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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사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평점 :
삼십세
-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내 청춘의 영원한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너에게
-최승자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제1부는 1981년. 제2부는 1977~1980년. 제 3부는 대학 시절. 시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더 거칠고, 에너지가 넘친다. 흔히 시인, 그 중에서도 여류 시인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편견이 있었다. 봄을 노래하고, 사랑을 찬미하고, 혹은 그리움에 파묻혀 베갯잇을 흠뻑 눈물로 적시는 그런 느낌.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 여류시인 최승자의 시는 하나같이 파괴적이고 어둡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온다'는 유명한 표현 말고도 비속어, 격정적인 표현이 쉼없이 등장한다.
매독, 뇌수, 죽음, 어둠, 아 썅! (왜 안 떨어지지?).
시가 노래하는 것이 언제나 밝은 삶의 영역은 아니란 걸 알았다. 물론 인생 역시 한없이 부드럽고 살랑거리는 이상적 공간이 아니란 걸 알기에 쉽게 납득이 갔다. 상처받고 좌절하고 그리고 아파하는 것 역시 인간의 속성이자. 시의 속성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