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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평점 :
TV를 켠다. 이름만 들어봤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가볼 일이 없는 리비아의 총격전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유일한 분단국가 대한민국이란 조그만 땅덩어리에 사는 나는 편안하게 뒹굴 거리며 생각한다. "그래서 뭘 나보고 어쩌라고?" 정보의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지지만, 인간은 자극에 무뎌져 간다. 하지만 시장 경제라는 절대적인 '종교'를 믿고 있는 지구촌 사회에서 리비아 사태는 먼 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 내가 베어 무는 사과의 가격마저 총알 한 발에 들쑥날쑥한 현실이다.
에릭 홉스봄의 말처럼 "20세기는 극단의 시대"라면 내 생각에 "21세기는 과잉의 시대"다. 폭력의 과잉, 권위의 과잉, 욕망의 과잉. 무엇이든지 극단을 넘어 언젠가 터져버릴 위험을 떠안고 폭탄을 전 지구가 돌아가며 떠넘기고 있지 않은가? 강상중 교수가 쓴 <고민하는 힘>은 과잉의 시대에 맞서 싸울 실마리를 던져 주는 현명한 책이다. 저자는 '세계화'라는 키워드에서 일본과 한국의 어두운 청춘이 고민하는 여러 화두의 기원을 살피고 의미를 찾아 나선다. 자아, 돈, 지식, 청춘, 종교, 일, 사랑, 생명, 노년. 총 9장에서 차분하고 천천히, 하지만 탄탄하게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에 대해 새롭게 뜯어보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지 최소한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한편 늙어서 할리 데이비슨을 몰겠다고 다짐하는 그에게 등대처럼 다가온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는 다양한 사례로 등장한다.
물론 '무엇이든 알고 있는 박식한 사람'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본래 '박식한 사람', '정보통'과 '지성'은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다(know)'와 '사고하다(think)'는 다릅니다. '정보(information)'와 '지성(intelligence)'은 같지 않습니다.
요즘 대학생은 '지성인'일까? '지식인'일까? 아마 후자일 것이다. 그것도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으로 인스턴트식 정보를 취합하는 지식인 말이다. 사회는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듯 '빠름, 빠름, 빠름'을 외치며 우리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누구보다 빠르면서 동시에 남들과는 다른 정답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인터넷, 휴대폰, TV와 같은 매체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우리는 숙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분별하게 범람하는 날 것, 불확실한 정보를 그대로 꾸역꾸역 씹어 삼키며 소화불량에 걸렸다고 불평한다.
과연 우리는 알고 있는가? 사고하는가? 가장 날카로운 비판과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우리 20대는 '사고(思考)'가 낯설다. 암기하고, 시험 보고, 잊어버리고. 다시 암기하고, 시험 보고, 잊어버리고. 고등학교 시절 지겹도록 주입식 교육에 치를 떨면서 학문의 전당 대학교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내 머릿속 정보 지도는 제법 넓어졌지만, 한없이 얕아졌다. 다섯 개의 갈림길에서 하나를 고를 때처럼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있는 정보를 정확히 기억해내 긴 글로 옮겨 적는 일에만 몰두했다. 과연 이러한 지식이 유용한 것일까 회의감이 들었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지혜를 가지려 노력했는지 '자아'를 돌이켜 보았다.
지식은 사회적이고 지혜는 개인적이란 말을 기억한다. 물론 이러한 명언 역시 클릭 몇 번으로 어디선가 긁어온 지식의 파편이다. 이렇듯 지식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전해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지혜는 오로지 자신만의 노력으로 깨우쳐야 할 덕목이다. 리비아 사태의 단순한 원인과 결과를 멍하니 외우고 있다면 그것은 금방 증발해버릴 지식이다. 하지만 TV 속 피 흘리는 아이를 바라보며 전쟁 이면에 숨겨진 비인간성, 전쟁으로 빚어진 국제 정세의 변화를 고찰하며 나부터 작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면 이것은 내 몸에 깊게 밴 지혜가 될 것이다. 적어도 청춘이란 의무이자 권리를 몸소 누리고 있는 대학생이라면 '제대로 안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사고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고민하는 힘>의 저자처럼 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줄 사람을 만나서, 만나지 못한다면 느리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인생을 바꿔나가겠다.
저자는 '노인의 힘'을 '교란하는 힘'이라고 정의한다. 너무나도 과잉되고 폭주하는 사회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을 건네며 주위를 둘러보게 할 해결책은 바로 노인에게 있다는 말이 아닐까? 대한민국 청춘은 '사고(事故)'에도 서툴다. 새로운 시도에 소극적이며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혹시나 실패할까 두려워한다. 그런 점에서 책 마지막 부분에서 뻔뻔하게 자신의 소망을 늘어놓는 저자가 인상적이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배우를 꿈꾸고 밑도 끝도 없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뻔뻔한 저자를 보면 문득 고민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을 지닌 나이가 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일요일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테니스 코트에서 즐겁게 복식 한 게임을 치고 싶다. 그리고 약수터에서 바가지로 시원한 물로 땀을 씻어내고 손자가 새근새근 잠든 행복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지은 동화를 잠에 취해 칭얼대는 아이에게 읽어주고 싶다. 고민한다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저 뻔뻔하게 꿈꾸고 언젠가 겁 없이 도전하고 싶다. 항상 천천히 사고하며 가끔 과감하게 사고치자! 그리고 백발의 나는 지성인이 되어 있겠지? 되고 싶다. 아니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무엇이든 알고 있는 박식한 사람‘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본래 ‘박식한 사람‘, ‘정보통‘과 ‘지성‘은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다(know)‘와 ‘사고하다(think)‘는 다릅니다. ‘정보(information)‘와 ‘지성(intelligence)‘은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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