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공중부양 - 이외수가 처음으로 공개하는 실전적 문장비법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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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빠진 글쓰기 관련 책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떡하니 표지에 드러내 특별함을 첨가한 이외수. 그의 외모 때문인지 재기 발랄한 필력 때문인지 무언가에 홀린 듯 이 책을 집어들게 되더군요. 시집, 산문집, 소설, 우화에 이어 트위터와 블로그를 넘나들며 폭풍처럼 글을 토해내는 작가의 비밀이 담긴 '비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글을 잘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천재성을 가진 작가의 표현과 통통 튀는 발상을 부러워하며 언제나 닮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누구는 날 때부터 펜을 잡고 글을 쓰며 나왔고 누구는 술만 마시고 발로 끼적거려도 명문이 술술 이어지겠습니까? 기인 이외수는 차분하고 진솔하게 '좋은 글'은 철저히 연습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무림 최고수의 필살기가 담겨있을 비기서 치고는 조금은 속은 것같고 김이 빠지긴 합니다. 매력적인 글의 실타래를 여유롭게 풀어낼 한 방이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취권>의 사부가 지독하게 청소와 빨래를 시켰듯이 자질구레한 숙제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모든 분야의 고수가 그리도 강조하는 것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기본기'인 것을 떠올려 본다면 이외수의 가르침 역시 당연한 이야기 같네요. 단어의 장, 문장의 장, 창작의 장, 명상의 장. 이렇게 네 가지 분야로 나누어 이외수는 차근차근 실전 글쓰기를 완성하는 자신의 경험과 비법을 전수해줍니다. 단어를 열거하고 사물의 속성을 알아맞히기, 감각으로 얻을 수 있는 살아 있는 단어 채집하기, 한 단어로 느낌 표현하기, 국어사전식이 아닌 감성사전식 반대말 찾기 등 깨알 같은 허드렛일이 많습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간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내 안의 글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자라고 있겠죠?

 

비기를 모두 읽은 제자에게 이외수는 마지막 과제를 전해줍니다.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던지겠다. 만약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그는 시덥지 않게 스피노자 뒤꽁무니를 따라 사과나무나 심겠다고 할 불량 제자를 향해 일침을 가하며 색다르고 자신만의 향기가 나는 글을 주문합니다. 이 글을 쓰고 나서도 아마 저는 여전히 구태의연하고 심하게 재미없는 글을 완성하고 잘해야 C+을 맞고 재수강을 면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학생일 겁니다. 그래도 초조해하거나 답답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이를 먹고 글쓰기 노트가 빼곡해질수록 언젠가는 반짝 튀는 글을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레 토해낼 거라 믿기 때문이죠. 토할 때까지 글을 토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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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임마."

17세기 합리론의 대표적인 철학자 스피노자가 2011년 한국에서 환생한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라고 욕지거리를 들었을 거다. 그가 대체 무엇을 꿈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랑 2만 원 짜리 묘목 한 그루를 심는 게 도도한 네덜란드 철학자의 코나투스는 아니었겠지. 아쉽게도 우리나라 땅덩어리는 심하게 좁아서 사과나무 수백 그루를 심을 공간이면 닭장 같은 아파트를 빽빽하게 지어 올리는 게 훨씬 더 옳고 이성적인 판단일 것이다. 요새 잘 나가는 경영학, 경제학적으로 생각해봐도 투자 대비 효용이 최소인데다가 이 정도면 D+ 학점을 줘도 교수님께 고맙다고 배꼽 인사를 올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하이델베르크 교수직을 철학의 자유를 지킨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이 소리를 전국 수천 명의 시간강사가 들으면 욕지거리에서 그칠 게 아니라 돌을 던지고 난리가 났을 거다. '유전교수 무전강사' 시대에 무슨 배부른 소리에 사과나무 타령이란 말인가.

 

하지만 올곳은 철학과 학부생인 나는 그를 맹목적으로 믿었다. 철학과 학생에게 있어 거친 역사 속에 끈질기게 살아남아 자신의 목소리를 한 마디로 남긴 스피노자는 절대자였다. 동네 철학관 김씨가 남긴 주옥같은 작업멘트들은 나 혼자서 기억할 뿐 아무도 모르지 아니한가? 수많은 후배 철학자들이 그를 까고 허점을 공략하지만, 그저 쌍방향이 아닌 일방적으로 수용하며 외워서 글을 써내려가는 철학'과' 학생인 나에게는 스피노자는 티 없는 국민 남동생, 아니 국민 철학자였다. 분명히 스피노자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1%의 무언가를 알고 자신 있게 헛소리가 아닌 헛소리를 외친 거라 믿었다. 아니 사실은 기계적으로 이기호발설이니 기발이승설, 사단칠정을 달달 지지고 볶으며 외운 내가. 대한민국 교과 과정을 한치의 의심 없이 순종적으로 받아들인 내가. 생각했을 때는......... 분명히 정답이다. 정답이 아니라면 날카로운 교과서 편집 위원의 그물망에 오류가 걸렸을 것이다. 그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기하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세계관에 있어서는 무신론적 성향이 강한 일원론적 범신론자였다. 독일 관념론에 큰 영향을 끼쳤고, 계몽주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라고 나는 기억했고 내 기억은 정확했다.

 

내 통장에는 달랑 29만 원이 있었고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장남인 나는 딱히 심을 만한 곳이 없었다. 게다가 문어 대가리 형상을 한 누구는 29만 원만 가지고도 평생 호화롭고 여유롭게 살지만, 학생인 나는 29만 원으로 사과나무 묘목을 살 수 없었다. 다행히 SNS 시대의 홍수에 살며시 발을 담그며 복분자 묘목을 1주당 300원에 팔며, 최소 500주를 사야 한다는 검색 결과를 얻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스피노자도 복분자가 없어서 그렇지 아마 사과와 둘 중 고르라면 분명히 복분자를 골랐을 거야. 복분자는 남자에게 최고니깐 말이야.' 그렇다고 하자며 자위하는 나는 며칠을 기다렸다. 지구 종말이 온다는 디데이가 하루하루 다가오는 동안 남은 14만 원으로 PC방과 플스방, 당구장을 전전하며 바퀴벌레같이 버텼다. 왜냐고? 나는 스피노자를 믿으니깐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줄 거라 믿은 건....아니고 그게 제일 싸게 먹히는 생존방법이었으니까 말이다.

 

복분자 묘목이 드디어 도착했다. 집 앞 화단에 심어볼까 했지만, 유모차에 쓰레기를 담아 유유히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눈초리가 매섭다. 멀쩡히 생긴 20대 청년이 삽을 들고 츄리닝 바람으로 떡하니 서 있으니 수상할 수밖에. 할 수 없이 건널목을 건너 공원으로 가서 에라 모르겠다 한 삽을 푸는 순간! 경비원 아저씨가 미쳤느냐며 고함을 빽하니 지른다.

"아저씨.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열심히 근무하세요? 그냥 쉬세요."

나름대로 설득을 한다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한 건데 아저씨는 더 성을 내며 멱살을 잡아 비튼다.

"내가 얼마나 오래 쉬었는데! 이 새끼야. 죽을 때까지 일할 거야!"

아차 싶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번듯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직장에서 쫓겨난 듯한 그를 오히려 자극한 것이다. 태생적으로 맞는 걸 싫어하고 눈치가 빠른 나는 적당히 담배 한 대를 물려들이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다행이다.

 

결국, 결심했다. 버려진 마늘밭이 보였다. 아마 신 나게 놀러다니며 지구 최후의 날을 맞이하려고 밭 주인은 여행을 떠났나 보다. 여기다 나는 거룩한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그 뜻을 이어나가리라. 얼마나 팠을까? 까만 피부는 이제 빨갛게 익어갔고 준비해온 비루한 복분자인지 블루베리인지 모를 묘목을 가지런히 심으려는 순간! 웃고 있었다. 내가 미친 것인지 더위를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웃고 있었다. 5만원 짜리 지폐에 웃고 있는 신사임당께서 구찌 선글라스에 샤넬 귀걸이를 치렁치렁 걸치고 계신 듯했다. 교과서에는 실려 있지 않은 스피노자의 비화가 떠올랐다. 꾸벅꾸벅 졸면서 들었던 윤리 인강에서 아마 윤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선생은 이야기했지. 스피노자는 당시 유럽의 신기술인 안경을 다루는 기술자였다고! 고고하고 도도한 척해도 스피노자는 철학자이기 이전에 돈을 좇아 인생을 살아가는 그저 인간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다발은 셀 수가 없었고 흙빛은 이미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함을 지르며 나는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 발광을 했다. 마늘밭에 감사의 키스를 전하며 흙 다발을 움켜쥐고 마치 쇼생크 탈출의 오마주인양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다. 비는 오지 않고 대신 뜨거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점점 다가오는 뜨거운 돌덩이에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고 마늘밭 김 노인은 최후의 만찬을 마무리했다. 그렇다. 스피노자가 개뿔 얼마나 대단한 철학자일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똥을 주었고 나는 죽어서도 스피노자를 잊지 않을 거다. 이래서 네덜란드 사람은 히딩크 빼고는 다 코쟁이 나쁜 놈이라니깐....

 

마늘밭 김 노인은 마지막 폐지를 주워담으며 웃었다.

"이제 다 채웠다. 만 원정도 나오려나?"

진실하게 써라. 글쓰기에는 무엇보다도 진실이 중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재담가라도 자신이 감동받지 않은 소재로 타인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먼저 닫혀 있는 그대의 가슴부터 열어라. 진실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있는 것이다. 감동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머리로 쓰지 말고 가슴으로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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