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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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동대구행 KTX 2호 차 1번. <여행할 권리> 달랑 한 권을 챙겨서 여행길에 올랐다. 7월 중순이지만 체감 온도는 8월 한여름이었다. 그런 무더위 속에서 피서를 떠나기는커녕 더욱 뜨거운 남쪽으로 떠났다. 게다가 용광로의 도시 포항, 열기가 가득 찬 스틸야드로 떠나는 축구 여행이었다. 열차 시간을 착각해 허겁지겁 열차에 가까스로 오른 후,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배터리 일체형이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를 (내 경험상 100% 단점이다. 최악의 약점.) 아이폰을 충전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무궁화호를 탔던 경험에 비추어 일부러 맨 앞자리로 예매했는데, 큰일이었다. 습관적으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을까 했지만, 결국 책을 펼쳤다.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두 형제. 태어난 곳이 여기고, 친구들도 다 여기에 있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냐며 귀국선에 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두 형제. 그 두 형제 중 한 사람은 북으로 갔고, 또 한 사람은 남에 남았다. 그들에게 리얼리티란 과연 무엇일까? 민족이나 국가나, 그 어떤 것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그들의 어긋난 삶이 다시 맞춰질 수 있을까?

  

<여행할 권리>는 선물 받은 책이다. 국민은행 대학생 홍보대사 7기 생활을 마친 겨울이었다. 1년간 내 능력 밖의 일을 수많은 인연과 함께 해냈다. 거리 홍보, 캘리그라피, 멘토링, 이벤트 진행. 귀찮고 힘들 때도 잦았지만 언제나 즐거웠기 때문에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노란 티를 입었다. 해단식 자리에서 국민은행은 여러 종류의 책을 테이블마다 놓아두고 마음에 드는 걸 골라가도록 준비했다. 1년을 무사히 버텨낸 우리를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날도 늦고 말았다. 가깝지만 먼 서강대, 캠퍼스에서 헤매다 팀원 중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책은 딱 두 권이 남아있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경제 관련 서적과 김연수 산문집 <여행할 권리>. 나는 믿고 보는 작가 ‘김연수’의 유명세와 ‘여행’이 주는 설렘에 끌려 급하게 이 책을 골랐다. 2012년을 가득 채운 짧은 여행을 마무리하는 기분이었다.

  

덧없는 것들만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해도 꿈은 늘 새롭다. 질서정연하게 역을 거쳐가는 기차들의 행렬은 불순했다. 그건 언제나 아이들을 유혹했다. 서울, 수원, 천안, 혹은 대구, 마산, 부산 같은 곳의 삶이 거기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최종적인 꿈은 그런 지명이 찍힌 기차표였다. 그 꿈은 자주 이뤄졌다. 그러므로 역에서 나는 늘 삼십도 정도 위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건 가게 앞에 앉아 구름을 바라보던 시선과 다르지 않았다. 모든 덧없는 것들만이 나를 사로잡았다. 영원히 스쳐갈 뿐인 것들만이.

 

몇 장 넘겨보니 독일 이야기가 나왔다. 유명 작가 김연수가 럭셔리 유럽 여행을 다녀온 뒤 느낀 소소한 에피소드를 모아 놓은 책인 줄 알았다. 문학, 예술과 철학의 고장을 누비며 새로운 영감을 얻고, 다양한 세계 유명 작가와 깊은 토론을 나누는 장면을 상상했다. 하지만 시작은 러시아 우스리스끄만이었다. 실감 나는 연변 사투리가 터져 나오는 국경 지대가 배경이었다. 여행은 시간순이 아닌 장소별로 나뉘어 있었다. 일본 나고야, 독일 밤베르크, 미국 캘리포니아, 중국 지린셩, 서울, 일본 도쿄. 유럽, 아시아, 미주를 넘나드는 김연수의 자유로운 여정이 생기 넘치는 글로 담겨 있었다.

 

 '북한의 핵무기'라는 말을 듣자, 프리드리히의 눈빛이 반짝였다. 결코 열어서는 안되는 상자를 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리드리히는 조금 이따가 그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더 많이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게 마음 편하게 맥주를 마시기는 글렀음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날 새벽 두시까지 나는 사전 없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영어단어를 다 말하고야 말았다.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독일인 앞에서 '북한의 핵무기'같은 단어는 꺼내지 말았어야만 했다고 자책하면서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서 돌아왔다. 하늘엔 여전히 별이 많았다. 마치 거대한 소똥처럼 유럽의 별빛은 크기도 컸다. 

 

나는 '불싯, 쎄자르. 이 세상에 로코코코적인 건 없어.', '아바, 내가 푸르미보다 진실되지 못한 밤비여서가 아니라.' 장이 제일 유쾌하고 흥미로웠다. 개인적 취향이 편차가 있기에, 모든 여행이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물론 독일에서 오가는 대화는 모두 격동적이진 않았지만 소소한 인생사가 담겨있었다. 김연수는 독일에서 '남한에서 온 미스터 킴' 혹은 '밤비'로 불렸다. 스물다섯 살의 신체 건강한 청년, 지독한 짝사랑에 빠져 괴로워하는 푸르미는 가이드다. 무려 '4만 부'가 넘는 판매량을 자랑하는 인기 작가의 조언에 따라 그는 지고지순하게 엽서를 보낸다. 순수한 이십 대 청년은 독일인이라서가 아니라 진심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기에 그저 노력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노르웨이의 숲'을 읽지 않는다. '데미안'을 읽지 않듯이. 그 소설이 인상적이던 어떤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르미는 이제 그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푸르미와 밤비 사이에는 시차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이차가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일본문학이니 독일문학이니, 혹은 한국문학이니 하는 따위의 경계선은 더이상 없었다. 오바상이든 아줌마든 푸르미에게 소개할 수는 없는 일이며, 디스거스팅이든 쩌거 왕빠딴이든 들어보면 욕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외국인을 바라볼 때 무의식중에 '편견'의 색안경을 끼고 본다. 다른나라 사람도 우리를 바라볼 때 마찬가지다. 'Korea'라는 국적을 밝히면 첫째로 일본인, 중국인이 아닌 것에 놀란다. 둘째로, 핵무기에 안전한지 묻는다. 이게 다 Fucking Dictator Mr.Kim 때문이다. 우리 역시 서양인은 개인적이고, 쿨하며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족속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어느정도 맞아들을지 몰라도 명백한 오류다. 문화적 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들도 사랑하고, 울고 웃는다. 마지막 목숨이 끝나는 순간도 모두에게 평등하다. 그렇기에 동서양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전은 읽히고 또 읽히는 법이다. 별 차이 없는 고만고만한 인간상에 공감을 얻고 위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무라까미 하루끼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푸르미의 국적은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저 그 나잇대 열병 같은 사랑에 빠진 청년만이 남는 것이다.

 

 교문 앞에 손을 내밀고 동상처럼 서 있다가 이십오 쎈트짜리 동전을 손바닥에 올려놓을 때마다 그 보답으로 부시에 대한 욕설을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우리 같으면 그런 인간들이 넘치면 어떻게 할까?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당장 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라고 요구할 것이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88만원만 벌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 공무원이나 학자들은 왜 자꾸 우리를 취직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빈둥거릴 텐데, 그 꼴만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버클리의 빈둥거리는 삶을 예찬하는 모습도 공감이 갔다. '빅 웬즈데이'(정말 보기 드물게 높은 파도)를 기다리는 살면서 경쟁보다는 만족을 중시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이 부러우면서 배우고 싶었다. 2013년 대한민국은 스펙 경쟁을 넘어서 전쟁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는가? 천재 이상의 발자취를 현지에서 차근차근 좇은 이야기, 까자흐스딴, 스웨덴 작가들이 오직 '한국 혈통'이라는 이유로 무언의 공동체 의식을 강요하는 모순, 아버지의 고향을 찾는 기행. 단순히 '해야 할' 무언가를 빠르게 해치우는 일정이 아니라 순간을 음미하고 주제에 맞게 깊게 빠져드는 여행이었다. 덧없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 총명한 일은 아마 김수영의 장기인가 보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그저 여권에 적혀 있는 생물학적인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비행기를 타고 우리가 어디에 도착하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란 존재는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에 불과하다. 그 이상의 것들, 그러니까 사회적인 '나'는 등 뒤에서 닫히는 출국장의 문 그 너머에 남겨져 있다.

 

여행을 떠나는 순간 나는 이방인이 된다.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얼굴들을 마주하면 내면의 모습이 나도 모르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김수영이 만난 숨겨진 내면은 그리 고약하지도, 괴팍하지도 않은 정말 글쟁이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물론 허풍과 자존심이 곳곳에 엿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비행기를 타고 떠나면 나는 오로지 사회적인 존재가 아닌 그저 스쳐지나가는 덧없는 여행객이 된다. 새로 만나는 인연들과 덧없는 추억이 아닌 진한 추억을 남기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비싼 돈 들여 멀리 떠날 필요는 없다. 내가 지금 포항으로 가듯이, 집밖을 떠나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는 누구에게 공평하다. 하지만 아무나 그런 권리를 누릴 수 없다는 점에서 공평하지 않다. 일단 떠나고 봐야겠다.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두 형제. 태어난 곳이 여기고, 친구들도 다 여기에 있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냐며 귀국선에 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두 형제. 그 두 형제 중 한 사람은 북으로 갔고, 또 한 사람은 남에 남았다. 그들에게 리얼리티란 과연 무엇일까? 민족이나 국가나, 그 어떤 것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그들의 어긋난 삶이 다시 맞춰질 수 있을까?

토끼를 잡았던 저 산, 붕어를 낚시하던 저 강. 지금도 꿈은 돌도 잊을 수 없는 고향. 아스팔트가 깔린 아버지의 고향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국경 너머에 있는 나라, 영영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리얼리티를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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