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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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 기행>은 활자보다 소리로 더 익숙한 작품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지금 생각하면 조잡한 아이리버 MP3에 나름 한국문학 전집 오디오북을 넣고 다니는 허세를 부렸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내내 기묘한 배경 음악과 살며시 읊조리는 남성의 목소리로 무진 기행을 읽었다, 아니 들었다. 희뿌연. 매연이 한데 뒤섞인 정체 모를 안개를 가르며 자전거를 탔을 때, 무진이란 가상의 공간이 아마 이러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교과서에 실린 한국 문학은 모두 재밌었다.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답을 한 가지 고르는 일이 대부분 스트레스였지만, 문학 작품은 달랐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숨은 의미를 하나 더 알려주는 듯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광장>에서 제3국을 택하는 주인공의 마지막에 놀랐다면, <무진 기행>은 첫 장면이 매력적이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진 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생명연습, 건, 역사, 차나 한 잔, 다산성,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 서울의 달빛 0장.

다른 듯 닮았고, 닮은 듯 다른 10편의 작품이 실린 김승옥 단편선을 읽었다. 빨간 책방에서 소개하는 순서대로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염소는 힘이 세다, 서울의 달빛 0장을 읽었다. 읽는 내내 글을 읽는데 눈앞에 공간이 펼쳐지는 신기한 일을 경험했다. 내용 자체는 크게 충격적이거나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시대적 상황을 감수하면 그럭저럭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무진으로 떠나와 서울로 다시 돌아가기 전 밀애를 즐기는 주인공, 어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사내를 만나 한바탕 진하게 놀고 돌아가는 사내, 겁탈당한 누이를 걱정하며 성장하는 어린이, 유명 연예인과의 이혼을 경험한 사내. 이들의 뻔하디뻔한 이야기가 놀랍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한글의 감각적으로 다루는 천재 김승옥의 존재 덕분일 것이다.

 

1960년대 문학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국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첫 한글세대 소설가.' 김승옥을 수식하는 말처럼 그의 소설을 무척 세련되었다.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의 곁에 놓인 (1964)를 (2014)로 고친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문장 하나하나가 끊기지 않고 술술 익히고, 서울이란 공간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신경숙 작가는 그 문체의 아름다움에 <무진기행>을 또박또박 필사했고, 김지하 시인도 "김승옥의 작품은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며 그를 칭송한다. 생각해 보면 2014년 27살의 나도 이렇게 그의 감성에 놀라는데, 이걸 처음 접한 그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나도 글을 잘 쓰고 싶다. 쓰기는 어렵겠지만, 읽기는 편한 글을 쓰고 싶다. 천재가 틀림없는 김승옥의 소설 속 퇴폐미, 쓸쓸함이 가끔은 부럽다. 2014년 서울을 그리며 연작 소설을 후배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써보는 것도 참 신선한 시도일 것 같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2014년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1964년 서울보다 바쁘지만, 그리 다를 게 없는 느낌이지 않을까.

염소는 힘이 세다. 염소는 죽어서도 힘이 세다. 가마솥 속에서 끓여지는 염소도 힘이 세다. 수염이 시커멓고 살갗이 시커멓고 가슴이 떡 벌어졌고 키가 크고 손이 큰 남자들도 가마솥 속의 염소에게 끌려서 우리 집으로 들어온다. 염소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만 일부러 골라서 우리 집으로 끌어들일 만큼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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