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강상중 지음, 오근영 옮김 / 사계절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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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 강상중 교수의 <어머니>는 작가의 '어머니의 삶'을 통해 재일교포들의 고난과 시대의 아픔을 이야기 한다. 이 책을 통해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자이니치(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삶을 다큐멘터리 보듯 관찰할 수 있었다.

전쟁의 패배로 인한 국가적인 궁핍에 자이니치로서의 차별대우까지 더해져 그들의 삶은 신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16세의 나이에 여자의 몸으로 혈혈단신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나기 위해 타국으로 떠난 강상중 교수의 어머니가 겪었을 어려움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왜,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하늘을 향해 던질 뿐 그 어떤 대답도 기다리지 못한채 지옥과도 같은 세상에 또다시 내던져지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서두 글을 통해, 괴로울 때나 슬플 때, 또는 몸이 고달플 때면 항상 기도를 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다. 저 세상으로 간 조상들과 대화를 도모하고, 또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위로를 받는 것 말고는 살아갈 아무런 힘도 얻을 수 없었던 어머니의 모습. 그런 어머니를 보고 강상중 교수는 과거의 유물에 집착한다며, 비합리적이라며 창피함을 느끼곤 했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머니가 늘 붙잡고 있었던 '기도의 세계'야 말로 지금 이 세상, 합리성과 경제성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세상에 꼭 필요한 것중의 하나라는 걸 느끼게 된다.

 

오늘날 한국의 모습은 어떤가? 세계 최고 수준의 스피드로 경제성장을 이룬 자랑스러운 국가의 국민으로서 뿌듯함을 느끼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옆집 사람이 굶어 죽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알고 싶지 않은 '효율성'의 삶만을 누리고 있지 않을까?

 

한편 이책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강상중 교수의 작은 아버지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패전 후 한국으로 돌아온 숙부 강대성은 보란 듯이 변호사로 성공적인 삶을 누린다. 박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사 청산은 커녕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건 출세에 커다란 플러스 요인이었을 것이다. 거꾸로 가문의 모든 것을 바쳐서 항일 투쟁을 했던 애국자들은 제대로 된 대접도 못 받아본 채 잊혀졌다.

기회주의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 돼버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말하면 안 된다. 그 모든 것들이 시발점이 되어 종교비리, 사학비리, 언론비리, 정경유착 등의 문제들이 결합되어 지금 우리나라의 모순으로 남기 때문이다. 도저히 어디서부터 손 대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커져버린 문제들.

따지고 보면, 강상중 교수의 어머니나 작은 아버지나 모두 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쳤을 것이다. 하지만 살기 위해 한 짓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용서되어서는 안 된다. 혼자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다. 우린 모두 '같이'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공동체가 살아야 진정한 혼자만의 삶도 유지될 수 있다. 어머니의 기도도 단지 '나와 내 가족만 잘 살자'는 기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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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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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리아 난민 아기가 바닷가에 엎어져 죽어있는 사진으로 세상은 충격에 빠졌다.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난민 문제가 SNS와 방송의 힘으로 별안간 내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안쓰러운 감정마저도 사실은 영화 보듯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질 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모두스 비벤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를 읽고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정도와 상황의 차이만 있을 뿐 현대인은 이제 누구나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을 맛보는 난민이 될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현대인은 이전까지는 결코 마주한 적이 없는 일련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 근대성이 '견고한 solid 국면에서 유동하는 liquid 국면으로 바뀌었다. 사회적 형태들이 순식간에 해체되고 소멸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장기적인 생활 전략을 세우거나 행동의 기반으로 삼을 준거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둘째, 권력과 정치가 분리되어 권력 가운데 상당 부분이 정치적으로 규제 받지 않는 전지구적 공간으로 이전되고 있다. 국가가 방출한 기능들은 변덕스럽고 본래 예측할 수 없기로 악명 높은 시장 세력들의 놀이마당이 되버린다.

셋째, 과거에는 개인이 실패하거나 불행해지면 공동체가 보호해 주는 국가 공인 장치가 있었으나 이제는 이런 장치가 점점 일관되게 줄어들고 있다.

넷째,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며 행동하던 유형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이런 유형을 유지해 주던 틀인 사회구조들도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다섯째, 끊임없이 순식간에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당혹스러운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이제 개인이 떠맡게 된다.


'열린 사회' '유동하는 세계'란 표면적으로는 개방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로운 사회를 의미하는 듯 하지만, 이제 '열린 사회'란 운명의 횡포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회를 일컬을 뿐이다.

이는 권력과 정치가 분리되었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권력은 그저 자본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지구인들의 안전과 자유와 미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한편 전지구적 문제 해결에 관심이 없는 정치는  그저 국가내에서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공포를 퍼트리는 정책으로 생존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해마다 선거철이면 북한의 도발이 만들어진다. 뉴스에서는 매일 더 충격적인 사건 사고들이 생방송 된다. 수백명의 아이를 죽음에 몰아넣은 세월호 사건은 원인 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다. 지금 당장 월급을 주고 있는 회사가 언제 회사를 그만 두게 할런지 알 수가 없다. 개인의 삶은 위험하고 공포로 가득 찬 삶이 되었다. 미래를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당장의 삶을 소비하며, 개인적인 삶을 사는게 왠지 현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적 유대는 소멸하고 연대는 약화된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의 특징들로 인해, 우리 개인들은 점점 더 우연성이 지배하게 되는 세상에서 영원히 폐기처분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고 주장한다. 이런 세상에서 한번 쓰레기가 되면 영원한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난민이다.


'난민들은 도착해서 잠시 머무는 곳에서 담당할 쓸모 있는 기능도 없고, 새로운 사회집단에 동화되거나 통합될 현실적인 전망도 의도 없는 '인간쓰레기'의 화신 자체다.'


바우만에 의하면 유동적 근대는 사냥꾼의 세계관이 지배한다.

머릿 속에 바람직한 설계도, 즉 유토피아를 구상해 놓고 이대로 정원을 가꾸어 가던 '정원사'와 비교해, '사냥꾼'은 사물의 균형 따윈 신경 쓰지 않으며 오로지 사냥감을 죽여 자루를 채우는 데만 관심을 가지는 존재다. 이들 사냥꾼에겐 사냥의 끝이 있으면 안 된다. 그들은 사냥을 계속 해야한다. 자본주의의 속성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삶의 의미는 생각지 못한 채 끝없이 뭔가를 추구해야 하는 삶, 끊임없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삶, 과연 이것은 유토피아인가?


물론 사냥꾼의 삶이 무슨 문제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삶만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일 것이며 전지구적 권력에 심취에 있는 초엘리트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분명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명백히 '지옥의 삶'이며 무엇인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누리는 안락함이란 누군가가 흘린 피눈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카라치나 바그다드의 어린이들이 잠자리에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미국의 어린이들도 그럴 것이다. 세계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박탈감과 굴욕감에 젖어 있다면 유럽인들이 아무리 자유를 자랑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책속에 인용된 벤저민 바버의 지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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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정답은 1번 조선이 되겠지요~ 아이폰은 없사오나 애플워치는 탐나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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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사세요? - 부동산에 저당 잡힌 우리 시대 집 이야기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지음 / 사계절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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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뭘까?

보수와 진보 간의 이념 대립? 남북 문제? 세대간의 첨예한 대립?

이 책 <어디 사세요?: 부동산에 저당 잡힌 우리 시대 집 이야기>를 읽고 나면, 단연 '집'이야말로 한국인의 행복을 발목 잡는 가장 큰 문제라는 인식을 하게 될 것이다.

 

 

'집'은 이제 주거 이상이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의 모든 문제를 농축하고 있다. 선거 때마다 당락을 가르는 토건공약, '사는 집'이 아닌 '파는 집'에 매달려온 건설업체, 여기에 편승해온 우리 안의 욕망이 유착한 결과다. 세입자의 경우 2년마다, 집이 있더라도 5년마다 이사를 가는 '신(新)유목민' 사회의 주원인이다. 정치·사회의 지형까지 바꿔 놓은 악순환의 3각 고리는 깨지기는커녕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프롤로그

 

이책은 경향신문사에서 2010년 3월부터 5월까지 19회 걸쳐 한국사회의 주거 문제를 심도 있게 분석한 기획기사를 묶어낸 책이다. 비록 5년 전 이야기이지만, 하나도 달라진 건 없다.

 

도대체 한국인에게 집이란 뭘까?

먹고 잠잘 수 있는, 그러면서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라면 충분히 나의 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우리는 2년 마다 오르는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 해 이사를 해야하며, 집이 있더라도 더 큰 집, 돈이 될 집, 자식 교육에 필요한 집을 찾아 또 이사를 하는 것일까?

20대에는 20평, 30대에는 30평, 40대에는 40평의 집을 소유하고 있어야 정상이라는데, 언제부터 우린 집의 넓이로 인생의 성공 여부를 평가하게 됐을까? 세입자와 주택 보유자를 불문하고 전 인구의 19%가 해마다 이사를 다닌다고 하니,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인 셈이다. 모두가 이방인으로 뿌리 없는 삶을 사니 애향심은 커녕 무관심이 우리 사회의 주된 정서가 된다. 해마다 투표율이 낮아지는 이유? 투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텐데, 내고장 내일꾼을 뽑는다는 생각이 들기나 하겠나?

 

임금에 비해 지나치게 비싼 주택비용은 소득과 고용의 불안정과 더불어 미래 세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젊은 세대는 결혼과 출산을 꺼리게 되고, 무리해서 집을 사더라도 하우스푸어가 되어 곤궁한 삶을 살게 된다. 2년에 한번씩 서울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우스갯소리는 처절하게 들린다.

 

대한민국은 어쩌다 이렇게 토건 공화국이 되었을까?

사실상 대한민국은 건설사의 낙원이다.

"국내 건설사들은 소비자보다는 공급자 위주의 제도인 아파트 선분양제를 활용해 막대한 수익을 남겨 왔다. 아파트를 다 짓기도 전에 분양하면서 분양가를 주변 시세에 맞춰 수익을 남긴다. 택지는 금융권에서 돈을 빌려 구입하고, 건축비는 분양대금을 미리 받아 충당한다. 여기에다 공사기간에 발생하는 세금과 이자는 모두 분양가에 반영한다."

 

하지만 건설사가 낙원의 잇점을 누리기 위해서는 뒤를 봐주는 세력들이 있어야 한다.

건설 재벌, 부동산 관벌, 정치인, 보수언론, 일부 학자로 구성된 '부동산 5적'이 투기 동맹을 형성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막대한 수익을 나눠먹기 위해 부동산 5적이 똘똘 뭉쳐 '아파트를 사야만 부자가 될 수 있고, 부동산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부자가 된다'는 환상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낸다. 특히 집값 펌프질하는 언론의 보도는 건설사와 부동산업자의 입장에 편향되어 있다. 신문사 수입의 절대량을 대기업(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서너개 쯤의 건설사를 갖고 있다) 광고에 의존하고 있으니 건설사의 말을 그대로 받아쓰는 수준의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마치 건설업체들을 살려야 한국경제가 산다는 식의 보도도 매정권마다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심심치 않게 부동산 투자로 부자가 됐다는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부동산 투기는 대한민국의 신화가 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거주형태인 아파트 단지는 도시 맥락으로 볼때 '섬'과도 같다.

주변 건물, 도로나 보행자 동선 등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장소로서 배려가 이뤄지기 전에 최대 용적률과 건폐율의 '이익'과 '효율성'만이 공간을 지배한다. 풍경의 공공성은 상실한지 오래다.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그 아파트의 브랜드가 과시하는 차별적인 신분을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파트 단지 자체가 군사문화를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규칙적 간격으로 늘어선 건물들, 위병소처럼 내부 출입을 통제하는 입구는 폐쇄적인 공간의 심상을 떠오르게 한다. 게다가 야간에는 이들 아파트를 지은 대기업의 '브랜드'를 과시하는 조명을 밝히며 주변 지역과 차별화가 시도된다. 광고 속 아파트는 언제나 궁전이다.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은 언젠가 그들만의 리그에 낄 수 있는 어떤 날을 꿈꾸며 동경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주택 문제로 인해 정치지도마저 바뀌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원래 서울은 전통적으로 진보개혁진영의 당선 비율이 (14대 56.8%, 15대 41.3%, 16대 62.2%, 17대 66.7%) 높은 편이었으나 18대 총선에서는 48개 선거구 중 40개를 한나당이 가져갔다. 당시 한나라당은 재개발과 뉴타운 공약을 내세워 몰표를 가져갔다. 당시 유세를 하던 한나라당 후보들은 거리 곳곳마다 뉴타운 도면을 걸어 놓고 주민들의 몰표를 얻어갔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 재개발과 뉴타운 공약이 서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지만, 이미 화살은 떠난 상태였다.

자, 그럼 이렇게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의 주택 문제,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주택의 탈상품화에 해결방안이 있다고 한다. 주택의 소유권과 임대권 전반을 공공이 갖고 있는 이른바 탈상품화 주택의 비율을 전체 주택에서 20~30%까지 늘려야 한다. 또한 아파트 위주의 공공 임대주택 패러다임도 변화가 요구된다. 임대주택을 아파트로 지으면 비용이 많이 들어 많은 가구를 공급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래된 다가구주택을 도시형 생활주택으로 바꾸는 방법도 유용하다.

그밖에도 이익 중심의 재개발이 아닌, 지역 주민 중심의 '도시 재생'으로의 패러다임 변화,  '수익권은 공공에, 이용권과 처분권은 개인에게 두는 시장친화적인 토지 공개념의 도입 등 해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물론 쉬운 건 하나도 없다.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생각을 갖고 덤벼야 할 정도로 첩첩산중의 문제들이다. 부동산 5적이 다 달려들테니 어디 쉬운 문제이겠는가. 하지만 그냥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문제인 것도 명백하다. ​한번뿐인 인생을 부동산에 저당 잡혀 살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우리들의 인식의 변화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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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하는 삶 - 도로시 데이, 평화와 애덕의 83년
로버트 콜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낮은산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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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 도로시 데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녀의 책을 읽어본 적도 없고,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로버트 콜스라고 하는 한 정신분석학자가 그녀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만만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도로시 데이가 얘기하고 있는 가톨릭 용어들이 섞인 영성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이런 이유로 읽기에 버거웠다는 지루한 서두는 여기까지...

 

도로시 데이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사회주의 운동에 젊음을 바쳤고, 어떤 운명에 이끌려 가톨릭 신자가 된 뒤에는(회심이라고 한다) '가톨릭 일꾼'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해 '환대의 집'을 운영하여 수많은 가난한 자들의 삶의 동반자로 평생을 살다간 평화운동가였다.

간단하게 정리하였지만, 그녀가 살았던 20세기 초반 미국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보건데, 그녀의 행보는 온통 가시밭길이었을 것이다. 이제 막 산업사회로 진입한 당시 미국에는 흑백 인종 문제 뿐만 아니라, 빈곤의 문제, 반전 운동 등 다양한 이슈가 있었고, 그녀는 불과 스무 살이던 1917년에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과 함께 행진을 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갈 정도였다. 당시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이것이었다.

"지금 이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젊은 시절, 수없이 감옥을 드나들던 열혈 사회운동가였던 도로시는 딸이 태어나던 해인 1927년,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다른 행보를 택한다. 물론 불의를 보면 못 참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는 모습 자체는 변함이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심리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그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이 책의 저자 로버트 콜스는 찾아내려 한다.

당시 가톨릭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기 보다는 자기 배 불리기에 급급하거나, 부자 편에 서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많았는데, 이상주의에 빠져있던 도로시가 왜 하필 종교에 귀의하게 되었는지는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의문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혼 관계에 있었으나 그녀가 딸을 세례받게 하는 바람에 이혼하게 된 남편 포스터 배터햄이 그녀에게 '누구지? 당신을 가톨릭으로 몰아간 사람이?"라고 물었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종교란 인민의 아편이 아니었던가?

 

"나의 회심 말이지요? 나의 회심은 내가 자신에게 말을 하는 방법이었어요. 내가 어딘가로 가려 한다는 걸 알고, 남은 인생 동안 그곳에 가려 노력하면서, 정처 없는 짧은 여행이나 소풍에 정신이 산란해지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에게 알려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회심은 과거 관점으로부터의 극적인 전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긍정한 사고방식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다. 예수의 삶과 예수의 설교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기 오래 전에 지지했던 이상과 조화를 이루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기에 회심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가톨릭에 귀의한 후에는 '가톨릭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동료 피터 모린과 단돈 57달러로 시작한 <가톨릭 일꾼>은 공동체주의, 평등주의, 민중주의를 제시하며 아무도 관심없어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매체로 자리매김한다.

 

"우리가 기본 원리로 삼은 것은 노동자의 생산수단 소유, 조립 라인 폐지, 공장의 분산, 수공업의 회복과 토지 소유를 추구하는 장기적인 계획이었다. 당연히 이것은 우리 경제에서 농업과 지방을 강조한다는 뜻이며, 도시에서 지방으로 중점을 옮긴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C.더글러스 러미스가 주장했던 중간기술, 불교경제와도 맥이 닿는 것들을 주장했던 것. 역시 최고의 생각은 최고의 사람들끼리 통하는가 보다.

특히  '가톨릭 일꾼 운동'의 주요 사업중 하나였던 <환대의 집>은, 노숙자를 비롯해 가난한 이들에게 흔히 무료 급식소에서 하듯 줄을 서게 하거나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풀기보다는 그들을 손님으로 맞아 먹을거리와 잠 잘 곳을 대접했다.

하지만 여전히 도로시 데이에게는 풀기 어려운 숙제가 있었다.

"가톨릭 일꾼 운동이 비현실적이며 그것으로는 이 나라가 가진 문제점의 99퍼센트에 어떤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리라"의 비판적 견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문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기 위해서 그녀는 '환대의 집'에서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상의 실천 속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루 24시간을 '지역' 현장에서 민중을 만나며 함께하는 것이 그녀가 택한 '혁명'의 장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태도, 도덕적 삶, 인간으로서의 총제적인 윤리적 목표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전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서로가 함께 살아가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본인도 모르게 자신이 대하는 사람들의 위에 서려고 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도로시 데이의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유혹, 그것은 '행세하는 태도'였다. 조금은 병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로시 데이는 로버트 콜스와의 대화에서, 그런 자신의 마음을 내비친다. 책망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가혹한 자기 검열이었다. 그런 엄격함이 있었기에 비로소 그녀의 삶 자체가 예수의 모습을 닮아간 것 아닐까 싶다.

요즘처럼 남의 말 하기 좋은 시대에 도로시 데이의 삶은 내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말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던가? 나의 삶은 나의 이상에 맞닿아 있는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내 삶은 지향점이 있는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그녀의 자선전을 먼저 읽고 접했으면 더 좋았을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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