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 냥. 뜨겁게 데워서. 매혈한 허삼관은 단순히 체력 보충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처럼 음식을 주문한다. 가진 건 건강한 몸뚱이뿐인 그는 철저히 정해진 단계에 따라 피를 판다. 우선 배가 터져라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방씨와 근룡이에게 배운 대로 오줌보가 터질 정도까지 물을 몇 사발 들이킨다. 이뿌리가 시리지 않으면 아직 더 마실 수 있다는 증거이므로 더러운 강물이 아닌 깨끗한 우물을 계쏙 들이 붇는다. 그리고 혈두를 찾아가 약간의 뇌물을 제공하고 피를 판다. 그리곤 돈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 냥을 주문해야 한다. 이것은 살에서 나온 힘이 아니라 피에서 나온 힘을 팔았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자마자 두 가지를 확인해봤다. 우선 돼지간볶음과 황주. 정확한 맛을 사진상으로 모르겠지만, 제육볶음과 비슷해 보였다. 황주는 마치 모주처럼 달달하면서 도수가 높은 느낌? 그리고는 나도 매혈, 아니 헌혈을 해보려고 다시 도전했다. 어릴 때부터 늘 헌혈을 해보곤 싶었다. 남을 돕는다는 기분도 좋았고, 일정 횟수를 넘으면 준다는 메달이 막연히 갖고 싶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이가 어려서, 혹은 천식이 있어서.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AB형, A형, B형 O형 급구!" (다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를 보고 자신만만하게 들어갔지만 민망하게 초코파이 하나만 집어들고 나왔다. 허삼관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중국 문학, 아니면 위화의 독특한 화법 때문인지 사실 초반에는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친아들이 아닌 일락이를 구박하거나, 임분방을 (책의 표현대로) 자빠뜨리려는 수작들은 그다지 재밌지 않았다. 하지만 허옥란과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를 책임지려는 중반부가 지나면서 서서히 주인공의 매력에 빠졌다.

 

허삼관은 전형적인 츤데레.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남자다. 마치 우스갯소리처럼 "부모 욕은 참아도, 내 욕은 못 참는다."를 몸소 실천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말만 이렇지 꽈배기 서시와 세 아들. 그가 인생을 사는 이유는 오로지 가족이다.

 

"하소용이 마누라가 내 욕도 했나?"

"자네 욕은 안 했지. 아마."

 

"그럼 됐지, 뭐. 어떻게 세상 일 다 신경 쓰고 사나?"


 

 

이렇듯 허삼관은 (중국에서 가장 심한 욕 중 하나인) '자라대가리'라는 욕을 들어먹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중국 남자다. 온갖 추문과 주변 눈치에 짜증 내고 버럭 화를 내버리곤 만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서서히 억지로라도 감춰둔 따뜻함을 드러낸다. 아니 드러내는 게 아니라 감추지 못한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문득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친아빠 하소용에게 가겠다면서 가출한 일락이를 실컷 욕하고 다그치다가도 결국은 국수를 먹인다.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몸이 상하는 건 신경 쓰지 않고 연속으로 피를 파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 가장의 책임을 어떻게든 지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죽느냐, 사느냐가 제일 중요한 가치로 성큼 다가온 극심한 시기에 그의 냉소적인 말투는 빛을 발한다. 피를 팔아 살아가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능청스럽고 무덤덤하다. 물론 자신이 힘들게 피를 판 것을 애써 감추거나, 티 내지 않는 성격은 아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생색은 낼 대로 다 내면서도 가족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게 바로 허삼관이기 때문이다.

"애들 줘."

"그럴 순 없어요. 이건 당신을 위해서 끓인 거라구요."

"누가 마시면 어때. 똥으로 변하기는 마찬가진데. 애들 똥이나 더 싸게 하라구. 애들 마시게 해."

 

"피를 팔아야지. 식구들 맛있는 밥 한 끼 먹게 해줘야지."


그가 바라는 건 엄청난 성공이 아니다. 그저 가족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게 해주는 게 다다. 우리네 가장이 느끼는 비애는 그 옛날 중국이나 2014년 대한민국이나 별다르지 않아 보인다. 특히 아픈 이락이를 위해 억지로 술을 마시는 모습에서는 짠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이락이네 생산대장은 술을 좋아하고, 권위적이며 비리로 얼룩진 인간이다. 동등한 위치라면 상종조차 하지 않고, 한 방을 날려버렸겠지만, 그는 사랑하는 이락이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힘이 있는 사람이다. 더럽고 치사해도 술상을 차리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장단을 맞춰줘야 한다. 과연 심야 지하철, 버스에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40, 50대 가장 중에서 흥겹게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강남역, 사당역을 가득 메운 이들은 술에 몸을 못 가누면서도 하나같이 집에 전화해 아이들 목소리를 듣거나, 사진을 들여다본다. 문득 어린 시절 술에 취해 돌아와 잠들어 있는 나한테 몇 마디라도 억지로 걸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까칠한 수염과 메케한 술 냄새가 너무 싫었는데, 이제는 조금이나마 그때 아버지가 느꼈을 애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또 한 잔 들어요! 몸은 상해도 감정은 상하면 안 되니까. 자, 다시 한 잔 듭시다."
허삼관은 속으로 '이락이를 위해서, 이락이를 위해서라면 마시다 죽는 한이 있어도 마셔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술잔을 받아들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 모습을 본 허옥란은 그제야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여보, 그만 마셔요. 무슨 일 나겠어요."
이락이네 생산대장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망할 생산대장. 육성으로 "아오, 이 인간"이 절로 나왔다. 권하는 술잔을 깨끗하게 비워야 하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억지 장단을 맞춰주고. 그런 무의미한 일을 되풀이할 게 문득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더럽고 치사한 일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 게 인생이고, 이런 상황에서 자존감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단 것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애써 감추고 낮추는 일의 목적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다지 절망적이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이 오로지 가족이고, 그래서 희생을 강요한다면 말년에 무척 슬프겠다고도 느꼈다. 마치 나이가 들고, 풍족한 환경에서 다름 아닌 피를 팔지 못해서 엉엉 아이처럼 우는 허삼관을 보니 더더욱 와 닿았다.

그는 젊은 혈두의 말을 떠올렸다. 자기처럼 늙은이의 피는 살아 있는 피보다 죽은피가 많아 원하는 사람이 없으니 가구에나 칠해야 한다고. 사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피를 팔지 못한 것이다.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피를 팔아 해결했는데, 이제는 자기 피를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니.... 집에 또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린푸, 베이당, 시탕, 바이리. 연거푸 피를 파는 '매혈 여로'가 이어지면서 젊은 허삼관은 쓰러지기도 했다. 아들이 아프거나, 집안이 어려울 때 매혈을 통해 허삼관은 역경을 이겨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피를 팔기 위해 찾아갔지만 매몰차게 거부를 당하자, 절망한다. 언제나 가족을 위해 살아왔던 그가, 자신을 위해 처음으로 피를 파는 행위, 즉 해야만 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거절당하자 슬퍼진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항상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생은 고통과 비애로 가득 찬 곳이다. 하지만 근엄하게 내뱉는 허삼관의 마지막 한마디를 기억하며 잘 버티고, 잘 이겨내고, 그냥 즐겁게 잘 살아야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그런 걸 두고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으니 다행이지. 지금 성안 사람 모두가 어렵게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옆집에 가봐라. 너희 친구 집에도 가보고. 멀건 죽만 먹을 수 있어도 잘 사는 집인 셈이다. 이 고통을 잘 참고 견뎌야 한다. 너희들, 나물이 질렸다고 하지만 먹어야 한다구. 찰진 밥 한 그릇, 옥수수 가루 넣지 않은 밥 한 끼 먹고 싶겠지만, 너희 엄마하고 상의해봤는데 지금은 안 된다. 나중에 해주마. 지금은 쌀독 속에 있는 나물을 먹고 옥수수죽을 마셔야 해. 너희는 그나마 죽도 갈수록 묽어진다고 하는데... 사실이다. 가뭄이 끝나지 않았고 끝나려면 아직 멀었으니, 우리도 별다른 방법이 없구나. 우선 목숨부터 부지하고 봐야지. 다른 건 생각할 틈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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