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오버 하이데거 - 분석적 해석학을 위하여
이승종 지음 / 생각의나무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지금 이 보고서를 ‘노트북’으로 쓰고 있다. 밀려오는 졸음을 떨쳐내려고 잠시 ‘텔레비전’을 켰다. 하지만 틈틈이 울려대는 카카오톡 소리에 ‘휴대폰’을 손에 쥐고 어느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더 빠른 스마트폰, 더 선명한 TV, 더 넓어진 인터넷. 하지만 과연 나는 과거에 비해 성장했을까? 매일 폭풍처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우리는 서서히, 아니 순식간에 잠식되어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크로스오버 하이데거』속 하이데거는 후설, 비트겐슈타인과 날카로운 논쟁을 펼치며 언어철학, 심리철학, 기술철학, 과학철학, 논리학을 넘나든다. 다소 난해하고 현상학적인 문제의식이 곳곳에서 밝게 빛나고 있지만,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텔레비전, 타자기, 휴대폰이다. 인터넷, 텔레비전의 혁명적인 발전을 보지 못했는데도, 하이데거의 사유를 따라가면 놀라울 정도로 2012년 IT 강국 대한민국의 현실에 들어맞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언어기계가 언어를 관리감독하고, 인간의 본질을 지배한다는 것이 사실이다.”(Heidegger 1957, 36쪽)

 

여기서 ‘언어기계’가 ‘휴대폰, 텔레비전, 컴퓨터’로 대체되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뉴미디어의 발달로 시공간의 거리는 혁신적으로 사라졌다. 클릭 한 번에 수천만 Km 먼 곳에서 벌어지는 말라리아 소식을 전해 듣고, 폭격을 펼치는 미군 조종사의 시점에서 폭탄 투하를 게임처럼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물리적 거리를 제거한 만큼 친밀함이 늘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TV 화면에서 기아에 시달리는 나약한 아이를 바라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지만, 오직 이미지가 방송되는 그 순간뿐이다. 무비판적으로 TV를 멍하니 쳐다보다 브라운관이 꺼지는 순간 다시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옛말이다.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이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란 사실은 몇 달째 방치된 채 서서히 노인의 고독한 죽음으로 알 수 있다.

 

스마트폰이 출시되며 친밀함이 동반되지 않는 거리 없앰은 가속화되었다. 만 10~49세 8.4%가 스마트폰 중독 상태이며 이는 인터넷 중독률(7.7%)을 뛰어넘은 어마어마한 수치다. 페이스북, 카카오톡, 트위터, 블로그. 다양한 모바일 소통의 장이 펼쳐졌지만, 스마트폰 사용자는 오히려 활발한 소통 속에서도 고독함, 외로움을 느낀다. 다른 이들과의 파편적이고 피상적인 소통은 도리어 텅 빈 소통일 뿐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자신의 모습을 애써 위장하고, 진정한 대화 상대자의 부재 속에도 우선은 접촉하고 보는 모습은 하이데거가 주의한 모습과 무척 닮아있다. 무의미한 메시지와 통화가 결코 진정한 자아를 찾는데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사방세계(Four Fold)'를 제시하며 평범하지만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천(天), 지(地), 신(神), 명(命). The Sky, The Earth, The Divinities, The Mortals. 이렇게 4가지 요인은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이며 타인과 사회를 구성하며 철저히 독립적일 수 없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성을 의미한다. 주변의 사물, 우리가 접하는 대중매체도 결국 사방세계로 설명 가능하다. 생각하지 않고 계산하기에 몰두하는 현대인을 비판한 점에서 우리의 모습은 그가 경계한 모습과 무척 닮아있다. 기술의 진보로 거리는 단축되었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는 제자리걸음이거나 오히려 후퇴되었다. 수동적이고 비판 의식 없이 정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깊은 성찰의 시도는커녕 자극적인 접촉에만 중독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의 정신은 인간 본연의 가치를 찾을 실마리를 제공할 한 줄기 희망의 빛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천지신명의 얼이 깃들어있는 사방세계를 날카롭고 비판적으로, 그리고 빛과 어둠 모두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은 인문학적 사고에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가 한 사람의 아이디어나 정책적 처방으로 극복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기술공학적, 실용주의적, 과학주의적 태도일 수 있습니다. 인문학을 위한 해법이 더 반인문학적인 역설적인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곤 합니다. 현사태의 전환을 위해서는 인간의 도움뿐 아니라 천지신명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추락한 자신의 진정성과 본래성을 회복하는 것이 인문학의 과제입니다. 시대가 진정한 인문학에 대해서마저 등을 돌린다면 그것은 인문학자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시대와 야합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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