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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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가 판치는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정의에 대한 갈망은 어찌 보면 인간의 당연한 욕구일지 모른다. 2011년 출판계를 뜨겁게 달군 마이클 샌델의 정의관은 하버드 명강의 'Justice' 열풍과 맞물려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트롤리 딜레마, 대리모와 인공수정처럼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다양한 사례를 중심으로 독자의 선택을 요구하는 책은 일단 매우 흥미롭다. 자유롭게 토론과 논증을 유도하는 명석한 샌델 교수는 누구나 생각하는 학문의 전당, 대학에서 펼쳐지는 지적인 싸움에 불을 지피는 역할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나가면서 독자는 묘한 의문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도대체 정의가 뭔데? 책의 2/3를 넘게 읽어도 두 입장(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에 샌델은 신랄한 비판을 가하며 허점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하지만 책 제목처럼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 '정의'에 대한 '정의'를 알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9, 10장에 되어서야 드디어 논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척' 하던 마이클 샌델이 본심을 드러낸다. 그는 인간은 정치적 덕목을 지니며 시민으로서의 덕이 사회정의의 초석이라는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등에 업고 덕 윤리를 주장한다. 무작정 자신의 논리를 펴지 않고 상대 측의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그는 덕 윤리를 설명한다. 일단 샌델은 정의에 접근하는 세 가지 덕목으로 복지(welfare), 자유(freedom), 덕(virtue)을 꼽는다. 벤담, 밀이 주장하는 공리주의와 노직이 주장하는 최소국가, 자유지상주의를 사례를 통해 언급하지만, 이는 모두 자신의 정치 철학, 윤리학의 장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특히 칸트의 무연고적 자아를 이어받은 롤즈의 무지의 베일 개념 역시 마이클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참여 공화주의 개념을 들어 강력하게 비판한다.

 

사실 샌델의 논리대로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의 주장에 쉽게 동의하게 된다. 왜냐하면, 감정적으로 쉽게 끌리기 때문이다. 개인, 자유, 자율을 중시하는 고립된 자아(Independent self) 개념을 이어받아 사회 정의를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실현한다는 롤즈의 입장은 언뜻 보면 샌델에 비해 비인간적으로 비추어지기 쉽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투정이 솟아난다고 할까? 위안부 문제나 희생자 처벌,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도 'Collective Responsibility'. 즉 자칫 후손이 책임져야 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반면 샌델은 8장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언급하며 이야기(narrative), 태생적인 요소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도덕, 윤리, 법, 정의의 동일화가 이루어지며 정치 연합체, 연대(solidarity)의 중요성을 거듭 언급한다. 그렇다면 샌델이 바라보는 정의란 대체 무엇인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Egalitarian liberals),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Libertarians)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도덕적, 종교적 논란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고 도덕적 책임을 개인적 자유와 연결한다. 반면 샌델은 이러한 자유의 개념은 틀렸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자아는 오직 속한 사회, 국가, 민족, 세계 속에서 Identity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자연스레 우리는 연대에 의한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매킨타이어가 제시한 '공동체의 이야기에 묻혀 있는 내 인생의 이야기'와 흐름을 같이 하는 샌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도덕과 정치의 합일"을 이루어 공화주의 정신에 대한 향수를 잃어가는 미국의 재건이다. 다시 말해 패기 넘치는 젊은 철학자는 "정치가 도덕 실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빌려 와 자신의 스승 롤즈가 주장한 "국가는 도덕적 중립"이라는 의견에 반기를 제대로 든 것이다.

 

하지만 중립성에 대한 샌델의 입장이 과연 정답일까? 나는 일정 부분 그의 입장을 수긍하지만 공동체 주의가 가진 위험성 역시 높다고 본다. 일단 공동체 속의 자아는 인정하고 토론의 중요성엔 매우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개인에 우선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즉 자아를 가진 인간들은 현대에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자원의 희소성과 욕망의 유사성이 묘하게 맞물려 개인은 타인과 부딪치기 마련이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 감정적 끌림과 냉철한 이성이다. 감성과 이성의 조화가 보장되고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해도 타인과 합의가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까다롭고 예민한 생명 윤리, 개인의 자유, 존엄성이 얽힌 다양한 문제가 과연 하나로 정답을 내릴 수 있을까?

 

물론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이상적이고 따뜻하지만, 상황에 따라 너무나 주관적이고 일관되지 못하고 덕끼리 충돌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가정을 지키는 아빠 윤씨. 직장에 출근하는 대리 윤씨. 아빠라면 당연히 일찍 집에 들어와 아이와 놀아주며 가정의 평화를 지킬 덕이 있다. 반면 동시에 회사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며 기업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야근을 해야 하는 덕이 있다. 과연 둘 중 어느 덕이 더 고차원적이고 훌륭한 특성을 지닌다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개인의 역할이 충돌할 때 공동체 주의는 아무런 대답도 내릴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내린 대답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좋음'이 항상 '옳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토론으로 합의된 덕도 부정의하고 오히려 공리주의적일 수도 있다. 나치 시대의 광적인 폭력성은 그 당시에는 올바른 덕이었고 정답이었지 않은가? 도덕적 문제에 정치가 개입하며 법률로 정하는 순간 '관용'이 아닌 '불법'의 영역으로 많은 부분이 넘어갈 것이고, 자연스레 운이 좋으면 일부, 혹은 최악에는 다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사회 유지와 개인의 존엄성 보호를 위해 법이 존재하는 것인데 오히려 역설적으로 법이 본질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 샌델이 가진 맹점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집단을 추구하며 개인의 정체성이 상실된 한국에서는 더 적용하기 어려운 논리라고도 볼 수 있다. 이미 우리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암묵적인 희생을 '덕'이라는 이름 아래 강요받아오지 않았는가? 정치는 기회의 평등을 교육, 보건과 같은 최소한의 영역에서 보장하고 건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선에서 손을 떼는 것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사적 합리성과 공적 합리성이 똑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기에 '정의'에 목마른 한국인이 특히 '정의'에 대한 대답을 궁금해하며 샌델의 날카로운, 그러나 따뜻한 포옹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을 보며 건전한 토론의 장이 다시 주목받고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발생하는 현상은 역시 '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정의는 무엇인지 몰라도 부정의는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한국인. 정의가 승리하는 날을 위해 투표하고 토론하자.

도덕적 이견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상호 존중의 토대를 악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킬 수 있다. 우린, 동료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어려운 도덕 질문을 공개적으로 고민한다고 해서 어느 상황에서든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거나, 심지어 타인의 도덕적, 종교적 견해를 평가할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도덕적, 종교적 교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것이 더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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