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뇨리따 2014-05-14  

1년에 하나꼴, 의도한 바는 아닌데 요상스레 이런 간격을 두고 글을 남기게 되네요. 

뭐 언제나 내용은 아름다운(물론 글이) 미잘 예찬입니다만,


흔히들 슬럼프라고 하는데, 이게 사실은 실질적인 기량저하가 아니라,

순전히 기분탓, 컨디션탓 이라는 걸 자각하면서도, 인간의 의지로 어쩔수 없으니

굳이 '슬럼프' 라고 이름붙여 진 거겠죠. 그때마다 들르고 있죠, 헤헷.


옜날엔 글이 막히고, 스스로의 기량에 회의를 품을때면 언제고 '관록'의 부재탓

이라고만 여겼는데, 요즘은 더읽었으면 더읽었지 덜 읽지는 않는데도, 기량저하가

느껴져요. 옜날같으면 윤택한 어휘와 브렐리언트 한 유머로 감각적인 글을 썼을텐데,

근래 글들을 보고있자면 신랄은 어디가고 두서없이 흐지부지, 흐리멍텅, 우유부단에 어찌나

치기로운지 중2때 글을 보는 느낌이예요. 으으


원래 오르락 내리락 하는것이 성취란것은 알고 있지만, '내리락'은 언제고 견디기

괴로워요. 반면 이럴때마다 미잘님의 서재를 눈팅하고, 읽은글을 또읽고, 새글도 또읽고

하다보면 화가 치밀죠. '이 생명체는 먹고 싸고 자고 대신, 읽고 쓰고 사색하는걸로 모든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죠. 물론 의문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어요.


이렇게 고단하게 느끼면서도 반 어거지로 글을 쓰는게 과연 근본적인 기량향상에

도움이 될까? 하는 회의감에 좀처럼 손도 놀리지 못해요. 그래서 넋두리겸 푸념만 하는

이런 편한 글을 미잘님 서재에 싸두는군요. 그래서 사과의 의미로 입발린 미잘예찬을

하자면,


 글은 깊이고 관록이라는, 변하지 않는 동경. 묵을수록 감칠맛을 더한다는 그 부분이 

너무 매력적인데, 언제나 위대한 관록의 전제는 훌륭한 기량이란걸 알고 있죠. 묵은지도

본래 김치맛이 훌륭해야 그 빼어난 맛을 내는것 처럼요.


그런점에서 미잘님의 기량은 놀라워요. 본래 소양의 크기도 대단히 커보일 뿐더라 분명히 젊은데 은근한 관록이 느껴져요. 맛깔나게 잘익었어요. 다사다난한 삶이라 그런지, 태생부터 애늙은이 기질이 강해서 그런지..대신 단맛은 좀처럼 없고 대부분 쓴 맛인데 그 쓴맛이 중동석이 강해서 한번 맛보고는 은근히 항상 생각나요. 음료로 치면 아메리카노고, 주류로 치면 드라이 와인이나 에일 맥주, 김치로는 파김치 겉절이 같은 느낌이랄까, 발랄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는데 음울한 풍미에 날카로운 관점 가차없는 표현들을 자유롭게 구사할수 있는 풍부한 어휘력으로 하지만 충분히 절제해서 구성하는게 1류의 맛이예요. 이런 재량이 더 깊고 높은 관록을 갖추면 어떤 글이 나올지 제가 더 기대될 지경이죠.


그러니 미잘께서는 글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어서 나이들도록 하세요. 

저는 아직 기량이 모자라니 충분히 젊음을 즐기면서 기량을 먼저 늘린후에 따라가도록 할게요.

 
 
뷰리풀말미잘 2014-05-19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이상한 님좀 보게?

지지난 주에는 산에 갔어요. 그냥 산이 아니라 정글 같은 야산이었죠. 워낙 깊은 산골이고 사유지라 아무도 안 오는 산이었어요. 중턱쯤 올라가니까 30~ 40년 전에 그 산골을 일궈서 논이며 밭을 붙여먹던 화전민들의 집터와 무덤 터가 있었는데 흔적뿐이고 지금은 아무도 안 살아요. 흔적만 남은 무덤도 있고, 그런 곳이죠. 길도 없어요.

사방 천지가 조용하니까 눈을 감으면 소리가 들리더군요. 아, 도대체 왜 귀가 두 개나 얼굴 옆에 붙어있는지 알겠더군요. 그래서 소리가 입체로 들리는 겁니다. 고라니가 어디에서 어디로 뛰어가는지. 벌떼가 어디에 집을 짓고 있는지. 근처에 얼마난 개울이 흘러가고 있는지. 전 가끔 잠 안 오면 ASMR을 듣는데 원래 세상의 음들은 가공할 필요도 없이 입체적인 모양입디다.

곰취를 뜯고, 찔레랑 셩을 꺾고, 고라니를 쫓고, 삼을 캐고, 나무 사이로 다니다 보니까 길 없는 것도 그렇게까지 불편하지는 않더구만요. 그렇게 다니다가 그냥 아무 바위나 통나무에 걸터 앉아서 칼로 셩 껍질을 벗겨서 아삭아삭 깨물어 먹으면.. 왜 그런거 있잖아요 그것이 물아일체고 무위자연이고 내가엘프더군요. 오, 저는 숲의 요정이었어요.

어제는 종일 빈둥거리다가 잘 때 쯤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켓인가 나발인가 그런 책을 읽었는데. 그렇게 빠순이들이 물고 빨고 할 만큼 대단한지 모르겠더군요. 그냥 뭐 가끔 멋지구리한 구절 몇 개 써 놓고 현학 좀 버무리고 인용문 몇 개 달아주니까 괜히 그럴 듯 해 보이게 된 거죠. 감상 걷어놓고 보면 그냥 막걸리에 뭣 물 탄 듯 한 말이 근거도 뭣도 없이 희끄무레한 언어의 연못 위에 부평초처럼 둥둥 떠 있는. 꽃 피면 보다가 꽃 지면 휙 건져서 아무데나 버리면 자연스럽게 또 생길.. (아, 뭐 지도 지 멋대로 평론하는데 나라고 욕 몇 줄 못 쓸 거 뭐 있겠어요. 그 병신. 책값만 오지게 비싸게 받아 쳐 먹고.) 근데 인터넷에 보니까 또 최근에 쓴 글들은 더러 볼 만 한게 있는 것 같아요.

제 생각인데요. 산을 오르는데 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같아요. 대단한 알퓌니스트 될 일 있나요. 그냥 자기 있는데서 꽃도 따고 고라니도 쫓고. 그러다 내려오는 거죠.

관록은 무슨, 소양은 무슨. 제 흥에 겨워서 찌질찌질거리는 것일 뿐이죠. 그러다 보면 2008년의 어느 놈 처럼 거지같은 글도 나오고 2014년의 어느 놈처럼 좀 세련된 글도 나오고. 흥나면 흥 나는 대로, 노는입에 염불하는 것 같은 거지.

김태경 대표는 예순에 죽었습니다. 저는 늙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