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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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는 순간 노래 '챠우챠우'가 생각났다. 이종석, 이보영 주연의 SBS 드라마도 언뜻 떠올랐지만, 금세 김영하 소설의 어둠을 생각하면 원작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몽환적인 멜로디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반복되는 델리스파이스의 주문 같은 노래. 딱 그런 느낌의 장편 소설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막연히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하면 "챠우챠우"가 귓가에 울려퍼지는 기분일 거라고 상상했다. 뭐 실제는 전혀 아니었지만.) 불안한 불빛 속에서 신비롭게 서 있는 사내아이가 그려진 표지 때문일지는 몰라도. 몽환적인 느낌은 마술사 이야기로 시작되는 처음부터 제법 긴 에필로그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녀가 피 묻은 여린 손으로 아이의 숨을 끊어놓기 직전에, 그 격렬한 생존의 의지를 미처 잠재우기 직전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한 남자가 문을 발로 걷어찼다. 부실한 경첩이 뽑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귓속을 송곳으로 후벼파듯 맹렬히 울고 있는 갓난아이만 아니었다면 어느 잔혹한 살인자가 소녀를 유린하고 달아난 현장처럼 보였을 것이다. 바닥은 소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불그죽죽한 체액과 약수로 흥건했다. 피냄새에 흥분한 사람들이 원숭이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갑자기 나타난 수많은 팔과 다리는 마치 힌두의 신이 강림한 것처럼 보였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태어난 제이는 고아다. 야생의 세계에서 서서히 길들다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고, 혹은 자각하며 다시 태어난다. 온갖 폭력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스스로 버티고 생존하는 법을 깨달은 것이다. 폭주족을 이끄는 리더로서 무모함과 신비로움, 경이로움까지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신화가 되려 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단짝 동규가 언제나 있었다. 한때 함구증을 겪으며 제이와 유대감을 나누었던 그도 엇나가기 시작하며 거리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제이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도하는 동규는 멈추지 않는 폭주기관차같 은 인생에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제이를 걱정한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 혹은 그 이상의 존재가 사라질까봐. 둘 주위에 수많은 비행청소년, 흔히 말하는 사회의 악들이 얽히고설킨다. 그리고 그 복잡한 실타래는 전설로 기억되는 '광복절 대폭주'와 함께 툭 끊어진다.

제이는 환영을 보았다. 자기가 휘두른 맥주병에 맞아 쓰러지던 야구모자와 피를 뿌리며 쓰러지던 나이키의 모습을 보았다. 동시에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했고 오른쪽 어깨는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화끈거렸다. 야구모자와 나이키에게 가한 고통이 자신에게 되돌아왔을을 깨닫고 제이는 눈물을 흘렸다. 이것은 부당하다. 너희들은 죄를 지었고 나는 그것을 응징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너희의 고통을 내가 겪어야 하는가. 눈을 감아도 환영들은 계속 찾아왔다. 의자에 묶인 한나와 담배빵을 당하던 지연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제이의 몸은 어디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부들부들 떨었다.

이야기꾼 김영하가 5년 만에 들고 온 장편 소설은 역시 어두웠다. 하지만 맛깔나는 표현과 실감 나는 묘사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동시에 다음 장에 대한 호기심이 스멀스멀 커졌다. 집단 난교나 폭행, 탈주같은 음지의 청소년 범죄는 무척 적나라했다. "씨발"로 시작해 "개새끼"로 끝나는 이야기는 거북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시사매거진 2580에 나올 법한 경악스러운 범죄들을 활자로 더욱 생생하게 엿보는 느낌이랄까? <검은 꽃>에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인간의 밑바닥, 끝자락을 낱낱이 까뒤집어 눈 앞에 들이대는 김영하의 단도직입적인 화법은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웠다.

손을 뻗으려 했지만 육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육신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전진이 막힌 포대열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소금을 뒤집어쓴 지렁이가 꿈틀대는 것처럼 보였다. 승기를 잡은 경찰들이 다리에서 밀고 내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자신이 태어난 고속버스터미널의 모습이 보였다. 새벽에 떠날 고속버스들이 공회전하는 소리가 마치 옆에서 듣는 것처럼 가깝게 들렸다. 제이는 어쩌면 자신의 영혼이 고속버스터미널에 깃들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책장을 넘기며 재밌었던 이유는 그의 글빨때문이었다. 종묘에서 테헤란로로 이어지는 고아들의 광복절 대폭주 장면은 무서울 정도로 생생하다. 실제 서울 거리의 새벽 2시가 머릿속에 펼쳐지며, 슬픔을 마음껏 분출하는 길거리의 무법자들이 그려졌다.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가며 활개치는 모습을 표현하는 글은 신기할 정도로 시원시원했다. 개인적으로 고속터미널 출산 장면과 더불어 광복절 대폭주 부분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우주나 신계를 묘사해야 상상력이 발동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접하는 주위의 광경에서 더욱 생생하게 꿈꿀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굉장한 일이 아닌가? 거창한 선과 악, 청소년 계도를 위한 비상 대책 마련 따위의 당위성까지는 모르겠다만..... 소설을 읽는 동안은 다음 장을 얼른 읽고 싶었다. 그리고 지저분하고 어둡지만 분명 우리 인간 세상에 감춰져 존재하는 부분을 직시한다는 묘한 쾌감 정도라도 독서의 재미는 충분했다.



그나저나 동규와 제이를 보면 묘하게 <데미안>이 떠오르는 건 과도한 해석일까?

받아만 준다면 나는 그들 사이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슬픔에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러니까 서러움에 가까운 감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마음이 차가워지는, 비애에 가까운 심사도 있다. 그날의 나는 후자였다. 마음에 서리가 낀다고 해야 할까.

심장이 차갑게 식으면서 눈가가 시렸다. 나는 MP3 플레이어의 볼륨을 높였고 그들은 그다음 역에서 일제히 내렸다. 수화를 하는 아이들의 손에서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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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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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간볶음과 황주 두 냥. 뜨겁게 데워서. 매혈한 허삼관은 단순히 체력 보충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처럼 음식을 주문한다. 가진 건 건강한 몸뚱이뿐인 그는 철저히 정해진 단계에 따라 피를 판다. 우선 배가 터져라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방씨와 근룡이에게 배운 대로 오줌보가 터질 정도까지 물을 몇 사발 들이킨다. 이뿌리가 시리지 않으면 아직 더 마실 수 있다는 증거이므로 더러운 강물이 아닌 깨끗한 우물을 계쏙 들이 붇는다. 그리고 혈두를 찾아가 약간의 뇌물을 제공하고 피를 판다. 그리곤 돈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 냥을 주문해야 한다. 이것은 살에서 나온 힘이 아니라 피에서 나온 힘을 팔았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자마자 두 가지를 확인해봤다. 우선 돼지간볶음과 황주. 정확한 맛을 사진상으로 모르겠지만, 제육볶음과 비슷해 보였다. 황주는 마치 모주처럼 달달하면서 도수가 높은 느낌? 그리고는 나도 매혈, 아니 헌혈을 해보려고 다시 도전했다. 어릴 때부터 늘 헌혈을 해보곤 싶었다. 남을 돕는다는 기분도 좋았고, 일정 횟수를 넘으면 준다는 메달이 막연히 갖고 싶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이가 어려서, 혹은 천식이 있어서.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AB형, A형, B형 O형 급구!" (다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를 보고 자신만만하게 들어갔지만 민망하게 초코파이 하나만 집어들고 나왔다. 허삼관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중국 문학, 아니면 위화의 독특한 화법 때문인지 사실 초반에는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친아들이 아닌 일락이를 구박하거나, 임분방을 (책의 표현대로) 자빠뜨리려는 수작들은 그다지 재밌지 않았다. 하지만 허옥란과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를 책임지려는 중반부가 지나면서 서서히 주인공의 매력에 빠졌다.

 

허삼관은 전형적인 츤데레.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남자다. 마치 우스갯소리처럼 "부모 욕은 참아도, 내 욕은 못 참는다."를 몸소 실천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말만 이렇지 꽈배기 서시와 세 아들. 그가 인생을 사는 이유는 오로지 가족이다.

 

"하소용이 마누라가 내 욕도 했나?"

"자네 욕은 안 했지. 아마."

 

"그럼 됐지, 뭐. 어떻게 세상 일 다 신경 쓰고 사나?"


 

 

이렇듯 허삼관은 (중국에서 가장 심한 욕 중 하나인) '자라대가리'라는 욕을 들어먹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중국 남자다. 온갖 추문과 주변 눈치에 짜증 내고 버럭 화를 내버리곤 만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서서히 억지로라도 감춰둔 따뜻함을 드러낸다. 아니 드러내는 게 아니라 감추지 못한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문득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친아빠 하소용에게 가겠다면서 가출한 일락이를 실컷 욕하고 다그치다가도 결국은 국수를 먹인다.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몸이 상하는 건 신경 쓰지 않고 연속으로 피를 파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 가장의 책임을 어떻게든 지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죽느냐, 사느냐가 제일 중요한 가치로 성큼 다가온 극심한 시기에 그의 냉소적인 말투는 빛을 발한다. 피를 팔아 살아가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능청스럽고 무덤덤하다. 물론 자신이 힘들게 피를 판 것을 애써 감추거나, 티 내지 않는 성격은 아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생색은 낼 대로 다 내면서도 가족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게 바로 허삼관이기 때문이다.

"애들 줘."

"그럴 순 없어요. 이건 당신을 위해서 끓인 거라구요."

"누가 마시면 어때. 똥으로 변하기는 마찬가진데. 애들 똥이나 더 싸게 하라구. 애들 마시게 해."

 

"피를 팔아야지. 식구들 맛있는 밥 한 끼 먹게 해줘야지."


그가 바라는 건 엄청난 성공이 아니다. 그저 가족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게 해주는 게 다다. 우리네 가장이 느끼는 비애는 그 옛날 중국이나 2014년 대한민국이나 별다르지 않아 보인다. 특히 아픈 이락이를 위해 억지로 술을 마시는 모습에서는 짠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이락이네 생산대장은 술을 좋아하고, 권위적이며 비리로 얼룩진 인간이다. 동등한 위치라면 상종조차 하지 않고, 한 방을 날려버렸겠지만, 그는 사랑하는 이락이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힘이 있는 사람이다. 더럽고 치사해도 술상을 차리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장단을 맞춰줘야 한다. 과연 심야 지하철, 버스에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40, 50대 가장 중에서 흥겹게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강남역, 사당역을 가득 메운 이들은 술에 몸을 못 가누면서도 하나같이 집에 전화해 아이들 목소리를 듣거나, 사진을 들여다본다. 문득 어린 시절 술에 취해 돌아와 잠들어 있는 나한테 몇 마디라도 억지로 걸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까칠한 수염과 메케한 술 냄새가 너무 싫었는데, 이제는 조금이나마 그때 아버지가 느꼈을 애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또 한 잔 들어요! 몸은 상해도 감정은 상하면 안 되니까. 자, 다시 한 잔 듭시다."
허삼관은 속으로 '이락이를 위해서, 이락이를 위해서라면 마시다 죽는 한이 있어도 마셔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술잔을 받아들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 모습을 본 허옥란은 그제야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여보, 그만 마셔요. 무슨 일 나겠어요."
이락이네 생산대장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망할 생산대장. 육성으로 "아오, 이 인간"이 절로 나왔다. 권하는 술잔을 깨끗하게 비워야 하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억지 장단을 맞춰주고. 그런 무의미한 일을 되풀이할 게 문득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더럽고 치사한 일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 게 인생이고, 이런 상황에서 자존감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단 것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애써 감추고 낮추는 일의 목적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다지 절망적이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이 오로지 가족이고, 그래서 희생을 강요한다면 말년에 무척 슬프겠다고도 느꼈다. 마치 나이가 들고, 풍족한 환경에서 다름 아닌 피를 팔지 못해서 엉엉 아이처럼 우는 허삼관을 보니 더더욱 와 닿았다.

그는 젊은 혈두의 말을 떠올렸다. 자기처럼 늙은이의 피는 살아 있는 피보다 죽은피가 많아 원하는 사람이 없으니 가구에나 칠해야 한다고. 사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피를 팔지 못한 것이다.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피를 팔아 해결했는데, 이제는 자기 피를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니.... 집에 또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린푸, 베이당, 시탕, 바이리. 연거푸 피를 파는 '매혈 여로'가 이어지면서 젊은 허삼관은 쓰러지기도 했다. 아들이 아프거나, 집안이 어려울 때 매혈을 통해 허삼관은 역경을 이겨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피를 팔기 위해 찾아갔지만 매몰차게 거부를 당하자, 절망한다. 언제나 가족을 위해 살아왔던 그가, 자신을 위해 처음으로 피를 파는 행위, 즉 해야만 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거절당하자 슬퍼진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항상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생은 고통과 비애로 가득 찬 곳이다. 하지만 근엄하게 내뱉는 허삼관의 마지막 한마디를 기억하며 잘 버티고, 잘 이겨내고, 그냥 즐겁게 잘 살아야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그런 걸 두고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으니 다행이지. 지금 성안 사람 모두가 어렵게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옆집에 가봐라. 너희 친구 집에도 가보고. 멀건 죽만 먹을 수 있어도 잘 사는 집인 셈이다. 이 고통을 잘 참고 견뎌야 한다. 너희들, 나물이 질렸다고 하지만 먹어야 한다구. 찰진 밥 한 그릇, 옥수수 가루 넣지 않은 밥 한 끼 먹고 싶겠지만, 너희 엄마하고 상의해봤는데 지금은 안 된다. 나중에 해주마. 지금은 쌀독 속에 있는 나물을 먹고 옥수수죽을 마셔야 해. 너희는 그나마 죽도 갈수록 묽어진다고 하는데... 사실이다. 가뭄이 끝나지 않았고 끝나려면 아직 멀었으니, 우리도 별다른 방법이 없구나. 우선 목숨부터 부지하고 봐야지. 다른 건 생각할 틈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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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Z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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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 <월드워 Z>와 맥스 브룩스 장편소설 <세계 대전 Z>는 완전히 다르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인 '세계 대전 Z', 세계관만 따온 듯한데 굳이 판권을 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수준이다. 영화 <월드워 Z>에서는 브래드 피트가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당연히 세계를 구하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박진감 넘치는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세계 대전 Z>에서 주인공은 따로 없다. 중국, 미국, 캐나다, 아일랜드, 한국, 러시아 등 전 세계 인류가 주인공이자 피해자, 가해자다. 스펙타클한 갈등도 없고, 헉소리가 절로 나오는 반전도 없다. 그저 극한의 상황에서 철저하게 작아지는 인간의 본성을 치밀하게 파고든 게 소설의 가장 큰 힘이다. 전 세계를 누비며 생존자를 만나고, 그들의 생생한 인터뷰 자료를 무미건조하게 모은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런 정공법에서 다른 좀비물과 차별화를 느낄 수 있다. 담담하게 마치 제3자의 입장에서 살육을 이야기하는 군인도 있고, 그 당시 악몽 같은 좀비의 돌진이 눈앞에 선한지 벌벌 떠는 사내도 있다. 

하지만 하나같이 공통된 감정은 '두려움'의 근원이 좀비가 아닌 사람에게 있다는 점이다. 하루아침에 고액 연봉자에서 재교육이 필요한 부속품이 되어버린 변호사, 자신을 쫓는 조국의 군함에 미사일을 날려야 하는 함장, 쓸모없어진 군용견을 처단하란 명령을 받은 군인. 모두 좀비에게 당해 자신도 좀비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보다는 인간에게 느끼는 모멸감이 더 크다. 좀비 바이러스를 치료할 의약품을 속여 파는 기업,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다가 결국 전 세계 인류의 파멸을 촉진시키는 무능한 미국 정부까지. 생존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철저히 무시하고, 수단화하는 사회 구조에서 자신도 자연스레 변해가는 모습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이익을 영악하게 계산하는 인간의 모습은 인터뷰 중 나온 명대사로 요약할 수 있다. 

"두려움을 자극하면 팔린다."

가장 근본적인 감정인 '두려움'을 냉혹하고 샅샅이 드러냈기에 <세계 대전 Z>는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다. 한편 워낙 다양하고 많은 인터뷰가 뒤엉켜 있기에 에피소드 별로 오르락 내리락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한 번 읽으면 책을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다."는 뻔한 찬사는 사실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용커스 전투나 일본인 오타쿠의 탈출기, 러시아 군대의 냉혹한 훈련법은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피를 튀기는 전투나 잔혹한 좀비 처단법이 주를 이루는 다른 소설과는 차원이 다른 현실적이고 전문적인 맥스 브룩스의 통찰이 빛나는 부분이다. 브래드 피트 역시 <월드워 Z>의 성공에 힘입어 속편을 만들 계획이고, 더 많은 부분을 원작에 의존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력이 발달하더라도 원작을 따라올 수 없을 것 같다. 담담하기에 더욱 소름 돋는 인터뷰 형식은 할리우드와 맞지 않다. 날것 그대로의 인류 파멸, 인간의 밑바닥을 그려내기엔 활자만큼 우직하고 효과적인 수단을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소, 여기엔 인종 차별주의도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계층 차별주의도 존재했소. 당신이 예전에 끗발 있던 기업 변호사라고 치지. 살아오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계약서를 검토하고, 거래를 중개하고, 전화기에 대고 수다를 떠는 게 당신의 일이었소. 당신은 그런 일에 재주가 있었고, 그래서 부자가 됐고, 덕분에 배관공을 불러서 화장실 변기를 고치게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계속해서 전화기에 대고 수다를 떨 수 있었지. 일을 더 많이 할수록, 돈이 더 많이 들어왔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잡다한 일을 떠맡길 수있는 하인들을 더 많이 고용하게 됐지.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갔단 말이오. 그러나 이젠 그게 통하지를 않소. 계약서를 검토하거나 거래를 중개할 필요 자체가 없어진 거요. 이제 필요한 건 변기를 고치는 거지. 그래서 갑자기 당신의 편의를 봐주던 사람이 당신의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상사가 될 수도 있소. 어떤 사람들에겐 이런 상황이 좀비보다 더 무서웠지.

우라지게 정곡을 찌른 말씀이었소. 늙는 게 두렵고, 외로울까봐 두렵고, 가난해질까 두렵고, 실패할까 봐 두려운 것. 두려움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이지. 두려움이 바로 핵심이라는 거요. 인간의 두려움만 건드리면 뭐든 팔아먹을 수 있다. 그게 내 영혼의 진언이었소. "두려움을 자극하면 팔린다."

첫째,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질병이 너무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그 위협을 효과적으로 격리시키기엔 무장 병력이 이미 너무 약화돼 있으며 국가 전체에 산발적으로 배치돼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이 빠지게 된다. 그래서 병력을 통합해서 특별한 ‘안전지대‘로 철수시키는데 바라건대 산,강, 심지어는 외국의 섬과 같은 자연적인 장애물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그 녀석이 내 파트너가 됐다거나, 아니면 화재나 뭐 그런 일에서 고아원 하나를 통째로 구했다는 디즈니식 결말을 이야기해 주고 싶지만 쉽지 않군요. 그 자식들이 녀석을 돌멩이로 쳤던 겁니다. 체액이 그 개의 귀의 도관까지 꽉 차 있었어요. 한쪽 귀는 완전히 먹고 다른 쪽 귀는 일부만 들렷죠. 하지만 코는 아직 쓸 만해서 새 주인을 찾아 줬더니 쥐를 꽤 잘 잡았죠. 그해 겨울 그 가족들을 먹여 살릴 만큼 쥐를 많이 잡아 줬어요. 그것도 디즈니식 결말이라고 하면 그럴 수 있겠죠. 미키 마우스 스튜가 들어간 디즈니 이야기. (부드럽게 웃었다.) 황당한 이야기 하나 들어 볼래요? 난 과거에는 정말 개를 싫어했어요.

물론 우리의 새로운 라틴 초강대국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쿠바에는 수백 개의 정당이 있고 해변의 모래보다 더 많은 특별 이익 단체들이 존재합니다. 거의 매일 파업이나 폭동이나 시위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혁명이 끝난 뒤 왜 체 게바라가 자취를 감췄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기차를 제시간에 운행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날려 버리는 게 훨씬 쉽거든요. 처칠 총리가 뭐라고 했나요?

"민주주의란 다른 모든 형태의 정부를 제외했을 때 최악의 정부 형태다."

(그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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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철학 강요 홍신사상신서 38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 홍신문화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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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철학강요』로 살펴본 사랑

 

 

 

 

 

0. 서론


 

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는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인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느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이 타자 안에서 인정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타자도 역시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을 얻는다는 데 있다.

 

 

사랑은 시대, 문화, 나라를 막론하고 가장 뜨겁고 흥미로운 주제다. 문학 작품은 물론이고 현실 세계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의 원동력에는 대부분 ‘사랑’이라는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온갖 불법적인 행동 역시 사랑이라는 하나의 추상적인 동기 때문인 경우도 무척 많다. 맑시즘과 유물론의 사상적 방법론적 진원지인 헤겔 역시 사랑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형이상학, 논리학, 절대정신, 사회 전반적인 구조, 체계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도 관심이 많았고 철학적인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철학자였다. 신에 대한 종교적 사랑은 물론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사랑도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헤겔은 사랑을 이성과 유비적인 어떤 것을 지닐 수 있는 도덕적인 감성으로 고찰하며, 따라서 감성 내에 존립하는 일종의 도덕적 추동력으로서 이해했다. 하지만 이성적인 관계 맺음과 이해 역시 중요하다고 헤겔은 주목했다. 한편 인간 대부분은 사랑에 빠지면 인생에서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에 빠지게 되고, 상대방의 내면에서 나의 모습을 찾고 행복해한다. 헤겔의 여러 저술과 사랑에 대한 언급을 종합하여 헤겔이 가진 사랑, 나아가 결혼, 가족, 자녀와 같은 전반적인 영역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한편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대상은 모두 의미를 부여받은 것으로 경험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대상들에 원래 의미가 내재해 있는 것처럼 경험하기 쉽다. 그런데 이 점은 우리 자신에게도 통용되는 것이다. 가령 사랑이라는 의미가 발생하면, 타인은 나의 연인이 되고 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사랑받을 만한 본성이 나에게 미리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며 나에게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본성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랑받을 만한 본성’ 혹은 ‘사랑할 수 있는 본성’등은 모두 사랑이라는 의미가 발생한 후 생기는 환상일 뿐이다. 따라서 의미 창조 혹은 의미 부여 행위가 먼저라고 할 수 있고, 주체 혹은 대상의 성격은 이로부터 구성되는 사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랑

 

 

사랑은 운명과 부딪친다. 사랑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행복한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불행한 일상성에 둘러싸여 있다. 사랑은 특히 소유관계를 배제함으로써만 성립된다. 소유관계야말로 자기와 타자의 구별과 대립이 첨예화하는 마당이며, 사랑마저도 넘어설 수 없는 벽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소유라는 운명에 거듭해서 부딪치는 것에 대해 헤겔은 처음부터 고심하고 있었다

 

 

헤겔도 초기 저작에서 사랑은 기본적으로 모든 대립을 배제하며, 차이가 있는 분열태는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본성상 감성과 이성으로 복합된 존재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이성적인 감성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헤겔을 보았다. 즉 사랑은 타자 내에서의 자기발견 또는 자기 망각을 뜻한다. 인륜적 가치를 지닌 사랑이라는 존재를 통해 타자와 나의 일체성을 깨닫고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에 주목한 것이다. 헤겔은 사랑이 그 자신의 통일성에 대한 정신의 감정이며, 개인은 독립적 인격이 아니라 그 성원으로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개인이 자신의 독립적 존재를 포기하고 타자와 합일을 이루는 과정은 두 명의 ‘내’가 하나의 ‘우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타인에 대해 헌신하고 기존의 독립성을 상실하며 역설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찾고, 표현하는 일이 바로 사랑이다. 결국, 독립적이지만 사랑이 없는 존재는 결함 있고 불완전하다는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타자와의 차이의 극복, 개별 인격의 상호 포기를 가져오지만 재통일하는 과정에서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 간다. 즉 헤겔은 사랑을 통해 인격적 고립으로부터 자유를 달성하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기를 상실할 때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집중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타인의 모습에서 괴물같은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매우 절망적이고 슬픈 현실일 수밖에 없다.

 

 

 

2. 결혼

 

 

이것은 동시에 칸트적인 파악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 즉 개인의 존립을 절대화하여 사회적 · 공동적 관계를 인간의 본질에 있어 외적 · 파생적 관계로 하는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인륜적 · 공동적 관계의 현실적 형태가 직접적으로 형성된 관계로서 결혼을 파악하는 시도이다. 이와 같이 파악된 결혼에서는 개인이 서로 헌신함으로써 일심동체가 되기 때문에, 그리하여 상대 속에서 자신을 의식하는 구조가 되는 한에서 결혼은 본질적으로 일부일처제로 된다.

 

 

 

헤겔의 사랑과 결혼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자유로운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여 가족을 구성한다. 마침내 두 사람에게 아이가 생김으로써 하나의 완전한 가족이 완성된다. 이렇듯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헤겔의 사유는 나만의 사랑이 아닌 상대방의 사랑도 고려한다.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한다.”는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타자도 내가 사랑한다는 것, 나와 똑같이 내 마음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타자의 자유문제를 지나치게 쉽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자연스레 헤겔이 두 사람의 주관적인 내면, 사랑과 자유에 대한 두려움도 간파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하나의 제도를 통해 남녀 간의 사랑을 실체화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단순히 인류의 종, 생명의 유지 및 보존을 위한 성적 관계 이상으로 헤겔은 결혼을 생각했다. 칸트가 결혼을 단순히 시민사회의 단순한 계약관계로서만 파악한 것을 뛰어넘어 헤겔은 사랑의 가치를 확인, 인식하며 객관적,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하나의 실체적인 의식이라고 규정했다. 즉 헤겔에게 있어서 결혼은 단순히 의례의식을 넘어 매우 중대한 사회적 체계인 것이다.

 

 

 

3. 가족

 

 

가족은 자연적인 공동체다. 가족의 구성원들은 신뢰와 자연적인 복종에 의해 결속되어있다. 가족은 정신의 직접적 실체성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상의 통일을 기초로 성립한다. 여기에 요구되는 마음가짐은 가족이라는 완전무결한 본질의 일체성 속에 스스로의 개성이 스며들어 있음을 자각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서가 아닌 그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데 있다.

 

 

타자였던 남녀가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되며, 실체적인 성격을 가진다. 둘의 주관적인 사랑이 우리라는 객관적 사랑으로 변화하는 하나의 선포로서 결혼이 필요한 것이다. 가족이라는 통일체 안에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 일원으로서 존재한다는 자각을 느낄 수 있다. 부부 사이, 가족 내에서는 공동소유가 가능하며 남녀는 서로 속에서 보편성을 본다. 가족은 자연적인 인륜적 공동체로서, ‘정신’이 직접적으로 실체로서 존재하는 모습이다. 부부가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기초한다면 그것은 주관적, 우연적,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하나의 제도적 결합으로 이뤄진 가족 관계를 통해 법률적으로 계약 관계를 맺고, 생활 전체를 공유하며 나아가 재산을 공동으로 운용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시민사회의 계약관계로서 가족을 살펴보면 서로 합의된 이용 관계, 뿔뿔이 흩어진 개인을 묶어 주는 하나의 체제로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헤겔은 가족이 공동 관계의 증표이며 국가 공동체에 버금가는 공동관계의 마당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시민은 조금 더 의식 있는 공동체로서 국가 공동체와 연계된다.

 

 

4. 자녀

 

 

부부 사이에서의 사랑의 관계는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사랑의 감정이 실체적 통일을 이룬다고는 하지만 이 통일은 아직 아무런 객관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는 자녀를 통해 비로소 이런 객관성을 갖게 되며 또한 바로 이들 자녀를 통해 결합의 전체를 목도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녀를 통해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자녀를 통해 아내를 사랑하는 가운데, 마침내 두 사람은 자녀에게서 다름 아닌 그 자신들의 사랑을 직감하게 된다.

 

 

헤겔은 부부와 자녀가 똘똘 뭉친 하나의 가족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특히 헤겔에 따르면 아이는 현실적 절대자로서 중요한 매개자 역할을 한다. 헤겔이 지향하는 객관적인 사랑이란 것이 결국 타자의 자유를 부정하는 형식을 띠게 되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객관적 사랑으로서 자녀를 낳는 행위로 드러난다. 즉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변증법적으로 종합된 결과물이 바로 자녀이다. 자녀를 바라보며 부부는 육체적 관계를 맺었을 때를 기억하며 그때의 사랑을 직감한다. 인륜적인 형태로서의 가족의 원리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은 단지 직접 느껴서 아는 것만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자기 의식적이어야 한다. 자녀 역시 각자의 권리라는 점을 언급하며 자녀와 부모 관계를 검토한다. 자녀는 가족의 공동재산에 의해 양육되고 교육될 권리를 갖는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자녀의 중요성은 중요한 개념이었다. 물론 자식을 낳은 뒤 두 사람이 사랑하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하고, 그저 과거의 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식은 사랑의 객관적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억지로 둘을 결합하게 하는 하나의 족쇄나 제어 장치로 변모될 위험도 있는 것이다.

 

 

5. 더 생각할 문제

 

 

- 헤겔은 거듭 결혼, 자녀의 출생을 강조하며 객관적인 실체적 통일을 확인하려 애썼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언제나 행복한 결말만을 낳지는 않는다. 자유의지를 가진 내가 타인을 사랑한다고 해서 타인이 나를 사랑해야 하는 의무는 없다. 오히려 주관적 감정에 푹 빠져 이성적 판단이 어려운 개인은 사랑의 영원함을 쉽게 착각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오히려 이런 개인의 특성과 사랑의 속성을 알고 있기에 더욱 이런 제도적 결합에 집중한 것은 아닐까? 자신이 느끼는 불안함을 사회적, 국가적 제도의 도움을 통해 안정감을 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21세기는 다양한 부부의 형태가 존재한다. 물론 헤겔이 살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며 문헌을 읽어야 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동성애 부부, 편부모, DINK족 등 새롭게 생겨난 가족의 형태가 많다. 이는 헤겔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남편, 아내, 아이 정반합의 구조가 아니다. 헤겔이 주목한 사랑, 결혼, 가족의 본질적인 의미에 집중한다면 과연 이런 결합을 비정상적이고 불완전하다고 규정할 수 있을까?

 

 

 

 

 

 

 

 

 

 

 

 

 

 

 

<참고 문헌 및 기사>

 

- 프리드리히 헤겔, 서정혁 역, 『법철학강요』,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1.

- 남기호, 「헤겔의 ‘사랑’ 개념과 그 철학적 위상 변화」,시대와철학, 2008.

- 김용찬, 「헤겔 정치철학에서 사랑의 의미와 역할」, 한국정치연구, 2008.

- 강신주, 『철학 vs 철학 : 사랑은 타인과 하나가 되는 것일까?』, 그린비, 2010.

- 강신주, 『철학 vs 철학 :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그린비, 2010.

- 엘리슨 스톤(윤소영 역), 『헤겔과 성적 차이의 페미니즘』. 공감, 2004.

 

『법철학강요』로 살펴본 자살  


0. 서론


인격으로서 나는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오직 내 의지가 있을 경우에만 나의 생명과 육체를 동시에 소유한다. 

나는 내가 의지하는 한에서만 내 몸의 여러 부분과 생명을 지닌다. 그래서 동물은 자기 신체를 절단하거나 자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인생을 산다. 하지만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은 모두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은 가장 확실하지만, 역설적으로 언제 다가올 지는 가장 불확실하다. 신분, 재산, 국적, 성격, 가족 등 많은 요소들도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오직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즉 생명이란 죽음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죽음은 우리의 삶 전체, 특히 현재의 삶에 영향을 끼치 수 있다. 죽음은 크게 자살, 타살, 자연사 세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가장 민감하고 논란의 여지가 큰 ‘자살’의 영역을 헤겔의 『법철학』을 기초로 하여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한편 최근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8년 째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33분에 한 명꼴로 자살이 발생하는 수치는 분명 짚고 넘어가야할 사회적 문제다. 자살에 관련한 철학적 논의는 오래되었다. 그중 혹자는 헤겔의 자살에 대한 견해를 오해하기도 한다. 헤겔은 『법철학』 추상법 중 ‘소유’ 부분에서 여타의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의 특이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단편적인 문장으로 헤겔의 철학적 사유를 오해하는 것은 위험하기에 헤겔의 상반되는 주장을 밝히고자 한다.


1. 인간의 생명권과 소유권


외적 활동의 포괄적 총체를 의미하는 생명은 인격에 대립하는 외적인 것이 아니다. 인격은 그 자체가 바로 이러한 총체로서 직접적으로 존재한다. 생명을 포기하거나 희생하는 것은 이러한 인격의 현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생명을 포기할 어떤 권리도 지니고 있지 않다. (중략) 근본 문제는 과연 내가 자살할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결국 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나의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살은 생명을 지니고 있는 자가 생명을 부정하는 일종의 모순적인 사태다. 헤겔은 자살을 권리의 문제로 생각했다. 하지만 흄, 루소로 대표되는 계몽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흄은 자살이 신과 공동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의 파기나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나의 생명은 나의 것으로서,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고, 이는 지극히 자연의 법칙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루소 역시 원칙적으로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헤겔은 자살은 언급하면서도 ‘인격’은 양도될 수 없는 기본권이라고 주장했다. 외면적인 활동의 포괄적 총체인 생명은 결코 인격에 대립하는 외면적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삶을 포기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헤겔의 이러한 주장에는 개인은 자신의 생명의 궁극적 주인이 아니라는 문제 의식이 깔려있다. 헤겔은 계약에 의해 성립하는 물건에 대한 권리와 인격적인 권리를 구분하며 자살이 추상법이 아니라 인륜적인 차원의 문제로 다루었다. 나의 신체, 생명, 인격을 단순히 추상적이고 계약으로 맺어지는 소유권과 차별적인 성격으로 규정한 것이다.


2. 인간 생명과 시효 문제


나의 개성, 일반, 나의 보편적 의지의 자유, 인륜 및 종교와 같이, 가장 나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인격과 나의 자기의식의 보편적 본질을 이루는 귀중한 것들이나 실체적 규정들은 양도될 수 없으며, 이러한 것들에 대한 권리에는 시효가 없다.


헤겔은 자살이 개별자로서의 자신을 죽임일 때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오히려 억압적인 외적 조건에 맞서 이 조건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 자유의 터전으로 바꾸는 노력에 주목했다. 자신의 현존의 개별성을 스스로 내걸 수 있는 자유만이 진정한 죽음의 능력으로서의 자유라고 본 것이다. 즉 자기희생, 자기지양의 삶을 산 예수나 소크라테스가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헤겔은 『법철학』에서 소유권의 포기, 양도는 소유권의 ‘시효’에 의존한다고 지적했다. 시효는 ‘어떤 것을 가지려고 하는 의지는 그 자신을 표출한다.’고 하는 필연적인 규정에 근거한다. 하지만 ‘외면적 활동의 포괄적 총체성’으로서 ‘생명’은 특수하게 제한되지 않고, 시효에 제한되지 않으므로 포기되거나 양도될 수 없다. 그리고 생명의 주체인 인격 그 자체를 포기할 권리를 갖는다면, 이는 인격이 곧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이므로 모순된 것이다. 삶, 생명은 외면적인 활동의 포괄적 총체로서 인격성에 대립하는 외적인 것이 아니다.


3. 주체적 삶, 실체적 삶. 그리고 자살의 사회성


국가와 개인의 하나됨 자체가 진정한 내용이자 목적이며, 개인들의 사명은 단 하나의 보편적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성성은… 보편과 개별의 상호침투적인 통일성에서 성립하며,… 객관적인 자유, 즉 보편적인 실체적 의지와 개별적인 앎이나 특수한 목적을 추구하는 의지로서의 주관적인 자유의 통일에서 성립한다.


자살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다.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사회 속에서 완벽히 고립되어 지낼 수 없다. 타인과 끊임없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존재가 인간이다. 헤겔 역시 국가가 보편적 필요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필요까지 돌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보편적 인간의 구체적 자유가 공동체 내에서 현실적일 수 있다면 생존권은 시민사회의 목적이자 보편적 업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국가에 종속되고 모든 걸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로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개인이 전체에 일방적으로 함몰되고 종속되어 자유롭게 자신의 생명조차 포기할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헤겔의 사유를 ‘전체주의’로 해석하는 것도 위험하다. 헤겔은 국가가 전체가 개별자를 무화하고 추상해서 얻어진 것, 국가라는 보편자가 개인보다 상대적 우위에 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국가를 ‘유기체’에 비교하며 이는 근대 시민사회에서 양도 불가능한 개인 고유의 인격성과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살이 폴리스 전체에게 해악을 끼치는 문제로 파악한 것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헤겔 역시 인륜을 중요시 하지만 개별자와 보편자가 직접적으로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4. 인륜적 공동체성의 실재적 복원


부산시내 주택에서 숨진 지 5년가량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60대 여성이 백골 상태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옆방에 사는 이웃도, 집주인도 이 여성이 숨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노인의 날인 2일을 이틀 앞둔 지난 9월30일 오전 11시30분께 부산 부산진구 초읍동 주택 단칸방에서 세들어 살던 김아무개(67)씨가 숨져 있는 것을 집주인(64)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부산진경찰서가 1일 밝혔다. 집주인은 “김씨가 백골 상태로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고 경찰에 말했다. 숨진 김씨는 두꺼운 옷을 아홉겹이나 껴입고 손에는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집 냉장고 안에는 음식물이 없었으며, 거미줄이 쳐진 채 고장나 있었다.


헤겔은 개인에게 자살할 권리가 없으며 자신의 생명의 주인도 아니라고 하며 인륜적인 부분을 언급했다. 헤겔이 자살을 용인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다. 자살 문제에서 드러나는 것은 소유권의 주체인 인격이 인륜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기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느냐라는 ‘인륜의 내면화’ 문제였다. 자살은 단순히 자신의 생명을 부정하는 파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체와 관련된 유기적(체계적, 조직적) 문제로 파악할 수 있다. 경제적인 이유로 자살을 택하는 이가 늘어난다면 사회는 개인의 비극적인 선택을 예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최근 정쟁으로 붉어진 복지와도 맞닿아 있다. 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한 자살의 원인이 존재하지만 결국 공허한 자살을 막기위한 궁극적인 대책의 기본은 인륜적 공동체성의 실재적 복원뿐이다. 독거노인 30만 명, 최근 사회적 소외와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죽은 고독사도 새로운 영역의 문제다. 위에서 언급한 고독사 사건은 현재 우리나라의 참혹한 세태를 보여주는 사례다. 고독사는 매우 애매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다. 누군가는 고독사를 자살로, 혹은 사회적 타살로, 혹은 자연사로 바라본다. 하지만 적어도 헤겔이 자살을 언급하며 집중했던 인륜적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면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5. 더 생각해볼 문제


- 자살은 개인의 문제일까, 사회의 문제일까? 단순히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겠지만 자살은 하나의 신드롬처럼 퍼져있다. 경제적 빈곤을 겪는 국가에서는 사회안전망의 부족으로 자살자가 속출한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적 수준이 높은 북유럽 일부 국가에서도 높은 자살률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연간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을 비교했을 때 핀란드는 2007년 18.8명, 스위스는 2006년 17.5명을 기록했다. 두 나라 모두 사회복지 안전망이 가장 잘 갖추어진 나라라고 평가받지만 자살률 10위 내에 위치한 불명예를 얻었다. 개인의 선택을 완벽히 강제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는 존재할 수 없다. 과연 자살이라는 하나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대책이 있을까? 인륜적 공동체성을 회복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마무리는 아닐까? 반대 사례로 서울시의 자살률은 6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무려 11%(인구 10만 명당 26.9명에서 23.8명으로 감소)의 감소세로 CCTV 설치, 생명의 다리 건설 등이 효과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단순히 양적 복지 체계의 강화보다는 따뜻한 위로와 공감하려는 소통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 헤겔이 인정한 자연사와 이념 봉사를 위한 낯선 이로부터의 죽음. 두 가지를 제외한 죽음은 여전히 많다. 죽음의 종류는 수많은 형태가 있지만, 죽음의 결과는 모두에게 똑같다. 생의 마지막은 결국 동일하지만 각각의 형태에 경중을 매길 수 있을까? 사고나 실수에 의한타살, 의도된 타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타살, 우발적인 타살, 정당방위로 인한 타살, 국가에 의한 타살인 사형 등 각각의 형태를 헤겔은 어떻게 평가할까? 한편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자살에서 과연 인간은 온전히 홀로 존재하는 대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헤겔은 저작을 통해 동물의 경우 육체와 생명에 대해 현실적인 점유는 하고 있지만 의지가 없기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생명의 권리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권의 범주가 확장되어 동물권도 등장하며 동물에게도 하나의 권리 및 의지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헤겔이 인간만의 독점적인 사태로 규정한 자살도 돌고래 등 일부 동물에게서도 볼 수 있다고 보고한 학술지도 존재한다. 과연 동물은 단순히 인간보다 의지가 부족하고 실제적인 점유를 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대상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까?

 

 

<참고 문헌 및 기사>


- 프리드리히 헤겔, 서정혁 역, 『법철학강요』,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1.

- 남기호, 「자유로운 죽음의 방식 - 헤겔의 자살론」,한국카톨릭철학회, 2011.

- 서정혁, 「헤겔의 법철학에서 자살의 문제」, 한국철학회, 2007.

- 김광수, '60대 할머니의 죽음 5년 만에 발견.', 한겨레신문, 201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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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되겠지 - 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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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가로등, 자동차 문자게시판, 셔플 프레이어, 친환경 프린터, 이기적인 보일러, 다기능 헬멧, 완전자동 결혼식, 농활 골프. '이동진의 빨간 책방'의 든든한 흑임자 김중혁의 책은 호기심과 편애로 가득하다. 특히 <뭐라도 되겠지>을 읽는 내내 마치 김중혁의 일기장, 혹은 낙서장을 들춰보는 느낌이었다. 그의 고백대로 '미당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매력적이고 공감이 많이 가는 세계관을 가진 작가다. 게다가 직접 그린 그림들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던 상상을 시각화하기에도 훌륭했다. 산문집의 특성상 짧은 글들이 많이 묶여있었는데, 묘하게 일관성을 느꼈다. 인간 김중혁은 과묵하기보단 산만하고, 무언가에 집착하기보단 흘려보냈다. 그가 '그나마' 열광하는 부분은 쓸데없는 것과 농담뿐이었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무소유의 정신과 맞닿은 <뭐라도 되겠지>. 표지부터 장난기가 가득 담긴 퍼즐이 보인다. 디자인은 했지만 디자이너는 아닌 팔방미인 김중혁의 산문집은 일단 재밌다.

 

내가 생각하기에 '재능'이란 (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되겠지. 이 문장을 제목으로 하자는 의견을 듣고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이게 좋은 뜻일까? 긍정이긴 하지만, 때로는 체념처럼 들리지 않을까? 하긴 체념이어도 상관없다. 작은 체념이 들어 있는 긍정이야말로 튼튼한 긍정이 아닐까.)

 

그냥 보기엔 무척 냉소적이고, 패배의식에 젖은 한탄 같을 수 있다. 힐링이 필요한 20대, 열정을 가지고 뭔가를 두드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청춘엔 부적절한 문장이다. 하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김중혁 작가 특유의 게으름과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에 익숙해지면 참된 의미를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생을 살면서 힘을 빼야 한다는 걸 수백 번도 넘게 느꼈다. 테니스를 칠 때도 초보자는 무조건 공을 세게 치려고 힘을 잔뜩 준다. 하지만 고수는 오히려 힘을 빼고 부드러운 스윙을 몸에 익히기 위해 매번 고민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늘 죽을 힘을 다해 매번 100m를 전력 질주하는 이는 퍼지기 마련이다. 가뜩이나 지옥 같은 경쟁 사회, 1등 만능주의에 길든 우리나라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 넘어져도 괜찮다. '뭐라도 되겠지'하고 웃어넘긴다고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가 날카롭게(?), 아니 얼렁뚱땅 넌지시 건네는 인생의 의미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결국 삶이란 선택하고 실패하고, 또 다른 걸 선택하고 다시 실패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패를 빨리 인정하고 원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유연성이다. 실패가 별게 아니란 걸 깨닫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으려면 실패에 익숙해야 한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다 더 큰 실패를 맛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막걸리 야구' 편이 무척 흥미로웠다.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본듯한 장면이 계속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죽어라 홈베이스를 향해 슬라이딩하지도 않고, 부상을 참아내며 완봉승을 하려는 사람도 없다. 그저 그 순간을 즐기고 게임 속에서 여유를 찾는 과정이다. 안타를 치고 나간 친구를 오히려 위로하는 이상한 야구 경기가 펼쳐진다.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는데, 화가 나는데, 복수를 하려고 하는데, 번호표를 뽑아야 하는 거다. 대기인 수는 일곱 명이다. 기다려야 한다. 그게 야구다.'라는 표현에 걸맞은 이상적인 야구의 전형이다. 

 

아무리 명절이라고 해도 열여덟 명의 스케줄을 맞추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죽고, 누군가 다치고 누군가 아프고, 누군가 일이 터지고. 누군가 도망가는 삶이 계속되고 있다. 다시 그런 야구시합을 할 수 있을까. 추석만 되면 운동장에서 깔깔거리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유치원 때부터 함께 자라온 수원 친구들을 만날 때면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초딩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영통구청에서 풋살을 한다. 중딩처럼 이기든 지든 싱글벙글 웃으며 치킨을 먹으러 간다. 고딩처럼 배가 꺼질 때까지 PC방에서 유치한 게임에 소리를 지른다. 나이는 점점 먹어가는데, 무섭도록 반복되는 패턴이다. 하지만 마음은 편하다. 학점, 취업, 연애. 온갖 무거운 주제는 미뤄두고 그냥 웃고 떠들고 싱거운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이렇게 버티고 견디다 보면 어쩌면, 아주 운 좋으면 재능이 생기고 그걸로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또 무의미한 상상을 시작한다. 힘들수록 계속 되내여야만 한다.

 

'지금은 이래도 뭐라도 되겠지. 버티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바뀐다고 나까지 급해질 필요는 없다. 급한 건 세상만으로 충분하다. 새해에 세운 나의 게획을 점검해본다. 너무 도전적인 것은 아닐까. 너무 빨리 걸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목표가 너무 거창한 것은 아닐까. 하루는 24시간이고, 한 달은 30일이고, 1년은 12달이다. 시간은 충분하다. 우리의 목표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성실하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조금만 더 행복해지면 된다. 주름을 만들듯 천천히 내 속도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눈물이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대가로 내가 세상에 지불하는 동전인 셈이다. 억울해서, 나를 몰라줘서, 속상해서 흘리는, 온전히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은 싫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눈물이라면 그게 얼마든 삶의 통과비로 지불하고 싶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포기하고 있었다. 시간을 포기하고, 돈을 포기하고, 또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한 다음,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을 포기하는가의 문제다. 선택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포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기로 선택하고, 결국 돈을 많이 벌게 된 사람이 어떤 걸 포기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얼마나 기분 좋게 포기할 수 있는가에 따라 인생이 즐거울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평생 몇 잔의 맥주를 마시게 될까, 평생 몇 명의 친구를 만나게 될까, 평생 얼마의 돈을 벌고, 또 쓸까. 숫자로 생각하면 가끔은 모든게 허망하다.

나와 네가 손을 잡으면 우리가 된다. 나와 네가 손을 잡는 이유는 한 줄로 서서 더 먼 곳까지 뻗어나가기 위해서다. 원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와 네가 손을 잡아 동그란 원을 만들어버리면 다른 사람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울이 되고 만다. 그곳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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