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기를 읽는 목적은 대부분 두 가지다. 여행을 떠나기 전 부푼 마음을 안고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이 첫째라면, 여행을 다녀온 후 추억을 곱씹기 위해 읽는 게 둘째다. 하지만 나는 여행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치밀하게 여행 계획을 짜는 준비성 강한 성격도 아니고, 여행기를 너무 많이 읽다 보면 애초에 질려버리기 때문이다. 기대와 설렘이 정점을 찍고 나면 어느 순간 여행지를 벌써 다 둘러본 느낌이랄까? (특히 내가 찍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환상적인 사진들이 담긴 포토북을 보면 더 심하다!) 그렇다고 여행을 다녀와서는 내가 직접 다이어리에 느낌을 쓰지, 남의 감상을 훑어보며 애써 공감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행기를 인상 깊게 읽은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빌 브라이슨은 다르다. 북유럽, 오슬로, 파리, 벨기에, 로마, 나폴리 등등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여행지가 나온다. 막연히 유명한 도시를 가보고 싶단 생각은 들지만, 현실적으로 훌쩍 떠날 수도 없기에 그냥 책으로 읽어보았다. 확실히 큰 기대 없이 보니 참 재밌더라. 책을 읽으면서 줄을 치고 여행 플래너에 꼼꼼하게 옮겨 쓸 필요도 없고, (다녀온 적이 없으므로!) 내용을 읽고 낡은 서랍 속에서 예전 사진들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불평불만이 가득한 투덜이 스머프같은 배 나온 미국 아저씨의 유머만 즐기면 된다. 그의 발자취를 따르다 보면 유럽은 '나라'가 아닌 '도시'가 중요한 갈림길이 되는 것 같다. 각기 다른 기질에서 나오는 묘한 차이를 건드리지만 어째 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느낌도 받는다. 왜냐하면, 가는 곳마다 싸우고, 불평하고, 따지고.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거치기 때문이다.

 

시계가 4시를 치자마자 여행사에 들어섰더니 항공사 예약 창구에는 다른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 내가 정황을 설명하자 여직원은 대기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나 훑어보았다. 잠시 후 하는 말이 내 이름이 명단에 없단다. 나는 직장에서 잘리고 차도 도둑맞았는데 아내가 제일 친한 친구와 도망간 사실을 방금 알게 된 사람 같은 표정으로 여직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고요?"

여직원이 이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저녁 비행기 좌석이 아주 많이 남아 있으니 상관없다는 것이다. 나는 물었다.

"뭐, 뭐라고요?"

여직원은 지극히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피아행 비행기 표는 112달러란다. 그걸로 하겠느냐고?

내가 비행기 표를 원했느냐고? 교황이 천주교냐고? 베티 포드가 병원이냐고? 두말하면 잔소리지.

"당장 하나 주시죠."

- 유고슬라비아

 

책을 읽다 보면 절반이 호텔에서 바가지요금을 가지고 싸우는 이야기, 나머지 절반은 다른 나라로 이동할 때마다 맞이하는 지옥 같은 줄서기에 대한 불만이다. 책장을 넘길수록 "이럴 거면 왜 여행을 하는 거지?"란 본질적인 물음이 들 수밖에 없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은 '여행 정보가 아닌 여행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라는 책 소개가 딱 들어맞는 솔직한 책이었다. (아, 적어도 어떤 도시를 피해야 하는지는 120% 알 수 있다.) 함메르페스트부터 이스탄불까지 부지런히 오다니면서 빌 브라이슨의 퉁명스러운 유머는 빛을 발한다. 예를 들면 리히텐슈타인의 군대 이야기라든지, 소피아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대한 유머라든지, 혹은 웨이터를 살려주며 영웅이 된 로마의 에피소드라든지.

(특히 식당 자리가 모자른 로마의 에피소드는 정말 재밌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가운데,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상황을 상상한다.)


웨이터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오히려 손님들을 더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돌포는 똘마니에게 다시 한 번 뭔가 귀띔했고, 똘마니는 자리르 떠났다. 기관총을 가지러 갔거나 불도저로 입구 쪽 벽을 밀고 들어오려나 보다.

"스쿠지(실례합니다)."

이날은 이탈리아 어가 좀 됐다.

"제 테이블을 쓰시지요. 전 이제 나갑니다."

나는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켰고, 잔돈을 챙긴 다음 일어섰다. 매니저는 내가 목숨이라도 건져준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랬는지도 모른다.) 웨이터는 내 입술에 키스라도 퍼붓고 싶은 게 분명했지만, 키스 대신에 '그라치에(고맙습니다)'만 연발했다. 내 평생 그 같은 인기를 느껴본 적도 없었다. 웨이터들의 얼굴은 환히 빛났고 식당 안의 다른 손님까지 나를 존경하는 눈길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아돌포까지도 고개를 살짝 까딱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로마 

 

그는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보다는 날카로운 비판의 눈길이 강한 남자다. 그는 나치즘을 도운 발트하임을 떡하니 대통령으로 선출한 오스트리아를 조롱한다. 공산주의가 저물어 가는 소피아도 냉정하게 바라본다. (물론 그러면서 그들의 변화 이전의 공간을 다녀왔다는 데 만족감을 느낀다. 전형적인 츤데레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까기'의 대표 주자 빌 브라이슨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외치는 미국 찬양론자도 아니다. 맥도날드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비판이나, 획일화되는 미국에 대한 냉소를 보면 그의 화살이 아군, 적군이 따로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여행을 가지도 않은 일본을 까는 부분도 있다.) 

 

맥도날드 임직원들은 유럽이 디즈니랜드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적당한 골목에 점포를 내도록 하고,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고 기능에 걸맞으면서도 좀 덜 튀도록 점포를 꾸며야 한다. 외관은 유럽의 보통 비스트로처럼 보여야 한다. 가령 붉은색 커튼이나 장식용 수족관 정도만 써야지, 창문에 새겨진 맥도날드의 노란 엠(m)자와 거대한 엉덩짝을 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모습을 빼고는 밖에서 봐서 맥도날드라는 표시가 나서는 안 된다. 말이 난 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맥도날드는 뚱보만 양산하고 건강에 나쁜 지금의 메뉴는 더 이상 팔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발 로너드 좀 치워달라고 누가 말 좀 해줬으면 좋겠다. 맥도날드는 이런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을 때에만 유럽에서 영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전까지는 절대 안 된다.

- 오스트리아 

 

반복된 불평불만이 사실 조금 지루해질 때도 있다. 그래서 글이 재밌고, 읽기 쉬운 데 비해 의외로 책을 끝까지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가본 도시라면 더 공감하고, 재밌게 함께 욕하면서 봤을 텐데. 하나도 가보지 못한 도시들이라 사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쓰고, 저널리즘 글쓰기에 익숙한 (물론 <발칙한 유럽산책>은 소설보다 더 가볍고 유쾌하다. 그렇다고 밝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의 깊이를 따라가기엔 배경 지식이 미천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여행 막바지에 갑자기 훈훈하고 따뜻한 결말을 읽는 순간 책을 읽는 내 여정도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행이란 어차피 집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아니. 이게 무슨 뒤통수 때리는 결말인가! 쉼 없이 전방위로 폭격을 퍼붓던 불평쟁이가 갑자기 회한에 잠기며 집에서 자신을 반길 가족들을 떠올리다니. 묘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런 따뜻한 마무리도 그리 나쁘진 않다. 여행하다 보면 결국 매번 느끼는 감정은 '역시 집이 최고야'란 것 아닌가? 이국적인 풍경에 사로잡혀 신선함에 즐거워하다가도 결국에는 자신이 익숙한 공간이 그리워지는 건 모든 사람의 공통 분모일 것이다. '여행'이란 것도 결국엔 역설적으로 돌아오는 게 정해져 있기에 더욱 즐겁고 낭만적이며, 흥미진진한 게 아닌가? 그게 아니라 체류가 된다면 어느덧 그것이 일상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되는 법이지. 그나저나 빌 브라이슨이 한국에 온다면 어떤 글을 쓸지 갑자기 궁금하다. 믿을 수 없이 빠른 인터넷, 깨끗하고 치안 걱정이 없는 밤거리, 아름다운 곡선이 살아 숨 쉬는 한옥일까? 아니면 집에 우환이라도 있는 듯 굳은 얼굴도 어디론가 빠르게 걸어가는 사람들, 외국인을 보면 일단 경계하고 보는 배타적인 마음, 그저 미친듯 맵고 짠 음식일까? 때론 이방인이 보는 우리의 밑낯이 궁금하기도 하다. 물론, 보나 마나 빌 브라이슨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는 없지만 말이다. 

나는 분명 여행의 끝에 와있었다. 저 반대편이 아시아가 아닌가. 유럽에서 가장 멀리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고생만 하고 있는 내 아내는 한 해 걸러 아기를 가졌는데 지금도 임신중이었다. 아내는 전화 통화에서 아이들 중 어린 두 녀석은 성인 남자만 보면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잔디는 허리까지 자랐고, 목장 울타리는 일부가 쓰러져가고 있었으며, 양들은 물가의 풀밭에, 소들은 옥수수 밭에 아무렇게나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나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고, 내 집의 친숙함이 그리웠다. 매일 먹고 자는 일을 걱정하는 것도 지겨웠고, 기차와 버스도, 낯선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도, 끊임없이 당황하고 길을 잃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라는 사람과의 재미없는 동행이 지겨웠다. 요즘 버스나 기차에 갇혀서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대는 내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내팽개치고 도망가고픈 충동을 얼마나 많이 느꼈던가?

동시에, 나는 계속 여행을 하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을 강하게 느끼기도 했다. 여행에는 계속 나아가고 싶게 만드는, 멈추고 싶지 않게 하는 타성이 있다. 해협 바로 저편에 아시아가 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저기가 아시아 대륙이라고 생각하자 경이로웠다. 몇 분이면 아시아 땅을 밟을 수 있다. 돈도 아직 남았다. 그리고 내가 가보지 못한 대륙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다. 대신에 콜라를 한 잔 더 주문하고, 오가는 페리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아시아에 갔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행이란 어차피 집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슬리브니차 강 위로 난 인도교를 건너, 그리고 이름 모를 주택가 거리를 따라 다시 시내로 돌아오면서 소피아는 실로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보다도, 소피아는 내가 가봤던 도시 가운데 가장 유럽다운 도시였다. 현대식 쇼핑센터도, 대형 주유소도, 맥도날드나 피자헛도 없고, 코카콜라 회전 광고판도 없다.

내가 가본 어떤 도시도 미국 문화의 달콤한 유혹에 이토록 철저하게 저항한 곳은 없었다. 소피아는 어느 모로 보나 완전히 유럽다운 도시였다. 내가 어린 시절 꿈꾸었던 유럽은 바로 이런 곳이었다는 걸 깨달으며 마음 깊이 뭔가 불편해졌다.



불가리아에서 공산주의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지속될 수도 없다. 국민을 배곯게 하며 아이들에게 장난감조차 주지 못하는 정부를 계속 유지할 국민은 없다. 5년 후에 다시 소피아에 가본다면 피자헛과 로라 애슐리가 즐비하고 거리에는 BMW가 넘쳐나며,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리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그들을 추호도 비난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변하기 전에 그곳에 다녀왔다는 게 너무도 다행스럽다.
- 소피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개를 극도로 흥분시키는 뭔가가 있는가 보다. 개가 내 복숭아뼈를 물어뜯으려고 할 때마다 개의 주인들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가만히 서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5센트씩 받았더라면 일찌감치 부자가 됐을 것이다.)

"대체 이해를 못하겠네요. 얘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분명히 댁이 얘한테 뭐라고 하셨겠죠."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개한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봐, 견공. 내 다리 정맥 좀 끊어주련?"
- 벨기에

"애들은 자기 침대에서 자야 잘 자잖아요."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미국에서 경찰에게 잡혔을 때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주차 위반 과태료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들은 내게 벽을 향해 팔다리를 벌리고 서도록 한 다음 몸을 수색하더니 나를 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당시 내 나이가 열일곱 살 정도였다. 시립 공원 벤치에서 마약에 취해 누워 있었다면 경찰이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했을지 자뭇 궁금하다. 지금 이 나이쯤 돼서야 출감하지 않았을까?

-코펜하겐

"개수대 옆에는 등나무 바구니에 무료 샤워 젤과 면도용 크림도 담겨 있나요?"

"물론입니다. 손님."

"휴대용 반짇고리도요? 바지 다리미는?"

"있습니다. 손님."

"헤어드라이어는?"

"비치되어 있습니다. 손님."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매직 와이프에서 나온 일회용 구두 스펀지는 없겠지?"

"물론 있습니다. 손님."

젠장, 이 중 하나는 없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러면 너털웃음 한번 웃어주고 한심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면서 나오려고 했건만! 그런데 전부 다 있다니 줄행랑을 놓을 게 아니면 투숙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결국 나는 투숙하기로 했다.

- 예태보리

나는 ‘바티칸시티‘하면 늘 고대 도시국가로 생각했는데, 바티칸이 정식으로 인정된 것은 무솔리니와 교황 사이에 라테란 조약이 체결된 1929년부터라고 한다. 나는 바티칸에 도달하면 왠지 국경수비대 같은 게 있어 엄청난 요금을 내야 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국경에서 날 귀찮게 했던 이들이라고는 슬라이드 따위나 폴라로이드로 여행객의 사진을 찍어 시끄러운 소리로 호객하는 장사꾼들뿐이었다. 나는 5미터가랴 떨어진 곳에 덴버 브롱코스(미국 프로 풋볼팀) 트레이닝복 상의를 입고 서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그녀가 내 아내인데 돈을 아내가 모두 갖고 있다고 하면서 이들을 그리로 보냈다. 이들은 그 여자를 향해 몰려갔고, 덕분에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대광장을 유유히 누빌 수 있었다.

-로마

오스트리아는 발트하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하며, 세계인의 의견에 과감히 맞서 발트하임과 같은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자국의 용기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발트하임이 병적인 거짓말쟁이라는 사실과 전범으로 공식 기소된 인물이며, 예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자신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몹시 구린 그의 과거를 눈감아주면서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배짱은 가히 전투적이다. 발트하임과 같은 인물을 지지하는 국민이라면 특별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으니 오스트리아는 과연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가.

- 오스트리아

이런 삶을 상상해 보라.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배우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보, 있잖아. 오늘 쇼핑은 진짜 성공했다. 빵 한 덩이에 리본 15cm를 건진 데다가 쇳조각 하나를 샀는데 써먹을 데가 많을 거 같아. 게다가 도넛도 하나 샀는걸."

"정말이야? 도넛까지?"

"음, 도넛은 사실 농담이었는데.."

-소피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거칠고 투박한 느낌의 검은 손이 수많은 활자를 짓이기고 있다. 짓누른다는 표현보다 짓이긴다는 게 더욱 그의 스타일을 잘 대변하는 단어일 것이다. 이게 바로 존 그레이가 쓴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표지이자 그의 철학을 가장 잘 표현한 그림이다. 정치 철학자 존 그레이는 '약탈하는(rapacious) 자'라는 뜻의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란 단어를 창조했다. '호모 라피엔스'는 현생 인류 종을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패러디한 용어로 인간이 결코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으며, 인간의 특성은 유독 파괴적이고 약탈적이란 존 그레이의 철학이 담겨 있다.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芻拘,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

- 노자. 『도덕경 석의』

 

인간의 진보에 대해 회의적이다 못해 부정적인 존 그레이는 노자의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자기 생각을 펼친다. 인간은 종교에서 과학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휴머니스트'의 위치에서 현실을 낙관해왔다. 그리고 자신들의 작은 변화, 업적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걸 맹신하며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의 영역에까지 나아갔다. 수만 명이 하루아침에 죽어 나가는 전쟁,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는 자연 생태계, 소리 없이 사라지는 동물. 결과론적으로 인간은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글쓴이는 냉철하게, 그리고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가며 "No"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인간만이 모든 구원이자 정답이라 생각하는 유아론에서 벗어나고자 존 그레이는 위험하고 논란이 가득하지만, 한편으론 파괴력이 넘치는 논리를 꾸준히 밀고 나간다.

 

인간, 기만, 도덕의 악덕, 구원받지 못한 자들, 비진보, 있는 그대로.

총 6장에 실린 짧은 글들은 굳이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개별적인 파편들이 모여 결국에는 인간 중심주의, 휴머니즘 만능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단순한 불평이나 회의주의는 분명 아니다. 간결하면서 풍자가 넘치는 이 책은 분명 가볍게 즐거운 책이 아니다. 기존 통념에 대해 무척이나 도발적이고 심지어 인간 종 자체에 대해 낱낱이 파헤치면서 독자에게까지 발가벗은 느낌을 선사하기도 한다. 부정할 수 없게도 모든 인간은 '인간 진보주의'에 길들여져 있고, 그것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 그레이는 그 사고 자체를 전복시키며, "인간이 진보하고 있지 않다"는 명제에서 나아가 "왜 인간이 진보해야 하는가?"까지 질문의 외연을 확장한다.

 

여전히 우리는 과학과 종교의 허울 안에서 자위하며 살아간다. 이에 격하게 공감한다. 그 안에서 위안을 찾고 때로는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고, 혹은 약간 조금 더 높은 위치에 섰다는 위치에 서 있다고 기뻐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더불어 인간이 굳게 믿는 '다름', '특별함'에 대해 별거 아닌. 그저 우연한 산물이라고 깎아내린다. 자아, 이성, 자유의지마저 한낱 착각이라고 몰아붙이는 존 그레이의 생각은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다. 일본, 러시아, 2차 대전, 체르노빌. 온갖 사례들이 모두 하나의 출발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인간의 대책 없는 휴머니즘말이다. 각자 생각이 반드시 하나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견없이 모두 하나라면 의심해봐야 한다. 반성이나 회의 없이 하나로 수렴하는 건 일종의 광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그레이는 '호모 라피엔스'란 다소 도발적인 용어를 무기 삼아 논쟁의 장을 폈다.

 

물론 그가 진정 꼬집고 싶었던 것은 인간 종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휴머니즘에 빠져 의심하지 못하는' 인간 종 자체의 특성이지 않을까? 유독 파괴적이고 약탈적인 종이란 지적은 그저 다른 동물에 비해 그 파급력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지속적이기 때문일 뿐이다. 단순 경험의 차이이지, 본질적으로 인간이 더욱 악하거나 특별히 약탈적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인간이 다른 종보다 특별하고 우월하지 않은 것처럼. 열등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무작정 비관적일 필요도 없고 반드시 낙관적일 필요도 없다. 그건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 개별의 가치관이자 삶의 태도일 뿐이다. 하지만 사회 전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맹목적으로 진보하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멈춰 서라는 존 그레이의 제언은 분명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유로우며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정의 아래 지나치게 많은 악행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 현재의 목적보다 미래의 목적이 더 중요해야 하는가? 미래는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가설적인 상상의 상황이다. 게다가 미래는 어쩌면 현재의 것들보다 추구할 가치가 적을 수도 있다. "왜 젊은이가 나이 든 이후에 생길 이해관계를 따지느라 솟아나는 열정을 억눌러야 하는가? 왜 50년 후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 알지도 못할 노인네가 다른 어떤 상상의 인물보다 지금의 나에게 더 중요한 사람이어야 하는가?"(산타야나)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현대 세계의 병폐를 치유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자신이 치유한다고 자처하는 그 질병의 증상이다. 그들은 전통 문화를 무조건 재건하고자 하는데, 이런 태도는 근대 특유의 기이한 환상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우리 좋을 대로 믿을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들이 남겨 놓은 흔적들이다. 세계관이라는 것도 우리 좋을 대로 우리 좋을 때 불러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지나가고 나면 전통적 생활 방식은 되살릴 수 없다. 어떤 방식이건 전통을 되살리는 일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덯나느 일이다. 과학이 좌우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아무리 원한다 해도 과학 이전의 세계관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철학은 통념을 믿어야 하는 그럴 법한 이유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이다. 칸트의 시대에는 기독교가 통념이었고 지금은 휴머니즘이 통념이다. 이 둘은 서로 크게 다르지도 않다. 지난 200년간 철학은 종교의 기반을 뒤흔들었지만, 기독교의 핵심적인 오류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현격하게 다르다는 믿음 말이다.

‘도덕‘이 절대 법칙이라는 생각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구약에 따르면, 좋은 삶은 신의 의지에 따라 사는 삶이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주어진 법칙이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말은 없다. 신의 법칙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발명품이다.

흔히 기독교의 광범위한 확산을 유대교의 발전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퇴보다. 모두를 구속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법칙이 있다면, 그 하나를 제외한 모든 삶의 방식은 죄짓는 삶이어야 한다.

진보와 대량 살해는 함께 간다. 기아와 역병으로 숨지는 사람의 숫자는 줄었지만, 폭력으로 숨지는 사람의 수는 늘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살해의 테크닉도 발달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희망이 자라면서, 대규모 살해도 증가했다.

대체로 도덕 철학이란 소설의 한 분파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아직 위대한 소설을 쓰지 못했다. 놀랄 일은 아니다. 철학은 삶의 진실에 별 관심이 없으니까.

과학은 인간의 지식을 향상시킬 수는 있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할 수는 없다. 과거의 기독교들이 그랬듯이, 과학자들도 권력망에 사로잡혀 있고 생존과 성공을 위해 분투한다. 과학자의 세계관은 전통적인 신념들을 누덕누덕 기운 것이다. 과학은 ‘기적, 신비, 권위‘를 인류에게 가져다 줄 수 없다. 예전에 교회에 복무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에 복무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인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종교는 미래에 대한 얕은 신념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가 뭘 가져다 줄지 아무것도 모른다. 구제불능으로 무능하거나 생각 없는 사람 빼고는, 아무도 장기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따위의 말을 믿지 않는다. 저축은 도박이고, 미래를 위한 경력 관리나 (미래에 타서 쓰려고 현재 돈을 넣는) 연금은 판돈이 큰 도박이다. 정말로 부자인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도박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그러니까 부자를 뺀 우리 나머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나 계획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동물들은 삶의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모순적이게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삶의 목적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냥 바라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탐정 소설의 전형적인 구조나 캐릭터를 빌려왔지만, 김중혁식 씨니컬하고 유쾌한 유머는 그대로였다. 의뢰인의 비밀을 지워주는 직업 '딜리터'로 활동하는 구동치는 냉철하면서 차가운 탐정이다. 하드디스크, 편지, 일기장, 소설 등 다양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딜리팅을 의뢰한다. 자신이 아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비밀을 알지 못하게 자신이 모르는 구동치를 찾아오는 것이다. 구도칭가 사는 악어빌딩 역시 신비로운 공간이다. 그는 '깊게 땅을 판 다음 음식물 쓰레기와 동물의 시체와 곰팡이와 사람의 땀과 녹슨 기계를 한데 묻고 50년 동안 숙성시키면 날 법한 냄새가 나는 비밀이 가득한 악어빌딩 4층'에 산다. 그의 주변에는 '시칠리아'에는 가본 적 없는 요리사 박찬일, 무도인의 정신을 항상 강조하는 차철호, PC방에서 자잘한 딜리팅을 도와주는 이빈일이 있다. 타인의 비밀, 그리고 그에 얽힌 불안을 매개로 돈을 버는 구동치는 의뢰를 받으면서 점점 실체를 알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다. 그리고 <역지사지 살인사건>을 끄적이는 터프한 김인천 형사, 돈이 제1 고려 요소인 이리 탐정의 도움을 받으며 원수도장, 대기업의 범죄에 다가선다.

 

악취가 나는 악어빌딩도 좋았고, 다닥다닥 붙은 집들도, 길과 길이 도대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종잡을 수 없는 골목도 좋았다. 복잡한 빌딩과 골목 속에 들어가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인파 속으로 숨은 범인을 찾기 힘든 것처럼 악어동네 속으로 숨은 범인도 찾기 힘들 것이다. 실제로 악어동네 어딘가에는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꼭꼭 숨어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죽이고, 죽였다는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악어빌딩 뒤쪽 악어동네에는 몇 명이 사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았고, 악어 가죽의 무늬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탐정물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부분보다 복작복작 악어빌딩에서 벌어지는 초반부 해프닝이 더욱 재밌었다. <뭐라도 되겠지>에서 받은 단편의 발랄함과 재치가 그대로 녹아있었기 때문일까? 김중혁 소설에 단골 손님인 유머러스한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티격태격 CCTV 장면을 놓고 차철호와 박찬일이 벌이는 말다툼이나, 짝사랑하는 오윤정과 PC방 알바 이빈일에게 전혀 다르게 대하는 박찬일의 요리같은 소소한 이야기들. 점점 스케일이 커지며 범죄의 실체에 다가가는 절정보다 오히려 이런 전개 부분의 악어빌딩 스토리가 더욱 정이 가더라.

 

"그렇죠. 무도인은 아니지만 탄탄한 살기 같은 게 좀 보여요."

"무도인은 딱 보면 아냐?"

"아, 알죠.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웃기고 지랄한다. 네가 고수라고?"

"언제 한번 도장에 올라와 보십시오. 제가 확실히 보여드릴테니까. 아니면 아드님을 보내시든지요."

"우리 귀한 아들을 거기 왜 보내."

 

역시 지극히 개인적으로 테니스를 치는 구동치도 매력적이었다. (나달에 대한 천일수 회장의 평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페더러의 우아함이야 당연히 공감하지만, 나달은 무슨 우직하게 뛰어다니는 듯이 평하다니!) 노블 클럽이 하는 스포츠가 골프가 아니라 테니스란 점도 무척 마음에 든다. 역동적인 움직임과 오고가는 공 속에서 묘한 권력 관계를 드러내기 최고의 스포츠가 아닌가? 접대 테니스의 고충도 조금은 알겠고. 한편 차갑고 냉정한 구동치가 딜리팅 과정에서 실수로 얼굴을 마주친 정소윤과 병원에서 투닥거리는 장면은 묘하게 인간적이고 연애소설 느낌도 났다. 아마 김인천 형사의 죽음만큼이나 정소윤의 만남도 그가 딜리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구동치는 자신만의 세계에 비밀을 몰래 옮겨 놓는 하프 딜리팅도 포기하게 된다.) 

 

'포티,러브'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40 대 0은 낭떠러지에 서 있는 점수이고, 궁지에 몰린 점수다. 0이라는 숫자에다 왜 '러브'라는 감미로운 의미와 발음을 결합시킨 것일까. 구동치는 '러브'라는 발음이 달걀을 뜻하는 프랑스러 'l'oeuf'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다른 상상을 하곤 했다. '러브'는 한 점도 내지 못한 패자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이 아닐까. 포티 러브로 이기고 있을 때도 있었고 포티 러브로 지고 있을 때도 있었지만 구동치는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나온 것처럼 희한하게 남녀캐릭터의 강렬함이 너무 다르다. 구동치, 천일수, 박찬일, 차철호. (김중혁은 'ㅊ' 성애자인가?) 정소윤, 백승자, 한유미. (이것도 심지어 책을 다시 찾아보고 떠올랐다.) 단숨에 그 모습이 그려지고 에피소드가 떠오르는 남자 캐릭터와 달리 여자 캐릭터는 누가 누군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름 구동치란 매력적인 캐릭터에 올인했다고 치지만, 신기하게도 여자 캐릭터들이 모두 잠수를 타버리다니. 뭐 그렇다고 소설의 재미가 반감되는 건 아니지만, 그저 특이해서.

 

구동치는 일기 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반성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며, 반성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반성을 빌미 삼아 더욱더 나쁜 짓을 하게 된다고, 구동치는 생각했다. 일기는 쓰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일기장에는 어떤 식으로든 진실이 들어 있고, 작은 것이라도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딜리팅이란 참 매력적인 소재다. 최근 잊혀질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란 용어가 새롭게 등장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심지어 국내와는 달리 법규가 자유로운 해외에서는 사망 신고가 접수되면 친구들에게 마지막 이메일을 보내고 각종 사이트에 올린 사진을 삭제하는 온라인 상조회까지 등장했다.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 사람은 죽어서도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어한다. 늘 기억해 달라는 말을 남기지만 그 안에는 '좋은' 기억만 남겨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평판에 끝까지 신경쓸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특성이다. 하지만 소설 속 딜리팅이 불완전하듯이(타인의 방해로 혹은 딜리터의 욕망때문에), 죽음 이후 삶의 자취를 조정하기란 상당히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그만큼 하루하루에 충실하고 주변에 잘하는 게 중요한 법이지. (더불어, 술먹고 SNS는 금물.)

 

지우는 건 말입니다,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 아니에요. 나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문장을 지웁니다.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또 지웁니다. 그걸 지워야 새로운 걸 쓸 수 있어요. 새로운 걸 쓰려면 계속 지워야 해요. 그렇게 지우고 지우다 마지막에 남는 것들, 그런 것들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최근 소설 원작의 영화가 쏟아지는만큼 책을 읽으며 영화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더라.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은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워낙 캐릭터들의 특성도 강하고, 대사 또한 그대로 대본으로 써도 될 정도로 생생하다. 영화는 물론 (명색이 탐정 소설인만큼) 시리즈 물로도 굉장히 훌륭한 떡밥들을 감추고 있다. 프리퀄이나 스핀오버로 구미가 당기는 소재가 참 많다. 구동치의 형사 시절 이야기, 새로운 딜리팅 에피소드, 구동치와 김인천 형사의 형사 버디물, 구동치와 XXX의 연애물(이건 좀 기대가 안 되네.) 등등. 실제 마지막 에필로그는 따로 단편으로 나왔다고 들었던가?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읽어본 작가의 말 중 이번 작품이 최고였다. 가장 뇌리에 남는 강렬한 세 마디. 이 문장만으로 두꺼운 책 한권을 요약하고, 마지막 한방을 날린다.

 

썼는데
누군가
지웠다.

 

마치 책을 읽었는데, 여자 캐릭터들의 대한 기억을 누군가 지운것 처럼..

아마 페더러는 부드러움으로 힘을 제압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준 사람일 겁니다. 다른 선수들은 백핸드를 두 손으로 치지만 페더러는 한 손으로 가뿐히 공격합니다. 부드럽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진정한 힘은 근육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유연함에서 나오는 것이죠. 유연하면 모든 걸 다 꺾을 수 있어요.



구동치가 테니스를 배우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나를 고쳐서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대방을 때리거나 물어뜯거나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물론 시합에 나가면 상대방의 약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밸런스였다. 구동치는 자신의 밸런스를 지키지 못하는 바람에 부상을 당했고, 너무 사랑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될 때마다 구동치는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보다는 아예 사랑하지 않는 게 낫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구동치는 왜 돌아보지 않았는지, 왜 대답을 하지 않았는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간단한 일이었다. 돌아보면서 한마디 할 수 있었다. ‘네, 선배도 조심해요.‘ 그렇게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구동치는 다정한 말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마지막 통화를 할 때도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고 말았다. 다정한 마지막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조심하라고, 늘 고마워하고 있다고, 선배를 존경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마지막 말이란 대부분 마지막일 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마지막 말은 할 수 없는 말이다. 불가능한 말이다. 늘 비어 있는 말이다. 텅 비어 있는 마지막 한마디가 구동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김인천을 보낸 것 같았다. 구동치는 소설을 더 읽을 수 없었다. 거기엔 김인천이 있었다. 김인천이 거기 있어서 차마 볼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진 기행>은 활자보다 소리로 더 익숙한 작품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지금 생각하면 조잡한 아이리버 MP3에 나름 한국문학 전집 오디오북을 넣고 다니는 허세를 부렸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내내 기묘한 배경 음악과 살며시 읊조리는 남성의 목소리로 무진 기행을 읽었다, 아니 들었다. 희뿌연. 매연이 한데 뒤섞인 정체 모를 안개를 가르며 자전거를 탔을 때, 무진이란 가상의 공간이 아마 이러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교과서에 실린 한국 문학은 모두 재밌었다.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답을 한 가지 고르는 일이 대부분 스트레스였지만, 문학 작품은 달랐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숨은 의미를 하나 더 알려주는 듯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광장>에서 제3국을 택하는 주인공의 마지막에 놀랐다면, <무진 기행>은 첫 장면이 매력적이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진 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생명연습, 건, 역사, 차나 한 잔, 다산성,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 서울의 달빛 0장.

다른 듯 닮았고, 닮은 듯 다른 10편의 작품이 실린 김승옥 단편선을 읽었다. 빨간 책방에서 소개하는 순서대로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염소는 힘이 세다, 서울의 달빛 0장을 읽었다. 읽는 내내 글을 읽는데 눈앞에 공간이 펼쳐지는 신기한 일을 경험했다. 내용 자체는 크게 충격적이거나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시대적 상황을 감수하면 그럭저럭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무진으로 떠나와 서울로 다시 돌아가기 전 밀애를 즐기는 주인공, 어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사내를 만나 한바탕 진하게 놀고 돌아가는 사내, 겁탈당한 누이를 걱정하며 성장하는 어린이, 유명 연예인과의 이혼을 경험한 사내. 이들의 뻔하디뻔한 이야기가 놀랍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한글의 감각적으로 다루는 천재 김승옥의 존재 덕분일 것이다.

 

1960년대 문학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국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첫 한글세대 소설가.' 김승옥을 수식하는 말처럼 그의 소설을 무척 세련되었다.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의 곁에 놓인 (1964)를 (2014)로 고친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문장 하나하나가 끊기지 않고 술술 익히고, 서울이란 공간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신경숙 작가는 그 문체의 아름다움에 <무진기행>을 또박또박 필사했고, 김지하 시인도 "김승옥의 작품은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며 그를 칭송한다. 생각해 보면 2014년 27살의 나도 이렇게 그의 감성에 놀라는데, 이걸 처음 접한 그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나도 글을 잘 쓰고 싶다. 쓰기는 어렵겠지만, 읽기는 편한 글을 쓰고 싶다. 천재가 틀림없는 김승옥의 소설 속 퇴폐미, 쓸쓸함이 가끔은 부럽다. 2014년 서울을 그리며 연작 소설을 후배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써보는 것도 참 신선한 시도일 것 같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2014년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1964년 서울보다 바쁘지만, 그리 다를 게 없는 느낌이지 않을까.

염소는 힘이 세다. 염소는 죽어서도 힘이 세다. 가마솥 속에서 끓여지는 염소도 힘이 세다. 수염이 시커멓고 살갗이 시커멓고 가슴이 떡 벌어졌고 키가 크고 손이 큰 남자들도 가마솥 속의 염소에게 끌려서 우리 집으로 들어온다. 염소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만 일부러 골라서 우리 집으로 끌어들일 만큼 힘이 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삼십세

 

-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내 청춘의 영원한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너에게

 

-최승자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제1부는 1981년. 제2부는 1977~1980년. 제 3부는 대학 시절. 시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더 거칠고, 에너지가 넘친다. 흔히 시인, 그 중에서도 여류 시인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편견이 있었다. 봄을 노래하고, 사랑을 찬미하고, 혹은 그리움에 파묻혀 베갯잇을 흠뻑 눈물로 적시는 그런 느낌.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 여류시인 최승자의 시는 하나같이 파괴적이고 어둡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온다'는 유명한 표현 말고도 비속어, 격정적인 표현이 쉼없이 등장한다. 

 

매독, 뇌수, 죽음, 어둠, 아 썅! (왜 안 떨어지지?).

 

시가 노래하는 것이 언제나 밝은 삶의 영역은 아니란 걸 알았다. 물론 인생 역시 한없이 부드럽고 살랑거리는 이상적 공간이 아니란 걸 알기에 쉽게 납득이 갔다. 상처받고 좌절하고 그리고 아파하는 것 역시 인간의 속성이자. 시의 속성일 수밖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