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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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

-아모스 오즈

-최창모/옮김

-현대문학


작품의 제목 '유다'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가 궁금했다. 또한 '유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인식은 옳은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유다는 배신자일까? 아모스 오즈의 <유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점을 바라보는 작가 본인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유다>는 유대교와 기독교, 유럽과 이스라엘, 아랍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접한다면 어렵고 힘든 작품이 될 것 이다. 작품의 말미에 장장 50페이지를 할애하는 297개의 주석이 그걸 증명한다. 



유대인 스물다섯 살 청년 슈무엘은 집안의 파산으로 학업을 계속 할 수 없음을 느끼고 학교를 그만둔다. 어디로 가야할지 갈 곳을 찾지 못하던 그는 우연히 임시 입주 일자리를 얻는다. 그의 입주 일자리의 업무는 그곳에 거주하는 장애 노인 게르숌 발드의 말동무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채용한 베일속 여인 아탈리야에게 매혹되지만 그녀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지는 못한다.


🔖<유다> p.429

"그는 아랍인들을 사랑했어요." 그녀는 마침내 슬프게 말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아마 아랍인들이 그에게 돈을 줬을 거예요."

조금 더 짧은 침묵을 지킨 후 그녀가 덧붙였다.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는 아랍인들도 사랑하지 않았죠. 아랍인들이 모두 도망칠 때,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도망가는 것을 도왔을 때, 그는 자기 집에만 머물러 있었어요. 그는 그들과 떠나지 않았어요.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어요.(...)"



매일 저녁 노인의 저녁을 책임지는 옆집 여인 사라는 아탈리야의 아버지 아브라바넬에 대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아브라바넬은 이스라엘의 총리가 된 '벤구리온'이 팔레스타인들이 터전을 잡고 있는 이스라엘 땅을 유대인의 땅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반대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의 아버지 아브라바넬은 아랍인들을 위해 이스라엘 공화국을 반대한 것이라는 동족의 비난을 받는다. 어쩌면 그는 반목하며 서로에게 총을 겨눌 지금의 그들과 저들의 모습을 알았던 선구자였을 수도 있다. 유다가 배신자로 불리지만 그의 행동이 있었기에 예수가 부활할 수 있었다고 '슈무엘'은 말한다. 슈무엘의 말처럼 아브라바넬의 반대가 유대인들에게 배신자의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두 민족의 화합을 위한 몸짓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뉴스에서 보여지는 팔레스타인들을 대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아브라바넬을, 슈무엘의 생각을 수긍하게 된다.


<유다>는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다. 2018년 작고한 아모스 오즈도 작품 속 인물 아브라바넬처럼 생전에 이스라엘과 아랍의 평화 공존을 주장함으로 '배신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도 아브라바넬처럼 은둔과 고독 속에 외로웠을 것이며 , 그의 가족들도 사회와 떨어져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지는 않았을지 걱정스럽다.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한 성경 속 유다의 의도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아모스 오즈의 작품 <유다> 속 아브라바넬의 의도는 공존하는 평화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오즈가 아브라바넬에게 자신을 투영한 듯 보여 아브라바넬에게 덧씌워진 '배신자'의 이름표가 안타깝다.


★ 출판사로 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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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이경혜 지음 / 바람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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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이경혜

-바람북스


그때나 지금이나 제목이 참 자극적이어서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는 2004년 초판을 시작으로 2021년 50쇄를 찍었다. 그 옛날 느꼈던 작품의 색이 17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다른 색으로 변하였다.

중학생 유미와 재준이는 서로 상대의 연애사에 진심어린 충고와 응원을 보내줄 만큼 돈독한 이성친구다. 서로가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함으로 인해 매일이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았던 그들에게 어느 날 들이닥친 재준이의 죽음은 재앙과도 같다. 그리고 재준이가 남긴 일기를 통해 유미는 재준이와 진짜 이별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죽음이 덜 아프고, 더 아프겠냐마는 '이별과정'을 거치지 못한 헤어짐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긴 고통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유미는 재준이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원망하며 무기력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재준이가 바라는 유미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재준이 없이도 잘 살아나가는 것이 결코 재준이를 잊어서도, 재준이가 미워서도 아닌 한켠에 잘 챙겨놓은 것임을 그 친구도 잘 알 것이다.






🔖(...)굵어진 빗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 빗소리가 내게는, 잘 있어, 잘 있어, 나는 가, 나는 가, 하는 소리로 들렸다. 작별 인사의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잠을 청했다. 비는 밤새 저렇게 올 모양이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p.200




'이별과정' 없이 보내야 했던 2014년 4월의 많은 아이들이 생각났다. 헤어짐은 아프다. 그 아이들의 가족은 얼마나 아팠을까? 잊지 않으며 기억하되 더 열심히 살아야 했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꽃을 피우지 못한 청춘들이 생기지 않는 안전한 사회가 되길 바래본다.


★출판사로 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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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이 온다
더글라스 러시코프 지음, 이지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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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환이 온다>

-인류사의 주인공을 바꿀 '생각'의 이동

-더글러스 러시코프

-이지연/옮김

-RHK



역삼각형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깃발을 들고 무리지어   다가오는 사람들의 형상이 보인다. 그들은  "여기 우리가 있어요.  당신들과 생각을 같이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길을 찾아 나서는 중이었어요" 라고 소리치고 있는 듯 하다.


<대전환이 온다>의 작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미디어 이론가이자 디지털 경제 전문가이며 뉴욕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우리에게  AI와 로봇에 대해 우리가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공포가 이겨낼 수 있는 것임을 말한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생활방식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되고 있는 미디어를 제대로 바라보고 인식해야 함을 다시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그리고 인류는 기본적으로 서로 공유하고, 유대감을 느끼고, 서로에게 배우고, 치유하도록 만들어졌으므로(p.311) 그것이 가능하다고 위로해 주고 있다.


<대전환이 온다>가 쉽게 이해될 수 있 이유는 저자 본인이  제시하는 주장을 주변의 다양한 이야기로 예시를 들어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가령 p.117~118 에서 제시한 미디어 환경이 바꾼 우리의 언어에 대한 예시는 가장 이해하기 쉽고 적절했다.  기계화된 메타포가 우리의 언어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용됨을 설명하며 '기름칠' 크랭크 업' '연료 공급' '나사' 라는 단어를 제시해 준다.  이런 단어들을 우리의  생활에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기계로 만들어 버리면서 부품화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저자는 말한다.우리가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 만든 기계들과 우리 스스로를 동일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능률적인 면에서 기계를 이길 수 없거늘 스스로를 얼마나 채찍질하며 내가 만든 것들과 경쟁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의 무한 경쟁이 결국은 완벽해지려는 욕구이지만 끝없는 경주라서 우리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는  기계가 아니므로 완벽하지 않아도 만족하며 행복을 느낄 수도 있음으로 스스로 경주에서 이탈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러시코프가 제시한 '전경과 배경' 이론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우리의 편리성을 위해 만든 것들의 노예가 되어서 우리는 힘겨워하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소유하려고 나를 혹사하면서도 소유한 것을 즐길 시간이 부족해지는 우리 삶의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내가 스스로 주체적으로 나를 전경으로 만들지, 배경으로 만들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이냐 닭이냐의 문제로 보일 수도 있지만 소통의 공간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나이므로 나도 러시코프처럼 직접 그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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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눌러 새로고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3
이선주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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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눌러 새로고침>

-이선주/조우리/유영민/문이소/문부일

-자음과모음


▶<마구 눌러 새로고침> P.65/작가의 말

(...) 불행한 청소년이 불행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라고. 지금 너의 자리가 영원히 너의 자리는 아니라고. 돈도 없고  키도 없고 힘도 없고 재능도 없고 꿈도 없고 친구도 없고 내 방도 없고 뭣도 없어도 삶이란 녀석은 너무너무 이상해서 분명 너에게도 이상한 기회를 잔뜩 줄 거라고. K가 얻어먹은 멜론빵 한 입이나 누나가 남기고 간 빈 방처럼 작고 소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변화도 분명 찾아온다고. 그러므로 진지하게, 궁서체로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불행한 청소년이 불행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이건 지금 불행한 청소년인 너에게, 한때 불행한 청소년이었던 내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아.


불안하고, 불확실하며, 상처받는 청소년들. 그들에게 작품 속 작가는 이야기한다. 괜찮다고......지금 너희가 엉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금의 모습이 너희의 평생 모습은 아닐거라고.  아이들을 향해 건네는 작가의 위로가 엄마인 나에게도 와 닿는다.

지금 우리 아이의 비틀거림이 아이의  인생 전체를 흔들까봐 불안하여 노심초사하며 다른 아이들과 다른 길을 걷지 못하게 으름장을 놓고 있는 나를 반성하게 한다.


<마구 눌러 새로고침>은 5명의 작가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여 서로 다른 그들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 다른 고민이지만 고민의 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외로워보이고, 힘겨워 보인다.  또한 모두 자신의 이야기에 누군가 귀기울여주고 이해해 주길 바라는 모습이 존재한다.  


SNS 공간 속 자신과 현실의 자신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리고 있는 방울이, 자신의 공간을 간절히 원하면서 존재감을 잃지 않으려는 K, 자신을 힘들게 한 아이를 미워하며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침잠하는 동훈이, 본인 세대를 멸종위기 동물로 느끼는 은설, 함께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으며 오해를 풀어가는 다승이와 노민이. 그들의 불행으로 그들이 불행한 어른이 되지 않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독특한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들여다는 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들을 이해하고 친구가 될 수는 없어도 그들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그들의 힘겨움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출판사로 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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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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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고 기괴하다. 다양한 시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이끌어갈 차세대 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사만타의 문체는 작가 만큼이나 생소하고 새로웠다. 두 인물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야기는 두 대상이 실존 인물인지, 영적 인물인지, 서로가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영혼의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인지 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독자에게 정보를 배제하면서 진행된다.

🔖 <피버 드림> p.141

-아이들이 많이 있어.

-우리는 전부 해서 서른세명이지만 숫자는 계속 바뀌어요.

-이상한 아이들이야. 걔들은, 뭐랄까, 눈이 따가워. 기형아들이야. 속눈썹도, 눈썹도 없고 피부는 분홍색, 진한 분홍색에 비늘로 뒤덮여 있어. 너 같은 애는 몇명밖에 없어.

아만다와 아만다의 딸 니나는 휴가를 보내기 위해 시골에 별장을 얻어 남편보다 하루 먼저 도착한다.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옆집 여자 카를라는 자신의 아들 다비드에 대해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여놓는다. 카를라의 입을 통해 발현되는 지난 이야기들은 섬뜩하다. 중독된 아들, 죽어가는 오리와 말등 그녀의 입을 통해 주저리 주저리 춤을 추며 나오는 이야기들은 공포감을 일으킨다.

다비드의 중독은 무엇이며, 다비드를 다비드라고 믿지 않은 카를라의 생각은 강박인 것인지, 혹은 정말 그는 다비드가 아닌 것인지 궁금해진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예전같지 않다면 나는 그 사람을 부정하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카를라는 그렇게 다비드를 대하는 것이 힘든 것일까? 몸의 병은 정신까지도 좀 먹을 수 있다. 그럼 나는 예전의 나일 수 있는 걸까? 변한 것이 아니라 힘든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병든 몸에 적응하는 것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변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비드가 찾는 벌레는 남자들이 들고 온 드럼통과 이슬처럼 온 몸을 촉촉히 적신 무언가에서 시작되는 것인 듯하다. 반점, 냄새, 따가움......그들을 중독시킨 벌레가 그들을, 가축을, 그들의 풀을 모두 죽이고 있다. 그 벌레는 과연 무얼까? 벌레는 이 작품을 읽는 이들의 시점 속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병들게 하고 , 나를 숨 쉴 수 없게 하는 모든 것이 벌레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벌레' 무엇일까? 독특하고 다양한 사유를와 질문들을 불러 일으키는 특별한 작품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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