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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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을 읽고 '오빠가 돌아왔다.', '퀴즈쇼'를 읽었을 때 나는 '김영하'가 흔한 이름인 만큼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독한 어둠과 아련한 밝음, 목이 턱턱 막히는 무거움과 피식 웃어넘기는 가벼움이 180도 뒤바뀌고 뒤죽박죽 섞이는 감정으로 책을 빠르게 읽는 신기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역시 똑같았다. 13편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고 동시에 독립된 이야기 속에서 묘한 재미를 느꼈다. 도시적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한다는 찬사를 받는 김영하의 글은 읽을수록 차갑다.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재밌고 신기한 일을 한 걸음 멀리서 관찰하고 혼자 골방에서 즐기는 느낌이랄까? 차가운 도시의 냉소보다 더 차가운 무감각한 도시인의 감성에 많이들 공감하기 때문에 그의 가볍지만 무거운 소설이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갑작스레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찾아온 목소리를 역시나 갑자기 잃어버린 가수의 이야기 '악어',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들먹이며 결국 사랑하는 이를 떠나는 로봇의 이야기 '로봇', 손해배상금이 아닌 과자세트에 만족하는 소시민의 이야기 '아이스크림', 절도범을 잡아 절도를 저지르는 비리 형사 '조'. 밀당에 전혀 소질이 없지만, 한방이 있는 여자의 짝사랑을 그린 '마코토'. 다양한 이야기들이 제각기 유려한 문체를 뽐내며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동명의 소설 '퀴즈쇼'였다. 온 가족이 살해당하고 홀로 남아 유산을 떠안았지만 동시에 아픔을 간직한 소녀와 그를 우연히 퀴즈쇼에서 만나게 되는 주인공.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그녀의 상처에 관심이 없다. 오직 돈, 돈, 돈. 거액의 유산이 빛날 뿐이지. 이유는 분명하다. 내 일이 아니니깐! 내게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으니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게 바로 현대인 대부분이 가진 심리가 아닐까?

 

책을 빌리고 나서 제36 이상 문학상 대상에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가 선정되었다는 뉴스를 문득 모니터에서 볼 수 있었다. "인간의 정신과 그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을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서사화함으로써 환상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라는 심사위원단의 평가에 자연스레 2월에 나올 예정이라는 책이 기다려진다. 물론 심사위원이 말한 거창한 메시지를 느끼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냥 재밌으니까! 현실에 있을 법한 무대에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기이한 이야기를 자신만의 독특하고 살아 있는 글로 써내려가는 김영하. 그가 만들어낸 비현실적이며 현실적인 소설 속 기괴한 공상과 재기 발랄한 표현을 읽어 내려가는 재미가 쏠쏠할 게 분명하다. 오히려 메시지가 남지 않아서 좋다. 가볍게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 그저 허무개그 한 편을 들은 기분이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독서는 아닐까? 반드시 내가 사회적 의미나 사색의 깊이를 더하려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즐거우려고 독서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오늘의 커피와 카페라테는 조용히 스타벅스를 나와 일식집이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마음의 준비를 한 오늘의 커피가 눈을 감자 카페라테가 주먹으로 있는 힘껏 그의 코를 때렸다. 어이쿠. 오늘의 커피가 무릎을 꺾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페라테는 코를 감싸쥔 그에게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몸조리 잘하십시오."

카페라테는 쥐색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먼저 자리를 떴다. 오늘의 커피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스타벅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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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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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가 판치는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정의에 대한 갈망은 어찌 보면 인간의 당연한 욕구일지 모른다. 2011년 출판계를 뜨겁게 달군 마이클 샌델의 정의관은 하버드 명강의 'Justice' 열풍과 맞물려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트롤리 딜레마, 대리모와 인공수정처럼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다양한 사례를 중심으로 독자의 선택을 요구하는 책은 일단 매우 흥미롭다. 자유롭게 토론과 논증을 유도하는 명석한 샌델 교수는 누구나 생각하는 학문의 전당, 대학에서 펼쳐지는 지적인 싸움에 불을 지피는 역할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나가면서 독자는 묘한 의문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도대체 정의가 뭔데? 책의 2/3를 넘게 읽어도 두 입장(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에 샌델은 신랄한 비판을 가하며 허점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하지만 책 제목처럼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 '정의'에 대한 '정의'를 알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9, 10장에 되어서야 드디어 논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척' 하던 마이클 샌델이 본심을 드러낸다. 그는 인간은 정치적 덕목을 지니며 시민으로서의 덕이 사회정의의 초석이라는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등에 업고 덕 윤리를 주장한다. 무작정 자신의 논리를 펴지 않고 상대 측의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그는 덕 윤리를 설명한다. 일단 샌델은 정의에 접근하는 세 가지 덕목으로 복지(welfare), 자유(freedom), 덕(virtue)을 꼽는다. 벤담, 밀이 주장하는 공리주의와 노직이 주장하는 최소국가, 자유지상주의를 사례를 통해 언급하지만, 이는 모두 자신의 정치 철학, 윤리학의 장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특히 칸트의 무연고적 자아를 이어받은 롤즈의 무지의 베일 개념 역시 마이클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참여 공화주의 개념을 들어 강력하게 비판한다.

 

사실 샌델의 논리대로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의 주장에 쉽게 동의하게 된다. 왜냐하면, 감정적으로 쉽게 끌리기 때문이다. 개인, 자유, 자율을 중시하는 고립된 자아(Independent self) 개념을 이어받아 사회 정의를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실현한다는 롤즈의 입장은 언뜻 보면 샌델에 비해 비인간적으로 비추어지기 쉽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투정이 솟아난다고 할까? 위안부 문제나 희생자 처벌,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도 'Collective Responsibility'. 즉 자칫 후손이 책임져야 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반면 샌델은 8장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언급하며 이야기(narrative), 태생적인 요소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도덕, 윤리, 법, 정의의 동일화가 이루어지며 정치 연합체, 연대(solidarity)의 중요성을 거듭 언급한다. 그렇다면 샌델이 바라보는 정의란 대체 무엇인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Egalitarian liberals),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Libertarians)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도덕적, 종교적 논란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고 도덕적 책임을 개인적 자유와 연결한다. 반면 샌델은 이러한 자유의 개념은 틀렸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자아는 오직 속한 사회, 국가, 민족, 세계 속에서 Identity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자연스레 우리는 연대에 의한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매킨타이어가 제시한 '공동체의 이야기에 묻혀 있는 내 인생의 이야기'와 흐름을 같이 하는 샌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도덕과 정치의 합일"을 이루어 공화주의 정신에 대한 향수를 잃어가는 미국의 재건이다. 다시 말해 패기 넘치는 젊은 철학자는 "정치가 도덕 실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빌려 와 자신의 스승 롤즈가 주장한 "국가는 도덕적 중립"이라는 의견에 반기를 제대로 든 것이다.

 

하지만 중립성에 대한 샌델의 입장이 과연 정답일까? 나는 일정 부분 그의 입장을 수긍하지만 공동체 주의가 가진 위험성 역시 높다고 본다. 일단 공동체 속의 자아는 인정하고 토론의 중요성엔 매우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개인에 우선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즉 자아를 가진 인간들은 현대에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자원의 희소성과 욕망의 유사성이 묘하게 맞물려 개인은 타인과 부딪치기 마련이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 감정적 끌림과 냉철한 이성이다. 감성과 이성의 조화가 보장되고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해도 타인과 합의가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까다롭고 예민한 생명 윤리, 개인의 자유, 존엄성이 얽힌 다양한 문제가 과연 하나로 정답을 내릴 수 있을까?

 

물론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이상적이고 따뜻하지만, 상황에 따라 너무나 주관적이고 일관되지 못하고 덕끼리 충돌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가정을 지키는 아빠 윤씨. 직장에 출근하는 대리 윤씨. 아빠라면 당연히 일찍 집에 들어와 아이와 놀아주며 가정의 평화를 지킬 덕이 있다. 반면 동시에 회사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며 기업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야근을 해야 하는 덕이 있다. 과연 둘 중 어느 덕이 더 고차원적이고 훌륭한 특성을 지닌다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개인의 역할이 충돌할 때 공동체 주의는 아무런 대답도 내릴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내린 대답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좋음'이 항상 '옳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토론으로 합의된 덕도 부정의하고 오히려 공리주의적일 수도 있다. 나치 시대의 광적인 폭력성은 그 당시에는 올바른 덕이었고 정답이었지 않은가? 도덕적 문제에 정치가 개입하며 법률로 정하는 순간 '관용'이 아닌 '불법'의 영역으로 많은 부분이 넘어갈 것이고, 자연스레 운이 좋으면 일부, 혹은 최악에는 다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사회 유지와 개인의 존엄성 보호를 위해 법이 존재하는 것인데 오히려 역설적으로 법이 본질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 샌델이 가진 맹점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집단을 추구하며 개인의 정체성이 상실된 한국에서는 더 적용하기 어려운 논리라고도 볼 수 있다. 이미 우리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암묵적인 희생을 '덕'이라는 이름 아래 강요받아오지 않았는가? 정치는 기회의 평등을 교육, 보건과 같은 최소한의 영역에서 보장하고 건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선에서 손을 떼는 것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사적 합리성과 공적 합리성이 똑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기에 '정의'에 목마른 한국인이 특히 '정의'에 대한 대답을 궁금해하며 샌델의 날카로운, 그러나 따뜻한 포옹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을 보며 건전한 토론의 장이 다시 주목받고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발생하는 현상은 역시 '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정의는 무엇인지 몰라도 부정의는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한국인. 정의가 승리하는 날을 위해 투표하고 토론하자.

도덕적 이견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상호 존중의 토대를 악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킬 수 있다. 우린, 동료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어려운 도덕 질문을 공개적으로 고민한다고 해서 어느 상황에서든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거나, 심지어 타인의 도덕적, 종교적 견해를 평가할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도덕적, 종교적 교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것이 더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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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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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의 통찰력으로 세상에 (혹은 가카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김어준. 대학 시절 무일푼으로 세계를 여행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인터넷 매체 <딴지일보>의 총수로 활약한 그는 이미 MBC 라디오 '색다른 상담소'에서 촌철살인의 독설로 유명했다. <건투를 빈다> 역시 '정면돌파 인생 매뉴얼'이라는 부제대로 두루뭉술하고 '좋은 게 좋은 거지' 식의 착한 해답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졸라! 씨바!' 두 단어로 요약되는 책의 내용을 무섭도록 현실적이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까지 있다. 물론 지금까지 제도권 교육 아래 정직하게 가르침을 습득한 나의 경직된 가치관 탓이기도 하겠지만 많은 부분 수긍하게 되는 점도 많았다. 나 (삶에 대한 기본 태도), 가족 (인간에 대한 예의), 친구 (선택의 순간), 직장 (개인과 조직의 갈등), 연인 (사랑의 원리) 다섯 파트로 구성된 Q&A는 누구나 공감할만한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책이 내놓는 답은 다양하다.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하라.", "당신만 각별하진 않다는 거.", "생겨먹은 대로 사시라. 그래도 된다.", "계속 징징거리면 죽통을 날려버려라." 등등.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똑같다. 바로 '자아'를 찾으라는 것이다. 흔히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그것이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한다. 부모의 기대, 연인 간의 책임감, 친구 사이의 믿음처럼 문제는 가까운 사람에서 시작된다. 하긴 애정이 있지 않은 상대에게서는 실망조차 느끼지 않겠지만 말이다. 사실 인생의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자기 원하는 대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서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게 2012년 한국이다. 남보다 비루한 스펙, 나보다 빨리 승진하는 동료, 남보다 빈약한 통장, 나보다 행복해 보이는 친구. 모든 관심이 '나'와 '남'을 가르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에 집중된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게 김어준의 날카로운 분석이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이해하기 껄끄러운 부분도 물론 있었다. 관계에서 쿨해지라는 데 어디 그게 말처럼 쉽나. 쿨하지 못한 나는 찌질한 사람이고 자괴감만 더 생기는 악순환은......없었다. 다행이다. 그저 내가 겪는 고민이 오직 나 혼자만 겪는 특별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묘한 위로가 50%, 다양한 시각을 마주하며 타인을 만날 때 생기곤 하는 편견이 조금은 없어진 느낌이 50%다. 대한민국을 강타한 베스트셀러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깐 청춘이다>보다 오히려 지독히 현실적이기에 충격이 크지만 그 효과도 더 컸다. <아프니깐 청춘이다>는 따뜻하고 힘을 건네는 명언으로 가득 찬 진통제였다. 지치고 힘들 때 가볍게 읽으며 다시 동기 부여를 하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지만 내가 마주할 세상은 그대로다. 그저 그 순간의 위안과 만족에 그치는 게 지나고나서 드는 생각이랄까? 하지만 <건투를 빈다>는 무식하게도 상처 부위를 그대로 째서 수술해버린다. 세상은 원래 이따위로 생겨먹었으니깐 니가 변해야 한다고. 진정한 자아를 찾고 제발 찌질하게 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좀 하면 살라고 건투를 빈다고 말하면서 시크하게 지랄을 한다. 하긴 세상은 훨씬 지랄 맞은 곳이니 김어준처럼 맞서 싸우거나 투덜거리지 말고 굴복하는 수밖에. 물론 그 선택에 대한 후회, 만족, 책임은 오로지 내 손에 달린 걸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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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없어진 MBC 라이동 <색다른 상담소> 명언 모음!

 

다시 시작 되서 잘 될 확률은 굉장히 낮죠. 사람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똑같은 문제 때문에 또 헤어집니다.


사람들이 흔히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자신의 실력이 70% 운이 30%인양 이야기하는데, 저는 거꾸로 라고 봅니다. 운이 90%, 나머지 10%는 뭐냐? 운이 올 때까지 버티는 능력. 조급하면 안 돼요.


여행이 좋은 게 다른 나라라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나라와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거죠.


죄책감이 자신을 향한 얄팍한 눈속임일 수가 있어요. 어떤 걸 속이는 감정이냐 하면 분노가 있을 수 있어요 사실. 흔히 자신이 느끼는 분노를 미안함으로 바꿔치기해서 깨닫는 거죠.


분노를 자극하는 게 중요하구요. 죄책감을 한 껍질 벗기면 그 안에 어마어마한 분노가 있을 수 있어요.


박지성의 축구를 보고 있으면 품성으로 뛰는 게 느껴져요. 최고의 리그에서 최고의 팀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내가 아닐 수 있는 방법, 세상에 없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나로 삽시다. 그래도 됩니다.

 

남자는 당신에게 무관심하거나 또 대충 덮으려고 하거나 그런 게 아니고, 언어 용도가 달라서 당신이 그 말을 하는 의도를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가장 이를테면 내가 화가 났을 때 화를 잘 풀어주는 남자의 언어를 제가 발견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게 뭐였냐면 "그러게.." 그거 였어요. 맞장구.

 

사실은 생각해보면 말이죠. 회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들어가서 어떻게 출세할래?하면..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 부장되고 뭐되고, 이럴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행태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올라간다는 게... 어디나 그런 것 같아요. 어떤 길로 가야할까? 고민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가서 물어보고 찾아보고 그런 게 정답이 아닐까.

 

사람들에게 자기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일 텐데 거기에 뭘 집어 넣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거죠.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합니다.

 

그 죄의식은 진짜 죄의식이 아니에요. 본인이 실제로 자기가 좋아한다고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 하는 진짜 자기를 즐겁게 만들고 자기가 열정을 부여할만큼 잘하지 못하는 거에서 오는 이 불만을 죄의식이라는 거로 돌려가지고 지금 계속, 나는 잘하고 싶은데 우리 부모님이 못하게 해서 저는 이만큼으로 살고 있어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어설프게 안전한 길은 가면 확실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요. 왜, 그게 본인한테 별다른 감흥을 못 주거든요.

 

핑계대기를 멈추고, 자기 약한 마음에 노를 한 다음에,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되는 거군요.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내가 아무리 먹는 거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거하고 마찬가지예요. 그것이 자연의 이치고 기본이거든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 된다라고 믿는 거는 자연의 이치를 거르는, 잘못된, 비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남이 날 어떻게 보냐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군요 먼저.

 

내가 살아있다는 것,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만 해도 나는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요. 어, 내가 내 주위에 저 사람을 만나 참 좋구나, 그네 바로 내가 태어난 이유구나. 또는 내가 야, 밥을 먹으니까 너무 맛있어, 이게 내가 태어난 이유구나, 그거는 본인이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1년 후에 먹을 음식을 고민한다고 해서 그 음식이 지금 생기나요? 오늘 먹을 거는 오늘 거만 걱정하면 돼요. 내일 할 수도 있는 일을 혹시 오늘 하고 있지 않을까. 문제가 생기면 그때 걱정해라.

 

우디 알렌 : 인간들은 행복이 기본 조건이고 마땅히 주어져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행복은 대가를 치르고 쟁취해야할 문제다. 인간의 기본 조건, 상태는 불안이다. 그것이 종족의 생존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사랑에 충실해라. 내가 줄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돌려받아야 겠다는 생각을 끊어버리면 불안하지 않아요. 본전의식을 없애는거죠. 자기가 자기 불안을 스스로 이해하고, 자기가 스스로 다스릴 수 있으려면 시간과 경험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때 그 일을 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원대한 계획이나 치밀한 플랜을 짜는게 아니라 그냥 일단 시작하는 것이다.

 

선택이 어려울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이어야 한다.

 

세상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짜 대인배다.

 

사람들은 자기를 방어하는라 엄청난 에너지를 쓰죠. 그 절반만 스스로를 돌아보는데 씁시다. 그러면 방어하는 일 자체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완벽해지기 위해서 토요일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월요일에 불완전한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사실 누구도 토요일이 되도 완벽해질 수 없죠.

 

남들과 갈등이 생길 때 가장 먼저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과 만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이방인이거든요. 

 

선택이 어려울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이어야 한다.

 

만남보다 더 나은 이별도 있고 이별보다 더 못한 만남도 있다.

 

가까운 사이에는 예의가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이일 수록 인간으로서 예의가 필요하죠. 가깝지 않다면 규범이나 윤리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부모도 자식도 서로에게 권리, 벼슬, 의무가 아니다. 가족을 묶는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 관계에 대한 예의여야 한다.

 

그냥 부딪쳐라. 사실 그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사랑도 생명이 있다. 내 사랑만은 영원하다고 믿는 분보다 사랑에도 끝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더 로맨틱한 사람이다. 내 사랑이 유한하다는 생각에 절박해지거든요.

 

남이 못나야 내가 잘나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믿는 만큼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죠. 그래서 필요한게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 지기입니다.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많이 속이거든요.

 

마음은 남지 않는 장사는 하지 않는 약삭빠른 장사꾼이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을 자신도 잘 모르겠다 싶은면 이 마음으로 얻으려는게 뭔지, 그 지점에서 출발해보시면 아마도 숨어있던 마음을 발견하실 수 있지 않을까...

 

상당수의 고민은 질문을 잘못해서 생긴다. 어떡하면 덜 불안해질까가 아니라 어떡하면 더 행복해질까라고 질문을 바꿔보세요. 꽤 많은 고민이 해결됩니다.

 

시니컬하지말고 시큰둥하자. 냉정한게 아니라 담담하게 사는게 어른이죠.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냥 그 일을 하는 거다. 실패를 준비하며 핑계를 마련해두는 데 에너지를 쓸 게 아니라, 토 달지 말고, 그냥, 그 일을 하는 거, 그게 그 일을 가장 제대로 하는 법이다. 그런다고 하고 싶은 대로 다 되느냐.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겠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 거지. 하지만 해보지도 않는데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겠나. 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되길 바라는 건 멍청한 게 아니라 불쌍한 거다. 자기 인생에 스스로 사기 치는 거라고. 그리하여 난 꿈을 말하는 대신 이렇게 외쳐야 한다고 믿는다.

"하면, 된다!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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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공부를 알아야 우리교육이 보인다 - 개정판
이원재 지음 / 문음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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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밤낮없이 학업에 정진하여 지금의 그 뜻을 지켜 과인의 곁으로 오라. 그대들이 꿈꾸는 조선을 과인에게도 보여다오.”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속 정조(조성하)가 근엄하게 조선의 미래를 꿈꾸며 건네는 말이다. 하지만 거창하고 웅대한 포부보다는 성균관 유생 구용하(송중기)의 솔직한 고백이 아마도 조선 시대 공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한마디로 정리해준다.

 

“난 양반이 아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시전상인을 지내온 중인 집안이고, 형조참의를 지낸 조부 같은 건 난 가져본 일도 없다. 내 아버진, 아들 자식에게 번듯한 집안을 물려주시겠다고 족보를 사들였고. 아니 정확히 양반의 허세를 사들였고 그게 바로 지금 눈앞에 나다.”

 

흔히들 유학이 꽃을 피웠던 조선 시대 교육을 떠올리며 21세기 우리나라의 열풍을 넘은 사교육 광풍, 공교육 붕괴를 나무라곤 한다. 우리가 떠올리는 위대한 조선의 학생은 밤낮으로 책상에 앉아 반딧불과 눈빛을 벗 삼아 고전을 외우는 형설지공을 실천하고 농사와 공부,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주경야독의 이미지다. 그들은 근면함과 학문에 대한 거창한 덕을 칭송하는 뿌리 깊은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였다. 선조와 비교당하며 벼락치기를 일삼고 족집게 공부, 대학 입시에 반영되는 과목만 골라 한다는 비난을 받는 이 시대의 학생. 우왕좌왕 일관성 없는 교육 정책, 사교육을 조장하는 느낌까지 풍기는 빈약한 교육 이념의 현실에서 그들은 과연 억울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 시대 선비와 비교당하며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로제타석에서도, 소크라테스가 활동하고 토론과 예술이 꽃을 피운 그리스 시대에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없어.”란 말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성세대의 눈으로 바라본 젊은 청춘은 언제나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완벽한 이상 사회가 구현되었을 조선 시대도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매년 폭음으로 사망자가 생기는 신입생 환영회는 과거급제 새내기에게 혹독한 정신적, 신체적 모욕을 가하는 신래침학(新來侵虐)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고 실학자 이익의 “아이들이 머리털이 마르기도 전에 과거공부를 한다.‘는 말처럼 영어 발음을 위해 혀까지 늘리는 21세기 대한민국 조기교육의 기원도 찾을 수 있다. 이 밖에도 과거 응시를 위해 위장 전입을 하며 조선 시대 최고 수준의 학교인 성균관에 학생들의 발길이 뜸하고 순환근무 개념의 담당 교사의 자질도 떨어지는 불편한 진실은 신문에서 보도되는 공교육 붕괴 현실과 맞닿아 보인다. 게다가 책들을 팽개쳐 두고 과거 시험에 나올 것 같은 글을 베껴서 모아둔 초집(抄集)이 애용되던 편의주의, 편법이 판을 치던 적나라한 현실을 보고 있으면 가히 역사는 돌고 돈다는 이야기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열등감에 가득 차 스스로 자존감을 낮추는 우리 시대의 힘겨운 학생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조선 시대 선비와 비교하면 오히려 2011년 ‘입시공화국’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불쌍하다. 식년시가 있는 해를 제외하고 보통 매년 1회 이상 시행되었던 별시와 달리 현재 대학 입시를 위해서는 수능, 논술, 내신, 봉사활동, 교외활동, 수상실적 등 너무나도 많은 성취도를 요구하며 완벽함을 바라고 있다. “이제 학생들은 케인즈와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 이론을 설명한 영어논술 한 토막을 읽고, 지문 내용을 토대로 미적분이 포함된 고차 방정식을 푼 다음, 그 해답이 나오게 된 과정을 2,000자 내외로 논해야 한다.”라고 꼬집는 기자의 말처럼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공교육이 제공하지 못하는 수준의 내용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 나의 경험에도 논술 대비는 그저 모두가 잠을 보충하는 아침 자습 시간에 EBS 강의를 틀어주는 것이 고작이었고 심화 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논술 준비 역시 오히려 외부 학원 강사를 초청한 형태였다. 입학사정관 제도로 창의력, 잠재력을 평가한다는 논리도 공허하다. 공정성 시비가 일어나기 쉬운 주관적인 제도에 따르다 보면 남들과 차별화되는 +α(플러스 알파)를 원하기 마련이고 이는 안타깝게도 경제적인 요소로 갈리기에 십상이다. 소위 말하는 다양한 스펙도 결국 돈이 있어야 따낼 수 있는 하나의 훈장과도 같고 이는 공교육에서 무상으로 공평하게 제공해줄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다양성’이 유명무실해지고 부의 세습이 이어지며 기회의 균등마저 해치고 있는 게 다양한 입시전형의 어두운 그림자이자 냉혹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최선은 아니지만 차악을 피하기 위한 ‘수능’이라는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비행기도 연착륙을 연기하고 온 국민의 출퇴근 시간까지 늦추는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수능 시험. 흔히들 “수능은 인생 전부는 아니다.”라고 격려의 말을 건네지만 수능이 인생 전부는 아닐지 몰라도 눈앞에 시험지를 마주하는 수험생 인생에서는 전부다. 상상을 초월한 중압감이 밀려오는 순간 단 하루의 시험으로 그간의 노력이 결정되는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지금까지 오랜 시간 유지되고 있는 것은 ‘공정성’을 지닌 시험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험 응시자의 컨디션이나 지나친 긴장이 당락을 좌우한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험에 공통되는 것으로, 어떤 시험제도도 이를 극복할 수 없다. ‘획일화’라는 가치에만 몰두하여 비판을 가하기보다는 수능 시험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변별력을 바탕으로 ‘공정성’에 집중하면 수능시험이 가진 그 가치를 알 수가 있다. 누구나 노력하고 성실하게 공부한다면 사교육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경시 대회, 논술과는 달리 충분히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고 가능성의 폭이 넓다는 것이 수능시험이 가진 매력이다.

 

하지만 이런 수능 시험 제도에조차 포함되지 않아 등한시되는 예체능 교육, 나아가 우리 학생의 건강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007 국민 체력 실태 조사를 따르면 우리나라 초등학교 6학년 남자는 평균 신장은 150.3㎝로 2001년의 149.5㎝보다 0.8㎝ 커졌고, 몸무게도 평균 44.3㎏으로 2001년 42.2㎏에 비해 2㎏ 이상 늘어나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체격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체력은 밑바닥이었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해 초등학생 1,700명을 대상으로 윗몸일으키기, 오래달리기 등으로 어린이 체력을 측정한 결과 1등급을 받은 어린이는 단 1%(17명)에 그쳤다. 게다가 체력뿐 아니라 건강도 매우 나빠졌다. 우리나라 소아의 비만율은 1970년대 후반 4% 수준이었지만 2005년 10.2%로 늘었다. 초등학생의 비만율도 1998년 12.1%에서 2005년에는 18.3%에 이르렀다. 실내에서만 생활하면서 면역력도 약해져 천식 등의 질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학생들의 시력도 갈수록 나빠져 고도 근시가 있는 학생이 점점 늘고 있다. 학생의 본분은 대학 진학을 위한 점수를 획득하는 공부가 아니라 인성교육과 더불어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과열된 교육열에 발맞추어 하나의 평가 요소로 예체능 교육이 편입될 때 더 많은 사교육을 불러들일 게 뻔한 현실에서 조금 더 진지하고 과학적인 교육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학생의 다양한 욕구와 관심을 충족시켜줄 단계적이 체계적인 커리큘럼 개발에 힘써야 하며 이는 자연스레 과열된 입시 경쟁에서 고통 받는 학생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선물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입시제도가 무분별하게 난립하는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일관성의 부재이자 교육 철학의 실종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 (百年之大計)’란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십년지대계 (十年之大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우리나라의 교육정책과 입시 제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정권이 바뀔 때는 물론 이거니와 교육 담당 부서인 교육인적자원부의 수장이 교체될 때마다 바뀌며 수험생과 수험생 가족, 나아가 사회 전체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뿌리 깊은 교육 철학이나 제도의 깊이가 없이 그저 국민의 눈치만 살피며 우왕좌왕하는 제도의 일관되지 못한 난립 속에서 결국 고통 받는 이는 수험생이다. 실제 2008년 수능 총점 대신 계열별 백분위에 따라 9등급으로 정하는 등급제 시행 1년 만에 반발이 거세지자 다시 표준점수까지 공개하는 식으로 태도를 바꾼 줏대 없는 수능 제도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게다가 그것이 수험생을 위한 길이 아니라 기타 사교육 기관이나 이해 타산적인 경제적 구조에 발맞춘 변화라면 비판을 넘어 비난을 받을 만한 사항이다.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개념 있는 교육 정책을 연구하여 가뜩이나 가장 힘겨운 시기에 고통 받는 수험생에게 진정한 의미의 가르침을 주는 것은 정부 기관의 몫이다. 부디 자신의 본분에 걸맞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본에 충실한 정책을 기대한다.

 

책을 읽으며 부패하고 꼼수에 능한 입시 공부가 조선 시대 과거 공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문화란 점에 회의감이 들고 허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과거에 당당히 맞서는 것이 한계 극복의 첫걸음이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어린 비판 속에서 우리 교육 제도는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바뀌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차곡차곡 진행되어 점수에 매달리며 스트레스받는 학생보다 즐거운 청춘을 만끽하는 풋풋한 학생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천연자원과 인구도 부족한 조그만 동방의 한 나라가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아시아의 강호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인적 자원‘의 힘이었다. 눈부신 성공의 뒷면에는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끈기와 열정이 있었고 교육으로 가정과 사회와 세계를 바꾸어 나가리라는 교육열의 긍정적인 측면도 큰 역할을 했다. 우리의 넘치는 교육열을 좀 더 창의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어 간다면 더 밝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상록수』의 영신이 칠판에 꾹꾹 눌러 적자 담 밖에 아이들도 훌쩍거리며 하나가 되어 외치지 않았는가?

 

“누구든지 학교로 오너라.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흔들리고 위태로워도 결국 교육만이 희망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 통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누구나 응당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사회를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해야 한다. 또 우리 아이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웃음을 위해서 힘차게 달리며 가르침을 이어나가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가장 효율적인 투자이자 사회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 온 나라 자제들이 초집만을 과거공부의 좋은 수단으로 여겨 책자로 만드는 경박한 풍습이 굳어져 비록 금지하는 법이 있어도 이제는 막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6월 기미)



따라서 시험은 공정해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과거제도가 지금의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를 수용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삶의 조건이 유사하다면 시대의 신,구와 상관없이 그 시대들이 요구하는 시험의 요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혹시 우리나라 사회가 외국처럼 학력(학벌)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우리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입시의 덕목은 바로 공정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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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공중부양 - 이외수가 처음으로 공개하는 실전적 문장비법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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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빠진 글쓰기 관련 책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떡하니 표지에 드러내 특별함을 첨가한 이외수. 그의 외모 때문인지 재기 발랄한 필력 때문인지 무언가에 홀린 듯 이 책을 집어들게 되더군요. 시집, 산문집, 소설, 우화에 이어 트위터와 블로그를 넘나들며 폭풍처럼 글을 토해내는 작가의 비밀이 담긴 '비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글을 잘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천재성을 가진 작가의 표현과 통통 튀는 발상을 부러워하며 언제나 닮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누구는 날 때부터 펜을 잡고 글을 쓰며 나왔고 누구는 술만 마시고 발로 끼적거려도 명문이 술술 이어지겠습니까? 기인 이외수는 차분하고 진솔하게 '좋은 글'은 철저히 연습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무림 최고수의 필살기가 담겨있을 비기서 치고는 조금은 속은 것같고 김이 빠지긴 합니다. 매력적인 글의 실타래를 여유롭게 풀어낼 한 방이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취권>의 사부가 지독하게 청소와 빨래를 시켰듯이 자질구레한 숙제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모든 분야의 고수가 그리도 강조하는 것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기본기'인 것을 떠올려 본다면 이외수의 가르침 역시 당연한 이야기 같네요. 단어의 장, 문장의 장, 창작의 장, 명상의 장. 이렇게 네 가지 분야로 나누어 이외수는 차근차근 실전 글쓰기를 완성하는 자신의 경험과 비법을 전수해줍니다. 단어를 열거하고 사물의 속성을 알아맞히기, 감각으로 얻을 수 있는 살아 있는 단어 채집하기, 한 단어로 느낌 표현하기, 국어사전식이 아닌 감성사전식 반대말 찾기 등 깨알 같은 허드렛일이 많습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간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내 안의 글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자라고 있겠죠?

 

비기를 모두 읽은 제자에게 이외수는 마지막 과제를 전해줍니다.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던지겠다. 만약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그는 시덥지 않게 스피노자 뒤꽁무니를 따라 사과나무나 심겠다고 할 불량 제자를 향해 일침을 가하며 색다르고 자신만의 향기가 나는 글을 주문합니다. 이 글을 쓰고 나서도 아마 저는 여전히 구태의연하고 심하게 재미없는 글을 완성하고 잘해야 C+을 맞고 재수강을 면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학생일 겁니다. 그래도 초조해하거나 답답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이를 먹고 글쓰기 노트가 빼곡해질수록 언젠가는 반짝 튀는 글을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레 토해낼 거라 믿기 때문이죠. 토할 때까지 글을 토해내야겠습니다.

 

 

 

####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임마."

17세기 합리론의 대표적인 철학자 스피노자가 2011년 한국에서 환생한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라고 욕지거리를 들었을 거다. 그가 대체 무엇을 꿈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랑 2만 원 짜리 묘목 한 그루를 심는 게 도도한 네덜란드 철학자의 코나투스는 아니었겠지. 아쉽게도 우리나라 땅덩어리는 심하게 좁아서 사과나무 수백 그루를 심을 공간이면 닭장 같은 아파트를 빽빽하게 지어 올리는 게 훨씬 더 옳고 이성적인 판단일 것이다. 요새 잘 나가는 경영학, 경제학적으로 생각해봐도 투자 대비 효용이 최소인데다가 이 정도면 D+ 학점을 줘도 교수님께 고맙다고 배꼽 인사를 올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하이델베르크 교수직을 철학의 자유를 지킨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이 소리를 전국 수천 명의 시간강사가 들으면 욕지거리에서 그칠 게 아니라 돌을 던지고 난리가 났을 거다. '유전교수 무전강사' 시대에 무슨 배부른 소리에 사과나무 타령이란 말인가.

 

하지만 올곳은 철학과 학부생인 나는 그를 맹목적으로 믿었다. 철학과 학생에게 있어 거친 역사 속에 끈질기게 살아남아 자신의 목소리를 한 마디로 남긴 스피노자는 절대자였다. 동네 철학관 김씨가 남긴 주옥같은 작업멘트들은 나 혼자서 기억할 뿐 아무도 모르지 아니한가? 수많은 후배 철학자들이 그를 까고 허점을 공략하지만, 그저 쌍방향이 아닌 일방적으로 수용하며 외워서 글을 써내려가는 철학'과' 학생인 나에게는 스피노자는 티 없는 국민 남동생, 아니 국민 철학자였다. 분명히 스피노자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1%의 무언가를 알고 자신 있게 헛소리가 아닌 헛소리를 외친 거라 믿었다. 아니 사실은 기계적으로 이기호발설이니 기발이승설, 사단칠정을 달달 지지고 볶으며 외운 내가. 대한민국 교과 과정을 한치의 의심 없이 순종적으로 받아들인 내가. 생각했을 때는......... 분명히 정답이다. 정답이 아니라면 날카로운 교과서 편집 위원의 그물망에 오류가 걸렸을 것이다. 그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기하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세계관에 있어서는 무신론적 성향이 강한 일원론적 범신론자였다. 독일 관념론에 큰 영향을 끼쳤고, 계몽주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라고 나는 기억했고 내 기억은 정확했다.

 

내 통장에는 달랑 29만 원이 있었고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장남인 나는 딱히 심을 만한 곳이 없었다. 게다가 문어 대가리 형상을 한 누구는 29만 원만 가지고도 평생 호화롭고 여유롭게 살지만, 학생인 나는 29만 원으로 사과나무 묘목을 살 수 없었다. 다행히 SNS 시대의 홍수에 살며시 발을 담그며 복분자 묘목을 1주당 300원에 팔며, 최소 500주를 사야 한다는 검색 결과를 얻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스피노자도 복분자가 없어서 그렇지 아마 사과와 둘 중 고르라면 분명히 복분자를 골랐을 거야. 복분자는 남자에게 최고니깐 말이야.' 그렇다고 하자며 자위하는 나는 며칠을 기다렸다. 지구 종말이 온다는 디데이가 하루하루 다가오는 동안 남은 14만 원으로 PC방과 플스방, 당구장을 전전하며 바퀴벌레같이 버텼다. 왜냐고? 나는 스피노자를 믿으니깐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줄 거라 믿은 건....아니고 그게 제일 싸게 먹히는 생존방법이었으니까 말이다.

 

복분자 묘목이 드디어 도착했다. 집 앞 화단에 심어볼까 했지만, 유모차에 쓰레기를 담아 유유히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눈초리가 매섭다. 멀쩡히 생긴 20대 청년이 삽을 들고 츄리닝 바람으로 떡하니 서 있으니 수상할 수밖에. 할 수 없이 건널목을 건너 공원으로 가서 에라 모르겠다 한 삽을 푸는 순간! 경비원 아저씨가 미쳤느냐며 고함을 빽하니 지른다.

"아저씨.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열심히 근무하세요? 그냥 쉬세요."

나름대로 설득을 한다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한 건데 아저씨는 더 성을 내며 멱살을 잡아 비튼다.

"내가 얼마나 오래 쉬었는데! 이 새끼야. 죽을 때까지 일할 거야!"

아차 싶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번듯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직장에서 쫓겨난 듯한 그를 오히려 자극한 것이다. 태생적으로 맞는 걸 싫어하고 눈치가 빠른 나는 적당히 담배 한 대를 물려들이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다행이다.

 

결국, 결심했다. 버려진 마늘밭이 보였다. 아마 신 나게 놀러다니며 지구 최후의 날을 맞이하려고 밭 주인은 여행을 떠났나 보다. 여기다 나는 거룩한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그 뜻을 이어나가리라. 얼마나 팠을까? 까만 피부는 이제 빨갛게 익어갔고 준비해온 비루한 복분자인지 블루베리인지 모를 묘목을 가지런히 심으려는 순간! 웃고 있었다. 내가 미친 것인지 더위를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웃고 있었다. 5만원 짜리 지폐에 웃고 있는 신사임당께서 구찌 선글라스에 샤넬 귀걸이를 치렁치렁 걸치고 계신 듯했다. 교과서에는 실려 있지 않은 스피노자의 비화가 떠올랐다. 꾸벅꾸벅 졸면서 들었던 윤리 인강에서 아마 윤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선생은 이야기했지. 스피노자는 당시 유럽의 신기술인 안경을 다루는 기술자였다고! 고고하고 도도한 척해도 스피노자는 철학자이기 이전에 돈을 좇아 인생을 살아가는 그저 인간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다발은 셀 수가 없었고 흙빛은 이미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함을 지르며 나는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 발광을 했다. 마늘밭에 감사의 키스를 전하며 흙 다발을 움켜쥐고 마치 쇼생크 탈출의 오마주인양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다. 비는 오지 않고 대신 뜨거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점점 다가오는 뜨거운 돌덩이에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고 마늘밭 김 노인은 최후의 만찬을 마무리했다. 그렇다. 스피노자가 개뿔 얼마나 대단한 철학자일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똥을 주었고 나는 죽어서도 스피노자를 잊지 않을 거다. 이래서 네덜란드 사람은 히딩크 빼고는 다 코쟁이 나쁜 놈이라니깐....

 

마늘밭 김 노인은 마지막 폐지를 주워담으며 웃었다.

"이제 다 채웠다. 만 원정도 나오려나?"

진실하게 써라. 글쓰기에는 무엇보다도 진실이 중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재담가라도 자신이 감동받지 않은 소재로 타인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먼저 닫혀 있는 그대의 가슴부터 열어라. 진실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있는 것이다. 감동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머리로 쓰지 말고 가슴으로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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