대한민국 무력 정치사 - 민족주의자와 경찰, 조폭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
존슨 너새니얼 펄트, 박광호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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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덟 살이 되는 것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새 녹색 조다스 가방을 메고 학교 가던 길이 선연하다. 나는 서울 온곡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담임선생은 중년의 남자였다. 이름은 소동섭이었다.

 

그는 성격이 괄괄했다. 책상을 치다 지휘봉을 분질렀을 때 나는 소스라쳤다. 교실에서 자주 담배를 피웠는데, 애들이 판서된 글씨를 받아 적는 동안 맨 앞줄의 내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늘 심부름이 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었고, 공 던지면 물어오는 개처럼 ‘엑스포 담배’를 사러 슈퍼로 뛰어갔다. 그러나 담배를 사다줄 때가 아니면 그는 친절하지 않았다. 우리가 떠들면 교실에서 호각을 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책상을 걷어찼다.

 

김윤형은 같은 반 친구였다.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공상을 즐겼고, 로봇이나 곤충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 아파트 앞 동 2층에 살았다. 집에 놀러 가면 납땜인두로 모기장을 뚫어가며 놀았다. 선생은 김윤형을 싫어했다. 어느 날 그는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교실 뒤켠으로 떠밀었다. 20kg밖에 안 나가는 얄팍하고 작은 몸이 나동그라졌고. 나동그라진 윤곽을 따라 분필로 호선을 그렸다. “넘어 오지 마. 이 새끼야.” 선생은 선의 바깥쪽에 ‘윤형 랜드’라고 적고, 웃었다. 우리 중 몇몇은 뭣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우리가 흔히 쓰던 ‘~요’라는 어미는 그에 의해 ‘~입니다’로 교정되었다. 그걸 제대로 못하는 녀석들은 비아냥을 당했다. 내가 그를 이토록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에게서 깊은 모멸감을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공교육과 그렇게 만났다.  


 

#. 2

 

이금옥은 중학교 미술 선생이었다. 30대 여자였고 호리호리하고, 차분하고, 나긋나긋했다. 그녀는 어느 날 몇몇이 미술도구를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 칠판 앞에 나란히 세우고 살짝 한숨을 쉬었다. “내가 좋게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말이 맺지도 않고 그녀는 무릎으로 서 있던 녀석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억, 하는 소리를 내면서 반쯤 쓰러졌을 때 그녀는 오른 주먹으로 왼 뺨을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친구는 허물어지듯 쓰러졌고, 다음은 내 차례였다.

 

국사선생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풍성한 머리를 조밀하게 파마해서 길게 늘어뜨렸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교실을 돌던 쪽지가 적발됐고, 그녀는 사무적인 태도로 쪽지를 압수한 친구에게 누구로부터 전달받았는지 추궁했다. 검지손가락이 교실을 삼분의 일쯤 돌아 나를 지목했는데, 나는 뒤에 앉은 친구를 말하기 싫어서 내가 썼다고 했다. “제가 썼..”까지 말 했을 때,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출렁, 했고 쫙 소리와 함께 내 얼굴이 반대편으로 홱 돌아갔다.

 

같은 배경이다. 토요일 오전이었는데 지각자가 많았다. 창밖으로 내려다보니 얼추 서른 명 정도가 ‘엎드려뻗쳐’ 상태로 운동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죽도를 든 체육 선생이 어슬렁 어슬렁 나타나서는 맨 앞 줄 부터 엉덩이를 다섯 대씩 때렸다. 풀 스윙이었다. 그는 중간쯤 까지 열을 거슬러 가다가 체력이 부쳤는지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즈음에는 죽도가 터졌고, 그는 헐떡거리며 너덜거리는 죽도를 들고 성실하게 과업을 마무리했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두 명의 여자애들이 교탁 앞으로 불려 나왔다. 담임이자 수학 선생이었던 오승환 선생은 둘에게 엎드려뻗쳐 자세를 시키고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L은 맞다가 엉엉 울면서 빌었다. 두 손으로 싹싹. 선생은 본 못 척 다시 엎드리라고 지시했다. 울고, 맞고, 빌고, 울고, 맞고, 빌고 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나가서 그날 수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 3

 

고등학교 시절에는 얻어터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모두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공부를 못해서 얻어터졌고, 숙제를 안 해서 얻어터졌고, 워커를 신었다고 얻어터졌고, 머리를 길러서 얻어터졌다. 주로 하키채로 맞았고,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당하기도 했다. 속옷과 살이 피로 엉겨서 붙은 것을 떼어내느라 고생했다는 얘기는 현실적이라 그다지 괴담 축에도 끼지 못했다.  
 
Y는 유독 맞는 걸 못 견뎌했다. 무슨 일이었는지 불려나와 교탁을 짚고 섰다. 그는 열대 쯤 맞았는데, 하키채가 닿을 때 마다 진저리를 쳤다. 우리는 그 꼴을 보면서 숨죽여 웃었다. ‘미친년 널뛰듯’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 이라고 국어 교사는 친절한 해설을 달았다.

 

그의 체벌은 폭력적이기도 했지만 놀랍도록 창의적이기도 했다. 내가 본 중 가장 인상적인 체벌은, 싸운 두 친구를 앞에 세워놓고 서로의 뺨을 때리게 하는 것이었다. 왼쪽이 오른쪽을 때리면, 오른쪽이 다시 왼쪽을 때렸다.
 
내가 고은의 시, ‘오라리’를 읽은 건 훨씬 나중의 일이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 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쎄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의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혹시, 국어 선생도 이 시를 알았을까?

 

내 학창시절은 남들 보다 조금 빨리 끝났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날, 나는 아홉시 쯤 일어났다. 창문을 열고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물론, 지각이었다. 가해질 폭력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청바지처럼 익숙한 것이었으므로. 다만, 그 날 내가 학교에 가서 해야 할 일상들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불현듯 그 모든 것이 잘못 먹은 음식처럼 불편했다.

 

학교는 학습을 미끼로, 규범에 대한 복종을 가르쳤다. 규범이란 무엇인가. 강자의 폭력이다. 물론 당시의 나는 명제를 뒷받침할 세련된 논거는 몰랐고, 그것을 대신할 꼿꼿한 가운데 손가락이 있었을 뿐이다.

 

아, 위에 언급한 모든 이름은 실명이다. 실명을 적어가며 나는 모종의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나도 삶의 어느 국면에서는 권위적 폭력의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문득 궁금하다. 나만, 그런가?

 


#. 4

 

‘오라리’는 제주도 4.3사건 당시 토벌대로 참여했던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고발한다. 그들은 북한의 탄압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젊은이들로 1946년, 반공의 깃발 아래 뭉쳤다. 이후 준군사조직으로, 이승만의 홍위병으로 끔찍한 일들을 많이도 저질렀다.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 된 48년 4.3사건과, 20만 명을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에서 그들은 암약했다. 다시 서북청년단과 마주친 건 이 책의 4장.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국가와 무력집단 사이의 관계 양상을 조망하는 부분이었다. 책은 이렇게 서술한다.

 

 

가장 폭력적인, 혹은 적어도 가장 악명 높은 불법 무장 청년 집단은 반공 성향의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는 (초창기의 형태이긴 하지만) 1946년 11월에 공식 설립됐는데, 미군 방첩대는 그들 고유의 비교 우위를 이용하려고 (우파 조직 중에서도) 서북청년회와 연락을 유지했다. 사실 미군과 서북청년회의 관계는 꽤 분명하다. 방첩대 보고서는 이렇게까지 언급한다.

 

‘방첩대는 부분적으로 언어 장벽과 전문 요언의 부재에서 기인한 이유들로 방첩 임무를 단독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서북청년회, 즉 이북에서 월남한 이들로 구성된 청년 조직원들은 방첩대에 특별한 가치가 있었다. 조직원들은 저마다 공산주의자들에서 고통을 겪은 바 있었다. 불행이도 이 조직은 적에게 잔혹하게 보복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였다.’

 

서로의 뺨을 때리던 임차순옹과 손자 임경표의 모습과, 서로의 뺨을 때리던 내 친구들의 모습이 엇갈린다. 왜 학교와, ‘가장 악명 높은 불법 무장 청년 집단’의 폭력은 닮았는가. 국가는 학교에게 교육과 더불어 폭력의 권한까지 양도했던 것은 아닐까.
 
시에서 폭력은 말 뒤에 숨어 증오의 구조를 만들었다.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대한민국 역사를 돌아보건대, 국가는 서북청년단 뒤에 숨어 그들이 원하는 질서를 만들었다. 무엇이 또 무엇 뒤에 숨어 암약하는가. 시스템의 뒤편을 보라고, 이 책은 말한다.

 


#. 5

 

다만 역사적 사건일 뿐인가. ‘대한민국 무력 정치사’의 서론은 인사동 노점상 폐쇄 현장에서 시작한다. 인사동 메인 스트리트에서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른 노점상 상인들이 노란 조끼를 입은 용역깡패들과 맞닥뜨리는 장면이다. 150여명의 남, 녀 깡패들은 좌판을 하나하나 두들겨 부수고, 상인들을 쥐잡듯 팼다. 아니, 그럼 그 동안 경찰은 뭘 했는가. 방패를 들고, 적극적으로 이 사태를 방관했단다. 왜? 깡패들은 사실 종로구청과 ‘공식 계약’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소오름!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2011년 5월 24일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직 싱싱한 날짜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책은 국가와 비국가 폭력전문 집단의 야합의 역사를 더듬는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폭력을 아웃소싱하는 국가적 현상의 원인과 본질을 연구한다. 저자가 밝히듯 정치학, 역사학, 사회학 등 학제 간 연구이며 양적연구 뿐 아니라 질적 연구를 포괄해 기존 연구와 차이를 뒀다.

 

저자에 따르면, 국가가 민간 폭력 집단을 이용한 것은 18세기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정은 ‘보부상동업조합’에게 판매세를 징수하는 역할을 맡기고, 무력충돌을 조율하는데 사용했다. 이후, 해방이후 김두한의 대한민청과 서북청년회 등 폭력집단과 준군사조직이 난립했고, 이들은 특히 이승만 정부의 기저를 떠받히고, 좌익세력을 탄압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시절 시민사회와 노동세력, 빈민 이주민들에 대한 탄압도 폭력조직과 결탁한 정치권력의 연출이었다. 그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2011년 5월 24일의 인사동을, 저자는 조망한다. 

 

국가는 왜 폭력집단을 이용하는가. 결론은 이렇다. 1. 이미지를 관리하고, 2.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분명히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아웃소싱은 행정 효율성 제고 차원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식민주의와 권위주의 정권에서 자행된 잔혹한 억압의 긴 역사가 군경이 (나아가서는 국가가) 오늘날의 맥락에서 활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인들이 국가 행위자들의 (예컨대 경찰이나 군) 폭력을 바라보는 방식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연이은 억압적 정권들에서 겪은 삶에 의해 좌우된다. 결국 국가의 폭력에는 강한 상징적 유의성[誘意性, valence,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동원하는 힘]이 있고, 폭력을 행사할 경우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라는 애써 만들어놓은 한국의 이미지를 파괴할 위험이 있다. 21p

이 책의 메시지는 명징하게 현재성을 갖는다. 어버이연합이 청와대의 사주를 받고 움직였다는 사실이 보도된 것이 불과 한 달 전. 그들은 세월호 반대 집회에 알바 1200명을 동원했고, 각종 친정부(혹은 친박)관련 포지션에서 시위를 포함한 이슈 파이팅을 진행했다. 알려졌다시피 때로는 이슈 파이팅이 아니라 가스통을 장착한 레얼 파이팅이 되기도 했다.

 

금전적인 부분을 추적하면 검은 실루엣이 드러난다. 전경련의 자금은 최소 5억 2천만 원, 통일부는 비전코리아를 통해 4400만 원을 지원했다. 처음엔 물론 지원하지 않았다고 구라를 쳤는데, 이유야 물론 ‘1. 이미지를 관리하고’, ‘2.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CBS의 보도에 따르면, 뒤가 켕겼는지 돈은 차명 계좌로 분산되어 입금됐다. JTBC에 따르면 현금인출은 어버이 연합 사무실 근처의 ATM기에서 주로 이뤄졌다. 전모가 드러난 지금 전경련의 실질적 책임자인 이승철 부회장은 급하게 출국했고, 어버이연합의 지도부는 사라졌으며, 홈페이지는 삭제됐다.

 

이 모든 기획이 청와대로 보인다는 보도는 너무 이론적이어서 추론하는 재미도 없을 지경이다. 어버이연합은 청와대 허현준 행정관으로부터 집회를 지시받았다고 증언했고, ‘어버이연합 외의 다른 보수•탈북 단체들도 허 행정관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허 행정관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을 경우 지원하는 예산을 자르거나 보류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77679)

 

어버이연합은 국가의 폭력을, 또는 폭력적 주장을 대행했다. 행정부는 쪽도 안 팔고, 본인들의 정치력을 비합법적 방식으로 구현하여, 정치적 입장이 다른(그들이 보기에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많은 시민들(잠재적 위협)에게 유‧무형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책의 출간일이 반년만 늦춰졌더라도 내용에 너끈히 포함될 사건이었다.

 


#. 5

 

최근에 꿈에 관한 두 개의 페이퍼를 적었다. 내 꿈에는 자주 폭력적 행위가 등장하는데, 총을 쏘고, 주먹을 휘두르더니 최근에는 급기야 창까지 던진다. 억눌린 무의식의 발현으로 본다. 샌드백을 곤죽으로 만들고 나서야 조금 풀어지는 이런 감정을 타인들은 어떻게 억누르고 사는지 궁금하다. 아마 컨트롤 되지 않은 우리 무의식의 총합이 이 사회 기저에 깔린 폭력성이리라. 

 

폭력의 경로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는 내게 내재한 폭력성이 학교에서 배태되었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그것을 국가로부터 가져왔을 것이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개인의 신체를 지배하는 권력의 전략을 연구했는데, 그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이 감옥, 군대, 병원, 그리고 학교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고사리의 가지 모양은 잎사귀의 모양과 닮았다. 눈송이의 구조나 해안선의 모습처럼 자연은 자기유사성을 갖는다. 폭력도 마찬가지다. 국가라는 거시적 규모로 일어났던 폭력은 삶이라는 미시적 부분에서 재현된다. 그래서 오라리와, 내 학창시절의 모습이, 유시민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말 한 반성문 쓰던 고문실과 학생부실의 살풍경이, 군대와 회사의 분위기가 프랙털처럼 닮은 것이겠지.

 

 

프랙털의 중심에는 상대적 강자들이 존재한다. 국가는 상징적으로나 현상적으로나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들어앉을 것이다. 주변부는 상대적 약자들로 구성된다. 유치원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다. 그녀가 가르치는 아이의 아버지는 마석 가구공단의 비정규직 이주노동자였다. 사장은 그에게 온갖 모욕을 가했고, 그는 술에 취해 아내를 팼다. 화난 아내는 아이를 학대했고, 아무도 괴롭힐 힘이 없었던 아이는 시름시름 앓았다고.

 

우리 사회의 증오와 폭력의 방향을 가늠해 본다. 아마 그것은 중산층의 몰락으로부터 급증하는 이주 노동자들로, 차별하는 남성으로부터 차별받는 여성으로, 일반으로부터 LGBT 성 소수자들로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집합에서 증오는 폭발할 것이다.

 


#. 6

 

아직도 가끔 소동섭 선생을 생각한다. 뭘 오래 기억하는 타입이 아닌데도,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그에게 사과를 받고 싶다. 그러나 용서를 하고 싶지는 않다. 사과는 그의 의무고, 용서는 나의 권리이므로. 그러나 내가 누구에게 사과를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사과를 할 사람을 찾았다고 한들 그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래서 화해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책에서 언급된 2011년의 인사동 상인들, 1989년, 쇠파이프 아래서 ‘우리 아버지는 김일성이다’라고 외쳐야 했던 현대중공업의 노조원들, 1948년, 몰살당한 제주도의 시민들은 나보다 훨씬 절박하게 국가가 사과의 의무를 이행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다지 사과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과거사에 대해 이 사회의 인식을 알 수 있는 단적인 예가 있다.

 

"한마디의 가치도 없는 모함이다. (노무현)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인사들이 모여 역사를 왜곡하고 헐뜯는 수작에 불과하다."(2005) “나에 대한 정치공세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국정치의 현실이다.”(2007)  “대법원의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나요?” (2011)

인혁당 사건에 대한 어느 정치 인사의 초지일관한 촌평이다. 그는 결국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게 지금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다.

 

올바로 기능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없는 나라에서 공고하게 다져지는 것은 오직 지배와 증오의 구조다.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현장에서, 사회 기저로부터 들끓어가는 분노를 본다. 공교로우나 92년의 LA의 끔찍한 지옥도도 한 여성의 억울한 죽음으로부터 시작했다. 다음에 올 현상은 메갈리아처럼 질퍽한 언어의 진창이나 헤집고 있지 않을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기다린다. 증오의 밑바닥에서 마침내 어금니를 사려문 인간을. 프랙탈을 박살내고 세계를 으깨어 놓을 신화적 존재를. 아비 없는 자식, 국적 없는 노동자, 성별 없는 소수자일 그를.  예수나 체 같은 최악의 테러리스트Terror-ist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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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1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1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6-02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종철 개그맨이 교장의 흉내내며, 사랑하는 온곡초등학교 학생 여러분 여러분, 한게 생각나는데.

서울이나 제가 있는 부산이나 같군여. 학교폭력의 근본은 군사문화에 시작한 체벌이 시작이라 보는데, 아이고

뷰리풀말미잘 2016-06-02 08:51   좋아요 0 | URL
딱히 그런 건 아니더라고요. 호주에 있을 때, 어느 세미나에서 폭력을 주제로 토론했던 적이 있었는데 군사문화가 강하지 않은 사우디에서도 교사에 의한 폭력이 빈번하답니다. 제 가설은 ‘권위주의 사회일수록 교사에 의한 폭력의 빈도가 높다’입니다.

그렇다면 군사문화가 없는 사회에서 폭력의 방법을 어떻게 배우느냐. 영화 ‘엑스페리먼트’로 유명한 스탠포드 심리 실험 있잖아요. 왜 감옥에 가두고 어쩌고 저쩌고. 그게 시사하는 바가 좀 있는데, 거기서 죄수들한테 통제 수단으로 체벌을 가했거든요. 그게 푸쉬 업이었어요. (간수 역할을 하는 자들이 알아서 고안했죠. 누가 가르쳐 준게 아닙니다.) 나치 수용소에서도 그랬죠. 결국, 푸쉬 업은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악마의 얼차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