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 개정판 동서문화사 월드북 100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전양범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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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재의 일상성 - 잡담, 호기심, 애매함.

 

 

 

 

0. 서론


 

존재의 물음에는 단순히 답이 부족할 뿐 아니라, 물음 그 자체도 불투명하고 방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일은, 우선은 먼저 문제설정을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다자인(Dasain)'이라는 단어로 특별한 존재 방식을 언급한다. ‘다자인’은 동사 'dasein, 존재하다.’의 부정형으로 독일어 ‘da(거기에)’와 ‘sein(있다)’으로 이루어졌다. 즉 ‘거기에 있음’이라는 뜻인데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키기 위해 ‘다자인’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현존재를 대표하는 용어는 ‘세계-내-존재’ (세계-속에-있음)이다. 내-존재라는 말로 표현하려는 바는 세계 속 주변 사물들을 이해하고 관계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가운뎃줄을 삽입한 이유 역시 세계와 현존재가 분리할 수 없는 통일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한편 또 다른 특징으로 하이데거는 비본래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그들-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걸 뜻한다. ‘그들’은 현존재가 거주하는 일정한 세계 속에서 사회적, 문화적 관습, 기대, 생활 방식에 함몰되어 고유한 자아와 가능성을 모른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특징은 ‘추락’이라는 단어로도 설명되는데 추락은 ‘서로-함께-있음’으로 빠져드는 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 ‘서로-함께-있음’을 지배하는 요소가 바로 잡담, 호기심, 애매함이다.

 

 

1. 잡담 (Gerede)


 

‘빈말 또는 잡담(Gerede)’이라는 용어는 여기서 ‘깎아내릴’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은 술어적으로 하나의 적극적인 현상을 의미한 것으로, 일상적인 현존재가 이해하며 해석하는 존재양식이다. 대개 이야기는 말로 표현되며, 언제나 이미 말로 표현되어 버린다. 이야기는 언어이다.

 

 

잡담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늬앙스를 띄고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잡담을 깎아내릴 뜻으로 사용하지 않고, 일상적인 현존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존재양식의 형태로 보았다. 잡담은 우선 입과 관련 있는 용어다. 일상적 현존재의 삶은 대부분 말함, 이야기함으로 이루어지며, 또한 그 말해진 것, 이야기된 것으로 구성된다. 순간순간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더욱 타인의 말함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다. 말은 대개 밖으로 말해지며, 이미 언제나 밖으로 말해져 왔다. 하지만 현존재는 대부분 말해진 그것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단지 피상적인 이해에 머문다. 그저 퍼뜨려 말하고 뒤따라 말하는 방법으로 함께 나누며 이러한 단계를 거치며 점점 권위를 갖는다. 빈말의 뿌리 없는 성격은 빈말이 공공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조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일상적 삶에서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TV 프로그램, 인터넷, 잡지 등에서는 진정으로 결단하고 책임지지 않은 채 누군가를 모방하고 확대하는 잡담만 재생산된다. 연예인 루머, 성접대 파문, 유명인사 차량 사고 등 근원적 발생지나 진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선정성과 상품화의 논리로 가득 찬 최근 대중매체의 행보를 보면 반성적 이해가 꼭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2. 호기심(Neugier)


 

시야의 근본기구는, ‘보는 기능’에 대한 일상성의 어떤 특유한 존재경향에서 표시된다. 우리는 그 같은 시야의 존재경향을 ‘호기심’이라는 술어로 부른다. 이 술어의 특징적인 일로는 보는 기능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특유한 방법으로 인식하면서 만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잡담이 입에 관련되었다면 호기심은 눈과 관련된 용어다. 하이데거는 일상적 현존재를 특징짓는 규정들 중 하나로 ‘호기심’에 주목했다. 호기심은 곧 보는 행위, 시야의 일상적 존재양상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인식도 이미 ‘보는 욕망’에 의거하여 파악되었다. 그는 나아가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며 이러한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이라고 칭한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호기심은 특이하게 가까운 것에는 머물지 않는 특성을 지닌다. 가장 친근한 손안의 것으로부터 떠나서, 먼 알지 못하는 세계 속으로 향함을 의미하는데 세계의 외관에 마음이 이끌리는 경향을 지닌다. 항상 새로운 것과 만나는 교체에 따른 동요와 흥분이 동반되는데, 호기심은 타우마제인(taumazein, 경이)과는 다르다. 타우마제인이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관찰하는 일이라면, 호기심은 모든 일을 처리할 때 노선, 수단, 올바른 기회, 적합한 순간을 부여하는 둘러봄이 본연의 성격을 상실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호기심을 통한 욕망의 해결은 최근 소비 사회의 경향과 유사하다. 『소유냐, 존재냐』에서 에리히 프롬이 인간 삶의 존재 양식이 ‘소유’라고 주목한 것처럼 인간은 호기심이란 욕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소비한다. 이러한 소유의 양식에 매몰되며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회피하게 되었고, 새로운 소유물을 찾아내려 애쓴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로부터 도망가려고 할수록 인간은 공허함을 느낀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아내지 못할 때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 즉 죽음에 마주할 때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를 회피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잊어버리기 위해 고유한 ‘자기 자신’의 세계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한편 잡담과 호기심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호기심은 잡담의 화제를 제공하고, 잡담은 호기심의 진로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3. 애매함(Zweideutigkeit)

 

 

애매성은 명백하게 위장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비로소 발생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개개의 현존재에 의해 비로소 근원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애매성은 어떤 세계 속에 ‘던져진’ 상호존재로서의 상호존재 속에 이미 잠재해 있다.

 

 

잡담과 호기심이 이상과 같은 것이라면 거기에서 이해되어 드러나는 의미라는 것도 결코 진짜가 아니다. 일상성의 해석은 ‘애매’하게 왜곡될 수 있다. 애매함은 자기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불분명한 특성을 지닌다. 애매성의 지배를 받는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무책임하게 얼버무리거나 상황을 회피한 채 도리어 화를 내기도 한다. 애매성은 현존재의 진정한 자기 이해를 가로막으며 세계를 향해 파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 관련하는 현존재에도 파급되어 있다. 현존재는 언제나 애매하게 ‘거기에’ 존재한다. 즉, 서로 함께 있음의 공공성 안에 가장 요란한 잡담과 가장 솜씨 좋은 호기심과 연관된다. 일이 공공적으로 해석될 때 애매성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앞서 말한 빈말과 호기심을 살펴보면 선명하게 하이데거의 사유를 알아볼 수 있다. 현존재는 일을 해석할 때 애매한데도 앞질러서 빈말하고 호기심으로 예감한 것을 진짜 사실이라고 떠벌리고, 그 예감대로의 수행과 행위가 때늦고 하찮다는 각인을 찍는다.

애매함은 이미 하나의 세계 안에 내던져져 있는, 서로 함께 있음 속에 들어 있다. 한편 이러한 애매함이 공공적으로 은폐되어 있지만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서 확증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현존재는 애매성에 기반한 이러한 해석이 현존재의 존재 양식에 해당된다는 사실에 저항하는 경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4. 퇴락(Verfallen)과 피투성(Geworfenheit)

 

빈말과 호기심 그리고 애매성은 현존재의 일상적인 자신, 즉 ‘현(現)’인 존재양식을 결정짓는다. 말하자면 세계-내-존재가 세계 속의 존재로서 있는 존재양식을 성격짓는다. 이들 세 가지 성격은 현존재에서 볼 수 있는 실존론적인 규정성이기 때문에, 눈 앞에 존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를 함께 구성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언급한 잡담, 호기심, 애매성은 현존재의 ‘무너짐, 퇴락’이라고 부르는 일상적인 존재의 근본 양식이다. 현존재의 퇴락성은 현존재 자체가 자기존재로서 귀속하는 세계로 퇴락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퇴락은 도덕적 퇴락, 죄에 빠져 있다거나 하는 등의 어두운 면을 규정하는 종교적 늬앙스를 지니지만, 하이데거가 말하는 타락은 ‘존재론적 운동개념’을 의미한다. 즉 퇴락은 잡담, 호기심, 애매성에 의해 구성되는 일상적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채 세계 속에 몰입해 살아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세계-내-존재의 한 실존론적 양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퇴락이라는 용어대신 '빠져 있음'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빠져 있음은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우리의 던져져 있음의 자동적이고 직접적인 귀결, 따라서 인간의 기초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하이데거는 이러한 비본래적 상태, 빠져 있음이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고 설명한다. 현존재가 기존의 실존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적인 환경을 해석하고 실용적인 관심사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비본래성’을 ‘본래성’보다 악하거나 열등한 개념으로 보지 말고 비본래적인 실존의 특징이 빠져 있음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빠져 있음은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 구조는 현존재의 매일 매일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실존 구조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즉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비본래적인 존재 양태를 깊이 의식하는 과정이 오히려 ‘본래성’의 구조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참고 문헌>

 

- 마르틴 하이데거, 전양범 역, 『존재와 시간』, 동서 문화사, 1992.

-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강연과 논문』이학사, 2008.

- 조형국, 『하이데거의 철학 읽기 : 일상/기술/무(無)의 사건』, 누미노스, 2010.

- 마이클 와츠, 전대호 역, 『30분에 읽는 마르틴 하이데거』, 랜덤하우스중앙, 2006.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

 

 

 

 

0. 서론


 

존재론적인 물음은 실증과학과 같은 존재적인 물음에 비해 더 근원적인 물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존재자의 존재를 물으면서 존재일반의 의미를 구명하지 못한다면 역시 그 자체도 소박함과 불투명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이데거는 정답을 내리기보다 물음을 좋아했던 철학자다. 그는 훌륭한 저작과 강연이 인정받으며 후설의 ‘현상학적인 아들’로 불리기까지 했다. 『존재와 시간』은 독일어권은 물론 라틴 국가에서도 중요한 작품으로 널리 읽혔지만 애매하고 불명료한 특징 때문에 영미철학에서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는 무화(無化)한다.” 등의 난해한 표현과 번역상의 어려움 때문에 여전히 그의 저서는 악명이 높다. 그는 언어는 이미 상당히 마모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언어적 수단이 마땅치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직접 새롭고 낯선 언어들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다자인(Dasein), 세계-내-존재, 그들-자신 등이 있는데 가운뎃줄이 포함된 복합어 사용 자체에서 오는 난해함과 혼란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1966년 독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하이데거는 나치에 협조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사과하지 않으며 많은 실망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현상학적 존재론은 여전히 매우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후 실존주의 운동, 철학 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존재를 망각한 존재론


 

전통은 본디의 관습을 당연한 것으로서 답습하도록 사람들에게 맡기며, 일찍이 전통적인 범주나 개념이 조금이나마 진정한 방법으로 근원적인‘원천’으로 가려는 통로는 막고 만다. 전통은 이러한 유래까지도 사람들에게 망각시키며, 이렇게 원천으로 되돌아가려는 필연성조차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근대 철학의 출발을 알린 데카르트. 그의 사유의 가장 핵심은 "Cogito, ergo sum."으로 요약된다. 존재자에 대한 탐구를 뜻하는 존재론은 데카르트를 넘어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했다. 존재론이란 명칭 자체는 없었지만 기원전 5세기의 아낙시만데로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은 모두 사물의 존재에 선행하는 무언가를 탐구했다.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사유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이성으로 해답을 찾은 파르메니데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나아가 서양철학사는 발전했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흐름을 ‘존재의 망각’이라고 비판했다. 플라톤 이후 철학자들은 고립된 주체,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구분하며 간극을 만들었고 하이데거는 이를 가리켜 ‘현상의 분열’이라고 말했다. 즉 하이데거가 궁금했던 원초적인 뿌리를 묻지 않고 세계 속의 존재자들과 특징에 관련된 정보만을 제공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서양 철학사는 ‘실체’나 ‘최고의 존재자’를 가리키며 존재를 추적했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가 아닌 존재의 의미를 어떤 궁극적인 원리나, 신적인 절대자, 우등한 행위자에서 찾는 경향성을 보였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주체’, ‘신’, 후설은 ‘순수의식’을 이용하여 설명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이러한 해석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회피할 뿐이며, 모종의 실체 형태를 근원으로 삼거나 초월적인 존재를 추구하기에 존재신학이라고 명명했다.

 


2. 기초존재론

 

 

현존재는 단순히 다른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출현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현존재는 오히려 나라는 존재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나라는 존재 자체와 관계함으로써 존재적으로 구별된다. 그렇다고 본다면 현존재의 존재구성은 그것이 나라는 존재이며, 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존재 관계를 가진다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자신의 존재론이 기존의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기초존재론’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예전의 물음들이 신의 존재, 자유의 존재, 신체와 정신의 분리성, 외부 세계 증명에 몰두했다면 하이데거는 물음 자체를 바꾼다. 그는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기초존재론을 시작한다. 그는 이 질문이 다른 모든 질문에 선행한다고 생각했다. 기초존재론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이 사는 세계와 인간을 구별하지 않았다. 세계-내-존재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존재는 ‘거기’에 있다. 거기는 세계로 현존재의 실존에 영향을 주는 맥락의 총체를 뜻한다. 예를 들면 국가나 문화권, 사회적 환경, 가족, 친구, 직업 등 모든 주변적 영향력과 관계 맺으며 사는 것을 뜻한다. 가운뎃줄까지 삽입하며 세계 내에 내던져진 현존재는 결코 분리되어 살 수 없다고 강조한다. 주변의 세계 속 사물들을 이해하고 관계하고 염려하는 가운데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본 전통 철학의 사유와는 정반대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을 구별하며 존재는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데카르트의 경우 극도로 자신의 논리를 확장시키면 ‘생각하는 나’만 빼고 모두 회의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하이데거는 세계가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닌 함께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

 

 

3.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s)


 

그러나 현존재의 이러한 모든 존재규정은 우리가 세계-내-존재라고 이름 지은 존재구성에 의거하여 아프리오리(앞의 것으로부터)로 간주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현존재 분석론의 올바른 실마리는 이 존재구성을 해석하는 일에 달려 있다.

 

 

하이데거가 거듭 언급하는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s)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그의 사유가 지닌 애매함을 줄여줄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단어를 존재하는 ‘있음’, 존재자들의 본질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존재’가 모든 존재자들 속에 공통으로 깃들여 있는 요소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존재는 분리될 수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는 모든 ‘존재자들’은 동일하다. 하이데거는 『동일성과 차이』에서 이에 대해 더욱 명쾌하게 설명을 한다. “존재에 응답한다.”, “밝히면서 건너옴”이란 표현을 쓰는데, 이는 밝음의 공간인 ‘존재’와 그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것들이 상징하는 ‘존재자’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하이데거는 같은 것으로 사유한다. 존재가 없으면 존재자가 드러나지 않고, 존재자가 없으면 존재의 의미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망각을 하나의 긍정적이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불가피한 조건이라고 생각한 니체와는 다르게 하이데거는 망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4. 시간성


 

현존재의 시간성을 일상성, 역사성 및 내시성으로 개발함으로써 비로소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론의 뒤섞임을 향한 가차 없는 통견이 주어진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사실적으로는 세계 내부에서 만나는 존재자와 함께 또한 그 존재자 아래서 실존하고 있다.

 

 

한편 하이데거가 강조한 ‘현존재’는 결국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는 존재가 시간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란 질문을 던졌다. 세계 속, 맥락 속의 인간은 결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공간 역시도 시간의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분리할 수 없으며, 우리의 존재 방식의 중요한 부분이다.”라는 언급에서도 다시 시간성이 지닌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단선적인 시간이 아닌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하는 3차원적인 시간 지대에 산다고 생각했다. 특히 미래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미래가 과거의 원천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결국 죽음이라는 하나의 결과로 치닫기 때문에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하이데거의 사유는 허무주의를 극도로 경계했다. 허무주의가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무의미하다고 보았다면 하이데거는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물었으며 불안이라는 감정,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오히려 본래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세계-내-존재가 결코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듯이 시간 역시 3차원이 함께 통일되어 분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가지는 ‘의미’는 오직 우리 삶의 전체 전개 과정, 총체적 맥락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참고 문헌>

 

- 마르틴 하이데거, 전양범 역, 『존재와 시간』, 동서 문화사, 1992.

-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강연과 논문』이학사, 2008.

- 조형국, 『하이데거의 철학 읽기 : 일상/기술/무(無)의 사건』, 누미노스, 2010.

- 마이클 와츠, 전대호 역, 『30분에 읽는 마르틴 하이데거』, 랜덤하우스중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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