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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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브레닌에게 꼭 필요한 것만을 가르쳤다. 재주를 가르칠 필요는 전혀 못 느꼈다. 자기가 바닥에 뒹굴고 싶지 않는데 내가 왜 그것을 시켜야 하는가? 심지어 브레닌에게 바닥에 앉으라고 시킬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앉건 서건  그것은 브레닌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나란히 걷는 것은 이제 당여한 행동이 되었다.

 

나는 강아지를 두 번 키웠다. 지금도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산책하는 강아지의 모습을 보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쉽사리 강아지를 키울 자신이 없다. 정들었던 존재, 나를 따르던 동물과의 이별은 너무 슬프기 때문이다. 차라리 본능에 따라 어디론가 떠나 버린 강아지는 잊을만했다.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 영화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마다 늘 지나던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은 둘째는 달랐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라고 해도, 밤새 펑펑 울면서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단순히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강아지와 함께한다는 건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철학자와 늑대>의 마크 롤랜즈처럼 브레닌과 11년간 진지한 교감을 주고받을 자신이 없었다.

 

늑대는 말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이해하기도 쉽다. 늑대들이 못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늑대는 문명사회에 맞지 않는 것이다. 늑대도 개도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너무 완벽해서 살짝 재수 없는 마크 롤랜즈. 잘나가는 미식축구 쿼터백, 명문 대학 엘리트 교수, 아마추어 복싱 고수 등 은근히 자기 자랑을 멈추지 않는다.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고, 게다가 술도 잘 마시고! (게다가 책까지 재밌다. 은근히 깨알 같은 유머가 숨어있다.) 물론 자랑의 중심에는 언제나 96% 혼혈 늑대개 '브레닌'이 있었다. 브레닌은 수업 시간이 지루할 때면 큰소리로 하품을 하고, 야생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조금씩 적응해나갔다. (만약 개를 싫어하는 학생에겐 진상 수업이었겠지?) 중간중간 칸트, 서양 철학 전반의 대립에 대한 설명도 등장한다. 하지만 철학과 학생인 나는 난해한 <존재와 시간>, <법철학>에 이미 질릴 대로 질려있는 상태였다. 자연스레 철학에 대한 통찰력 있는 간단한 설명은 그리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거대한 늑대개를 상상하며 책을 읽었다. 자유롭게 뛰어노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집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날 경기에서 누가 MVP였건 상관없이 브레닌이 옆에 있으면 그 사람이 MVP였다. 나는 경기장에서는 어림도 없었지만, 브레닌 덕분에 언제든 MVP가 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떠나간 강아지 '곱슬이'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비 오는 오후에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길을 잃은 듯한 잡종개, 흔히 말하는 똥개였다. 갈색 털은 빗물에 젖어 축 늘어졌고, 흙탕물이 번진 몸은 지저분했다. 반장인 나는 묘한 의무감으로 강아지를 데려왔다. 물만으로 대충 구정물을 헹궈주었다. 그러던 중 수업 종이 치자 부랴부랴 커다란 청소함에 억지로 강아지를 숨겼다. 얼른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과 강아지를 데리고 놀 생각에 들떠있었다. 하지만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26살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귀여운 발상이었다. 낑낑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왈왈 짖는 강아지를 어떻게 수업 내내 조용히 숨길 수 있겠는가? 브레닌 옆에서 마크 롤랜즈가 자신감이 넘치듯 나도 강아지와 함께면 주인공이 되었다. 여자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을 뜬 곱슬이를 한번씩 조심스레 만져보려 했다. 선생님의 중재로 반장인 나는 주인을 찾을 때까지 이틀만 집에서 맡아 기르기로 했다. 약속한 수요일이 되었지만 나는 금세 친해져 어리광을 피우는 곱슬이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아빠, 우리 그냥 곱슬이 키우면 안 될까?" 

 

그렇게 2년을 함께 보냈다. 11년간 좌충우돌, 우여곡절을 겪은 철학자와 늑대에 비하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심을 다했다.

 

나는 언제나 나의 늑대 형제를 기억할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슬픈 감정이 용솟음쳤다. 서서히 이별을 예감하고 기력이 다해 가는 브레닌을 바라보는 작가의 아픈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신을 원망하고, 술에 취해보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일은 언제나 쉬울 수가 없다. 수많은 추억이 아직 아른거리는데, 눈앞에 항상 있던 이가 없다면? 허전함과 슬픔은 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하기 힘들다. 철학 연구 내내 동물권, 체화된 인지론을 펼친 철학 교수. 남겨진 늑대개 니나와 테스를 돌보는 사내. 술독에 빠져 흥청망청 놀기만 했던(물론, 임용이 되는 걸 보면 그러면서 공부는 열심히 했나 보다.) 악동. 11년 인생 전체에서 '브레닌'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어마한 롤랜즈는 아마 더 아프고 힘들었을 것이다. 연인과의 이별보다 더 애절하고, 가족과의 멀어짐보다 고통스러워 보였다. (물론, 브레닌은 이미 가족이므로 이 표현은 틀린 말이다.)

 

나의 늑대 형제여. 우리, 꿈에서 다시 만나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주인공의 찢어지는 가슴만큼이나 슬픈 마지막 말이었다. 하지만 마크 롤랜즈가 지난 추억을 곱씹으며 여생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철학 개론서, 혹은 동물권에 관련된 말랑말랑하고, 감동적인 책이 아니라 늑대개와 함께 한 뜨거운 연애 소설을 본 느낌이다. 오늘 자기 전엔 나도 '곱슬이'를 떠올리며 웃으며 잠들 수 있겠다. 

  

이마누엘 칸트는 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정확히 간파한 바 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반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안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악의 보편성을 능력의 부재라는 관점에서 논한다면 이는 매우 편리한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실제 벌어진 상황을 불가항력이라고 하면 죄를 모면하게 된다. 그렇게 쉽게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그 순간에는 과거의 얼룩도 없고 미래의 유령도 없다. 각 순간은 그 순간의 것이다.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렇다면 이제 삶의 의미는 꽤 달라진다. 지금껏 일직선상의 어떤 결정적인 점 또는 부분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왔다면, 이제부터는 삶의 의미를 순간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순간은 아니고 특정한 순간들일 것이다. 삶의 의미는 삶의 전체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나는 내가 왜 그토록 브레닌을 사랑했는지, 또 녀석이 떠난 지금 이 순간 왜 그토록 그리움에 몸부림치는지를 깨달았다. 브레닌은 나에게 정규교육이 가르쳐 주지 못한 것, 즉 내 고대의 영혼 속에 살아 있던 늑대를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근거, 증거, 정당화, 보장. 정말 사악한 동물들에게만 필요한 개념이 아닌가? 불만이 많을수록 더 사악해지고, 화해에 무감할수록 정의는 더욱 필요해진다.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영장류만이 도덕적 동물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불만으로 가득하다.

최고의 상태는 최악의 상태에서 나온다. 그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마음속에 새겨둘 만은 하다.

서양 철학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철학은 이성과 지성 대 쾌락과 즐거움 간의 대립의 역사였다. 후자는 원초적 혹은 동물적 본능으로 치부되었다. 이성이나 지성은인간을 구성하는 뿌리이며 다른 동물과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이성과 쾌락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이성은 부분적으로 쾌락 욕구의 결과물이다. 속임수와 계략에 대한 욕구는 영장류에게 더 강하게 나타나며 위험도 그만큼 더 크다.

진정한 인간의 선은 아무런 힘이 없는 이들을 대할 때 발현되듯이 약함, 최소한 상대적인 약함도 인간 악의 필요조건이다.

사랑은 때때로 아프다. 사랑 때문에 영원히 저주받을 수도 있다. 사랑은 당신을 지옥에 떨어뜨릴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으면, 정말 행운을 만난다면 사랑은 당신을 지옥에서 건져내 줄 것이다.

나는 절대 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다른 이들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만 나 자신을 기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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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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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구행 KTX 2호 차 1번. <여행할 권리> 달랑 한 권을 챙겨서 여행길에 올랐다. 7월 중순이지만 체감 온도는 8월 한여름이었다. 그런 무더위 속에서 피서를 떠나기는커녕 더욱 뜨거운 남쪽으로 떠났다. 게다가 용광로의 도시 포항, 열기가 가득 찬 스틸야드로 떠나는 축구 여행이었다. 열차 시간을 착각해 허겁지겁 열차에 가까스로 오른 후,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배터리 일체형이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를 (내 경험상 100% 단점이다. 최악의 약점.) 아이폰을 충전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무궁화호를 탔던 경험에 비추어 일부러 맨 앞자리로 예매했는데, 큰일이었다. 습관적으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을까 했지만, 결국 책을 펼쳤다.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두 형제. 태어난 곳이 여기고, 친구들도 다 여기에 있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냐며 귀국선에 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두 형제. 그 두 형제 중 한 사람은 북으로 갔고, 또 한 사람은 남에 남았다. 그들에게 리얼리티란 과연 무엇일까? 민족이나 국가나, 그 어떤 것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그들의 어긋난 삶이 다시 맞춰질 수 있을까?

  

<여행할 권리>는 선물 받은 책이다. 국민은행 대학생 홍보대사 7기 생활을 마친 겨울이었다. 1년간 내 능력 밖의 일을 수많은 인연과 함께 해냈다. 거리 홍보, 캘리그라피, 멘토링, 이벤트 진행. 귀찮고 힘들 때도 잦았지만 언제나 즐거웠기 때문에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노란 티를 입었다. 해단식 자리에서 국민은행은 여러 종류의 책을 테이블마다 놓아두고 마음에 드는 걸 골라가도록 준비했다. 1년을 무사히 버텨낸 우리를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날도 늦고 말았다. 가깝지만 먼 서강대, 캠퍼스에서 헤매다 팀원 중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책은 딱 두 권이 남아있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경제 관련 서적과 김연수 산문집 <여행할 권리>. 나는 믿고 보는 작가 ‘김연수’의 유명세와 ‘여행’이 주는 설렘에 끌려 급하게 이 책을 골랐다. 2012년을 가득 채운 짧은 여행을 마무리하는 기분이었다.

  

덧없는 것들만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해도 꿈은 늘 새롭다. 질서정연하게 역을 거쳐가는 기차들의 행렬은 불순했다. 그건 언제나 아이들을 유혹했다. 서울, 수원, 천안, 혹은 대구, 마산, 부산 같은 곳의 삶이 거기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최종적인 꿈은 그런 지명이 찍힌 기차표였다. 그 꿈은 자주 이뤄졌다. 그러므로 역에서 나는 늘 삼십도 정도 위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건 가게 앞에 앉아 구름을 바라보던 시선과 다르지 않았다. 모든 덧없는 것들만이 나를 사로잡았다. 영원히 스쳐갈 뿐인 것들만이.

 

몇 장 넘겨보니 독일 이야기가 나왔다. 유명 작가 김연수가 럭셔리 유럽 여행을 다녀온 뒤 느낀 소소한 에피소드를 모아 놓은 책인 줄 알았다. 문학, 예술과 철학의 고장을 누비며 새로운 영감을 얻고, 다양한 세계 유명 작가와 깊은 토론을 나누는 장면을 상상했다. 하지만 시작은 러시아 우스리스끄만이었다. 실감 나는 연변 사투리가 터져 나오는 국경 지대가 배경이었다. 여행은 시간순이 아닌 장소별로 나뉘어 있었다. 일본 나고야, 독일 밤베르크, 미국 캘리포니아, 중국 지린셩, 서울, 일본 도쿄. 유럽, 아시아, 미주를 넘나드는 김연수의 자유로운 여정이 생기 넘치는 글로 담겨 있었다.

 

 '북한의 핵무기'라는 말을 듣자, 프리드리히의 눈빛이 반짝였다. 결코 열어서는 안되는 상자를 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리드리히는 조금 이따가 그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더 많이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게 마음 편하게 맥주를 마시기는 글렀음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날 새벽 두시까지 나는 사전 없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영어단어를 다 말하고야 말았다.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독일인 앞에서 '북한의 핵무기'같은 단어는 꺼내지 말았어야만 했다고 자책하면서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서 돌아왔다. 하늘엔 여전히 별이 많았다. 마치 거대한 소똥처럼 유럽의 별빛은 크기도 컸다. 

 

나는 '불싯, 쎄자르. 이 세상에 로코코코적인 건 없어.', '아바, 내가 푸르미보다 진실되지 못한 밤비여서가 아니라.' 장이 제일 유쾌하고 흥미로웠다. 개인적 취향이 편차가 있기에, 모든 여행이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물론 독일에서 오가는 대화는 모두 격동적이진 않았지만 소소한 인생사가 담겨있었다. 김연수는 독일에서 '남한에서 온 미스터 킴' 혹은 '밤비'로 불렸다. 스물다섯 살의 신체 건강한 청년, 지독한 짝사랑에 빠져 괴로워하는 푸르미는 가이드다. 무려 '4만 부'가 넘는 판매량을 자랑하는 인기 작가의 조언에 따라 그는 지고지순하게 엽서를 보낸다. 순수한 이십 대 청년은 독일인이라서가 아니라 진심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기에 그저 노력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노르웨이의 숲'을 읽지 않는다. '데미안'을 읽지 않듯이. 그 소설이 인상적이던 어떤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르미는 이제 그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푸르미와 밤비 사이에는 시차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이차가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일본문학이니 독일문학이니, 혹은 한국문학이니 하는 따위의 경계선은 더이상 없었다. 오바상이든 아줌마든 푸르미에게 소개할 수는 없는 일이며, 디스거스팅이든 쩌거 왕빠딴이든 들어보면 욕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외국인을 바라볼 때 무의식중에 '편견'의 색안경을 끼고 본다. 다른나라 사람도 우리를 바라볼 때 마찬가지다. 'Korea'라는 국적을 밝히면 첫째로 일본인, 중국인이 아닌 것에 놀란다. 둘째로, 핵무기에 안전한지 묻는다. 이게 다 Fucking Dictator Mr.Kim 때문이다. 우리 역시 서양인은 개인적이고, 쿨하며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족속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어느정도 맞아들을지 몰라도 명백한 오류다. 문화적 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들도 사랑하고, 울고 웃는다. 마지막 목숨이 끝나는 순간도 모두에게 평등하다. 그렇기에 동서양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전은 읽히고 또 읽히는 법이다. 별 차이 없는 고만고만한 인간상에 공감을 얻고 위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무라까미 하루끼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푸르미의 국적은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저 그 나잇대 열병 같은 사랑에 빠진 청년만이 남는 것이다.

 

 교문 앞에 손을 내밀고 동상처럼 서 있다가 이십오 쎈트짜리 동전을 손바닥에 올려놓을 때마다 그 보답으로 부시에 대한 욕설을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우리 같으면 그런 인간들이 넘치면 어떻게 할까?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당장 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라고 요구할 것이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88만원만 벌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 공무원이나 학자들은 왜 자꾸 우리를 취직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빈둥거릴 텐데, 그 꼴만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버클리의 빈둥거리는 삶을 예찬하는 모습도 공감이 갔다. '빅 웬즈데이'(정말 보기 드물게 높은 파도)를 기다리는 살면서 경쟁보다는 만족을 중시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이 부러우면서 배우고 싶었다. 2013년 대한민국은 스펙 경쟁을 넘어서 전쟁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는가? 천재 이상의 발자취를 현지에서 차근차근 좇은 이야기, 까자흐스딴, 스웨덴 작가들이 오직 '한국 혈통'이라는 이유로 무언의 공동체 의식을 강요하는 모순, 아버지의 고향을 찾는 기행. 단순히 '해야 할' 무언가를 빠르게 해치우는 일정이 아니라 순간을 음미하고 주제에 맞게 깊게 빠져드는 여행이었다. 덧없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 총명한 일은 아마 김수영의 장기인가 보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그저 여권에 적혀 있는 생물학적인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비행기를 타고 우리가 어디에 도착하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란 존재는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에 불과하다. 그 이상의 것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나'는 등 뒤에서 닫히는 출국장의 문 그 너머에 남겨져 있다.

 

여행을 떠나는 순간 나는 이방인이 된다.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얼굴들을 마주하면 내면의 모습이 나도 모르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김수영이 만난 숨겨진 내면은 그리 고약하지도, 괴팍하지도 않은 정말 글쟁이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물론 허풍과 자존심이 곳곳에 엿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비행기를 타고 떠나면 나는 오로지 사회적인 존재가 아닌 그저 스쳐지나가는 덧없는 여행객이 된다. 새로 만나는 인연들과 덧없는 추억이 아닌 진한 추억을 남기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비싼 돈 들여 멀리 떠날 필요는 없다. 내가 지금 포항으로 가듯이, 집밖을 떠나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는 누구에게 공평하다. 하지만 아무나 그런 권리를 누릴 수 없다는 점에서 공평하지 않다. 일단 떠나고 봐야겠다.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두 형제. 태어난 곳이 여기고, 친구들도 다 여기에 있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냐며 귀국선에 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두 형제. 그 두 형제 중 한 사람은 북으로 갔고, 또 한 사람은 남에 남았다. 그들에게 리얼리티란 과연 무엇일까? 민족이나 국가나, 그 어떤 것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그들의 어긋난 삶이 다시 맞춰질 수 있을까?

토끼를 잡았던 저 산, 붕어를 낚시하던 저 강. 지금도 꿈은 돌도 잊을 수 없는 고향. 아스팔트가 깔린 아버지의 고향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국경 너머에 있는 나라, 영영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리얼리티를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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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과 중국인의 사유방식
몽배원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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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서론

 

 

중국철학의 주체적 사유는 기본적으로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의 상호 통일을 전제로 출발한다. 중국철학은 만물의 주재(主宰)일 뿐만 아니라 천지(天地)인 인간의 주체성을 드러내면서도 주관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더불어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강조하며, 인간의 심령 가운데 자연계의 보편적인 원칙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중국철학의 주체성에 주목한 몽배원은 상호 연관적인 네 가지 차원(내향적 사유, 의향적 사유, 경험적 사유, 초월적 사유)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이러한 흐름에 알맞게 유(儒)·도(道)·불(佛)의 다양한 사상가와 원전을 살피며 사유를 추적한다. 한편 중국철학, 사유 방식은 사변적이 아니라 실천적이다. 유·불·도마다 각자의 이론체계에 따라 달랐지만 결국 어떻게 하면 참된 인간, 즉 성인(聖人), 신인(神人), 지인(至人), 진인(眞人), 선인(仙人), 부처가 되느냐에 주목했다. 요약하자면 중국철학의 주체적 사유는 인문주의 철학, 인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서 시작했다. 자연계의 주재(主宰) 인간이 주체 자신으로 돌아가고, 자아를 반성·체험·초월하여 자연계와 하나가 되는 관계를 바라는 마음이 사유의 핵심이다.

 


◎ 제2장 자아반성형의 내향적 사유 (自我反思型 內向思惟)

 

 

1. 자기를 돌이켜서 구함 (反求諸己)

 

 

마음은 인간 존재의 표지로서, 인간인 인간으로 되는 까닭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혼(人者萬物之靈)”이란 말도 있듯이 영혼이 있는 곳이 마음이다. “생각할 수 있음(能思)”은 마음의 기능이고, “생각되는 것(所能)”은 마음의 존재, 바로 인간의 내재적 본성이다. 모든 사람은 내재적 본질을 갖추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자각하는 것은 아니다. 자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을 돌이켜 생각하고(反身而思), 자신을 반성해야(反求諸己) 한다.

유가들은 ‘성(誠)’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도덕 본체, 하늘이 하늘로 되는 까닭으로서의 도(天之所以爲天之道), 인간이 인간으로 되는 까닭으로서의 도(人之所以爲人之道), 인간에 내재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이상 인격을 완성하려면 정확하게 선택해야 하고, 정확하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재적 잠재 능력이나 선한 본성(善性)을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 반성적 사유(自反思維)의 주체적 특징은 ‘참천(參天, 하늘에 참여하는)’ 사상을 드러낸다. 공자는 반드시 자기의 마음 안에서 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맹자는 심성합일론(心性合一論)의 명제를 발전시켰다. 즉 유가의 주장에 따르면 도덕 본성은 모든 사람이 갖고 있으며 모든 인간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양지·양능은 “생각하지 않아도 알고(不慮而知)”,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不學而能)“ 내재적인 잠재 능력이자 도덕 표준이다. 대표적으로 왕양명은 양지는 마음의 바깥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양지양능은 성(誠)이나 인(仁)처럼, 전통 철학 가운데 보편적으로 사용된 범주로서 주체의 내향적 사유의 특징을 표현한 것이다.

 

 

2.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함 (理盡性)

 

 

순자(荀子)는 사유의 객관적 원칙을 제시하고, 지성 능력(앎의 능력)을 인성(人性)의 중요한 측면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마음(心)이 ‘도를 아는(能道)’ 문제를 제시하여, 인간의 마음은 보편적인 객관 법칙을 인식할 수 있다고 여겼다. 여기서 ‘도’는 천도가 아닌 ‘인도(人道)’로 주로 사회, 정치, 윤리, 원칙으로서 순자가 말한 ‘예(禮)’다. 더불어 순자는 인간이 귀한 까닭을 ‘의(義)’를 갖고 있는 것으로 금수와 구별되는 차이라고 살폈다. 즉 성인이 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예의(禮義)이고 인의(仁義)라는 것이다.

『역전(易傳)』에서는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한다(窮理盡性)”는 문제를 제시한다. 천도(天道)는 인도(人道)에 포함되고, 천명(天命) 역시 인성(人性) 가운데 하나다. 궁리(窮理)하여 본성을 다한다는 이러한 사유는 후기 유학, 이학에 전해졌다. 이학가들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設)’, ‘즉물궁리성(卽物窮理設)’을 기하며 사물들이 각기 그 이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여기에는 외향적 사유의 특징도 함께 있다. 주희는 마지막에는 자신에게로 돌아가 마음속의 리를 밝힐 것을 주장했다. 한편 왕양명은 마음 바깥에 있는 리(心外有理)를 부정하고 직접 마음속을 궁리할 것을 강조했다. 요약하자면 ‘치지’든 ‘격물’이든, ‘궁리’든 ‘진성이든 공부(功夫)는 마음(心)에서 해야 한다는 것으로, 반드시 자신의 양지(良知)를 인식하고 실현해야 한다.

 

 

3. 순박함으로 돌아감 (反朴還純)

 

 

도가는 “순박함으로 돌아가라(反朴還純)”, “소박함을 드러내고 순박함을 간직하라(見素抱朴)”를 주장한다. ‘자연’을 인간의 내재적 본질로 규정하고, 인간의 본성으로 변화시킨다. 노자의 ‘자연무위설(自然無爲設)’은 인성의 자연(人性自然)을 전제한 것이다. 그리고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는 말로 무욕, 무위하여 자연의 도와 합치되는 인간의 내재적인 본성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스스로를 아는(自知)’ 영명함(明)을 통해 ‘자연’의 본성을 실현하라고 주장했다.

자기 반성적 사유의 일반 원칙은 장자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했다. 그는 ‘자연’의 도를 세계의 최고 존재이자 인간의 근본 존재로 보았다. 즉 ‘자연’이 바로 인간의 참된 본성이며 절대, 보편적인 성질을 갖추고 있다고 바라봤다. 장자를 대표로 도가는 모든 외적인 지식을 상대적인 것, 아무리 노력해도 진정한 인식을 얻을 수 없다고 보앗다. 그래서 유일한 방법으로 자기의 심령으로 돌아가서 자아를 깨닫고 인식하는 것, 즉 지인(至人), 진인(眞人), 신인(神人)을 이상적인 인격으로 설정했다.

 

 

4. 자기를 살펴서 앎 (察己而知)

 

 

현학가들은 자연의 본성에 대한 자아의 반성인 “현묘한 사유(玄思)”를 주장했다. 왕필은 “자연의 본성을 밝히고(明自然之性)”, “반드시 자기에게서 구하는(必求諸己)”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천인합일론’의 주체적 사유이자 자아반사형의 내향사유를 나타낸다. 자연의 본성을 밝히려면 먼저 인위(人爲)를 없애고, 동시에 ‘신명’한 작용을 통해 자아를 인식해야 한다. 이밖에도 혜강은 “자연에 맡김(任自然)”이란 객관적인 자연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본성(自然之性)”에 맡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안을 보고 돌이켜 들어라(內視反聽)”고 주장하며 마음과 정신이 바깥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한편 곽상은 명확하게 “안에 있는 것을 구하라(求在內者)”고 주장하며 사람의 안에 있는 자기의 본성(自性)을 알기를 구하라고 권한다.

 

5.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바라봄 (明見心性)

 

 

중국화한 불교는 영원한 불성을 인간의 심리 가운데 두었고, 그것을 인간의 “마음의 본체(心本體)”로 변화시켜 개체의 마음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도생(道生)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衆生皆有佛性)”는 학설, ‘자성설(自性設)’을 제시하며 유가의 사유와 비슷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불성이 모든 개인에게 내재된 것으로 여기며 불성은 스스로 그러하고(自然), 스스로 존재하며(自在), 무위(無爲)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한편 천태종은 도생처럼, 주체의 내부에서 불성을 인식하고 실현하기를 주장했다. 대표적으로 지의는 마음에 심체(心體), 심종(心宗), 심용(心用)이라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나아가 불성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므로, 마음 바깥을 향해 구하기보다 자신을 향해 구해야 한다는 것, 무진장설(無盡藏設)이 핵심이다. 그리고 선종 역시 우주의 마음이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으며, 개인의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목했다. 선종의 ‘명심견성설(明心見性說)’은 자신의 ‘본심(本心)’을 밝히고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마음은 본성이고 본성은 마음이다. 부처는 서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속에 있으므로 그것을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불성은 인식하는 관건은 ‘깨달음(悟)’에 있다. 깨달으면 부처, 미혹되면 중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진정으로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다. 유가 도가와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자기반성형 내향적 사유의 특징을 나타낸다.

 


◎ 제3장 정감체형형의 의향적 사유 (情感體驗意向思惟)

 

 

1. 두 가지 사유 방식의 비교

 

 

중국의 전통철학은 주체 체험을 특징으로 하는 의향적(意向的) 사유다. 정감의 체험과 정감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중시하였으며 지·정·의 세 가지를 결합하며 어떤 지혜를 추구했다. 대표적으로 유가와 묵가는 경험적인 지식을 중시하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경험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가 있었다. 유가의 공자는 정감적 경험, 내적인 심리 경험을 무엇보다 강조하며 견문과 학습(學習)을 중시했다. 인문주의적이고 윤리정감형인 공자는 인학을 정감적이고 심리적인 경험 위에서 발전시켰다. 나아가 맹자는 내재적인 심리 정감과 심리 경험을 강조하며 선택, 고려, 정화하려는 노력을 펼쳤다. 즉 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應當什麽)’에 주목한 사유다.

반대로 묵가는 인간을 인식의 주체로 보고 객관 사물을 인식의 대상으로 본다. 묵자는 경험 지식을 매우 중시하며 인간의 정감적 수요와 도덕적 평가에 유의하고 어떤 의미를 체험하려 한다. 묵가의 대표적인 단면은 삼표법과 겸애 학설이 있다. ‘삼표법(三表法)’에서 ‘삼표’는 인식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증명해줄 수 있는 세 가지 표준이었다. 겸애는 “사랑에는 차등이 없다(愛無差別)”는 뜻으로 유가와 달리 사람의 종류에 구애 받지 않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논리적으로 형식화된 묵자의 사유 방식을 엿볼 수 있다.

 

 

2. 사단 (四端)과 칠정 (七情)

 

 

공자가 언급한 인자(仁者)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명제를 강조하며 ‘충(忠)’과 ‘서(恕)’ 개념에 주목한다. ‘충’은 “자신이 서고자 함에 남도 서게 하며, 자신이 통달하고자 함에 남도 통달하게 하는 것”이고, ‘서’는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음”이다. 맹자는 공자의 정감형 사유를 이어 받아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 도덕관념 사성(四性)을 제시했다. 이러한 네 가지 내재적 정감은 인의 단서 측은지심, 의의 단서 수오지심, 예의 단서 공경지심, 지의 단서 시비지심으로 사단(四端)이다. ‘사단’의 정을 ‘확충’하여 도덕 이성으로 만드는 것은, 근본적으로 순수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아 체험의 문제다. 한편 칠정설(七情設)은 희(喜),노(怒), 애(愛,) 구(懼), 애(哀), 오(惡), 욕(欲) 일곱 가지를 지칭하는 주체의 내재적 정감이다. 칠정은 인간이라며 누구나 갖게 되는 인성의 중요한 근원이다. 마찬가지로 칠정 역시 주체가 체험할 수 있으나, 인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성질이다. 정감체험형의 철학인 중국의 유가철학은 명석성과 형식화가 부족한 한계를 드러내지만 정감을 승화하고 의지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3. 미발 (未發)과 이발 (己發)

 

 

‘미발’과 ‘이발’은 희로애락의 정에서 출반한 것으로 주체의 정감 의식이다. 간단하게 둘을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다.

 

미발(未發)

이발(己發)

편벽됨, 지나침, 부족함이 없는 ‘중(中)’

잠재적, 잠존적

주체의 원칙, 중은 천하의 “큰 근본(大本)”

절도에 맞는 화

현실적, 구체적

‘화(和)’는 천하의 “공통된 도”

 

 

『중용(中庸)』은 선험적 도덕 내용을 정감 의식에 부여하여 본체론의 성질을 갖게 하였고, ‘미발’로부터 '이발‘에 이르는 것이 부단히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자 자아 체험의 과정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치중화(致中和)는 ’중화에 이른다‘는 의미로 미발, 이발의 양방향 체험을 통해 대본(大本)으로부터 ’달도(達道)‘에 이르는 것이다. 즉 치중화는 천명지성을 다하는 것이다. 이학가들은 자아수양의 방법으로 “고요한 가운데서의 체험”을 강조했고 이정과 주희는 ‘경’공부를 강조하였다.

 

 

4. 마음속의 즐거움 (心中之樂)

 

 

도덕적인 정감 가운데 미의 경지를 체험한 마음속의 즐거움(心中之樂)에서 정감 철학적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중국철학에서 즐거움은 내심의 자아 체험이자 인생의 경지다. 공자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주목했으며 “공자와 안자의 즐거움(孔顔之樂)”을 예로 들며 즐거움과 어짊을 같이 보고 천인합일의 미학 사상을 살폈다. 맹자 역시 “군자에게는 세 가지의 즐거움이 있다.(君子三樂)”을 강조했다. 세 가지 즐거움에는 내재적인 도덕감을 중시하는데,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시며, 형제가 무고한 것(父母俱存, 兄弟無故)”,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으며, 아래로 인간에 부끄럽지 않은 것(仰不于愧天, 仰不炸于人)”이 이에 해당한다.

 

 

5. 체험을 마음으로 삼음 (以體會爲心)

 

 

중국철학과 그 사유는 ‘마음(心)’이란 범주에서 표현되고 ‘마음’이란 범주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마음이 주체성의 주요한 표지이자 인간의 의지와 가치를 실현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체험을 마음으로 삼는다.(以體會爲心)”는 실제로 자아를 체험한 마음을 가리킨다. 즉 자아의 체험을 통해 하늘과 인간이 합일된 본체 경지를 실현하며, 그 존재를 인지하는 것이다. 이는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통일된 본체 의식과 그 작용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맹자는 이와 유사하게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萬物皆備于我)”고 말하며 자아를 체험하기, 천지만물을 포함한 거대한 마음을 강조했다. 유가에서는 견문을 통해 만물의 규율이 아닌, 안과 밖, 하늘과 인간의 합일을 체험하는 경지를 강조했다. 그때 비로소 만물이 모두 내게 갖추어 있게 되면 인간은 주체성을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6. 도를 체득하고 자연을 체득함 (體道體自然)

 

도가에서도 초윤리적인 본체를 체험할 것을 주장했다. 자연을 숭상하고 근본으로 삼는 도가는 ‘무정(無情)’, ‘무심(無心)’의 학설을 제시한다. 이는 본체 존재 또는 ‘신명’의 마음에서 출발하여, 개체화된 자아를 실현하는 체험을 요구하는 동시에, 개체와 절대 본체, 자아와 비아를 완전히 통일시킬 것을 주장한다. 도가의 노력을 ‘도(道)’가 중국철학의 기본 범주이자 최고 범주가 되었고, 도는 만물의 근원으로 자리 잡았다. 노자는 “고요히 바라보는(靜觀)” 방법을 제시하며 자신을 드러내고 자아를 체험하는 가운데서 ‘정관’을 실현하기를 요구했고, 장자는 ‘무정(無情)’을 강조하며 인간과 자연이 합일된 초윤리적 초공리적 미학적인 정감 체험을 주장했다.

 


◎ 제4장 주체실천형의 경험적 사유 (主體實踐 經驗思惟)

 

 

1. 몸으로 실천하기 (躬行踐履)

 

 

중국 철학적 사유는 “안으로 성스런 지혜를 증득하는(內證聖智)” 실천적 사유이다. 특히 몸으로 실천하기(躬行踐履)를 호소하며 의지와 행위가 실천적인 요구와 효과를 대부분 결정한다고 여겼다. (도교는 ‘선인지학(仙人之學)’, 불가는 ‘내학(內學)’이라고 불렀다.) “사람 만드는(作人)” 실천 활동을 중시하며 유가는 ‘성인지학(聖人之學)’, ‘몸으로 실천하는 학문(躬行踐履之學)', '도덕지학(道德之學)’을 제시한다. 유가의 맹자는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다(心之官則思)”를 주장하며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기르고 하늘을 받드는 실천 공부”(存心養性事天)를 제시했다. 어떻게 올바른 인간을 만들어야 하는가의 문제와 연관된 실천 원칙이 사유의 근본 원칙이 되었고 ‘어진 정치(仁政)’를 실행해야 한다. 한편 명가는 개념론을 제시하였고, 왕양명은 ‘치양지설(致良知設)’, ‘지행합일설’을 명확하게 주장했다.

 

 

2. 진지 (眞知)란 무엇인가?

 

 

유가는 실천하는 가운데 ‘진지(眞知)’를 구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몸으로써 얻어야 하는 지식이며, 개인의 실천과 경험에서부터 나온 것으로 진실로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유가에서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지식을 장악하고 자기의 ‘진지’로 바꾸기 위해서 실천이 필수적이라는 것으로 이는 “배우고서 때때로 익히는 것(學而時習之)”라고 할 수 있다. 정이는 담호색변(谈虎色变) 예화에서 진지와 상지(常知)를 구분했다. 진지는 “체험에 바탕하여(着實體驗)” 얻은 지식이며 “체험에 바탕했다“는 것은 ”몸소 그 방면을 경험한 것(親厲其域)“, 곧 몸소 실천한 것이다. 진지와 상지는 자신에게서 얻었느냐(得之于己), 진정으로 자기의 내재 체험에 속하느냐 여부로써 구분한다. 한편 도가는 ”오직 마음으로 일할 뿐 눈으로 보지 않기(以神遇而不以目視)“로 설명되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우화, 착륜(斲輪)의 고사를 예로 들었다. 불교의 선종 역시 ”부처를 꾸짖고 각종파의 시조를 질책한다(訶佛駕祖)“는 구절로 문자에 얽매이지 말자는 말을 전한다.

 

 

3. 위기 (爲己)와 자위 (自爲)

 

 

위기의 학문은 자위의 학문, 즉 자아 실현을 위한 실천 철학이다. 공자는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며 자신의 인격 완성을 추구하는 위기,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위인을 구별한다. 이는 이기적, 이타적이란 설명과는 다르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일종의 도덕자주론이며, 실천적으로는 자아 수양, 자아 완성의 ‘위기’의 학문이다. 위기의 중요한 특징은 ‘안심입명(安身立命)’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으로 어떻게 자기의 몸에서 인생의 이상을 실현하고 인생의 귀결점을 찾느냐 하는 것이다. 즉 자아에 대한 즐김이다. 현세의 인생 가운데서 인(仁)을 구하고 도(道)를 구하며 이상적인 경지를 실현해야 한다고 보는 유가의 사유 방식은 중국 철학의 주체적 사유의 실천적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실천적 특징에 따라 전통 철학은 내세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현세의 행복을 구하며, 피안에 호소하기보다 자신에게서 구한다. 한편 도가는 ‘도’라는 추상 관념을 제시하며 “도의 체득(得道)”를 주장하며 “신체를 보호하고 생명을 온전히 하기(保身全生)”를 주장한다. 대표적 학자 노자, 장자의 학설은 출세주의적이 아닌 현세주의적이다. 한편 자위, 위기라는 현세적 정신이 극단으로 표현되면 ‘위아(爲我)’로 나아간다. 극단적 개인주의적 사유를 나타내는 위아는 양주파의 주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중국화된 불교 선종은 “장작을 지고 쌀을 옮기는 것도 오묘한 도가 아닌 것이 없다(担柴運米)”라고 주장했다. 선종은 ‘비아(非我)’, ‘무아(無我)’의 종교가 아니라 ‘유아(有我)’, ‘위아(爲我)’의 종교다.

 

 

◎ 제5장 자아초월형의 형이상학적 사유 (自我超越型 形上思惟)

 

 

1. 형이상자 (形而上者)

 

 

중국철학은 일종의 인간을 배우고자 하는 ‘인학형이상학(人學形而上學)’이며, 중국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내재적인 자아 초월을 주장하고, 피안의 외재적 초월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학은 『역전』에서 형이상학적 사유로 접어들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자’는 형제와 형상이 없는 보편적 원리이자 세계 만물의 근본 존재다. 이학가들은 리(理)의 주요한 의미 ‘소이연지리(所以然之理)’는 존재의 원칙, ‘소연당지리(所當然之理)’는 당위의 법칙이다.

도가는 최초로 형이상학적 사유를 시작한 학파로 ‘도(道)’는 지각해서 파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추상물이었다. “만물의 “근본(萬物之宗)”인 도는 되돌아오는 특징이 있다. 즉 도가 운동과 변화의 근원임을 설명했다. 노자와 장자에 뒤를 이어 위진남북조 시대 현학자 왕필, 곽상은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왕필은 도와 리를 사물의 근본으로 제시하였고, 곽상은 현상과 본질의 관계를 제시하며 숭유론(崇有論)을 제창했다. 불교에서는 천태종의 실성론(實性論), 화엄종의 ‘이사론(理事論)’, 선종의 '체용론(體用論)‘을 중점적으로 본체와 현상, 형이상과 형이하의 차별을 없애려 했다.

 

 

 

2. 천도 (天道)와 성명 (性命)

 

‘천인합일(天人合一)’로 대표되는 중국 전통 철학은 ‘천도(天道)’, ‘성명(性命)’에 주목한다. 하늘(天), 천도(天道)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천도는 형이상학적 의미로 자연계 형이상의 도, 우주의 본체다. 그리고 성명은 하늘의 명을 받아 인간이 본성으로 삼은 것으로 하늘의 명령이란 상제가 인간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천도가 유행하여 인간에게 천지지성을 부여한 것이다. 성은 원래 명에서 기원하며, 하늘의 명은 성으로 실현된다. 성명의 합일이 바로 천인합일의 ‘성명지리(性命之理)’다. 이학에서는 ‘천인합일’의 형이상학적 사유가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는데 인간의 본체를 무극이면서 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살핀 주돈이, 하늘은 곧 리라고 생각한 정호 등이 이를 뒷받침했다.

 

 

3. 참된 나를 실현함 (眞我實現)

 

 

‘진아’란 주체와 객체를 대립시키지 않고 주체와 객체를 통일시킨 상태에 도달한 형이상자면서, 감성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로서의 형이하자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부단히 자아를 초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음이 하는 것을 좆아도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는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진아‘를 실현한 경지를 말한다. 맹자 역시 ’대인지학(大人之學)‘은 자아 초월의 형이상학이다. 즉 대장부(大丈夫) 정신은 바로 자아를 초월하고 새로운 경지로 승화하는 단계다. 초월은 외재적인 초월이 아니라 내재적 초월, 비아의 피안으로의 초월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초월이다. 이학자들도 ’천지지성(天地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구별한다. 장재는 기질지성과 천지지성을 형이하와 형이상으로 구분했고 천지지성에 도달하는 자아초월을 제시한다. 정호는 ’진아‘와 ’자아‘는 분리될 수 없지만 감성적 자아를 초월해서 진아를 실현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4. 궁극으로 복귀함 (復歸于極)

 

 

자아초월형 형이상학적 사유는 도가와 불가철학에서도 존재한다. 도가의 노자(老子)는 일찍이 ‘무극으로 되돌아간다(復歸于無極)“는 명제를 제시하여 최초로 초월적 사유를 운용한다. ‘어린아이로 돌아가라(復歸于嬰兒)’, ‘소박으로 돌아가라(復歸于樸)’는 명제는 이러한 무극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즉 자연 소박의 성과 도덕 본체를 종합한 것으로 노자가 말하는 무극(無極)이란 자연계의 근본존재이자 보편적인 규율로 볼 수 있다. 한편 장자(莊子)는 인간의 마음에서 ‘이루어진 마음(成心)’을 이야기하며 옳음과 그름의 대립 중간에서 진정한 초월을 실현 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는 ‘성심’이 있으면 ‘득도’할 수 없고 득도하지 못하면 진인(眞人)이 될 수 없으므로 ‘무심(無心)’의 마음에 주목했다. 다시 말해 대개 진인이 있음 다음이라야 참된 앎이 있고, 형체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형체를 초월하며, 자아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자아를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근본적인 특징이 있다. 한편 ‘무’를 강조하고 노자 중심을 계승한 왕필은 자연으로 돌아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인성을 실현하고, ‘진아’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유’를 강조한 장자 중심 곽상은 현상계의 존재를 중시하며, 자연의 만물 본래의 모습이라 주장했다.

 

 

5. 부처와 조사를 초월함 (超佛越祖)

 

 

중국 대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심체(心體), 심종(心宗), 심용(心用)의 ‘일심법(一心法)’, ‘일심이문(一心二門)’의 학설을 제시한다. 일심법은 마음이 절대적인 우주 본체로서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법,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는 본체계를 포함한다는 내용이다. 한편 이문이란 형이상, 형이하의 두 차원으로 구분한 것이다. ‘심진여상(心眞如相)’은 진여 불성으로 절대적으로 평등하고 어떤 차별이 없는 것이다. ‘심생멸상(心生滅相)’은 생멸 변화의 구체적인 존재로 절대 개체의 생멸심(生滅心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진여심은 마음의 본체(心體)이고 청정심(淸淨心)이다. 생멸심은 마음의 작용이고 염심이다.

천태종(天台宗)의 지의는 마음의 본체를 표현하며 ‘관심법(觀心法)’으로 제시했다. 이는 심체를 돌이켜 바라보고 내부를 관조하는 것으로써 심체는 보편적 존재이므로 유한의 개체를 초월하게 된다. 한편 화엄종은 성체설(性體設)에서 성리(性理)를 현상계를 초월한 절대 본체로 설명하며,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염정심(染淨心)을 자성이 없는 환상적이고 거짓된 현상으로 설명한다. 법장은 깨닫지 못함은 차안(此岸)이 되고 깨달음은 피안(彼岸)이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차안과 피안의 구별은 이해함(了)과 이해하지 못함(不了)의 차이다. 그리고 선종에 이르러 이러한 부처와 조사를 초월함(超佛越祖)은 완성되는데 이른바 “마음을 알고 본성을 바라봄(識心見性)”으로 요약된다. “스스로 본심을 알고 스스로 본성을 보는 것”으로 “자신이 깨닫고 자신을 수양할 것(自悟自修)”을 강조한다. 자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자아를 초월하는 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자재인’ 또는 ‘해탈인(解脫人)’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넘어선’ 예다. 선종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는 ‘서쪽 지방’에 있지 않고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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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 개정판 동서문화사 월드북 100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전양범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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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재의 일상성 - 잡담, 호기심, 애매함.

 

 

 

 

0. 서론


 

존재의 물음에는 단순히 답이 부족할 뿐 아니라, 물음 그 자체도 불투명하고 방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일은, 우선은 먼저 문제설정을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다자인(Dasain)'이라는 단어로 특별한 존재 방식을 언급한다. ‘다자인’은 동사 'dasein, 존재하다.’의 부정형으로 독일어 ‘da(거기에)’와 ‘sein(있다)’으로 이루어졌다. 즉 ‘거기에 있음’이라는 뜻인데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키기 위해 ‘다자인’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현존재를 대표하는 용어는 ‘세계-내-존재’ (세계-속에-있음)이다. 내-존재라는 말로 표현하려는 바는 세계 속 주변 사물들을 이해하고 관계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가운뎃줄을 삽입한 이유 역시 세계와 현존재가 분리할 수 없는 통일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한편 또 다른 특징으로 하이데거는 비본래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그들-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걸 뜻한다. ‘그들’은 현존재가 거주하는 일정한 세계 속에서 사회적, 문화적 관습, 기대, 생활 방식에 함몰되어 고유한 자아와 가능성을 모른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특징은 ‘추락’이라는 단어로도 설명되는데 추락은 ‘서로-함께-있음’으로 빠져드는 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 ‘서로-함께-있음’을 지배하는 요소가 바로 잡담, 호기심, 애매함이다.

 

 

1. 잡담 (Gerede)


 

‘빈말 또는 잡담(Gerede)’이라는 용어는 여기서 ‘깎아내릴’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은 술어적으로 하나의 적극적인 현상을 의미한 것으로, 일상적인 현존재가 이해하며 해석하는 존재양식이다. 대개 이야기는 말로 표현되며, 언제나 이미 말로 표현되어 버린다. 이야기는 언어이다.

 

 

잡담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늬앙스를 띄고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잡담을 깎아내릴 뜻으로 사용하지 않고, 일상적인 현존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존재양식의 형태로 보았다. 잡담은 우선 입과 관련 있는 용어다. 일상적 현존재의 삶은 대부분 말함, 이야기함으로 이루어지며, 또한 그 말해진 것, 이야기된 것으로 구성된다. 순간순간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더욱 타인의 말함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다. 말은 대개 밖으로 말해지며, 이미 언제나 밖으로 말해져 왔다. 하지만 현존재는 대부분 말해진 그것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단지 피상적인 이해에 머문다. 그저 퍼뜨려 말하고 뒤따라 말하는 방법으로 함께 나누며 이러한 단계를 거치며 점점 권위를 갖는다. 빈말의 뿌리 없는 성격은 빈말이 공공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조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일상적 삶에서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TV 프로그램, 인터넷, 잡지 등에서는 진정으로 결단하고 책임지지 않은 채 누군가를 모방하고 확대하는 잡담만 재생산된다. 연예인 루머, 성접대 파문, 유명인사 차량 사고 등 근원적 발생지나 진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선정성과 상품화의 논리로 가득 찬 최근 대중매체의 행보를 보면 반성적 이해가 꼭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2. 호기심(Neugier)


 

시야의 근본기구는, ‘보는 기능’에 대한 일상성의 어떤 특유한 존재경향에서 표시된다. 우리는 그 같은 시야의 존재경향을 ‘호기심’이라는 술어로 부른다. 이 술어의 특징적인 일로는 보는 기능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특유한 방법으로 인식하면서 만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잡담이 입에 관련되었다면 호기심은 눈과 관련된 용어다. 하이데거는 일상적 현존재를 특징짓는 규정들 중 하나로 ‘호기심’에 주목했다. 호기심은 곧 보는 행위, 시야의 일상적 존재양상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인식도 이미 ‘보는 욕망’에 의거하여 파악되었다. 그는 나아가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며 이러한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이라고 칭한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호기심은 특이하게 가까운 것에는 머물지 않는 특성을 지닌다. 가장 친근한 손안의 것으로부터 떠나서, 먼 알지 못하는 세계 속으로 향함을 의미하는데 세계의 외관에 마음이 이끌리는 경향을 지닌다. 항상 새로운 것과 만나는 교체에 따른 동요와 흥분이 동반되는데, 호기심은 타우마제인(taumazein, 경이)과는 다르다. 타우마제인이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관찰하는 일이라면, 호기심은 모든 일을 처리할 때 노선, 수단, 올바른 기회, 적합한 순간을 부여하는 둘러봄이 본연의 성격을 상실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호기심을 통한 욕망의 해결은 최근 소비 사회의 경향과 유사하다. 『소유냐, 존재냐』에서 에리히 프롬이 인간 삶의 존재 양식이 ‘소유’라고 주목한 것처럼 인간은 호기심이란 욕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소비한다. 이러한 소유의 양식에 매몰되며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회피하게 되었고, 새로운 소유물을 찾아내려 애쓴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로부터 도망가려고 할수록 인간은 공허함을 느낀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아내지 못할 때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 즉 죽음에 마주할 때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를 회피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잊어버리기 위해 고유한 ‘자기 자신’의 세계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한편 잡담과 호기심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호기심은 잡담의 화제를 제공하고, 잡담은 호기심의 진로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3. 애매함(Zweideutigkeit)

 

 

애매성은 명백하게 위장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비로소 발생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개개의 현존재에 의해 비로소 근원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애매성은 어떤 세계 속에 ‘던져진’ 상호존재로서의 상호존재 속에 이미 잠재해 있다.

 

 

잡담과 호기심이 이상과 같은 것이라면 거기에서 이해되어 드러나는 의미라는 것도 결코 진짜가 아니다. 일상성의 해석은 ‘애매’하게 왜곡될 수 있다. 애매함은 자기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불분명한 특성을 지닌다. 애매성의 지배를 받는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무책임하게 얼버무리거나 상황을 회피한 채 도리어 화를 내기도 한다. 애매성은 현존재의 진정한 자기 이해를 가로막으며 세계를 향해 파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 관련하는 현존재에도 파급되어 있다. 현존재는 언제나 애매하게 ‘거기에’ 존재한다. 즉, 서로 함께 있음의 공공성 안에 가장 요란한 잡담과 가장 솜씨 좋은 호기심과 연관된다. 일이 공공적으로 해석될 때 애매성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앞서 말한 빈말과 호기심을 살펴보면 선명하게 하이데거의 사유를 알아볼 수 있다. 현존재는 일을 해석할 때 애매한데도 앞질러서 빈말하고 호기심으로 예감한 것을 진짜 사실이라고 떠벌리고, 그 예감대로의 수행과 행위가 때늦고 하찮다는 각인을 찍는다.

애매함은 이미 하나의 세계 안에 내던져져 있는, 서로 함께 있음 속에 들어 있다. 한편 이러한 애매함이 공공적으로 은폐되어 있지만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서 확증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현존재는 애매성에 기반한 이러한 해석이 현존재의 존재 양식에 해당된다는 사실에 저항하는 경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4. 퇴락(Verfallen)과 피투성(Geworfenheit)

 

빈말과 호기심 그리고 애매성은 현존재의 일상적인 자신, 즉 ‘현(現)’인 존재양식을 결정짓는다. 말하자면 세계-내-존재가 세계 속의 존재로서 있는 존재양식을 성격짓는다. 이들 세 가지 성격은 현존재에서 볼 수 있는 실존론적인 규정성이기 때문에, 눈 앞에 존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를 함께 구성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언급한 잡담, 호기심, 애매성은 현존재의 ‘무너짐, 퇴락’이라고 부르는 일상적인 존재의 근본 양식이다. 현존재의 퇴락성은 현존재 자체가 자기존재로서 귀속하는 세계로 퇴락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퇴락은 도덕적 퇴락, 죄에 빠져 있다거나 하는 등의 어두운 면을 규정하는 종교적 늬앙스를 지니지만, 하이데거가 말하는 타락은 ‘존재론적 운동개념’을 의미한다. 즉 퇴락은 잡담, 호기심, 애매성에 의해 구성되는 일상적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채 세계 속에 몰입해 살아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세계-내-존재의 한 실존론적 양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퇴락이라는 용어대신 '빠져 있음'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빠져 있음은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우리의 던져져 있음의 자동적이고 직접적인 귀결, 따라서 인간의 기초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하이데거는 이러한 비본래적 상태, 빠져 있음이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고 설명한다. 현존재가 기존의 실존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적인 환경을 해석하고 실용적인 관심사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비본래성’을 ‘본래성’보다 악하거나 열등한 개념으로 보지 말고 비본래적인 실존의 특징이 빠져 있음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빠져 있음은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 구조는 현존재의 매일 매일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실존 구조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즉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비본래적인 존재 양태를 깊이 의식하는 과정이 오히려 ‘본래성’의 구조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참고 문헌>

 

- 마르틴 하이데거, 전양범 역, 『존재와 시간』, 동서 문화사, 1992.

-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강연과 논문』이학사, 2008.

- 조형국, 『하이데거의 철학 읽기 : 일상/기술/무(無)의 사건』, 누미노스, 2010.

- 마이클 와츠, 전대호 역, 『30분에 읽는 마르틴 하이데거』, 랜덤하우스중앙, 2006.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

 

 

 

 

0. 서론


 

존재론적인 물음은 실증과학과 같은 존재적인 물음에 비해 더 근원적인 물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존재자의 존재를 물으면서 존재일반의 의미를 구명하지 못한다면 역시 그 자체도 소박함과 불투명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이데거는 정답을 내리기보다 물음을 좋아했던 철학자다. 그는 훌륭한 저작과 강연이 인정받으며 후설의 ‘현상학적인 아들’로 불리기까지 했다. 『존재와 시간』은 독일어권은 물론 라틴 국가에서도 중요한 작품으로 널리 읽혔지만 애매하고 불명료한 특징 때문에 영미철학에서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는 무화(無化)한다.” 등의 난해한 표현과 번역상의 어려움 때문에 여전히 그의 저서는 악명이 높다. 그는 언어는 이미 상당히 마모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언어적 수단이 마땅치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직접 새롭고 낯선 언어들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다자인(Dasein), 세계-내-존재, 그들-자신 등이 있는데 가운뎃줄이 포함된 복합어 사용 자체에서 오는 난해함과 혼란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1966년 독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하이데거는 나치에 협조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사과하지 않으며 많은 실망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현상학적 존재론은 여전히 매우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후 실존주의 운동, 철학 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존재를 망각한 존재론


 

전통은 본디의 관습을 당연한 것으로서 답습하도록 사람들에게 맡기며, 일찍이 전통적인 범주나 개념이 조금이나마 진정한 방법으로 근원적인‘원천’으로 가려는 통로는 막고 만다. 전통은 이러한 유래까지도 사람들에게 망각시키며, 이렇게 원천으로 되돌아가려는 필연성조차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근대 철학의 출발을 알린 데카르트. 그의 사유의 가장 핵심은 "Cogito, ergo sum."으로 요약된다. 존재자에 대한 탐구를 뜻하는 존재론은 데카르트를 넘어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했다. 존재론이란 명칭 자체는 없었지만 기원전 5세기의 아낙시만데로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은 모두 사물의 존재에 선행하는 무언가를 탐구했다.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사유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이성으로 해답을 찾은 파르메니데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나아가 서양철학사는 발전했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흐름을 ‘존재의 망각’이라고 비판했다. 플라톤 이후 철학자들은 고립된 주체,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구분하며 간극을 만들었고 하이데거는 이를 가리켜 ‘현상의 분열’이라고 말했다. 즉 하이데거가 궁금했던 원초적인 뿌리를 묻지 않고 세계 속의 존재자들과 특징에 관련된 정보만을 제공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서양 철학사는 ‘실체’나 ‘최고의 존재자’를 가리키며 존재를 추적했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가 아닌 존재의 의미를 어떤 궁극적인 원리나, 신적인 절대자, 우등한 행위자에서 찾는 경향성을 보였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주체’, ‘신’, 후설은 ‘순수의식’을 이용하여 설명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이러한 해석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회피할 뿐이며, 모종의 실체 형태를 근원으로 삼거나 초월적인 존재를 추구하기에 존재신학이라고 명명했다.

 


2. 기초존재론

 

 

현존재는 단순히 다른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출현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현존재는 오히려 나라는 존재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나라는 존재 자체와 관계함으로써 존재적으로 구별된다. 그렇다고 본다면 현존재의 존재구성은 그것이 나라는 존재이며, 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존재 관계를 가진다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자신의 존재론이 기존의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기초존재론’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예전의 물음들이 신의 존재, 자유의 존재, 신체와 정신의 분리성, 외부 세계 증명에 몰두했다면 하이데거는 물음 자체를 바꾼다. 그는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기초존재론을 시작한다. 그는 이 질문이 다른 모든 질문에 선행한다고 생각했다. 기초존재론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이 사는 세계와 인간을 구별하지 않았다. 세계-내-존재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존재는 ‘거기’에 있다. 거기는 세계로 현존재의 실존에 영향을 주는 맥락의 총체를 뜻한다. 예를 들면 국가나 문화권, 사회적 환경, 가족, 친구, 직업 등 모든 주변적 영향력과 관계 맺으며 사는 것을 뜻한다. 가운뎃줄까지 삽입하며 세계 내에 내던져진 현존재는 결코 분리되어 살 수 없다고 강조한다. 주변의 세계 속 사물들을 이해하고 관계하고 염려하는 가운데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본 전통 철학의 사유와는 정반대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을 구별하며 존재는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데카르트의 경우 극도로 자신의 논리를 확장시키면 ‘생각하는 나’만 빼고 모두 회의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하이데거는 세계가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닌 함께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

 

 

3.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s)


 

그러나 현존재의 이러한 모든 존재규정은 우리가 세계-내-존재라고 이름 지은 존재구성에 의거하여 아프리오리(앞의 것으로부터)로 간주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현존재 분석론의 올바른 실마리는 이 존재구성을 해석하는 일에 달려 있다.

 

 

하이데거가 거듭 언급하는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s)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그의 사유가 지닌 애매함을 줄여줄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단어를 존재하는 ‘있음’, 존재자들의 본질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존재’가 모든 존재자들 속에 공통으로 깃들여 있는 요소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존재는 분리될 수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는 모든 ‘존재자들’은 동일하다. 하이데거는 『동일성과 차이』에서 이에 대해 더욱 명쾌하게 설명을 한다. “존재에 응답한다.”, “밝히면서 건너옴”이란 표현을 쓰는데, 이는 밝음의 공간인 ‘존재’와 그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것들이 상징하는 ‘존재자’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하이데거는 같은 것으로 사유한다. 존재가 없으면 존재자가 드러나지 않고, 존재자가 없으면 존재의 의미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망각을 하나의 긍정적이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불가피한 조건이라고 생각한 니체와는 다르게 하이데거는 망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4. 시간성


 

현존재의 시간성을 일상성, 역사성 및 내시성으로 개발함으로써 비로소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론의 뒤섞임을 향한 가차 없는 통견이 주어진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사실적으로는 세계 내부에서 만나는 존재자와 함께 또한 그 존재자 아래서 실존하고 있다.

 

 

한편 하이데거가 강조한 ‘현존재’는 결국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는 존재가 시간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란 질문을 던졌다. 세계 속, 맥락 속의 인간은 결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공간 역시도 시간의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분리할 수 없으며, 우리의 존재 방식의 중요한 부분이다.”라는 언급에서도 다시 시간성이 지닌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단선적인 시간이 아닌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하는 3차원적인 시간 지대에 산다고 생각했다. 특히 미래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미래가 과거의 원천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결국 죽음이라는 하나의 결과로 치닫기 때문에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하이데거의 사유는 허무주의를 극도로 경계했다. 허무주의가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무의미하다고 보았다면 하이데거는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물었으며 불안이라는 감정,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오히려 본래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세계-내-존재가 결코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듯이 시간 역시 3차원이 함께 통일되어 분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가지는 ‘의미’는 오직 우리 삶의 전체 전개 과정, 총체적 맥락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참고 문헌>

 

- 마르틴 하이데거, 전양범 역, 『존재와 시간』, 동서 문화사, 1992.

-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강연과 논문』이학사, 2008.

- 조형국, 『하이데거의 철학 읽기 : 일상/기술/무(無)의 사건』, 누미노스, 2010.

- 마이클 와츠, 전대호 역, 『30분에 읽는 마르틴 하이데거』, 랜덤하우스중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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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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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관계가 없는 우연은 이야기를 이끌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플롯의 고리를 느슨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작가가 보여주려고 하는 세계, 그 세계를 구현하지 않는 에피소드는 여지없이 퇴출된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 자기 인생의 작가라는 권능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피소드의 형태로 등장하여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버스 가운데 어떤 것이 일회성 우연이며 어떤 것이 내 인생의 플롯으로 가는 노선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을 포착하고 무엇을 흘려보내야 할까."

 

가장 친숙한 소재로 글을 쓴다는 사실은 양날의 검과 같다. 잘 알고 있는 것을 묘사하는 손쉬운 방법은 어찌 보면 유혹과도 같다. 풍부한 경험과 다양한 천태만상은 글감의 고갈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하면 너무나 식상하고, 작가 자신만 공감하는 일기로 전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 은희경은 힘을 빼고, 그냥 생각이 흘러 가는 대로 친숙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바로 ‘작가’ 이야기다. 물론 고리타분하거나 뻔하지 않았다. 소설 전반적으로 요셉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류를 비롯해 다양한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액자 식으로 소설을 여닫는 류의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었고, 소설 막바지의 시나리오 대본 같은 형식도 신선했다. 인과관계가 없는 우연 같아 보이지만, 은희경이 빚어낸 플롯은 느슨하지 않았고, 오히려 끈끈했다.

 

요셉은 한마디로 재수 없는 인간이다. 시종일관 독설을 날리고,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타인을 평가하고 속단한다. 냉소적인 인생으로 온갖 위악을 행하는 그를 졸졸 쫓아다니는 여러 여인이 이해할 수 없었다. 요셉이 멋들어지게 작가나 위인의 명언 따위를 조용히 읊조리면 그를 향한 동경의 눈빛을 날리는 도경. 그녀들의 애정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공허함에 대한 대리 만족이었을 것이다. 요셉은 지인 J의 장례식에서도 택시비, 부조금을 따지며 자신의 빈소를 상상한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현대인 대부분이 감추려 애쓰는 태연한 인생의 한 조각이었다. 모두가 숨기고 비난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태도를 그저 적나라하게 드러낸 캐릭터가 요셉 같았다. 비난하면서도 묘하게 부러움이 느껴지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류는 신비로우면서,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그녀는 사실 작품의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이름과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 가족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 류의 가족을 소재로 은희경이 단편 소설을 완성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달라서 서로에 끌렸는지도 모르겠지만 둘은 류 인생을 조화롭게 빚어냈다. 어머니는 비행기 기류처럼 자유롭게 흘러가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반대로 아버지는 오페라 속 비극적인 여인의 이름에서 ‘류’를 불렀다. 누군가가 맞고 틀리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류 인생을 관통하는 고독과 매혹, 이성과 감성, 논리와 충동의 얽히고설킨 화합을 의미했다.

 

"언제부터인가 까페 안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광장에 모이지도 밀실에 숨어들지도 않았다. 남의 집을 방문할 필요도 없었다. 대신 까페에 자리를 잡았다. 실내는 쾌적했으며 먹고 마실 것이 준비돼 있었고 참견하는 사람도 없었다. 집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사람들끼리 용건 없이 만나 가벼운 개인사를 공유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데이트하는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각기 사진을 찍고 음악을 듣고 스마트폰의 앱을 뒤적였다. 따로 노는 것 같지만 애인을 다른 사람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공부를 하든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든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와 달라서 분명 혼자는 아니었다. 그들 모두는 같은 장소에 함께 있었지만 독립적이었다. 심심할 수는 있지만 고독해 보이진 않았다. 어쩌면 각자 눈에 보이지 않는 부스 안을 들어가서 비용을 지불하고 그 댓가로 고독에 대한 통각을 차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문단의 썩은 권력행태나 과도한 상업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진 못했다. 독립적으로 튀어나와 현실을 비꼬는 요셉의 독설 행진도 공감이 되기보다는 그저 웃고 넘길 정도였다. 하지만 ‘까페’와 ‘백화점’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매우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여러 까페를 전전하며 글을 써내려가서인지 너무나 현실적이고 태연한 까페 안 풍경이 그려졌다.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이어폰을 끼고, 노트북을 켜고, 스마트폰을 하며. 다수의 공간 속에서 개인은 고독을 즐긴다.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커플도 다를 게 없다. 함께 있는 이유는 서로를 다른 이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일 뿐이다. 각자 노래를 듣고, 페이스북을 하며 개별적으로 시간을 흘려보낸다. 기술의 진보로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심리적 거리는 어마어마하게 멀어졌다. 그나마 <태연한 인생>을 함께 읽은 후 잠시나마 생각을 공유할 기회가 생길 수 있으면 좋겠다.

소설에 서사가 실종됐다고 비판하는 평론가들말야, 그렇게 고정관념에 빠져서 소설을 제대로 읽겠어? 신간기사 쓸 때 보도자료 보고 요약하는 기장랑 똑같아. 소설에서 줄거리만 보는 거지. 그게 뭐냐면 그, 줄거리 먼저 쓰게 돼 있는 독후감 노트라고 있지? 그거 잘 활용해서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 가서, 그래서 신문사랑 대학원 시험에 붙은 거라구. 분명 둘이 친구 사이일걸. 신문이나 보는 머리에서 뭐가 나오겠냐. 아, 이건 김수영이 한 말이야. 신문이란건 볼 필요가 없어. 오늘 신문이 일년 전 신문하고 하나도 안 다르거든. 참, 그렇지, 어제 신문하고는 조금 다르지. 평론도 읽을 필요 없어. 평론가들은 작가가 뭘 썼는지는 하나도 안 궁금해. 자기가 본 게 맞는지 그것만 찾아가면서 읽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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