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혀 - 황교익의 본격 정치 시식기
황교익 지음 / 시공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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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부터 최근까지 ‘대통령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책들이 꽤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통령의 말하기, 글쓰기, 독서, 리더십, 마음 등등이 그 제목이었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혀’라는 단어 때문이다. ‘입맛’도 아니고 ‘요리’도 아니고 ‘말’도 아닌, 입이 달린 대부분의 생물이 가지고 있을 혀! 뭔가 날것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신체기관의 이름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서 저자의 이름이 보였다. 한 7-8년전까지는 미식칼럼니스트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정치적 발언도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 저자 황교익씨다. 그 다음에야 대통령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맛집과 정치적 이야기가 버무려있겠거니 이 책의 내용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런 내용이라도 ‘혀’라니. 흥미로운 마음에 책을 넘겼다.

이 책은 그 분(!)이 2025년 1월 15일 새벽 공수조가 대통령 관저에 들이닥치던 날 새벽, 직접 만들었다는 샌드위치로 시작한다. 변호인단에게 주려 했다는 그 열 개의 샌드위치는 과연 누가 먹었을까, 궁금하다.

“저는 공화파이고 유물론자이며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있습니다. 현실적인 정치 지형상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지만, 저의 정치적 신념은 그보다 한참 왼쪽에 있습니다. 이를 참고하시고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p.24)라는 황교익 저자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낱낱이 밝히고 시작한다. 그래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나와 정치색이 맞았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정치적 성향이 듬뿍 적셔진 글의 의도를 미리 알고 볼 수 있기에 취사선택이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음흉하거나 뒤로 딴 이야기를 한다기 보다 TTTTTT 성향의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정치인들 설명에는 없는 단어인, ‘공화파’가 가장 앞서 소개되어 있는 부분은 의아했다. 하지만 곧 ‘왕당파’의 수장과 같은 위치에 있던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내용을 읽다보니 왜 ‘진보’라는 글자는 없고 ‘공화파’를 가장 먼저 밝혔을지에 대한 그의 정치입장을 엿볼 수 있었다. 이렇게 나도 정치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며 이 책을 읽어 나간다.

이 책은 두시간도 안되어 읽었다. 이승만시절의 2인자 이기붕의 냉장고에서 발견된 4월의 수박, 박정희 시절의 혼분식 운동으로 생겨난 칼국숫집과 시바스 리갈, 김영삼의 칼국수오찬, 마이클 잭슨의 비빔밥, 노무현의 라면, 오바마의 불고기 외교, 이명박의 미국산 쇠고기 스테이크, 시장에서의 유세가 어울리지 않았던 박근혜, 독도새우와 옥류관 냉면의 문재인을 읽으며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알려진 이 음식들을 통한 그들의 정치적인 행보와 국민을 향한 관점을 예리하게 읽어낸 저자만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여기 이 글을 쓰면서도 책임져야 할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몇 번을 반복해서 읽습니다. 자유인에게 표현의 자유란 자유인으로서 져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뜻할 뿐입니다.”(p.220) 공화파 시민을 자처하는 저자가 생각하는 자유의 의미와 전 대통령들이 국민을 바라본 시각이 읽히는 책이다. 책을 덮고 내 혀에 진하게 남는 맛과 자유의 맛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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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
브라이언 애터버리 지음, 신솔잎 옮김 / 푸른숲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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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 보다는 반지의 제왕을 더 선호하는 나는 판타지, 특히 SF 장르를 좋아한다. ‘저는 판타지를 좋아합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가뜩이나 가벼운 인상도 맘에 안드는데 굳이 철이 덜 든 취향까지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판타지는 진실을 전달하는 거짓말이다”(p.27).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거짓으로 세팅된 세상 속, 불안해보이는 주인공을 따라 읽다보면 가까스로 가닿는 충격적인 결말, 이 뻔한 구조에 나는 열광했다. 가끔 나 자신이 현실도피형 독서가인가 자조적이기도 했지만 나보다 한 천배는 심각한 판타지덕후가 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판타지를 읽는 정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있었다.

서문에서 저자는 판타지라면 현실을 탈피하고, 상식적인 사고를 벗어나는 대상들의 연결성을 밝히고, 사실 같은 거짓말을 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한다. 이 중심에는 두 가지 질문이 자리한다. “첫째, 판타지가 어떻게 의미 있을 수 있는가? 물리 법칙을 비틀고 과거 사실을 부정하는 스토리텔링의 한 형태가 어떻게 인간의 본성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파고드는 통찰의 원천이 될 수 있을까? 둘째, 판타지의 역할은 무엇인가? 판타지는 소설 속 캐릭터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 독자들의 세계에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지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가?”(p.6) 이후 이어지는 아홉 개의 챕터는 판타지적인 세계구축과 스토리텔링의 여러측면을 설명하며 이 두 질문에 답한다.

나는 이 중에서 3, 4챕터, ‘판타지는 어떤 결말을 추구해야 하는지’, ‘갈등만이 스토리를 흥미롭게 하는지’를 읽으며 그동안 읽어왔던 판타지들의 공식을 떠올리는 거시적 안목을 선물 받았다. 또 개인적으로는 6챕터의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생각’에서 ‘유토피아’ 키워드가 주된 장이 가장 재미있었다. “유토피아 문학은 판타지가 정치와 만나는 지점이다”(p.243)로 시작하는 이 장은 이전의 사회의 모습을 버리고 새롭고 합리적인 스타일의 세계를 만나는 전제로 시작한다. “유토피아 문학은 (...) 행동의 변화를 이끄는 데는 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p.244)며 설명하는데 “첫번째 전제는 이 세계에 잘못된 것이 너무 많고 우리가 더욱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전제는 이런 오류들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일부이므로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상황을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첫 번째 전제를 수용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두 번째 전제를 수용할 때는 유토피아를 향한 노력조차 결국 끔찍한 결과를 부를 뿐이라고 믿는다.”(p.245) 이 부분을 읽으며 디스토피아가 암울한 미래로 마무리되어진다 하더라도 그런 문제점을 제시하는 데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다. 특히 영 어덜트들이 디스토피아를 좋아한다는 내용에 호기심이 생겼다. <헝거게임>, <다이버전트>에 이어 작년에 넷플릭스에 공개된 <어글리> 등 영화, 또는 드라마화된 작품들이라 익숙해서였을까. 아동 문학가 마이클 레비는 “그들이 사는 곳이 디스토피아이기 때문”(p.247)에 그들이 디스토피아를 선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일컫는 MZ세대가 떠오르기도 했다. 제국주의라는 디스토피아에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은 젊은이들밖에 없지 않을까?”(p.250)라고 이야기한 시인 로빈슨 제퍼스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10대 독자들이 계속해서 영 어덜트 유토피아에 사로잡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제안하기도 한다. “내러티브의 흥미를 부여하기 위해 우리는 세상과 스토리 내에서 저항의 근원을 설명할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p.264) 나 역시 어느새 판타지의 작가가 되어 영 어덜트의 디스토피아 독서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쉬웠던 부분은 C.S. 루이스, 톨킨의 작품까지는 읽어본 작품이라 괜찮았지만, 동화 외에는 플롯과 스토리에 대해 간단하게 서술해주기는 하지만 낯선 서구작가와 작품들의 예시가 많아 읽는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책의 뒤쪽 날개 부분에 쓰인 ‘판타지를 읽고 쓰는 사람들이 생각해 볼 것’에 대한 아홉가지 키워드- “진실성, 사실주의, 결말, 흥미 요소, 문학의 사회적 기능, 유토피아, 남성성, 정치성, 두려움”-가 책을 읽다 길을 잃은 나에게 등불이 되어주었다.

우리나라 저자가 쓴 이런 책을 기대해보며, 판타지 장르를 쓰고 있는 현 소설가분부터, 디스토피아를 좋아하는 영 어덜트, 그리고 절대 현실도피형으로 판타지를 읽는게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을 판타지 덕후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나는 이 책 덕분에 한 2년치의 독서목록을 선물받았다.
#판타지는어떻게현실을바꾸는가#푸른숲#브라이언애터버리#신솔잎#진실을말하는거짓말#판타지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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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개정증보판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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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숨 쉬러 나가다" 3종을 리커버 세트로 출간했다. 그 중 <나는 왜 쓰는가>이다.


한국 방송이나 문단에서 긴 수명을 유지하는 유명인들의 행동 지침이 있다면 1번은 정치색을 띄지 않을 것일테다. 그런 지식인들만을 미디어에서 자주 접하다가 가끔 조지 오웰을 글에서 만날 때면 나는 이 작가에 대해 ‘치열하게’, ‘정치를 이야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직설적인’등의 편견의 형용사를 머릿속에 떠올렸음을 고백한다.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추천을 받기도 하고 익히 들어왔던 터라 이미 읽은 것 같은 책이었다. 이제서야 이 책을 읽으며 조지 오웰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고 비로소 내가 가졌던 고정관념을 탈탈 털어버릴 수 있었다. 

    

“나는 작가다. 모든 작가는 ‘정치에 거리를 두려는’ 충동을 느낀다. 평화롭게 책을 쓸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이상은 기업형 슈퍼마켓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구멍가게 주인들의 꿈보다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책들을 쓰면서도 자본가계급으로 하여금 매주 몇 파운드의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생활을 어찌어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 나는 그런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한다. (...) 그리고 길게 볼 때 언론의 자유를 감히 허용할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밖에 없다. 파시즘이 승리한다면 나는 작가로서는 끝이다. 즉, 내가 가진 유일하게 쓸 만한 능력이 끝이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pp.65-66)

-‘나는 왜 독립 노동당에 가입했는가’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 시스템에 의해 생긴 돈으로 근근히 살아온 저자는,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는 사회주의 체제가 낫겠지만 이마저 파시즘으로 향할 수 있는 구멍들을 본다. 그래서 그가 가진 유일한 능력인 글쓰기를 계속하기 위한 삶을 위해 비판해왔다. 그래서 그렇게 치열하게 자신이 보고 경험한 노동자계급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면서 비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노동자들을 대변하여 썼기에 있는 솔직한 글쓰기로 이어졌음을 이 책을 읽으며 배운다. 


우리나라에는 왜 조지 오웰같은 작가가 없을까, 생각해본다.(물론 우리는 한강 작가 보유국이지만) 그대신 우리에게는 조지 오웰이 우려하던 파시즘, 독재를 극복해낸 풀뿌리 민중들이 있다. 바람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풀뿌리, 누울지언정 뿌리 뽑히지 않는 풀뿌리민중. 


이번에 이 세권을 새로 읽으며 오늘날의 우리나라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 사회를 반으로 가른 각 당의 정치인들이 서로를 비판하고 비방하는 이야기들이 시끄럽게 들려온다. 이를 듣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귀를 닫기는 너무 쉽다. 하지만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듣지 않으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서 살 수 없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로서 남길 원했지만 양쪽을 다 들었고, 다 비판했다. 글쓰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멈추지 않고 썼다. 당장 ‘정치적이지 않은 글쓰기는 없다’라는 말의 조지 오웰처럼 쓸 수 없는 풀뿌리 같은 나는 귀를 닫지 않고 계속해서 들을 것을, 멈추지 않고 읽을 것을 다짐한다. 이 두 가지가 나의 뿌리를 뽑히지 않게 해줄 것이며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잡아줄 것임을 예감한다. 


#나는왜쓰는가#한겨레출판#하니포터10기#하니포터#조지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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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 개정판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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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숨 쉬러 나가다" 3종을 리커버 세트로 출간했다. 그 중 <숨 쉬러 나가다>이다.

 

<1984>와 <동물농장> 외에 조지 오웰이 쓴 다른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유명하지 않다는 뜻은 ‘별로인가’하며 기대감 없이 읽었다가 진흙 속에서 보석을 줍게 되었다. 

   

 중년의 보험 외판원, 조지 볼링이 새 틀니를 맞추는 날, 우연히 경마로 따게 된 17파운드를 아내 힐다 몰래 쓸 생각에 부풀면서 소설이 시작한다. 그는 보채는 아이들로 목덜미에 묻은 비눗물을 다 씻지도 못한 채 욕실에서 나와 일터에서도, 집안에서도 끈적끈적한 불편한 일상을 참고 있는 중이다. 돈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아내는 그런 그를 더욱 지치게 만들 뿐이다. 게다가 라디오에서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전쟁이야기는 그를 불안하게 한다. 이러한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조지 볼링은 20년 전 떠나온 고향을 혼자 방문하여 낚시와 같은 소일거리를 하는데 이 돈을 쓸 생각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의 자연에 둘러싸인 고향과는 달리, 대규모 주택 건설로 연못은 쓰레기매립지가 되어 있고, 비밀의 연못은 정신병원으로 변해 있다. 볼링은 자신의 기억 속 과거의 고향과 현재의 모습 간의 괴리감을 느낀다. 라디오로 힐다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 다시 돌아오지만 여행을 하기 전과 다를바 없는 불편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틀니를 새로 맞추는 날이라는 설정부터 힐다에게 무어라고 이야기할 지에 대한 3개의 객관식까지 인상적인 부분이 정말 많았다. 그중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이루어진 상아탑에 스스로 갇힌 포티어스와 히틀러에 대해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히틀러는 차원이 다른 존재예요. 스탈린도 그렇고요. 그들은 그저 재미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머리를 베고 하던 옛날 인간들하곤 달라요. 그들이 추구하는 건 사뭇 다른 무엇이에요. 전혀 못 들어본 것이라고요.”

“이 친구야!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없다네.”

물론 그건 포티어스가 아주 좋아하는 말이었다. 그는 새로운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p.248)


조지 볼링은 ‘바보도 아니지만 지식인도 아닌 자신’조차 “다가올 전쟁이, 전후와 식량배급줄과 비밀경찰이, 생각할 것을 지시해주는 확성기가 눈에 선하다”(p.249)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만나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이, 펍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이들이, 버스 운전사들이, 철물회사의 출장 외판원들이 세상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음을 직감하고 있”(p.249)다. 그러나 포티어스에 대해서는 “이 학식 있는 사람은, 평생 책과 함께 살았고 역사에 푹 빠져 있어 몸에서 역사 향이 발산되는 듯한 이 사람은, 세상이 변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 히틀러가 문제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또 한 번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지난번 전쟁에 나가 싸우지 않았으니 전쟁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pp.249-250) 조지 오웰이 가장 경계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런 류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에피그라프- “그는 죽었네, 하지만 누워 있지 않으려 하네, 어느 대중가요“-를 떠올려본다. 오웰은 포티어스 같은 사람을 ”‘그는 죽었다.’ 유령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죽은 것이다.“(p.251)라며 평범한 볼링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한다. 내면적으로, 정신적으로 죽은 지식인층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챕터의 마지막 문장 -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의아했던 건 도대체 왜 나 같은 인간이 그런 걱정을 해야 하느냐였다.“(p.253) -은 사회 문제에 대해 고뇌하는 미약한 개인, 조지 볼링을 우리가 바라볼 수 있도록 쓴 오웰의 전방위적 시각이 돋보였다.   


고향을 방문한 일주일동안에도 변해버린 고향 사람들과 전쟁의 불안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엘시가 뚱뚱하고 추한 할망구가 되버린 모습은 상징적으로 자신의 기억 속 과거의 고향과 변해버린 현재의 상징으로 보인다. 제목처럼 숨 쉬러 나갔지만 그는 오히려 물먹은 종이처럼 상실감과 절망을 잔뜩 흡수해버리고 말았다.    


조지 오웰의 이 작품은 ‘조망하고 예견하는 글쓰기’로 소개한다. 


”현대 사회의 실체인 ‘불안’과 ‘소외’의 징후를 예리하게 밝혀내는 시선에, 다가올 2차대전과 파시즘이 지배하는 세상을 너무나도 정확히 예견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다.“


유명한 두 작품이 설명없는 은유로 쓰였다면 이 소설은 조지 볼링의 내면의 목소리를 직접 묘사하기에 조지 오웰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청소년들이 이 작품을 먼저 읽고 나머지 두 작품을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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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개정판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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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조지 오웰의 삶과 사유를 담은 대표적인 작품들을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도록 "나는 왜 쓰는가",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숨 쉬러 나가다" 3종을 리커버 세트로 출간했다. 그 중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다.

190cm이 넘는 조지 오웰이 1m도 안되는 막장을 기어가며 본 것을 썼다는 르포,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세미 다큐멘터리의 위대한 고전’이라는 칭송받는다. 이 책은 총 2부로 ‘1부, 탄광 지대 노동자의 밑바닥 생활’에서는 1930년대 영국 북부에 있는 탄광지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우리는 영국에서 수백만 명이 (또 전쟁이 터지지 않는 한) 이승에서는 절대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게 낫다. 할 수도 있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 하나는, 원하는 모든 실업자에게 약간의 땅과 연장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생활보호위원회의 실업수당으로 연명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가족을 위해 채소라도 기를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건 가당찮은 일이다.”(pp.112-113)

세계적인 공황으로 실업자가 흔한 1930년대의 모습을 기록하며 자신이 본 바와 연결하여 최소한의 땅과 연장을 제공해줄 것을 주장하는 조지 오웰의 모습이다. 또 이어 노동자들이 묵는 열악한 하숙집의 모습, 막장안의 광부들, 광부 노동자들이 가족들과 사는 집들, 실업에 대한 정확한 통계등에 대해 서술한다.

‘2부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에서는 ”나는 상류 중산층 가운데 하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p.162)라며 자신의 출신에 대해 노동계급과 아주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으면서도 구차하게 체면을 차려야 하는 계급으로 설명한다. ”아랫 것들은 냄새가 나“(p.170)라고 이야기하는 부르주아 출신의 중산층 이상의 계급들의 시각에 대해서도 직설적으로 쓰고 있다. 이런 부분은 사회주의자들에게서도 배척받는 이유로 이해된다. 제국주의 시대의 버마에서의 경찰로서의 경험이나 아시아인에 대해, 또 후반부에서는 사회주의와 파시즘에 대해 생각한 바를 거침없이 썼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부분은 기록 노동자로서의 면모다.

“탄광에 고용된 광부 한 사람이 매년 퍼내는 석탄의 톤수는(...) 1934년에는 280톤을 캐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광부의 일평생 업적과 다른 사람의 것을 비교해보변 잘 알 수 있다. 나는 만일 예순까지 산다면 서른 권의 소설을, 아니면 기껏해야 보통 크기의 책꽂이 하나를 채울 분량을 채울 것이다. 그런데 같은 기간에 평균적인 광부 한 사람은 8,400톤의 석탄을 캐낸다.(p.59)

광부들을 지켜보며 그 노동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동하는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존경이 담겨있다. 글쓰는 자신을 광부와 비교하는 부분을 읽으며 날이 서 있으면서도 뜨거웠던 이유의 비밀을 엿본 듯하다.

“하지만 메모에 불과한 이런 기록은 내 기억을 되살리는 것으로만 가치가 있다. 나야 읽어보면 내가 본 것들이 떠오르지만, 기록 자체가 북부 지역 슬럼가의 끔찍한 실태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드러내는 건 아니다. 글이란 게 그렇게 미약한 것이다.”(p.78)
이 부분을 읽으며 의외로 겸손한 오웰의 모습도 느꼈지만 오늘날 ‘조지 오웰’의 명성을 그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자신이 직접 본 것을 글로 쓰기 VS 있는 그대로 그리기, 중에 어떤 것이 더 힘드냐고 묻는다면 단연 전자에 손을 들겠다. 조지 오웰 자신은 글이란 게 미약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며 글의 힘을 느껴본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이 의아하다.
“아! 위건 부두는 헐려버리고 이젠 그 자리마저 확실치가 않으니!”(p.99) 위건부두는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라고 제목을 붙였을까? 지하에서 무릎을 꿇고 석탄을 캐는 광부들에게 이 곳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고 싶어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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