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8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조현진 옮김 / 책세상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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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ICA> PART ONE ON GOD

◎ 원문 인용구는 기울임 처리를 했습니다.

 

※ 정의(Definitions)

스피노자는 ‘제1부 신에 대하여’를 저술하며 자명하므로 증명할 필요가 없는 정의(definition), 공리(axiom)를 먼저 제시하며 이를 전제로 다양한 주제를 탐구했다. 우선 그는 자기원인, 실체, 속성, 양태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자기원인(cause of itself)은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그것의 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 원인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부정하면 모순이 되는 필연적인 것이다. 만약 존재가 무엇인가에 의존한다면 우연자이고 자기 안에 자기 정당성을 지녔는지에 따라 필연과 우연으로 나뉜다. 그리고 같은 본성을 지닌 다른 것에 의해서 한정될 수 있는 사물은 자신의 종류 안에서 유한하다고 일컬어진다. 물체와 사유 간에는 한계를 가지지 않고 물체는 물체끼리, 사유는 사유끼리 생각할 때 유한자가 가능하다. 즉 동류의 속성이 있으면 제약된다. 둘째로 실체(substance)는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다. 실체는 개념 형성 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자기 원인이며 필연적으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데카르트는 신만이 자기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속성(attribute)은 지성이 실체에 관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고 지각하는 것이며 스피노자에게 인식의 세계는 곧 존재의 세계였다. 즉 지성의 지각은 곧 인간의 정신 능력을 뜻한다. 셋째로 양태(mode)는 실체의 변용으로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다. 양태는 외면적 표현으로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사유 되더라도 다른 것에 의하여 파악 할 수 있다. 존재론, 인식론 적으로 의존적 존재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개체, 모든 것이 양태다. 다시 말해 어떤 것에 자극을 가해 원래 상태와 다르게 실체가 나타나는 것이 양태이며 이러한 속성의 변형태를 지칭한다. 스피노자가 관심을 기울였던 신(God)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absolutely infinite entity)로 자신의 종류 안에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다. 어떤 속성에서건 무한하며 무한에 조건을 걸 수 없다. 그리고 자유롭다는 것(free)은 그에게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자신에 따라서만 행동하게끔 결정되는 것이다. 타자에 의해 제약되지 않고 본성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면 자유롭다는 뜻이며 영원성(eternity) 개념도 중요하다. 영원성을 통하여 존재 자체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한 것을 자기원인자로 보고 영원성은 필연성과 같게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8가지 정의와 더불어 공리(Axioms) 7개도 함께 제시한다. '기하학적 방법으로 증명한 5가지 문제'라는 부제처럼 『에티카』는 기하학의 증명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제, 공리를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증명하며 논리적 정당성을 찾아가는 식이다.

 

※ 공리 (Axioms)

1.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거나 아니면 다른 것 안에 존재한다.

2. 다른 것에 의하여 파악될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에 의하여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3. 주어진 일정한 원인에서 필연적으로 결과가 생긴다. 이와 반대로 일정한 원인이 전혀 주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결과도 생길 수 없다.

4. 결과의 인식(cogito)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며 그것을 포함한다.

5. 서로 아무런 공통된 것도 가지지 않은 것들은 서로 상대편에게 인식될 수 없으며, 또한 한 개념은 다른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6. 참다운 관념은 자신의 대상과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7. 존재하지 않는다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의 본질에는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다.

 

정리1. 실체는 본성상 자신의 변용에 앞선다.

데카르트는 연장적 물체와 사유의 정신이 유한한 실체였지만 스피노자에게는 실체를 일원론적 입장에서, 즉 하나의 신이라는 실체만 인정하다.

 

정리2. 서로 다른 속성을 소유하는 두 실체는 서로 간에 공통되는 어떤 것도 갖지 않는다.

실체의 정의3을 따르면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므로 다른 실체와 공통성을 갖게 될 수 없다.

 

정리3. 서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사물들은 그것 중 하나가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인식의 경우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만약 공통점이 없다면 원인과 결과는 성립하지 않는다.

 

정리4. 서로 다른 둘 또는 다수의 사물은 실체의 여러 가지 속성에 의하여 또는 실체의 여러 가지 변용에 의하여 구분된다.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있거나 의존해 있다. 즉 인간의 분별력으로만 실체와 그에 따른 변용을 구분할 수 있다.

 

정리5. 사물의 본성 안에는 동일한 본성이나 속성을 가지는 둘 또는 다수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

실체가 하나라면 속성, 양태로 구분된다. 그리고 정리4에 따라 실체가 속성의 차이로 구분된다면 하나의 실체만 존재할 것이다. 만약 속성이 같은 것이 하나라면 양태, 변용에 의해 구분될 수 있다. 이를 구분하는 주체는 지성이며 동일한 속성을 가지는 실체는 오직 하나만 존재 가능하다. 실체는 그 밖의 무엇인가에 의해 산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리6.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에서 산출될 수 없다.

똑같은 속성을 가지는 두 실체가 존재할 수 없고, 공통되는 것을 가지는 두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실체가 다른 것에 의하여 이해되면 그것 역시 실체의 정의에 어긋난다.

 

정리7. 실체의 본성에는 존재가 속한다.

실체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산출될 수 없으므로 자기 원인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존재를 포함하며 그 자체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정리8.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실체가 만약 유한하다면 같은 본성을 지닌 다른 실체에 의해 제약될 것이므로 실체는 무한할 수밖에 없다. 유한하다는 것은 어떤 본성의 존재의 부분적 부정이고 무한하다는 것은 절대적 긍정이다. 그러므로 실체의 본성에는 존재가 속한다는 정리7에 따라 모든 실체는 무한하다. 한편 나무나 사람 모두 실체로 보면 다들 자기 존재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실체의 본성에 주목한다면 공리를 도출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참된 관념에는 신의 존재가 내재하고 있다. 실체의 존재는 본질과 더불어 영원한 진리다. 인간의 존재는 우연적인 요소이며 감각의 불완전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 부분적으로 신의 속성, 제1 속성은 연장을 기반으로 설명하며 이는 당대 자연 과학적 논의를 수용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근대가 꿈꾼 기계론적 세계관, 결정론에 따르며 뒤에서 논의되지만 자기 보존 욕구에 도움되는 것이 선이며 반대가 악이라고 본 가치 주관주의자다.

 

정리9. 각각의 사물이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유를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속성이 그 사물에 귀속된다.

 

정리10. 실체의 각 속성은 그 자체를 통해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속성은 사유와 연장, 그 밖에 우리가 아는 것들이다. 더 많은 실재성을 지닌다는 것은 독자적 존재성이 높다는 것, 즉 존재하는데 다른 것에 덜 의존한다는 의미다. 물론 더 많은 속성을 지닌다고 더 많이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다. 내가 과제를 하는데 사용하는 노트북과 연필을 비교해도 이는 명백하다. 역으로 보다 많은 속성을 가지면 보다 많은 실재성을 가진다는 것 또한 성립한다. 한편 우리는 연장을 아무리 분석해도 사유를 알지 못한다. 속성은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체는 속성들의 집합이므로 속성에 의해서만 파악 가능하다. 그러나 속성은 자기원인자가 아니며 자기원인자인 실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속성 하나가 빠지면 실재성이 예전보다 떨어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존재, 있음'은 존재를 채우는 여러 가지로 구성되며 개별적인 낱낱의 양태로 구성되므로 석송을 빼버리면 순간 실체는 사라진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색, 크기, 특징 등 속성을 모두 제거해도 '질료 남는다.'고 생각했다. 실체가 속성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고 속성들의 구성체가 실체라고 스피노자는 파악했다. 완전성의 등급에 따라 존재성도 달라지며 존재 그 자체 정도가 실체라고 이해했다.

 

정리11. 신 또는 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신은 실체이므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모든 사물에는 존재하는 이유,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내부, 외부적으로 다 있는데 신도 마찬가지다. 무한하고 절대적인 실체이므로 실체의 원인이 밖에 있을 수 없으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내부, 외부적으로 모두 불가능하다. 만약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에 의존하고 구성된다면 이는 논리적 모순이므로 보다 큰 실재성, 독립성을 가지면 힘을 더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힘이 있다는 것은 실재, 역능, 역량, 완전성이 있다는 것과 동일하며 무한한 존재의 능력을 자신 안에 가지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 reason/ cause 구분

cause : 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4원인 언급 당시 등장한 것으로 사물을 구성하는 원리적 요소다. 행위의 원인으로 물리적 작용,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지닌다.

reason : 이유, 주장을 뒷받침하는 명제, 근거, 논거, 판단으로 결론에 대한 논리적 특징을 지닌다.

예를 들어 "돌로 유리를 깼다."라는 진술에 원인은 돌을 던진 것이고, 이유는 깨지는 강도의 유리라서 그런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 둘을 의도적으로 혼동하며 기계론, 인과적 세계관을 취했다. 논리적 관계로 사건을 바라보고 자연에 우연이 없다고 보았지만 흄은 인과관계는 경험적이며 제한적이라 논리적 확증, 필연적 예측이 어렵다고 보았다.)

선천적(a priori)인 것은 원인에서 결과를 찾아 나가는 과정이고, 후천적(a posteriori)은 결과에서 원인으로 향하는 소급적 과정이다. '우리는 존재한다.'에서 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스피노자의 논의 방식은 후자라고 볼 수 있다.

 

정리14.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파악될 수도 없다.

신이 가진 속성으로 다른 것이 존재 가능한 것이다. 연장된 사물, 사유하는 사물 역시 신의 속성 혹은 속성의 변용이며 대응의 관계다.

 

정리1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도 또 파악될 수도 없다.

신은 무한하다는 사실에 포함되는 내용으로 연장 그 자체는 쪼갤 수 없고 무한하고 영원하므로 이는 당연히 신의 속성에 귀속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리16. 신성한 본성의 필연성에서 무한한 것이 무한한 방식으로 (곧 무한한 지성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은 무한한 속성을 지닌 무한한 존재이다. 무한한 사물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무한한 방식으로 따라나온다. 스피노자는 본성과 관계없이 생산되는 (중세적 표현을 빌리면) 우연적 방식을 언급하며 (예를 들면 개가 괴물을 낳으면 우연적이라고 볼 수 있다.) final cause, 목적인을 신에 적용하기를 거부했다. 신은 자기 원인자이며 절대적인 제1원인이고 모든 사물의 작용인이라고 인식했다.

 

정리17. 신은 오로지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의거해서만 활동하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강요받아 활동하지 않는다.

신은 외부에 강제하는 제3의 존재, 타자가 있을 수 없으며 내적 필연성에 따라 행동한다. 스피노자는 '목적인으로 더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거부하며 모두 기계적, 물리적인 원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행동을 기초로 자연을 파악하는 이러한 사유는 자연을 철저히 기계적 구조로 파악한다. 그는 자유의지, 목적이 철저한 착각이라고 생각했고 신은 의지의 자율이 아니라 신은 자유롭다고 보았다. 타자에 의해서 강요받지는 않지만, 본성에 따른다는 점에서 결정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자유롭다'와 '결정되어있다'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신의 행동이며 다양하게 내적 필연성에 따라 발현되는 것이다. 인간을 자연 속의 한 부품으로 본 스피노자는 다른 존재, 자연 산물과 동일하게 이를 인식했고 (perfection이란 어휘로 정도의 차이는 드러냈지만) 층계를 나누지는 않았다. 한편 신은 할 수 있었고 안할 수도 있었던 자유로운 행위 주체이다. 신도 모순을 일으킬 수 있고 신은 이러한 방식으로밖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생겨날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진정한 전능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다 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심지어 신까지 포함해 거부할 수 없는 필연성으로 끌어들였고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은 전능한 신이며 모든 것은 신의 표현이자, 신에 속한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역사의 의미는 희미해질 수 있다. 신은 인과적으로 앞서고, 사물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 지성은 사물 전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신의 지성 속에 인과적, 논리적인 것이 선행한다. 즉 신에게 설령 지성, 의지가 있더라도 인간의 것과 이름만 유사할 뿐 다른 것이다. 인간은 본질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신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의 원인이라면 신의 본질은 인간의 것과 분명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정리18.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은 아니다.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의 내재적 원인이지만, 신 외부에는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초월적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인간에 비추어 세계를 바라보며 목적인을 거부했다. 자연 사건은 논리적, 인과적 필연일 뿐이고 우연적, 임의적 사건은 착각일 뿐이다. 신의 본성의 결과를 모든 것을 바라보는 논의 속에서 그 당시 과학자 대부분은 수학으로 우주의 비밀을 모두 밝힐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부록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물이 그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떤 목적을 위하여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더욱이 그들은 신이 모든 것을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이끈다고 확신한다.

스피노자는 원인에 대한 원인을 끊임없이 묻고 최종적으로 신의 존재를 끌어들였다. 인간의 정밀한 신체 구조도 신의 설계라고 판단했고 세상에 목적적인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착각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책임, 칭찬, 비난, 악행도 생겨났고 그에 따른 도덕적 평가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모든 대상의 운동이 건강, 즉 나의 완전성 보존에 도움, 쾌감을 주는 것에 유용하면 아름답다고 판단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주체의 자기 보존 욕구, 코나투스로 설명되는데 이는 다른 장에서 논의한다. 의견의 불일치, 회의, 상대성은 지성적이 아니라 감각적 표상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완전한 본성에서 나온 것이 불완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감각적 특성에 따른 반론이고 사물은 본성과 힘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불완전한 것은 인간의 기준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고, 신에게는 완전성의 최고에서 최저까지 모든 것을 창조할 재료가 있었기에 신의 본성의 법칙은 풍부하고, 무한 지성이 무한하고 가능한 모든 것을 탄생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스피노자는 모든 사물이 신에 의해서, 그리고 신과 연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한히 많은 신의 속성 중 우리는 ‘사유’와 ‘연장’만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이는 자기원인이자 실체인 신의 속성일 뿐이고, 모든 일은 절대적이고 논리적으로 일어난다. 즉 자유의지, 우연성을 거부하는 사유를 기반으로 신의 존재를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증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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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서설 -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 / 문예출판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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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문 인용 ○ : 요약 및 해설 ☞ : 개인적 의견

<DISCOURSE ON THE METHOD FOR CONDUCTING ONE'S REASON WELL AND FOR SEEKING THE TRUTH IN THE SCIENCES > PART FOUR

 

◉ “I reject as absolutely false everything in which I could imagine the least doubt, in order to see whether, after this process, something in my beliefs remained that was entirely indubitable.”

○ 중세적 질서가 지배하던 사회 속에서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오로지 진리추구에 전념하려고 확실한 것을 불확실하게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다 의심해보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그는 감각, 기하학, 깨어 있을 때 가지는 모든 생각도 거짓이라고 가정한다.

☞ 엄격하고 논리적인 사유를 통해 뿌리깊이 박혀 있는 기존 통념을 끝까지 회의한 데카르트는 중세와 근대를 연결 고리 역할을 정확하게 했다. 중세에 통용되는 진리에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기존 관습을 해체하고 새로운 판을 짠 그의 업적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 "And noticing that this truth - I think, therefore, I am - was so firm and so assured that all the most extravagant suppositions of the skeptics were incapable of shaking it, I judged that I could accept it without scruple as the first principle of the philosophy I was seeking."

○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해도 그러한 동안에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무엇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I think, therefore, I am)>라는 진리를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인다. <I think, therefore, I am>은 추론의 형식이지만 추론이 아닌 직관적 연결이다. 여기서는 영혼이 본질인 지금의 나까지만 논의를 한정하며 ‘생각하는 동안만 단속적인 나’까지만 언급한다.

☞ “나는 생각한 곳에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못한다.”라는 라캉의 말이 떠올랐다. 과연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과 존재가 단순 도식화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존재하는 ‘현실’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고 그렇기에 고통과 슬픔을 느낀다. 문득 내가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해보았다.

 

◉ It thus remained that this idea had been placed in me by a nature truly more perfect than I was and that it even had within itself all the perfections of which I could have any idea, that is to say, to explain myself in a single word, that it was God.

○ 인간 존재는 완전한 것이 아니므로(=‘무’를 분유하고 있으므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완전성에 대한 관념, 이를 갖고자 하는 욕망의 본능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탐구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해답으로 신을 끌어들인다. (이는 단지 기독교 신일 필요는 없고 합리적인 하나의 인격적 실체다.) 즉 내가 부분적으로 가지는 완전성의 원인자, 내가 가진 완전성이란 관념의 원인자는 신이다. 신은 지성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의 합성물이 아닌 전지전능하며 완벽한 지성적 존재다. 그리고 신은 명석 판명한 보증자로서 선하다.

☞ 전지전능하며 선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중세시대는 억압과 폭력이 가득한 시대였을까? 아마 신의 말을 멋대로 해석한 인간의 그릇된 신앙과 이기적인 믿음 때문에 중세는 ‘암흑시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 존재, 혹은 신 존재에 대한 관념이 오히려 그들에게 매력적인 변명거리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타인을 악으로 배제하고 자신만이 선한 신의 일부를 분유하였다고 맹신했기 때문에 비상식적 폭력을 합리화할 수 있었다.

 

◉ "I do not believe they can give any reason sufficient to remove this doubt, unless they presuppose the existence of God. For first of all, even what I have already taken for a rule, namely that the things we very clearly and very distinctly conceive are all true, is assured only for the reason that God is or exists, and that he is a perfect being, and that all that is in us comes from him."

○ 꿈과 현실을 구별하고 명증성을 획득하려면 신의 존재를 상정해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있다’에서 명석 판명한 일반 규칙을 도출했고 이러한 규칙도 결국 신에 의해 논증되었다. 이는 인간의 자기성을 넘어서기 위해 인간 외부를 끌어들였으므로 신에 갇혀있다는 근대철학 전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 데카르트는 결국 신을 끌어들였지만, 중세시대 철학자와는 구별되는 지점이 더 크다고 본다. 신의 존재와 우월성, 완전성은 인정했지만, 인식 자체에서 근대 철학의 주체를 인간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전후 관계는 차치하고 신도 결국 인간의 이성을 통해 생각하고 추론했기 때문이다. (이성과 추론 모두 ‘reason’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점에서 신선했다.) 한편 명석 판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심리적이라 모호한 면이 있으므로 오류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는 회의도 들었다.

 

◉ “For finally, whether awake or asleep, we should never allow ourselves to be persuaded except by the evidence of our reason. And it is to be observed that I say "of our reason," and not "of our imagination" or "of our sense.""

○ 꿈이 생생하긴 하지만 감각은 그 자체로 불확실하다. 꿈이든 아니든 이성의 명증성에 따른 ‘명석 판명함’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상상, 감각에서 오는 정보는 완전한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오직 이성만이 그 자체로 참이라고 보증될 수 있다.

☞ 데카르트는 이성은 참,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으로 대다수 인간이 천부적으로 갖춘 양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성을 가진 모든 인간이 하나의 물음에 똑같은 답을 내릴 수 없다고 본다. 자신이 자라온 환경, 사회 문화적 시공간, 개인적 경험, 신념에 따라 진리에 대한 견해는 달라질 것이다. 비합리성의 대표적인 사례인 나치즘도 그 당시 독일인이 따르는 하나의 진리, 이성적 판단으로 통용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데카르는 모든 것을 회의하는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지녔지만 ‘이성’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주의로 일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 “But it does dictate to us that all our ideas or notions must have some foundation of truth, for it would not be possible that God, who is all-perfect and all-truthful, would have put them in us without that.”

○ 데카르트는 내 밖이 아닌 철저하게 내면에 집중했고 사유하는 나(I) 자체에 주목했다. 그리고 내 안의 사건과 바깥 사건을 보증하기 위해 신(God)을 상정했다는 점에서 경험론자와 대비된다. 그리고 그는 근대 인간, 평등의 인간만 남기고 백지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즉 인간을 ‘사유’라는 개념으로 평준화시켜버린 것이다.

☞ 물론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해답은 아니지만, 신의 은총에서 ‘사유’라는 동등한 판단 기준으로 중심 추를 옮긴 데카르트의 사유에 공감했다. 이는 네덜란드라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집필을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중세의 흔적을 재정비하고 근대의 시작을 알린 그의 이성에 대한 믿음은 충분히 존재 가치를 지닌다고 본다.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 IN WHICH THE EXISTENCE OF GOD AND THE DISTINCTION BETWEEN THE SOUL AND THE BODY ARE DEMONSTRATED> MEDITATION THREE : Concerning God, That He Exists

 

◉ "I am a thing that thinks, that is to say, a thing that doubts, affirms, denies, understands a few things, is ignorant of many things, wills, refrains from willing, and also imagines and senses."

○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시작하여 <성찰>에 이르러 방법론적 회의를 더 세밀하게 밀고나가며 '코기토' 개념을 정당화시키려했다. 감각, 상상은 무론 수학적 진리 등 거의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사유 주체로서 '코기토'는 물론 현존하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도 등장한다.

☞ 근원적 실체인 신의 존재는 언제나 절대적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신'은 지금의 '신'보다 더욱 절대적이고 영원불멸한 존재였을 텐데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관념들을 여러 가지로 나누며 명석 판명한 판단 기준을 마련했다. 그리고 하나님마저도 기만자일 수 있는지 없는지 검토해보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 신선했다. 그리고 그 출발이 앞서 인간을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만든 상태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Now the principal and most frequent error to be found in judgments consists in the fact that I judge that the ideas which are in me are similar to or in conformity with certain things outside me”

○ 자체로는 옳지만 의지, 감정과는 달리 판단은 주의를 요구한다. 참된 판단은 나의 지각 능력의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은 1차적으로 신체적 영역이므로 세상 외부의 질서를 완전하게 설명 불가능하다. 물체와 내가 공유하는 성질인 제1성질, 물체의 변동하는 성질인 제2성질 구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사성을 가지는 ‘판단’을 내릴 때 오류가 등장할 수 있다.

☞ 인간이 판단을 내릴 때 신중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인간의 판단은 성급하며 타인의 의지, 감정적 끌림에 쉽게 흔들리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이 판단에 있어서 100%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리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주관의 인식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오류는 항상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Among these ideas, some appear to me to be innate, some adventitious, and some produced by me."

○ 관념은 생득적(사물, 사유, 진리가 무엇인지를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 외래적(내 외부에 현존하는 사물로부터 온 것, 열을 느낀다는 것), 인위적(자신이 고안해낸 것, 사이렌, 히포그리프스)으로 구분할 수 있다. 외부에서 받아들인 것은 필연성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즉 기하학 수량화가 가능한 것은 외부에 있지만, 색깔, 소리, 맛 등은 파생적, 2차적 성질로 감각을 거쳐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감각보다 이성을 주요 작업 주체로 끌고 들어왔으며, 이성적으로 명석 판명한 것은 거짓이라 할 수 없다고 보았다.

☞ 관념의 구분에는 동의하지만, 외부 성질을 받아들이는 가교 역할을 하는 감각의 중요성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글 곳곳에 등장하는 이성에 대한 무한한 낙관론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성에 대한 맹신이 계속된다면 ‘신의 섭리’를 ‘이성’이란 이름으로만 대체되었을 뿐 그 역할은 똑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Again, the idea that enables me to understand a supreme deity, eternal, infinite, omniscient, omnipotent, and creator of all things other than himself, clearly has more objective reality within it than do those ideas through which finite substances are displayed."

○ 관념 하나하나는 사물의 대변자로서 표상적 실재성(정신 안에 관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실재성, 관념)을 지닌다. 그렇다면 현상적 실재성(현실속의 사물 개별이 지니고 있는 실재성, 관념의 원인)을 지닌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한편 독자적 실재성에 따라 관념에 위계가 존재한다. 실체는 양태에 우선하며 작용적이고 전체적인 원인 속에는 적어도 그 결과 속에 있는 만큼의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 양태는 실체에 의존해서 존재하므로 독립성이 떨어지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관념은 유한한 실체를 나타내는 관념보다 더 많은 객관적 실재성을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다.

☞ 과연 생각하는 실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1 실체, 즉 존재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 물질은 공간을 점유하는 속성을 가진다. 영혼을 지닌 인간도 어찌 보면 하나의 유기적 물질이고 그러므로 시공간 좌표를 점유하기 위해서 육체가 필요하다. 이는 자연스레 심신이원론의 비판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Thus there remains only the idea of God. I must consider whether there is anything in this idea that could not have originated from me."

○ 지속성, 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고, 연장, 모양, 위치, 운동 같은 성질도 실체의 어떤 양태이므로 실체인 나는 내 우월적으로 내 속에 그들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남는 것은 하나님의 관념뿐이다. 신의 관념은 명석 판명하며 그보다 더 자체적으로 참된 관념은 없다. 신의 표상적 실재성은 비의존적이고 전지전능하며 나 자신을 만들었다. 나는 유한한 실체이며 이는 나 자신에게서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 양태, 실체 구분을 통해 관념들 사이에 위계를 정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자연스레 인간은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신 관념을 끌어들였고 이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쥐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인간 역시 하나님이란 실체에 의존하는 양태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신의 예정된 섭리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라면 결국 신의 뜻이 드러나는 하나의 양태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들었다. 한편 유한한 실체에서 필연적으로 신을 생각해낸 인간의 사고 흐름은 어찌 보면 '유한성'이 가지는 당연한 특성, 절대성, 무한함에 대한 당연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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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오버 하이데거 - 분석적 해석학을 위하여
이승종 지음 / 생각의나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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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지금 이 보고서를 ‘노트북’으로 쓰고 있다. 밀려오는 졸음을 떨쳐내려고 잠시 ‘텔레비전’을 켰다. 하지만 틈틈이 울려대는 카카오톡 소리에 ‘휴대폰’을 손에 쥐고 어느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더 빠른 스마트폰, 더 선명한 TV, 더 넓어진 인터넷. 하지만 과연 나는 과거에 비해 성장했을까? 매일 폭풍처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우리는 서서히, 아니 순식간에 잠식되어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크로스오버 하이데거』속 하이데거는 후설, 비트겐슈타인과 날카로운 논쟁을 펼치며 언어철학, 심리철학, 기술철학, 과학철학, 논리학을 넘나든다. 다소 난해하고 현상학적인 문제의식이 곳곳에서 밝게 빛나고 있지만,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텔레비전, 타자기, 휴대폰이다. 인터넷, 텔레비전의 혁명적인 발전을 보지 못했는데도, 하이데거의 사유를 따라가면 놀라울 정도로 2012년 IT 강국 대한민국의 현실에 들어맞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언어기계가 언어를 관리감독하고, 인간의 본질을 지배한다는 것이 사실이다.”(Heidegger 1957, 36쪽)

 

여기서 ‘언어기계’가 ‘휴대폰, 텔레비전, 컴퓨터’로 대체되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뉴미디어의 발달로 시공간의 거리는 혁신적으로 사라졌다. 클릭 한 번에 수천만 Km 먼 곳에서 벌어지는 말라리아 소식을 전해 듣고, 폭격을 펼치는 미군 조종사의 시점에서 폭탄 투하를 게임처럼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물리적 거리를 제거한 만큼 친밀함이 늘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TV 화면에서 기아에 시달리는 나약한 아이를 바라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지만, 오직 이미지가 방송되는 그 순간뿐이다. 무비판적으로 TV를 멍하니 쳐다보다 브라운관이 꺼지는 순간 다시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옛말이다.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이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란 사실은 몇 달째 방치된 채 서서히 노인의 고독한 죽음으로 알 수 있다.

 

스마트폰이 출시되며 친밀함이 동반되지 않는 거리 없앰은 가속화되었다. 만 10~49세 8.4%가 스마트폰 중독 상태이며 이는 인터넷 중독률(7.7%)을 뛰어넘은 어마어마한 수치다. 페이스북, 카카오톡, 트위터, 블로그. 다양한 모바일 소통의 장이 펼쳐졌지만, 스마트폰 사용자는 오히려 활발한 소통 속에서도 고독함, 외로움을 느낀다. 다른 이들과의 파편적이고 피상적인 소통은 도리어 텅 빈 소통일 뿐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자신의 모습을 애써 위장하고, 진정한 대화 상대자의 부재 속에도 우선은 접촉하고 보는 모습은 하이데거가 주의한 모습과 무척 닮아있다. 무의미한 메시지와 통화가 결코 진정한 자아를 찾는데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사방세계(Four Fold)'를 제시하며 평범하지만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천(天), 지(地), 신(神), 명(命). The Sky, The Earth, The Divinities, The Mortals. 이렇게 4가지 요인은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이며 타인과 사회를 구성하며 철저히 독립적일 수 없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성을 의미한다. 주변의 사물, 우리가 접하는 대중매체도 결국 사방세계로 설명 가능하다. 생각하지 않고 계산하기에 몰두하는 현대인을 비판한 점에서 우리의 모습은 그가 경계한 모습과 무척 닮아있다. 기술의 진보로 거리는 단축되었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는 제자리걸음이거나 오히려 후퇴되었다. 수동적이고 비판 의식 없이 정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깊은 성찰의 시도는커녕 자극적인 접촉에만 중독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의 정신은 인간 본연의 가치를 찾을 실마리를 제공할 한 줄기 희망의 빛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천지신명의 얼이 깃들어있는 사방세계를 날카롭고 비판적으로, 그리고 빛과 어둠 모두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은 인문학적 사고에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가 한 사람의 아이디어나 정책적 처방으로 극복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기술공학적, 실용주의적, 과학주의적 태도일 수 있습니다. 인문학을 위한 해법이 더 반인문학적인 역설적인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곤 합니다. 현사태의 전환을 위해서는 인간의 도움뿐 아니라 천지신명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추락한 자신의 진정성과 본래성을 회복하는 것이 인문학의 과제입니다. 시대가 진정한 인문학에 대해서마저 등을 돌린다면 그것은 인문학자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시대와 야합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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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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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1.1. 연구 배경과 목적, 접근 방식

스타기라에서 기원전 384년에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 머나먼 대한민국 울산에서 1968년 태어난 박민규. 위대한 철학자와 재기 발랄한 작가는 과연 어떤 점이 닮았을까? 두 사람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았다. 이번 쪽글에서는 훌륭한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나름의 기준을 세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행동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박민규의 작품을 비교 분석해본다. 우선 윤리학은 물론 생물학, 생리학, 천문학, 인식론, 형이상학 등 다양한 학문에 두루 관심을 보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중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그리고 <카스테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더블> 등 주로 경쟁 사회 속에서 소외된 이들, 흔히 말하는 ‘루저’에 주목한 박민규의 작품 중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적용해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개념인 ‘실천적 지혜’를 분석하여 ‘미래의 일을 계획 할 때 인간의 의식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1.2. 작품 소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펴낸 윤리학 서적으로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 그를 이루기 위한 인간의 방법을 제시한 서양 윤리학의 최초 서적으로 역사적 의의도 깊다. 원리론(제1권~ 제3권 5장), 덕의 현상론(제3권 6장~제10권)으로 나뉘며 ‘행복’을 향한 깊이 있는 사유가 곳곳에 녹아있다.

한편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제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프로야구 꼴찌팀 ‘삼미슈퍼스타즈’의 원년 팬을 주인공 삼는다. 스포츠라는 소재로 최근 경쟁 사회를 절묘하게 풍자하며 우리가 삶을 살아갈 나침반을 제공하여 대중의 큰 인기를 끌었다. 생생한 1980년대 묘사와 재기발랄한 글 솜씨는 박민규 만의 특색으로 자리 잡았다.

 

2. 실천적 지혜와 사례 분석

 

2.1. 실천적 지혜

 

“이성을 가지고 있는 영혼에는 두 부분이 있는데, 실천적 지혜는 (학문적 인식이 관련하는 부분과는) 다른 부분의 탁월성, 즉 의견을 형성하는 부분의 탁월성이다. 의견도 실천적 지혜도 모두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들에 관련하니까.”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 제5장

 

실천적 지혜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이다. 실천적 지혜, 프로네시스는 이성을 동반한 참된 실천적 품성으로서 인간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에 관계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이성적 탁월성이 연관된 지적인 덕에 속하면서, 욕구적 부분의 탁월함인 성격적 덕과 연관된다. 실천적 지혜는 올바른 이성에 따른 판단, 중용의 덕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며 학문적 인식과 기예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한편 실천적 지혜는 ‘입법적’ 실천적 지혜, ‘정치적’ 실천적 지혜로 나뉘며 개별자에 관련한다. 일반적으로 ‘숙고’-‘선택, 결정’-‘실천’ 단계로 구성된다.

 

“집은 비어 있었다. 넥타이를 맨 채 나는 그대로 쓰러졌고, 결국 베개에 얼굴을 묻고서야 울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가정을 버리고도, 회사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빙산에 갇힌 공룡처럼, 나는 깊고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잔 걸까.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그리고 외로웠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의 품속에는 물과, 조성훈이 사다 놓았을 두 개의 치즈버거가 있었다. 치즈버거를 데우면서, 나는 문득 아내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친구 조성호와 가입비 5,000원 내고 삼미 슈퍼스타즈 어린이 회원에 가입했던 주인공은 평범하게 자랐다. 엉망진창 꼴찌 팀의 야구를 지켜보며 희로애락 중 ‘애’(愛)의 감정만 한가득 안고 대학생이 되었고 시간은 흘러갔다. 그는 하라는 대로 공부를 적당히 했고, 하지 말라는 대로 방황도 적당히 하며 어느덧 가장이 되었고 회사의 부속품이 되었다. 하지만 IMF 사태로 졸지에 주인공은 일자리를 잃었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단 한 차례의 지각도 결근도 한 적이 없는’ 제법 그럴싸한 사원이었는데도 말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만 그를 엄습해왔고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위기가 찾아오고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나면서 역설적으로 그는 ‘실천적 지혜’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바로 잊고 지냈던 꼴찌 야구팀의 방식대로 말이다.

 

2.2. 숙고

 

“우리는 우리에게 달린 것, 그리고 우리의 행위에 의해 성취 가능한 것에 관해 숙고한다. 이것들이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고 남아 있던 것이다. 본성과 필연과 우연이 원인들인 것으로 보이지만 지성 또한 원인이며,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 역시 원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들 각자가 자신의 행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들에 관해 숙고하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3권 제3장

 

숙고한다는 것은 학문적 인식이나 잘 짐작하는 것과 다르다.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숙고해야 하며 합리적 추론(logos)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숙고의 대상도 정확히 나누는 논의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원한 것들, 운동하고 있지만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 우연히 나온 것들은 숙고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 대신 ‘숙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 우리의 행동으로 성취 가능한 것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또 목적들이 아니라 목적들에 이바지하는 것들에 대해 숙고한다. 즉 ‘숙고’란 ‘사려있는 자’, 실천저 지혜를 가진 자가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실현하는데 유용한 대안적 수단으로 모두 검토하는 단계다. ‘확고한’ 목적들에 이바지하는 수단을 찾아내려고 시도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가장 ‘쉽고’ 가장 ‘고귀하게’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지를 판가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숙고하는 것은 일종의 탐구하는 것과 같다.

 

“노는 법도 다 잊어먹었겠지.. 뭘 해야 할지도 모를 거야... 늘 일만 했으니... 비 맞은 중처럼 두 번째 종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나는 짜증이 났다. 이제 서른이다. 누군가로부터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말을 들을 나이가 아닌 것이다. 나는 시끄러운 모든 종들을 방주에서 확 던져버리고 치킨과 단둘이 여행이나 훌쩍 다녀올까, 라는 생각을 했다. 여행을 다녀오면 뭔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아직 ‘학벌’과 ‘경력’이 남아 있다. 그것이 기록되어 있는, 지구여 영원하라!”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주인공에게 여행은 바로 야구였다. ‘팡! 팡! 팡!’ 소리가 우렁찬 캐치볼을 던지고 받으며, 그는 숙고의 단계를 밟아 나갔다. 잊고 살았던 노는 법을 떠올리려 애썼고, 진정한 행복을 위해 일단 힘을 빼고 푹 쉬었다. 재취업을 위해 새로운 실무 공부(학문적 인식)나 로또, 경마(우연적인 요소)에 빠지기보다는 그는 이성적으로 자신이 바꿀 수 있는 지점을 천천히 숙고했다. 하릴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산보를 하는 습관이 생겼고, 잊고 살았던 ‘행복’이란 선물을 차지하기 위한 대안을 끊임없이 검토했다. 그리고 주인공의 힘으로 성취 가능한 것은 바로 추억 속의 ‘삼미 슈퍼 스타즈’의 야구를 재현하며 인생의 의미를 조금씩 찾아 나가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그는 어린 시절 친구 조성호와 흘러간 추억을 돌이켜보며 ‘가장 쉽고 가장 훌륭하게’ 행복을 찾으려 노력했다. 미래의 일을 계획하며 역설적으로 과거의 추억을 꺼내 자신의 나침반으로 삼았다. 항상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프로답지 않은 프로팀 ‘삼미 슈퍼스타즈’를 불러와서 말이다.

 

2.2 선택, 결정

 

“그런데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들에 대한 숙고와 욕구의 대상이므로, 합리적 선택 또한 우리에게 달린 것들에 대한 숙고적 욕구일 것이다. 우리는 숙고를 통해 결정한 후 그 숙고에 따라 욕구하는 것이니까.”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3권 제3장

 

결정은 행동의 성취를 위해 숙고한 여러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단계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적 선후에 따라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욕구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게다가 올바른 선택, 결정을 위해서는 단순한 이성과 욕구를 넘어서는 특징도 필요하다. ‘참된 이성’, ‘올바른 욕구’의 조화가 필요한 선택, 결정 단계에선 ‘욕구적 지성’, ‘이성적 욕구’, ‘숙고된 욕구’를 강조한다. 숙고가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중간 단계인 선택, 결정이 필요하며 실천이 구체화되는 단계다. 즉 앎과 욕구의 일치는 올바른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믿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를 견지한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너도알다시피 모든 선수들의 가슴 속엔 저마다 빛나는 자존심이란 것이 있게 마련이니까. 또 놈들은 누구나 칠 수 있을 것 같은 공을 끊임없이 던져주곤 해. (중략) 얼마나 큰 보증금이 걸려 있는가는 IMF를 통해 이미 눈치 챘잖아. 아이템도 본사에서 조달돼. 인테리어도 마찬가지야. 그게 이 세계의 여건, 한국의 여건이라구. (중략) 그래서 말인데

말해봐.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을 다시 만들었으면 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 어떻게?

너와 나. 일단은 둘이서.“

-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주인공은 캐치볼을 하며 ‘숙고’ 과정을 통해 여러 선택지를 꿈꿨다. 다시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 몸을 던져 이리저리 치이며 ‘돈’이라는 마취제를 맞을 것인가? 아니면 한 걸음 물러나서 진정 스스로 원하는 일을 찾아 넘어지더라도 걸음마를 시작할 것인가? 불안감과 초조함이 먼저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다가오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담보로 하여 현재의 행복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친구의 날카로운 지적에 주인공은 단숨에 결정한다. 한 걸음 쉬어가며 힘을 조금 빼기로 말이다. 그리하여 조촐하지만 둘은 추억이 어린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만들었다. 꼴찌였지만 항상 여유로웠던 ‘삼미 슈퍼스타즈’를 기억하며 인생의 롤 모델로 삼기 위해서! 이러한 결정은 충동적이거나 맹목적인 것이 아닌 ‘참된 이성’과 ‘올바른 욕구’의 결합으로 빚어낸 것이었다. 이혼, 실직이란 스트라이크를 두 개나 지나보내며 초조했던 그의 마음은 한 결 여유로웠다. 아직 삼진 아웃은 아니고 다음 공은 볼이었으니 말이다.

 

2.3. 실천

 

“또 실천적 지혜는 보편적인 것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까지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실천적 지혜는 실천적인 것인데, 실천 혹은 행위(praxis)는 개별적인 것들에 관련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편적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간혹 (보편적인 것을) 아는 사람보다 더 실천적인데, 특히 다른 분야에서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 제7장

 

실천적 지혜의 마지막 단계로 실천은 숙고, 선택의 결정 과정을 거쳐 나온 결론이다. 이는 ‘제작’과 같은 행위와 다르다. ‘제작’이 외적 필요 충족, 미적 혹은 정신적 쾌락을 위해 생산물을 창조하는 수단적 성격이 강하다면 ‘실천’은 목적 그 자체를 위하여 이루어지는 성격의 개념이다. 그리고 실천은 단어대로 실천적이다. ‘인식’보다 ‘실천’에 중심을 두고 그 자체로 목적을 지닌다. 숙고를 통해 판단한 것은 합리적 선택의 대상이므로 우리는 행위에 착수할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른 이성을 따르고 지나침과 모자람의 중간인 중용의 상태를 기준으로 삼으며 말이다.

 

“애당초 승부의 판가름이 무의미한 경기였다. 아니, 같은 룰이 적용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야구를 통해 - 두 팀은 격돌했던 것이다. 7회 초의 공격은 끝이 나지않았다. 오른쪽 잡초 덤불 쪽으로 빠진- 2루타성 타구를 잡으러 간 <프로토스>는 공을 던지지 않았고, 그 이유는 공을 찾다가 발견한 노란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서였고, 또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중략)

“왜 이런 식으로 야구를 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모자를 벗은 조성훈이, 끝없이 겸손한표정으로 예를 갖춰 대답했다.

“야구를 복원하기 위해서입니다.””

-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숙고와 결정의 단계를 지나 주인공은 결국 실천으로 옮겼다. 야구가 하기 좋은 15평 전셋집을 구했고, 조성훈과 야구 멤버를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노력은 평범했다. ‘충분한 잠을 자고, 산책을 하고, 하늘을 보고, 심심한 캐치볼을 하고, PC방에서 하루 왼종일 오락을 하고, 프라모델을 조립하곤’ 했다. 이러한 노력이 통했는지(?) 여차저차 PC방 죽돌이 청년들, 친척, 프라모델 문하생 등 총 10명이 팬클럽 결성을 위해 모였다. 이기려고 하는 운동이 아니라 그저 즐기기 위한 운동은 주인공에게 활력소를 불어넣어줬다. 강변의 바람은 시원했고 가을의 볕은 언제나 공짜였으며, 시간은 눈앞의 강처럼 철철 흘러넘쳤다. 하지만 그런 시공간이 권태가 아닌 여유로움으로 주인공에게 다가왔다. 복잡했던 상황과 지끈거렸던 머리는 의외로 쉽게 평화를 찾았고 행복을 곁에 둘 수 있었다.

 

3. 결론

 

“회원들 각자의 신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 그렇듯 자연스럽게 우리 클럽은 이 세계에서 사라져갔다. 먹고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문제였고, 우리는 모두 그 문제를 어떤 식으로건 간에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야구‘로부터, 우리가 분명 어떤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뭐랄까, 더 이상치기 힘든 공을 치거나, 잡기 힘든 공을 잡기 위해 똥줄을 태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론은 다들

잘 먹고 잘 산다, 다.“

-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결국 주인공은 아내와 재결합을 하고 다시 취직했다. 그리고 인생의 한복판에서 임신하고 두근거리는 감정을 다시 경험한다. 그는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려있는 자’였다. 물론 사회의 시선과 편견에서 보자면 경쟁에서 뒤처진 ‘루저’이자 재도전 의지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패배자였지만 그는 행복했다. 차오르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그는 오랫동안 생각하며 여러 대안을 찾는 숙고의 과정을 이겨냈다. 그리고 친구 조성호의 도움으로 힘들지만 참된 이성, 올바른 욕구에 따라 선택, 결정하는 용기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실천’까지 행하며 그는 실천적 지혜의 과정을 차근차근 완료했다. 미래를 계획하며 자연스레 발생하는 여러 부정적 감정을 이겨내고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부러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말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한 박자 쉬면서라도 찾아야 한다. 남의 시선에 맞추어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이성적 판단을 못 한다면 점점 상황은 나빠진다. 한편 한 번 실수하면 다시는 회복 불가능한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우리는 조금 힘을 빼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차피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인데 그것을 꾸역꾸역 외면하고 스스로 피로를 쌓아가는 주체는 바라 ‘나’ 자신 아닌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회원으로 ‘숙고-선택,결정-실천’의 단계를 몸소 이뤄낸 그의 사려 깊음은 흔들리는 청춘이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까?

 

※ 참고문헌

아리스토텔레스, 강상진,김재홍,이창우역, 『니코마코스 윤리학』, 길, 2012.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한겨레출판, 2010.

크리스터포 원, 김요한역,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입문』, 서광서, 2011.

손병석,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실천지의 적용단계」, 철학연구 제46집, 2006.

"우리는 우리에게 달린 것, 그리고 우리의 행위에 의해 성취 가능한 것에 관해 숙고한다. 이것들이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고 남아 있던 것이다. 본성과 필연과 우연이 원인들인 것으로 보이지만 지성 또한 원인이며,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 역시 원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들 각자가 자신의 행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들에 관해 숙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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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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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켠다. 이름만 들어봤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가볼 일이 없는 리비아의 총격전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유일한 분단국가 대한민국이란 조그만 땅덩어리에 사는 나는 편안하게 뒹굴 거리며 생각한다. "그래서 뭘 나보고 어쩌라고?" 정보의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지지만, 인간은 자극에 무뎌져 간다. 하지만 시장 경제라는 절대적인 '종교'를 믿고 있는 지구촌 사회에서 리비아 사태는 먼 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 내가 베어 무는 사과의 가격마저 총알 한 발에 들쑥날쑥한 현실이다.

 

에릭 홉스봄의 말처럼 "20세기는 극단의 시대"라면 내 생각에 "21세기는 과잉의 시대". 폭력의 과잉, 권위의 과잉, 욕망의 과잉. 무엇이든지 극단을 넘어 언젠가 터져버릴 위험을 떠안고 폭탄을 전 지구가 돌아가며 떠넘기고 있지 않은가? 강상중 교수가 쓴 <고민하는 힘>은 과잉의 시대에 맞서 싸울 실마리를 던져 주는 현명한 책이다. 저자는 '세계화'라는 키워드에서 일본과 한국의 어두운 청춘이 고민하는 여러 화두의 기원을 살피고 의미를 찾아 나선다. 자아, , 지식, 청춘, 종교, , 사랑, 생명, 노년. 9장에서 차분하고 천천히, 하지만 탄탄하게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에 대해 새롭게 뜯어보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지 최소한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한편 늙어서 할리 데이비슨을 몰겠다고 다짐하는 그에게 등대처럼 다가온 '막스 베버''나쓰메 소세키'는 다양한 사례로 등장한다.

 

물론 '무엇이든 알고 있는 박식한 사람'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본래 '박식한 사람', '정보통''지성'은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다(know)''사고하다(think)'는 다릅니다. '정보(information)''지성(intelligence)'은 같지 않습니다.

 

요즘 대학생은 '지성인'일까? '지식인'일까? 아마 후자일 것이다. 그것도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으로 인스턴트식 정보를 취합하는 지식인 말이다. 사회는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듯 '빠름, 빠름, 빠름'을 외치며 우리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누구보다 빠르면서 동시에 남들과는 다른 정답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인터넷, 휴대폰, TV와 같은 매체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우리는 숙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분별하게 범람하는 날 것, 불확실한 정보를 그대로 꾸역꾸역 씹어 삼키며 소화불량에 걸렸다고 불평한다.

 

과연 우리는 알고 있는가? 사고하는가? 가장 날카로운 비판과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우리 20대는 '사고(思考)'가 낯설다. 암기하고, 시험 보고, 잊어버리고. 다시 암기하고, 시험 보고, 잊어버리고. 고등학교 시절 지겹도록 주입식 교육에 치를 떨면서 학문의 전당 대학교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내 머릿속 정보 지도는 제법 넓어졌지만, 한없이 얕아졌다. 다섯 개의 갈림길에서 하나를 고를 때처럼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있는 정보를 정확히 기억해내 긴 글로 옮겨 적는 일에만 몰두했다. 과연 이러한 지식이 유용한 것일까 회의감이 들었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지혜를 가지려 노력했는지 '자아'를 돌이켜 보았다.

 

지식은 사회적이고 지혜는 개인적이란 말을 기억한다. 물론 이러한 명언 역시 클릭 몇 번으로 어디선가 긁어온 지식의 파편이다. 이렇듯 지식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전해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지혜는 오로지 자신만의 노력으로 깨우쳐야 할 덕목이다. 리비아 사태의 단순한 원인과 결과를 멍하니 외우고 있다면 그것은 금방 증발해버릴 지식이다. 하지만 TV 속 피 흘리는 아이를 바라보며 전쟁 이면에 숨겨진 비인간성, 전쟁으로 빚어진 국제 정세의 변화를 고찰하며 나부터 작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면 이것은 내 몸에 깊게 밴 지혜가 될 것이다. 적어도 청춘이란 의무이자 권리를 몸소 누리고 있는 대학생이라면 '제대로 안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사고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고민하는 힘>의 저자처럼 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줄 사람을 만나서, 만나지 못한다면 느리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인생을 바꿔나가겠다.

 

저자는 '노인의 힘''교란하는 힘'이라고 정의한다. 너무나도 과잉되고 폭주하는 사회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을 건네며 주위를 둘러보게 할 해결책은 바로 노인에게 있다는 말이 아닐까? 대한민국 청춘은 '사고(事故)'에도 서툴다. 새로운 시도에 소극적이며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혹시나 실패할까 두려워한다. 그런 점에서 책 마지막 부분에서 뻔뻔하게 자신의 소망을 늘어놓는 저자가 인상적이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배우를 꿈꾸고 밑도 끝도 없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뻔뻔한 저자를 보면 문득 고민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을 지닌 나이가 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일요일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테니스 코트에서 즐겁게 복식 한 게임을 치고 싶다. 그리고 약수터에서 바가지로 시원한 물로 땀을 씻어내고 손자가 새근새근 잠든 행복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지은 동화를 잠에 취해 칭얼대는 아이에게 읽어주고 싶다. 고민한다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저 뻔뻔하게 꿈꾸고 언젠가 겁 없이 도전하고 싶다. 항상 천천히 사고하며 가끔 과감하게 사고치자! 그리고 백발의 나는 지성인이 되어 있겠지? 되고 싶다. 아니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무엇이든 알고 있는 박식한 사람‘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본래 ‘박식한 사람‘, ‘정보통‘과 ‘지성‘은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다(know)‘와 ‘사고하다(think)‘는 다릅니다. ‘정보(information)‘와 ‘지성(intelligence)‘은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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