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공부를 알아야 우리교육이 보인다 - 개정판
이원재 지음 / 문음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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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밤낮없이 학업에 정진하여 지금의 그 뜻을 지켜 과인의 곁으로 오라. 그대들이 꿈꾸는 조선을 과인에게도 보여다오.” 

 

KBS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속 정조(조성하)가 근엄하게 조선의 미래를 꿈꾸며 건네는 말이다. 하지만 거창하고 웅대한 포부보다는 성균관 유생 구용하(송중기)의 솔직한 고백이 아마도 조선 시대 공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한마디로 정리해준다.

 

“난 양반이 아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시전상인을 지내온 중인 집안이고, 형조참의를 지낸 조부 같은 건 난 가져본 일도 없다. 내 아버진, 아들 자식에게 번듯한 집안을 물려주시겠다고 족보를 사들였고. 아니 정확히 양반의 허세를 사들였고 그게 바로 지금 눈앞에 나다.”

 

흔히들 유학이 꽃을 피웠던 조선 시대 교육을 떠올리며 21세기 우리나라의 열풍을 넘은 사교육 광풍, 공교육 붕괴를 나무라곤 한다. 우리가 떠올리는 위대한 조선의 학생은 밤낮으로 책상에 앉아 반딧불과 눈빛을 벗 삼아 고전을 외우는 형설지공을 실천하고 농사와 공부,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주경야독의 이미지다. 그들은 근면함과 학문에 대한 거창한 덕을 칭송하는 뿌리 깊은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였다. 선조와 비교당하며 벼락치기를 일삼고 족집게 공부, 대학 입시에 반영되는 과목만 골라 한다는 비난을 받는 이 시대의 학생. 우왕좌왕 일관성 없는 교육 정책, 사교육을 조장하는 느낌까지 풍기는 빈약한 교육 이념의 현실에서 그들은 과연 억울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 시대 선비와 비교당하며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로제타석에서도, 소크라테스가 활동하고 토론과 예술이 꽃을 피운 그리스 시대에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없어.”란 말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성세대의 눈으로 바라본 젊은 청춘은 언제나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완벽한 이상 사회가 구현되었을 조선 시대도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매년 폭음으로 사망자가 생기는 신입생 환영회는 과거급제 새내기에게 혹독한 정신적, 신체적 모욕을 가하는 신래침학(新來侵虐)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고 실학자 이익의 “아이들이 머리털이 마르기도 전에 과거공부를 한다.‘는 말처럼 영어 발음을 위해 혀까지 늘리는 21세기 대한민국 조기교육의 기원도 찾을 수 있다. 이 밖에도 과거 응시를 위해 위장 전입을 하며 조선 시대 최고 수준의 학교인 성균관에 학생들의 발길이 뜸하고 순환근무 개념의 담당 교사의 자질도 떨어지는 불편한 진실은 신문에서 보도되는 공교육 붕괴 현실과 맞닿아 보인다. 게다가 책들을 팽개쳐 두고 과거 시험에 나올 것 같은 글을 베껴서 모아둔 초집(抄集)이 애용되던 편의주의, 편법이 판을 치던 적나라한 현실을 보고 있으면 가히 역사는 돌고 돈다는 이야기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열등감에 가득 차 스스로 자존감을 낮추는 우리 시대의 힘겨운 학생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조선 시대 선비와 비교하면 오히려 2011년 ‘입시공화국’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불쌍하다. 식년시가 있는 해를 제외하고 보통 매년 1회 이상 시행되었던 별시와 달리 현재 대학 입시를 위해서는 수능, 논술, 내신, 봉사활동, 교외활동, 수상실적 등 너무나도 많은 성취도를 요구하며 완벽함을 바라고 있다. “이제 학생들은 케인즈와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 이론을 설명한 영어논술 한 토막을 읽고, 지문 내용을 토대로 미적분이 포함된 고차 방정식을 푼 다음, 그 해답이 나오게 된 과정을 2,000자 내외로 논해야 한다.”라고 꼬집는 기자의 말처럼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공교육이 제공하지 못하는 수준의 내용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 나의 경험에도 논술 대비는 그저 모두가 잠을 보충하는 아침 자습 시간에 EBS 강의를 틀어주는 것이 고작이었고 심화 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논술 준비 역시 오히려 외부 학원 강사를 초청한 형태였다. 입학사정관 제도로 창의력, 잠재력을 평가한다는 논리도 공허하다. 공정성 시비가 일어나기 쉬운 주관적인 제도에 따르다 보면 남들과 차별화되는 +α(플러스 알파)를 원하기 마련이고 이는 안타깝게도 경제적인 요소로 갈리기에 십상이다. 소위 말하는 다양한 스펙도 결국 돈이 있어야 따낼 수 있는 하나의 훈장과도 같고 이는 공교육에서 무상으로 공평하게 제공해줄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다양성’이 유명무실해지고 부의 세습이 이어지며 기회의 균등마저 해치고 있는 게 다양한 입시전형의 어두운 그림자이자 냉혹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최선은 아니지만 차악을 피하기 위한 ‘수능’이라는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비행기도 연착륙을 연기하고 온 국민의 출퇴근 시간까지 늦추는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수능 시험. 흔히들 “수능은 인생 전부는 아니다.”라고 격려의 말을 건네지만 수능이 인생 전부는 아닐지 몰라도 눈앞에 시험지를 마주하는 수험생 인생에서는 전부다. 상상을 초월한 중압감이 밀려오는 순간 단 하루의 시험으로 그간의 노력이 결정되는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지금까지 오랜 시간 유지되고 있는 것은 ‘공정성’을 지닌 시험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험 응시자의 컨디션이나 지나친 긴장이 당락을 좌우한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험에 공통되는 것으로, 어떤 시험제도도 이를 극복할 수 없다. ‘획일화’라는 가치에만 몰두하여 비판을 가하기보다는 수능 시험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변별력을 바탕으로 ‘공정성’에 집중하면 수능시험이 가진 그 가치를 알 수가 있다. 누구나 노력하고 성실하게 공부한다면 사교육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경시 대회, 논술과는 달리 충분히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고 가능성의 폭이 넓다는 것이 수능시험이 가진 매력이다.

 

하지만 이런 수능 시험 제도에조차 포함되지 않아 등한시되는 예체능 교육, 나아가 우리 학생의 건강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007 국민 체력 실태 조사를 따르면 우리나라 초등학교 6학년 남자는 평균 신장은 150.3㎝로 2001년의 149.5㎝보다 0.8㎝ 커졌고, 몸무게도 평균 44.3㎏으로 2001년 42.2㎏에 비해 2㎏ 이상 늘어나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체격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체력은 밑바닥이었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해 초등학생 1,700명을 대상으로 윗몸일으키기, 오래달리기 등으로 어린이 체력을 측정한 결과 1등급을 받은 어린이는 단 1%(17명)에 그쳤다. 게다가 체력뿐 아니라 건강도 매우 나빠졌다. 우리나라 소아의 비만율은 1970년대 후반 4% 수준이었지만 2005년 10.2%로 늘었다. 초등학생의 비만율도 1998년 12.1%에서 2005년에는 18.3%에 이르렀다. 실내에서만 생활하면서 면역력도 약해져 천식 등의 질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학생들의 시력도 갈수록 나빠져 고도 근시가 있는 학생이 점점 늘고 있다. 학생의 본분은 대학 진학을 위한 점수를 획득하는 공부가 아니라 인성교육과 더불어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과열된 교육열에 발맞추어 하나의 평가 요소로 예체능 교육이 편입될 때 더 많은 사교육을 불러들일 게 뻔한 현실에서 조금 더 진지하고 과학적인 교육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학생의 다양한 욕구와 관심을 충족시켜줄 단계적이 체계적인 커리큘럼 개발에 힘써야 하며 이는 자연스레 과열된 입시 경쟁에서 고통 받는 학생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선물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입시제도가 무분별하게 난립하는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일관성의 부재이자 교육 철학의 실종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 (百年之大計)’란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십년지대계 (十年之大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우리나라의 교육정책과 입시 제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정권이 바뀔 때는 물론 이거니와 교육 담당 부서인 교육인적자원부의 수장이 교체될 때마다 바뀌며 수험생과 수험생 가족, 나아가 사회 전체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뿌리 깊은 교육 철학이나 제도의 깊이가 없이 그저 국민의 눈치만 살피며 우왕좌왕하는 제도의 일관되지 못한 난립 속에서 결국 고통 받는 이는 수험생이다. 실제 2008년 수능 총점 대신 계열별 백분위에 따라 9등급으로 정하는 등급제 시행 1년 만에 반발이 거세지자 다시 표준점수까지 공개하는 식으로 태도를 바꾼 줏대 없는 수능 제도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게다가 그것이 수험생을 위한 길이 아니라 기타 사교육 기관이나 이해 타산적인 경제적 구조에 발맞춘 변화라면 비판을 넘어 비난을 받을 만한 사항이다.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개념 있는 교육 정책을 연구하여 가뜩이나 가장 힘겨운 시기에 고통 받는 수험생에게 진정한 의미의 가르침을 주는 것은 정부 기관의 몫이다. 부디 자신의 본분에 걸맞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본에 충실한 정책을 기대한다.

 

책을 읽으며 부패하고 꼼수에 능한 입시 공부가 조선 시대 과거 공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문화란 점에 회의감이 들고 허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과거에 당당히 맞서는 것이 한계 극복의 첫걸음이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어린 비판 속에서 우리 교육 제도는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바뀌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차곡차곡 진행되어 점수에 매달리며 스트레스받는 학생보다 즐거운 청춘을 만끽하는 풋풋한 학생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천연자원과 인구도 부족한 조그만 동방의 한 나라가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아시아의 강호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인적 자원‘의 힘이었다. 눈부신 성공의 뒷면에는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끈기와 열정이 있었고 교육으로 가정과 사회와 세계를 바꾸어 나가리라는 교육열의 긍정적인 측면도 큰 역할을 했다. 우리의 넘치는 교육열을 좀 더 창의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어 간다면 더 밝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상록수』의 영신이 칠판에 꾹꾹 눌러 적자 담 밖에 아이들도 훌쩍거리며 하나가 되어 외치지 않았는가?

 

“누구든지 학교로 오너라.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흔들리고 위태로워도 결국 교육만이 희망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 통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누구나 응당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사회를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해야 한다. 또 우리 아이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웃음을 위해서 힘차게 달리며 가르침을 이어나가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가장 효율적인 투자이자 사회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 온 나라 자제들이 초집만을 과거공부의 좋은 수단으로 여겨 책자로 만드는 경박한 풍습이 굳어져 비록 금지하는 법이 있어도 이제는 막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6월 기미)



따라서 시험은 공정해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과거제도가 지금의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를 수용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삶의 조건이 유사하다면 시대의 신,구와 상관없이 그 시대들이 요구하는 시험의 요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혹시 우리나라 사회가 외국처럼 학력(학벌)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우리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입시의 덕목은 바로 공정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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