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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철학 강요 ㅣ 홍신사상신서 38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 홍신문화사 / 1997년 9월
평점 :
절판
『법철학강요』로 살펴본 사랑
0. 서론
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는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인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느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이 타자 안에서 인정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타자도 역시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을 얻는다는 데 있다.
사랑은 시대, 문화, 나라를 막론하고 가장 뜨겁고 흥미로운 주제다. 문학 작품은 물론이고 현실 세계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의 원동력에는 대부분 ‘사랑’이라는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온갖 불법적인 행동 역시 사랑이라는 하나의 추상적인 동기 때문인 경우도 무척 많다. 맑시즘과 유물론의 사상적 방법론적 진원지인 헤겔 역시 사랑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형이상학, 논리학, 절대정신, 사회 전반적인 구조, 체계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도 관심이 많았고 철학적인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철학자였다. 신에 대한 종교적 사랑은 물론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사랑도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헤겔은 사랑을 이성과 유비적인 어떤 것을 지닐 수 있는 도덕적인 감성으로 고찰하며, 따라서 감성 내에 존립하는 일종의 도덕적 추동력으로서 이해했다. 하지만 이성적인 관계 맺음과 이해 역시 중요하다고 헤겔은 주목했다. 한편 인간 대부분은 사랑에 빠지면 인생에서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에 빠지게 되고, 상대방의 내면에서 나의 모습을 찾고 행복해한다. 헤겔의 여러 저술과 사랑에 대한 언급을 종합하여 헤겔이 가진 사랑, 나아가 결혼, 가족, 자녀와 같은 전반적인 영역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한편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대상은 모두 의미를 부여받은 것으로 경험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대상들에 원래 의미가 내재해 있는 것처럼 경험하기 쉽다. 그런데 이 점은 우리 자신에게도 통용되는 것이다. 가령 사랑이라는 의미가 발생하면, 타인은 나의 연인이 되고 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사랑받을 만한 본성이 나에게 미리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며 나에게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본성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랑받을 만한 본성’ 혹은 ‘사랑할 수 있는 본성’등은 모두 사랑이라는 의미가 발생한 후 생기는 환상일 뿐이다. 따라서 의미 창조 혹은 의미 부여 행위가 먼저라고 할 수 있고, 주체 혹은 대상의 성격은 이로부터 구성되는 사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랑
사랑은 운명과 부딪친다. 사랑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행복한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불행한 일상성에 둘러싸여 있다. 사랑은 특히 소유관계를 배제함으로써만 성립된다. 소유관계야말로 자기와 타자의 구별과 대립이 첨예화하는 마당이며, 사랑마저도 넘어설 수 없는 벽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소유라는 운명에 거듭해서 부딪치는 것에 대해 헤겔은 처음부터 고심하고 있었다
헤겔도 초기 저작에서 사랑은 기본적으로 모든 대립을 배제하며, 차이가 있는 분열태는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본성상 감성과 이성으로 복합된 존재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이성적인 감성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헤겔을 보았다. 즉 사랑은 타자 내에서의 자기발견 또는 자기 망각을 뜻한다. 인륜적 가치를 지닌 사랑이라는 존재를 통해 타자와 나의 일체성을 깨닫고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에 주목한 것이다. 헤겔은 사랑이 그 자신의 통일성에 대한 정신의 감정이며, 개인은 독립적 인격이 아니라 그 성원으로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개인이 자신의 독립적 존재를 포기하고 타자와 합일을 이루는 과정은 두 명의 ‘내’가 하나의 ‘우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타인에 대해 헌신하고 기존의 독립성을 상실하며 역설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찾고, 표현하는 일이 바로 사랑이다. 결국, 독립적이지만 사랑이 없는 존재는 결함 있고 불완전하다는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타자와의 차이의 극복, 개별 인격의 상호 포기를 가져오지만 재통일하는 과정에서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 간다. 즉 헤겔은 사랑을 통해 인격적 고립으로부터 자유를 달성하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기를 상실할 때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집중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타인의 모습에서 괴물같은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매우 절망적이고 슬픈 현실일 수밖에 없다.
2. 결혼
이것은 동시에 칸트적인 파악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 즉 개인의 존립을 절대화하여 사회적 · 공동적 관계를 인간의 본질에 있어 외적 · 파생적 관계로 하는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인륜적 · 공동적 관계의 현실적 형태가 직접적으로 형성된 관계로서 결혼을 파악하는 시도이다. 이와 같이 파악된 결혼에서는 개인이 서로 헌신함으로써 일심동체가 되기 때문에, 그리하여 상대 속에서 자신을 의식하는 구조가 되는 한에서 결혼은 본질적으로 일부일처제로 된다.
헤겔의 사랑과 결혼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자유로운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여 가족을 구성한다. 마침내 두 사람에게 아이가 생김으로써 하나의 완전한 가족이 완성된다. 이렇듯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헤겔의 사유는 나만의 사랑이 아닌 상대방의 사랑도 고려한다.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한다.”는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타자도 내가 사랑한다는 것, 나와 똑같이 내 마음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타자의 자유문제를 지나치게 쉽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자연스레 헤겔이 두 사람의 주관적인 내면, 사랑과 자유에 대한 두려움도 간파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하나의 제도를 통해 남녀 간의 사랑을 실체화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단순히 인류의 종, 생명의 유지 및 보존을 위한 성적 관계 이상으로 헤겔은 결혼을 생각했다. 칸트가 결혼을 단순히 시민사회의 단순한 계약관계로서만 파악한 것을 뛰어넘어 헤겔은 사랑의 가치를 확인, 인식하며 객관적,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하나의 실체적인 의식이라고 규정했다. 즉 헤겔에게 있어서 결혼은 단순히 의례의식을 넘어 매우 중대한 사회적 체계인 것이다.
3. 가족
가족은 자연적인 공동체다. 가족의 구성원들은 신뢰와 자연적인 복종에 의해 결속되어있다. 가족은 정신의 직접적 실체성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상의 통일을 기초로 성립한다. 여기에 요구되는 마음가짐은 가족이라는 완전무결한 본질의 일체성 속에 스스로의 개성이 스며들어 있음을 자각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서가 아닌 그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데 있다.
타자였던 남녀가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되며, 실체적인 성격을 가진다. 둘의 주관적인 사랑이 우리라는 객관적 사랑으로 변화하는 하나의 선포로서 결혼이 필요한 것이다. 가족이라는 통일체 안에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 일원으로서 존재한다는 자각을 느낄 수 있다. 부부 사이, 가족 내에서는 공동소유가 가능하며 남녀는 서로 속에서 보편성을 본다. 가족은 자연적인 인륜적 공동체로서, ‘정신’이 직접적으로 실체로서 존재하는 모습이다. 부부가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기초한다면 그것은 주관적, 우연적,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하나의 제도적 결합으로 이뤄진 가족 관계를 통해 법률적으로 계약 관계를 맺고, 생활 전체를 공유하며 나아가 재산을 공동으로 운용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시민사회의 계약관계로서 가족을 살펴보면 서로 합의된 이용 관계, 뿔뿔이 흩어진 개인을 묶어 주는 하나의 체제로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헤겔은 가족이 공동 관계의 증표이며 국가 공동체에 버금가는 공동관계의 마당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시민은 조금 더 의식 있는 공동체로서 국가 공동체와 연계된다.
4. 자녀
부부 사이에서의 사랑의 관계는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사랑의 감정이 실체적 통일을 이룬다고는 하지만 이 통일은 아직 아무런 객관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는 자녀를 통해 비로소 이런 객관성을 갖게 되며 또한 바로 이들 자녀를 통해 결합의 전체를 목도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녀를 통해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자녀를 통해 아내를 사랑하는 가운데, 마침내 두 사람은 자녀에게서 다름 아닌 그 자신들의 사랑을 직감하게 된다.
헤겔은 부부와 자녀가 똘똘 뭉친 하나의 가족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특히 헤겔에 따르면 아이는 현실적 절대자로서 중요한 매개자 역할을 한다. 헤겔이 지향하는 객관적인 사랑이란 것이 결국 타자의 자유를 부정하는 형식을 띠게 되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객관적 사랑으로서 자녀를 낳는 행위로 드러난다. 즉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변증법적으로 종합된 결과물이 바로 자녀이다. 자녀를 바라보며 부부는 육체적 관계를 맺었을 때를 기억하며 그때의 사랑을 직감한다. 인륜적인 형태로서의 가족의 원리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은 단지 직접 느껴서 아는 것만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자기 의식적이어야 한다. 자녀 역시 각자의 권리라는 점을 언급하며 자녀와 부모 관계를 검토한다. 자녀는 가족의 공동재산에 의해 양육되고 교육될 권리를 갖는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자녀의 중요성은 중요한 개념이었다. 물론 자식을 낳은 뒤 두 사람이 사랑하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하고, 그저 과거의 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식은 사랑의 객관적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억지로 둘을 결합하게 하는 하나의 족쇄나 제어 장치로 변모될 위험도 있는 것이다.
5. 더 생각할 문제
- 헤겔은 거듭 결혼, 자녀의 출생을 강조하며 객관적인 실체적 통일을 확인하려 애썼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언제나 행복한 결말만을 낳지는 않는다. 자유의지를 가진 내가 타인을 사랑한다고 해서 타인이 나를 사랑해야 하는 의무는 없다. 오히려 주관적 감정에 푹 빠져 이성적 판단이 어려운 개인은 사랑의 영원함을 쉽게 착각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오히려 이런 개인의 특성과 사랑의 속성을 알고 있기에 더욱 이런 제도적 결합에 집중한 것은 아닐까? 자신이 느끼는 불안함을 사회적, 국가적 제도의 도움을 통해 안정감을 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21세기는 다양한 부부의 형태가 존재한다. 물론 헤겔이 살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며 문헌을 읽어야 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동성애 부부, 편부모, DINK족 등 새롭게 생겨난 가족의 형태가 많다. 이는 헤겔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남편, 아내, 아이 정반합의 구조가 아니다. 헤겔이 주목한 사랑, 결혼, 가족의 본질적인 의미에 집중한다면 과연 이런 결합을 비정상적이고 불완전하다고 규정할 수 있을까?
<참고 문헌 및 기사>
- 프리드리히 헤겔, 서정혁 역, 『법철학강요』,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1.
- 남기호, 「헤겔의 ‘사랑’ 개념과 그 철학적 위상 변화」,시대와철학, 2008.
- 김용찬, 「헤겔 정치철학에서 사랑의 의미와 역할」, 한국정치연구, 2008.
- 강신주, 『철학 vs 철학 : 사랑은 타인과 하나가 되는 것일까?』, 그린비, 2010.
- 강신주, 『철학 vs 철학 :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그린비, 2010.
- 엘리슨 스톤(윤소영 역), 『헤겔과 성적 차이의 페미니즘』. 공감, 2004.
『법철학강요』로 살펴본 자살
0. 서론
인격으로서 나는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오직 내 의지가 있을 경우에만 나의 생명과 육체를 동시에 소유한다.
나는 내가 의지하는 한에서만 내 몸의 여러 부분과 생명을 지닌다. 그래서 동물은 자기 신체를 절단하거나 자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인생을 산다. 하지만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은 모두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은 가장 확실하지만, 역설적으로 언제 다가올 지는 가장 불확실하다. 신분, 재산, 국적, 성격, 가족 등 많은 요소들도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오직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즉 생명이란 죽음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죽음은 우리의 삶 전체, 특히 현재의 삶에 영향을 끼치 수 있다. 죽음은 크게 자살, 타살, 자연사 세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가장 민감하고 논란의 여지가 큰 ‘자살’의 영역을 헤겔의 『법철학』을 기초로 하여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한편 최근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8년 째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33분에 한 명꼴로 자살이 발생하는 수치는 분명 짚고 넘어가야할 사회적 문제다. 자살에 관련한 철학적 논의는 오래되었다. 그중 혹자는 헤겔의 자살에 대한 견해를 오해하기도 한다. 헤겔은 『법철학』 추상법 중 ‘소유’ 부분에서 여타의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의 특이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단편적인 문장으로 헤겔의 철학적 사유를 오해하는 것은 위험하기에 헤겔의 상반되는 주장을 밝히고자 한다.
1. 인간의 생명권과 소유권
외적 활동의 포괄적 총체를 의미하는 생명은 인격에 대립하는 외적인 것이 아니다. 인격은 그 자체가 바로 이러한 총체로서 직접적으로 존재한다. 생명을 포기하거나 희생하는 것은 이러한 인격의 현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생명을 포기할 어떤 권리도 지니고 있지 않다. (중략) 근본 문제는 과연 내가 자살할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결국 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나의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살은 생명을 지니고 있는 자가 생명을 부정하는 일종의 모순적인 사태다. 헤겔은 자살을 권리의 문제로 생각했다. 하지만 흄, 루소로 대표되는 계몽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흄은 자살이 신과 공동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의 파기나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나의 생명은 나의 것으로서,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고, 이는 지극히 자연의 법칙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루소 역시 원칙적으로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헤겔은 자살은 언급하면서도 ‘인격’은 양도될 수 없는 기본권이라고 주장했다. 외면적인 활동의 포괄적 총체인 생명은 결코 인격에 대립하는 외면적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삶을 포기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헤겔의 이러한 주장에는 개인은 자신의 생명의 궁극적 주인이 아니라는 문제 의식이 깔려있다. 헤겔은 계약에 의해 성립하는 물건에 대한 권리와 인격적인 권리를 구분하며 자살이 추상법이 아니라 인륜적인 차원의 문제로 다루었다. 나의 신체, 생명, 인격을 단순히 추상적이고 계약으로 맺어지는 소유권과 차별적인 성격으로 규정한 것이다.
2. 인간 생명과 시효 문제
나의 개성, 일반, 나의 보편적 의지의 자유, 인륜 및 종교와 같이, 가장 나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인격과 나의 자기의식의 보편적 본질을 이루는 귀중한 것들이나 실체적 규정들은 양도될 수 없으며, 이러한 것들에 대한 권리에는 시효가 없다.
헤겔은 자살이 개별자로서의 자신을 죽임일 때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오히려 억압적인 외적 조건에 맞서 이 조건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 자유의 터전으로 바꾸는 노력에 주목했다. 자신의 현존의 개별성을 스스로 내걸 수 있는 자유만이 진정한 죽음의 능력으로서의 자유라고 본 것이다. 즉 자기희생, 자기지양의 삶을 산 예수나 소크라테스가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헤겔은 『법철학』에서 소유권의 포기, 양도는 소유권의 ‘시효’에 의존한다고 지적했다. 시효는 ‘어떤 것을 가지려고 하는 의지는 그 자신을 표출한다.’고 하는 필연적인 규정에 근거한다. 하지만 ‘외면적 활동의 포괄적 총체성’으로서 ‘생명’은 특수하게 제한되지 않고, 시효에 제한되지 않으므로 포기되거나 양도될 수 없다. 그리고 생명의 주체인 인격 그 자체를 포기할 권리를 갖는다면, 이는 인격이 곧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이므로 모순된 것이다. 삶, 생명은 외면적인 활동의 포괄적 총체로서 인격성에 대립하는 외적인 것이 아니다.
3. 주체적 삶, 실체적 삶. 그리고 자살의 사회성
국가와 개인의 하나됨 자체가 진정한 내용이자 목적이며, 개인들의 사명은 단 하나의 보편적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성성은… 보편과 개별의 상호침투적인 통일성에서 성립하며,… 객관적인 자유, 즉 보편적인 실체적 의지와 개별적인 앎이나 특수한 목적을 추구하는 의지로서의 주관적인 자유의 통일에서 성립한다.
자살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다.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사회 속에서 완벽히 고립되어 지낼 수 없다. 타인과 끊임없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존재가 인간이다. 헤겔 역시 국가가 보편적 필요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필요까지 돌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보편적 인간의 구체적 자유가 공동체 내에서 현실적일 수 있다면 생존권은 시민사회의 목적이자 보편적 업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국가에 종속되고 모든 걸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로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개인이 전체에 일방적으로 함몰되고 종속되어 자유롭게 자신의 생명조차 포기할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헤겔의 사유를 ‘전체주의’로 해석하는 것도 위험하다. 헤겔은 국가가 전체가 개별자를 무화하고 추상해서 얻어진 것, 국가라는 보편자가 개인보다 상대적 우위에 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국가를 ‘유기체’에 비교하며 이는 근대 시민사회에서 양도 불가능한 개인 고유의 인격성과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살이 폴리스 전체에게 해악을 끼치는 문제로 파악한 것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헤겔 역시 인륜을 중요시 하지만 개별자와 보편자가 직접적으로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4. 인륜적 공동체성의 실재적 복원
부산시내 주택에서 숨진 지 5년가량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60대 여성이 백골 상태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옆방에 사는 이웃도, 집주인도 이 여성이 숨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노인의 날인 2일을 이틀 앞둔 지난 9월30일 오전 11시30분께 부산 부산진구 초읍동 주택 단칸방에서 세들어 살던 김아무개(67)씨가 숨져 있는 것을 집주인(64)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부산진경찰서가 1일 밝혔다. 집주인은 “김씨가 백골 상태로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고 경찰에 말했다. 숨진 김씨는 두꺼운 옷을 아홉겹이나 껴입고 손에는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집 냉장고 안에는 음식물이 없었으며, 거미줄이 쳐진 채 고장나 있었다.
헤겔은 개인에게 자살할 권리가 없으며 자신의 생명의 주인도 아니라고 하며 인륜적인 부분을 언급했다. 헤겔이 자살을 용인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다. 자살 문제에서 드러나는 것은 소유권의 주체인 인격이 인륜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기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느냐라는 ‘인륜의 내면화’ 문제였다. 자살은 단순히 자신의 생명을 부정하는 파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체와 관련된 유기적(체계적, 조직적) 문제로 파악할 수 있다. 경제적인 이유로 자살을 택하는 이가 늘어난다면 사회는 개인의 비극적인 선택을 예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최근 정쟁으로 붉어진 복지와도 맞닿아 있다. 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한 자살의 원인이 존재하지만 결국 공허한 자살을 막기위한 궁극적인 대책의 기본은 인륜적 공동체성의 실재적 복원뿐이다. 독거노인 30만 명, 최근 사회적 소외와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죽은 고독사도 새로운 영역의 문제다. 위에서 언급한 고독사 사건은 현재 우리나라의 참혹한 세태를 보여주는 사례다. 고독사는 매우 애매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다. 누군가는 고독사를 자살로, 혹은 사회적 타살로, 혹은 자연사로 바라본다. 하지만 적어도 헤겔이 자살을 언급하며 집중했던 인륜적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면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5. 더 생각해볼 문제
- 자살은 개인의 문제일까, 사회의 문제일까? 단순히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겠지만 자살은 하나의 신드롬처럼 퍼져있다. 경제적 빈곤을 겪는 국가에서는 사회안전망의 부족으로 자살자가 속출한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적 수준이 높은 북유럽 일부 국가에서도 높은 자살률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연간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을 비교했을 때 핀란드는 2007년 18.8명, 스위스는 2006년 17.5명을 기록했다. 두 나라 모두 사회복지 안전망이 가장 잘 갖추어진 나라라고 평가받지만 자살률 10위 내에 위치한 불명예를 얻었다. 개인의 선택을 완벽히 강제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는 존재할 수 없다. 과연 자살이라는 하나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대책이 있을까? 인륜적 공동체성을 회복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마무리는 아닐까? 반대 사례로 서울시의 자살률은 6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무려 11%(인구 10만 명당 26.9명에서 23.8명으로 감소)의 감소세로 CCTV 설치, 생명의 다리 건설 등이 효과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단순히 양적 복지 체계의 강화보다는 따뜻한 위로와 공감하려는 소통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 헤겔이 인정한 자연사와 이념 봉사를 위한 낯선 이로부터의 죽음. 두 가지를 제외한 죽음은 여전히 많다. 죽음의 종류는 수많은 형태가 있지만, 죽음의 결과는 모두에게 똑같다. 생의 마지막은 결국 동일하지만 각각의 형태에 경중을 매길 수 있을까? 사고나 실수에 의한타살, 의도된 타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타살, 우발적인 타살, 정당방위로 인한 타살, 국가에 의한 타살인 사형 등 각각의 형태를 헤겔은 어떻게 평가할까? 한편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자살에서 과연 인간은 온전히 홀로 존재하는 대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헤겔은 저작을 통해 동물의 경우 육체와 생명에 대해 현실적인 점유는 하고 있지만 의지가 없기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생명의 권리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권의 범주가 확장되어 동물권도 등장하며 동물에게도 하나의 권리 및 의지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헤겔이 인간만의 독점적인 사태로 규정한 자살도 돌고래 등 일부 동물에게서도 볼 수 있다고 보고한 학술지도 존재한다. 과연 동물은 단순히 인간보다 의지가 부족하고 실제적인 점유를 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대상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까?
<참고 문헌 및 기사>
- 프리드리히 헤겔, 서정혁 역, 『법철학강요』,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1.
- 남기호, 「자유로운 죽음의 방식 - 헤겔의 자살론」,한국카톨릭철학회, 2011.
- 서정혁, 「헤겔의 법철학에서 자살의 문제」, 한국철학회, 2007.
- 김광수, '60대 할머니의 죽음 5년 만에 발견.', 한겨레신문, 201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