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 Z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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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 <월드워 Z>와 맥스 브룩스 장편소설 <세계 대전 Z>는 완전히 다르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인 '세계 대전 Z', 세계관만 따온 듯한데 굳이 판권을 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수준이다. 영화 <월드워 Z>에서는 브래드 피트가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당연히 세계를 구하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박진감 넘치는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세계 대전 Z>에서 주인공은 따로 없다. 중국, 미국, 캐나다, 아일랜드, 한국, 러시아 등 전 세계 인류가 주인공이자 피해자, 가해자다. 스펙타클한 갈등도 없고, 헉소리가 절로 나오는 반전도 없다. 그저 극한의 상황에서 철저하게 작아지는 인간의 본성을 치밀하게 파고든 게 소설의 가장 큰 힘이다. 전 세계를 누비며 생존자를 만나고, 그들의 생생한 인터뷰 자료를 무미건조하게 모은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런 정공법에서 다른 좀비물과 차별화를 느낄 수 있다. 담담하게 마치 제3자의 입장에서 살육을 이야기하는 군인도 있고, 그 당시 악몽 같은 좀비의 돌진이 눈앞에 선한지 벌벌 떠는 사내도 있다. 

하지만 하나같이 공통된 감정은 '두려움'의 근원이 좀비가 아닌 사람에게 있다는 점이다. 하루아침에 고액 연봉자에서 재교육이 필요한 부속품이 되어버린 변호사, 자신을 쫓는 조국의 군함에 미사일을 날려야 하는 함장, 쓸모없어진 군용견을 처단하란 명령을 받은 군인. 모두 좀비에게 당해 자신도 좀비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보다는 인간에게 느끼는 모멸감이 더 크다. 좀비 바이러스를 치료할 의약품을 속여 파는 기업,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다가 결국 전 세계 인류의 파멸을 촉진시키는 무능한 미국 정부까지. 생존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철저히 무시하고, 수단화하는 사회 구조에서 자신도 자연스레 변해가는 모습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이익을 영악하게 계산하는 인간의 모습은 인터뷰 중 나온 명대사로 요약할 수 있다. 

"두려움을 자극하면 팔린다."

가장 근본적인 감정인 '두려움'을 냉혹하고 샅샅이 드러냈기에 <세계 대전 Z>는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다. 한편 워낙 다양하고 많은 인터뷰가 뒤엉켜 있기에 에피소드 별로 오르락 내리락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한 번 읽으면 책을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다."는 뻔한 찬사는 사실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용커스 전투나 일본인 오타쿠의 탈출기, 러시아 군대의 냉혹한 훈련법은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피를 튀기는 전투나 잔혹한 좀비 처단법이 주를 이루는 다른 소설과는 차원이 다른 현실적이고 전문적인 맥스 브룩스의 통찰이 빛나는 부분이다. 브래드 피트 역시 <월드워 Z>의 성공에 힘입어 속편을 만들 계획이고, 더 많은 부분을 원작에 의존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력이 발달하더라도 원작을 따라올 수 없을 것 같다. 담담하기에 더욱 소름 돋는 인터뷰 형식은 할리우드와 맞지 않다. 날것 그대로의 인류 파멸, 인간의 밑바닥을 그려내기엔 활자만큼 우직하고 효과적인 수단을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소, 여기엔 인종 차별주의도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계층 차별주의도 존재했소. 당신이 예전에 끗발 있던 기업 변호사라고 치지. 살아오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계약서를 검토하고, 거래를 중개하고, 전화기에 대고 수다를 떠는 게 당신의 일이었소. 당신은 그런 일에 재주가 있었고, 그래서 부자가 됐고, 덕분에 배관공을 불러서 화장실 변기를 고치게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계속해서 전화기에 대고 수다를 떨 수 있었지. 일을 더 많이 할수록, 돈이 더 많이 들어왔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잡다한 일을 떠맡길 수있는 하인들을 더 많이 고용하게 됐지.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갔단 말이오. 그러나 이젠 그게 통하지를 않소. 계약서를 검토하거나 거래를 중개할 필요 자체가 없어진 거요. 이제 필요한 건 변기를 고치는 거지. 그래서 갑자기 당신의 편의를 봐주던 사람이 당신의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상사가 될 수도 있소. 어떤 사람들에겐 이런 상황이 좀비보다 더 무서웠지.

우라지게 정곡을 찌른 말씀이었소. 늙는 게 두렵고, 외로울까봐 두렵고, 가난해질까 두렵고, 실패할까 봐 두려운 것. 두려움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이지. 두려움이 바로 핵심이라는 거요. 인간의 두려움만 건드리면 뭐든 팔아먹을 수 있다. 그게 내 영혼의 진언이었소. "두려움을 자극하면 팔린다."

첫째,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질병이 너무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그 위협을 효과적으로 격리시키기엔 무장 병력이 이미 너무 약화돼 있으며 국가 전체에 산발적으로 배치돼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이 빠지게 된다. 그래서 병력을 통합해서 특별한 ‘안전지대‘로 철수시키는데 바라건대 산,강, 심지어는 외국의 섬과 같은 자연적인 장애물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그 녀석이 내 파트너가 됐다거나, 아니면 화재나 뭐 그런 일에서 고아원 하나를 통째로 구했다는 디즈니식 결말을 이야기해 주고 싶지만 쉽지 않군요. 그 자식들이 녀석을 돌멩이로 쳤던 겁니다. 체액이 그 개의 귀의 도관까지 꽉 차 있었어요. 한쪽 귀는 완전히 먹고 다른 쪽 귀는 일부만 들렷죠. 하지만 코는 아직 쓸 만해서 새 주인을 찾아 줬더니 쥐를 꽤 잘 잡았죠. 그해 겨울 그 가족들을 먹여 살릴 만큼 쥐를 많이 잡아 줬어요. 그것도 디즈니식 결말이라고 하면 그럴 수 있겠죠. 미키 마우스 스튜가 들어간 디즈니 이야기. (부드럽게 웃었다.) 황당한 이야기 하나 들어 볼래요? 난 과거에는 정말 개를 싫어했어요.

물론 우리의 새로운 라틴 초강대국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쿠바에는 수백 개의 정당이 있고 해변의 모래보다 더 많은 특별 이익 단체들이 존재합니다. 거의 매일 파업이나 폭동이나 시위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혁명이 끝난 뒤 왜 체 게바라가 자취를 감췄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기차를 제시간에 운행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날려 버리는 게 훨씬 쉽거든요. 처칠 총리가 뭐라고 했나요?

"민주주의란 다른 모든 형태의 정부를 제외했을 때 최악의 정부 형태다."

(그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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