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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철학 - 사상과 그 원천 ㅣ 들뢰즈의 창 3
서동욱 지음 / 민음사 / 2002년 9월
평점 :
◇들뢰즈의 철학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어도 끊임없이 이런 종류의 책들을 놓지 않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그것은 갈증이었다. 이해하지 못해서 치워야 하는 삶이 아니고 계속 부딪치면서 겪게 되는 피할 수없는 일상.
책을 읽다보면 조금씩 가시기도 하지만 더해지는 또 다른 갈증은 한 철학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왠지 시원했다. 거의 필사하다시피 내용을 요약했지만 쓰는게 즐거웠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이 저자의 <차이와 타자>로 메꿔볼까 한다.
또한 책의 끝 자락에 있는 다음의 글이 앞으로 내가 책을 대하는 좋은 지침이 되겠다.
<무심한 별들이 그렇듯, 기억될 만한 사상이란 그것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진리를 기르는 자들의 옆에서 늘 성가시게 마련이다>.
1 감성에서의 내적 차이와 강도 이론 : 대칭적
대칭적 대상들의 역설과 지각의 예취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부르는 초월적 경험론에서 감성의 내적 차이는 감각이 가르쳐주는 그 차이이다.
칸트에서 감성의 비개념적 내적 차이는 실재 사물의 초월적 근거를 이루며, 이런 뜻에서 들뢰즈는 자신의 초월적 경험론의 선구적 면모를 칸트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다. 칸트가 지각의 예취라 불리는 장에서 말하는 강도 이론은 비개념적 차이가 경험 가운데 실재가 발생하기 위한 충족 이유로 표현하고 있다.
들뢰즈는 < 대상이란 그 자체 외관이 아니라, 힘의 출현이다> 라고 말한다. 그 힘은 강도적 크기의 측면에서 고려할 때에만 가능하다. 힘의 다양한 강도는 각각 고유성을 지니는 사물들의 다양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2 <초월적 경험론> 이라는 말의 의미
초월적 경험론의 의미를 해명하면 의식 상관적인 실재 대상의 선험적 근거는 변별적인 것들이다. 여기서 선험적 근거란 의식되지 않는 지각일 뿐이며 그렇기에 <변별적인 무의식적인 것> 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초월적 경험론에서 경험의 근거는 선험적 개념에 있지 않고 순수 지각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초월적 경험론이 경험의 발생적 요소들 사이의 변별적 관계와 차이 자체는 주관적 감성으로 환원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초월적 관념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별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차이 자체의 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차이는 그것을 통해 소여가 주어지고 그것으로 다양이 주어진다. 즉 차이는 현상이 아니라 현상의 예지체에 가깝다.
들뢰즈는 차이 자체를 <이념>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예지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이념 또는 예지체는 지성적으로 직관될 수 있는 것도 형이상학적 실재도 아니다. 이념은 하나도 다수도 아니다. 그것은 다수성으로, 변별적 요소들을 구성하고 이 요소들 사이에 변별적 관계를 맺어주며, 이 관계에 대응하는 특정성을 구성한다. ---- 이 세 가지 차원, 즉 요소들, 관계들, 특정성들은 이념적인 시간적 차원(감성)에 투사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념에 대한 경험론이 존재한다. <요소들>은 경험의 발생적 구성 요소를 가리키며 <관계들>은 이 요소들 사이에 성립하는 변별적 관계들을 말하고, <특정성들>은 이로부터 발생하는 강도적 크기로서의 경험을 일컫는다.
3 개념의 획득 문제 : 능력들의 일치와 도식 작용론의 한계
들뢰즈는 <우리는 조건을 모든 가능한 경험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실재 경험의 조건으로서 세워야 한다> 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변별적 지각들이라는 선험적 근거로부터 경험 가운데 실재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실재는 질료일 뿐 하나의 대상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성 가운데 나타난 강도적 크기에 사유가 개입하여 대상들에 대한 개념을 획득할 수 있는가? 이종적인 마음의 능력들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능력들의 일치란 우선 대상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지성과 감성의 일치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이다.
칸트의 도식론에서 상상력은 지성의 종속된 능력이기 때문에 상상력은 지성이 상상력을 규정하고 인도하는 한에서만 도식 작용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도식론은 능력들의 일치 문제에 해답이 될 수 없다.
4 《판단력 비판》의 매개적 의미 : 능력들의 일치와 숭고
능력들의 일치는 그 근원적 일치를 바로 숭고 분석에서 발견한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활동에서 도식 작용은 지성의 입법적 임무에 종속된 활동일 뿐이므로, 도식 작용을 수행할 때, 상상력 그 자체만의 순수한 자태는 은폐되어 버릴 수 밖에 없다. 반면 숭고는, 이성이 사변적 관심을 가질 때는 은폐되어 버리는 이러한 상상력의 비밀을, 즉 그것의 근원적 자유를 드러내 준다. 숭고란 어떤 대상의 표상이, 자연이 [이성의 개념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이념의 현시를 달성한 것이라고 마음이 생각하게끔 규정할 경우 그 대상을 말한다. 대상에 대한 상상력은 이성이 전체성의 이념을 현시할 것을 요구하지만 감성적 직관이란 본래 총괄의 극한을 지니기 때문에 상상력은 한계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력은 자신이 이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현시한다. 자연 가운데서 이성의 이념에 도달할 수 없음 자체가 바로 이성의 이념의 현시이며, 이렇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현시된 자연 안의 대상을 숭고하다고 부른다. [이념의 현시를 통해] 자신의 감성적 경계를 제거함으로써, 상상력은 스스로가 무한함을 감지한다.
우선 능력들의 일치라는 문제부터 해결하고 보자. 이성의 욕구와 상상력 사이에서 체험하는 모순의 관계는 불일치이다. 여기서 칸트는 이성과 상상력 사이의 불일치의 일치를 이 능력들의 불일치의 일치는 임의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 안의 위력적인 대상으로부터 자극을 받음으로 해서 각각의 능력들이 규정되지 않고 제각기 활동하면서 이룬 일치이다.
5 초월적 경험론의 모델로서 숭고 분석
우리는 발생적으로 감성에 주어진 <대상없는 형상>이 어떻게 개념을 획득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들뢰즈의 능력들의 일치 문제와 숭고 분석을 끌어들였다. 이제 숭고의 사유 방식과 인식론을 하나의 그릇에 담으려 한다. 숭고의 경우 <감성에 대해 위협적인 것>이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우리 정신은 강요당한 듯 발생적으로 사유(상상력과 이성의 불일치의 일치)하게 된다. 사유하게끔 감성을 자극해서 이 감성의 미지의 - 지성 개념에 의해 매개ᆞ표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지의> - 형상으로부터 개념의 출현을 발생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들뢰즈 철학은 경험론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유의 발생을 기술할 때 감각적 기호(마들렌 과자)가 감성을 자극했을 때, 이에 응하는 능력은 <비자발적 기억력>이며, 이 능력의 기능은 공명을 발견해 내는데 있다. 우리는 공명을 <비의존적인 이질적인 항들간의 ‘이웃 관계‘의 조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공명의 효과가 발생하는가이다. 두 항 사이에 공명이 있다는 것은 이미 두 항을 서로 독립시켜 주는 개념(정체성)과 두 항을 서로 관계 맺어주는 개념(유사성)이 탄생했다는 뜻이다. 그 공명을 가능케하는 선험적 근거를 묻고 있기에 그것은 다름 아니라 <차이 자체>이다. 바로 이런 즉자적 과거, <이념으로서의 차이 자체>가 경험상의, 과거와 현재의 콩브레(혹은 과거와 현재의 미들렌) 사이의 차이, 유사성, 동일성의 선험적 근거를 이룬다. 바로 이런 선험적 근거로 인하여 우리의 감성 가운데 나타난 <하나의 개념 없는 형상>은 시간적 차원을 부여받고(과거의 미들렌, 현재의 미들렌), 그 시간적 차원 안에서 비로서 유사성, 동일성, 차이성의 경험 구성적 개념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차이 자체는 하나의 <이념>이라고 말하였다. 들뢰즈가 이념으로서의 차이 자체를 이해하는 방식은 카트가 숭고 분석에서 이념을 이해하는 방식에 가깝다. 감각적 기호는 마치 본질[차이 자체의 이념]이 사유되어야 하는 유일한 것인 듯이 사유에게 본질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요한다. 이때 능력들은 초재적인 실행을 하게 된다. 능력들의 <초재적 실행>은 차이 자체를 각각 경험 가운데 현시한다. 능력들의 실행은 결코 감성화할 수 없는 것의 현시가 사명이므로, <초재적> 혹은 <초감성적>이라 불려 마땅하다.
일반적으로 [경험론에서] 최종적으로 목적들은 자연의 목적들이다. 그러나 칸트에서 목적들은 오로지 이성에 고유한 목적들이다. 이성의 이념(전체성의 이념)의 부정적 현시로 인하여 자연은 목적론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칸트의 전체성의 이념과 달리 들뢰즈의 차이 자체의 이념에는 어떤 목적론적 함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감성적인 것들이 결코 통일되지 않는 차이를 지니고 계속 공명하도록 해주는 <분열의 원리>인 것이다.
6 경험의 필연성 문제
초월적 경험론은 경험의 필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들뢰즈는 줄곧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을 [기호와의]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필연은 우연을 통해서 긍정된다>라고 강조한다.
경험론적 견지에서 사실로서 확인되고 원리로서 <긍정>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카오스이므로, 어떤 우연적 요소가 경험 가운데 출현하든 그것은 세계의 원리(카오스)로부터 근거를 부여받은 필연적인 출현일 수밖에 없다. 이런 뜻에서 경험의 필연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우연성, 더 정확히 카오스이다.
보론
경험론과 철학 --- 들뢰즈, 레비나스, 데리다
1)경험론은 현전의 형이상학인가? (레비나스, 데리다)
레비나스는 자기 철학을 <외재성의 가르침을 신뢰할 철저한 경험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선 <흔적>이라 불리는 레비나스의 경험 개념의 본성을 숙고한다. 레비나스의 경험은 이념의 <말소>와 <현전>을 동시에 이루어내는 <대리 보충>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대리 보충의 결과는 외부의 대상이 <타인>으로 <경험>되는 일이 그 귀결이다. 타인에 대한 경험은 감성에 주어진 흔적이 대리 보충 기능을 통해 무한의 이념을 현시함으로써 생긴 결과이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무한의 이념은 우리의 선험적 근저로부터 오지 않는다. 결국 그것은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 경험이다>. 외부의 감각적인 것을 단지 대상이 아니라 <타인>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바로 무한의 이념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현상은 기호에 의한 근원적인 오몀을 전제한다>. 여기서 기호란 현상(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대리 보충의 기능을 하는 흔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 흔적이 레비나스에게서는 감성적인 것이다. 타인은 결과로서의 경험이며, 흔히 <근원적 현상>이라 일컫는 감성 가운데 주어진 흔적은 근거로서의 경험이다. 따라서 근원적 경험은 대리 보충의 논리와 모순되지도 않고 그 자체는 타인이 아니라 타인의 근거이므로, 즉 현전이 아니라 현전의 근거이므로, 그것은 <현전의 형이상학으로서의 경험>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난다. 데리다는 이 흔적이 왜 감성적인 것이어서는 안 되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2)경험론과 존재 사유(레비나스, 데리다)
레비나스 경험론에서 데리다는 흔적은 어떻게 무한을 현시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 데리다가 타자의 무한성이 절대적으로 적극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규정으로부터도 독립해 있고 우리는 언어를 사용해그것을 <무엇>이라고부를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데리다는 무한은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부정성이 아니라 유한 아님으로서의 무한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 스스로도 무한은 절대적 부정성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즉 경험을 통한 부정적 현시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유한 안에 무한이 있다는 것, 혹은 유한을 통해 무한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무한이 유한성의 지평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감성 중의 경험은 우선 존재 사건을 통해 출현한 존재하는 것, 즉 유한한 존재자에 대한 경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은 부정적으로 현시하는 감성 중의 <얼굴>, <흔적> 등의 이름은 궁극적으로 존재를 가리키는 은유로서의 언어일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존재자적 규정들의 아래로 물러서면서도 존재할 수 있기>때문이다.
3)경험론에서 계사는 존재 동사가 아니라 접속사이다(들뢰즈, 데리다)
데리다는 경험론의 성립 불가능성의 메시지를 보낸다.
여기서 레비나스의 논의에 대한 이해를 하자면 레비나스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본질인 <존재>를, 존재자의 모든 이기적 권력의 원천으로 본다. 그러므로 참다운 윤리의 가능성은 <존재와 다르게> 라는 부사구를 통해서 타인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 비로서 희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적 언어는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가지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비판의 요지이다. 이러한 비판이 경험론에 대해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은 경험으로부터 결코 얻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존재>라는 계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도 <존재와 다른 것>이기는 커녕, 어떤 식으로든 이미 존재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타자들을 그들의 진리 속에 ‘내맡겨져‘ 있게끔 하는 유일한 것>이 존재이다. 데리다는 동사 <존재한다>는 모든 다른 동사와 모든 보통 명사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험론의 근본정신을 말하고 있는 이 구절들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계사는 존재 동사가 아니라, 접속사라는 것이다. 계사는 존재 동사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속성들의 배치를 의미하는 접속사임을 밝히는 것, 그것이 경험론의 핵심이다.
4)경험론은 철학인가? 혹은 들뢰즈와 레비나스는 그리스인인가?
데리다는 경험론을 <사실 경험론은 단 하나의 잘못을 범했을 뿐인데, 그것은 자신을 철학이라고 공표한 철학적 잘못이다>라고 말한다. 철학이 로고스, 즉 존재 사유를 일컫는 것인 한 철학을 부정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어쩔 수 없이 존재 동사가 이미 자리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데리다는 <철학을 해야 한다면, 철학을 해야 한다. 철학을 해선 안 된다고 해도, (그 사실을 말하고 사유하기 위해) 여전히 철학을 해야 한다. 언제나 철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언어가 있다는 사실이 그 배후에 존재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철학자는 생각하지만, 철학이 아닌 경험론이 보이고자 하는 것은 바로 비그리스적 언어, 즉 존재 동사가 배후에 은폐되어 있지 않은 언어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레비나스의 후기 철학은 이런 언어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말함>과 <말해진 것>을 구별하는데, 말해진 것은 타자를 주제화하는 언어, <존재론화>하는 언어, 즉 우리가 타자를 지배하기 위행사용하는 언어인 반면, 말함은 바로 비그리스적 언어, 비철학적 언어, 존재와는 다른 타자에게서 오는 언어이다.
들뢰즈는 형사에 대한 사유, 곧 경험론이 절대적으로 비그리스적임을, 즉 비철학적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들은 개념을 획득하며, 획득한 것을 믿었다. 획득은 소유와 대립한다. 애초에 소유하고 있지 않은 개념의 획득은 경험을 통해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획득된 경험을 기술하는 언어는 본성상 결코 존재 사유를 전제하지 않는다.
2 차이의 논리
데리다의 <차연>과 들뢰즈의 <차이 자체>, 프로이트의 사후성
프로이트의 <사후성>의 논리는 데리다의 <차연>개념과 들뢰즈의 <차이 자체>개념의 핵심을 이루는 논리이다.
1)데리다 : 대리 보충으로서 사후성의 논리
데리다는 어떻게 프로이트의 사후성의 논리에서 자신의 대리 보충의 논리를 발견하는가? 흔히 <자기 촉발>이라 불리는 현전의 형이상학에서 자기 촉발을 가능하기 위해서는 외재적이고 이질적인 요소(차이)의 매개, 즉 외재적이고 이질적인 요소에 의한 <대리>와 <보충>을 거쳐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촉발은 그 말의 뜻에서부터 나타나듯 이질적인 것으로부터의 촉발과 양립 불가능하다. 데리다의 전략은 바로 현전의 형이상학은 이런 모순 위에서 존립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꿈의 관계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는 이것을 사후성의 논리, 혹은 동치인 <연기>의 논리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 오로지 꿈은 꿈(원인)으로써 무의식 속의 기억 흔적(결과)은 꿈속에서만 사후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무의식이란 이처럼 사후에 <뒤늦게>, 늘 연기된 형태로만 꿈속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기억 흔적이란 결코 현재였던 적이 없는 <태생적 과거>이다. 현전하는 시니피에는 언제나 뒤늦게, 사후적으로, 때늦게, ‘대리 보충적으로‘ 재구성된다. 여기서 대리 보충에의 호소는 근원적인 것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자신의 핵심 용어인 대리 보충이 프로이트의 사후성과 정확히 동일한 것임을 명시한다.
2)프로이트 : 트라우마, 지각, 종교 현상에서 사후성의 논리
무의식은 그 기원의 자격을 가지는 것이 오로지 사후성의 논리, 지연됨의 논리, 즉 대리 보충의 논리일 뿐이지 순수한 원천으로서 무의식이 아니다.
무의식상의 기억은 어떤 식으로 우리의 지각에 개입하는 것일까?
지각은 외부로부터만 도래한 순수한 지각은 없으며, 지각은 늘 무의식상의 기억에 의해 매개된다는 점에서 기억은 <나타남(의식상의 지각)>을 가능케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종교에서의 사후성의 논리는 잠재되어 있는 아버지의 살해에 대한 죄의식을 예수의 처형이라는 계기를 통해 신의 살해라는 주제 속에서 현실화시켰다. <원죄>라는 교리적 주제는 바로 잠재된 아버지 살해의 죄의식이 <왜곡>된 형태로 현실화한 것이다. 그래서 사후성의 논리는 원죄에 대한 죄의식과 신의 아들의 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교리 속에 굴절된 형태로, 과거로서, 사후적으로 첨가된 것이다.
3)들뢰즈 : 공명과 사후성의 논리
데리다의 작업은 경험 혹은 현상성의 근원에는 그것의 근거로서 차연이 자리 잡고 있다는 말로 요약된다. 이와 동일하게 들뢰즈의 모든 작업은 경험의 근원에는 그것의 선험적 근거로서 차이 자체가 자리 잡고 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들뢰즈는 이질적인 두 개 이상의 항들 사이 ㅣ 조화를 공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들뢰즈는 두 사건이 공명할 수 있는 근거는 둘 사이의 유사성이 아니라 <차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유사성은 공명의 조건이기는커녕 차이에 근거한 공명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사성뿐 아니라 이미 인용했듯 경험을 구성하는 개념들 -- 동일성, 차이성, 유비성, 대립 -- 이 경험의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차이 자체로부터 발생한다. 우리가 보았듯 프로이트에서는 <사후적 회귀>의 조건이 두 항 사이의 유사성이었던데 반해, 들뢰즈에서는 차이에 의해서 비로서 두 항간의 유사성과 공명이 결과물로서 생산된다.
사후성 논리의 특성은 <지체 현상>, <거꾸로 된 인과성>, <연기>, <사후적 첨가>. <결코 그 자체로 현전한 적이 없었던 과거> 등오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런 특성은 사후성의 논리만이 지닌 독특한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다.
필연적 시간[잠복기의 시간]에서 연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참으로 두 항 사이의 공명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공명을 가능케 해주는 차이 자체가 무엇인지 매우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세 개의 항이 분류되고 있다. 서로 공명하는 항은 성인기의 두 항이며, 이 두 항을 공명하게 하는 차이 자체, <어두운 전조>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어린 시절의 사건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공명하는 것은 유아기의 사건과 성인기의 사건이 아니라 성인기의 두 사건이며, 유아기의 사건은 성인기의 두 사건이 공명하게 해주는 차이 자체로 역할한다. 차이 자체와 잠복기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적 논점 -- 1)사후성, 2)차이 자체의 초월적 지위, 3)프로이트의 집단 심리학의 영향 -- 을 이해 해야만 한다.
1)사후성은 비현전적 과거(유아기의 사건)는 <연기>된 채 잠복기를 거쳐, 두 개의 사건을 서로 유사하게 만들어주는 <근거>로서 사후적으로 기능한다.
2)차이 자체로 인하여 출현한 두 항이 일으키는 경험상의 실재적 효과는 바로 공명이며, 그 공명이란 개념적으로 표현하면 <유사성>의 생산이다. 결국 유사성이란 내적 차이의 산물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차이 자체는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경험적 개념, 즉 유사성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이기에 <궁극적 차이>라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3)유사성 개념을 통해 엮어 준다는 것, 즉 하나의 초개인적 계열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성되는 특정한 계열은 우리의 경험을 초월하고 다른 경험들과 연결되며, 주관을 초월해 있는 실재를 향해 열린다. 개인적 주관을 초월해 있는 실재란 인류의 본성을 말한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말하려는 것은 무의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보편적ᆞ집단적인 것이며, 수많은 세대를 매개로 잠복기를 거치며 반복적으로 각성하는 것이다.
4 사후성의 논리를 넘어서
《앙띠 오이디푸스》에 와서 들뢰즈는 잠복기의 논리를 정면으로 이렇게 부정한다. <확실히 이 잠복기는 정신 분석의 가장 큰 속임수이다>
잠복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들로즈의 비판은 프로이트의 이론 가운데 오이디푸스론에 제한되며, 이런 배경 아래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잠복기를 오이디푸스 형성의 본질적 계기로 이해하고 오이디푸스를 -- 니체적 의미에서 -- 힘(욕망)의 반응적 형태, 즉 힘이 억압되고 왜곡된 결과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잠복기와 그 결과로서 갖게 되는 오이디푸스는 정상적인 인간 욕망이라면 피할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운명이 아니라, 욕망을 억압하는 파시스트적 기제라는 것이다.
<위대한 인간이란 그의 인격과 그가 내세우는 이념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추종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라고 정의된다. 위대한 인간은 아버지의 변형이다. 이 위대한 인간에 대한 증오와 살해, 기억 흔적으로 잠재되어 버리는 살해 사건, 잠복기 동안의 가책과 죄의식, 그리고 궁극적인 사후적 복종이 프로이트가 서술한 집단 욕망의 오이디푸스적 형성 과정이다. 프로이트의 잠복기 이론이 이론으로 성립할 수 있기 위해 불가결하게 요구되는 개념인 위대한 인간은, 이처럼 인간의 욕망이 예속적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상정하지 않고는 인정될 수 없는 개념이다.
들뢰즈는 <무의식 체계 속의 영속적이며 변함없기까지 한 흔적>을 비판한다. 이제 들뢰즈는 사라지지 않는 흔적, 트라우마와 대립하여, 적극적인 힘인 <망각 능력>을 찬양한다.
3 일의성의 존재론, 그리고 오이디푸스 비판
들뢰즈의 니체적 배경
<들뢰즈는 니체의 텍스트를, 그러므로 니체의 고유한 개념들과 이론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리고 <니체에 대한 그 해석은 이른바 들뢰즈 자신의 철학이라는 것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
1) 들뢰즈의 존재론과 니체 : 차이와 반복, 존재의 일의성
1>존재자들의 차이와 반복
들뢰즈 존재론의 핵심 개념인 존재의 <일의성> 및 개별자(존재자)들의 <차이>와 <반복>이, 니체의 <힘의 의지>와 <영원 회귀>에 대한 연구로부터 탄생했다는 점이다.
(1)개념적 차이와 개념없는 차이
들뢰즈는 <차이 자체>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려고 한다.
플라톤 형이상학의 세 가지 항인 이데아, 모사물, 시뮬라크르의 경우를 보자. 이데아는 저 스스로는 규정을 받지 않는 <동일적인 것>이다.이데아에 종속됨으로써 이성적 대상이 되는 개별자를 <모사물>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동일적인 것(이데아)에 대한 개별자의 종속은 무엇을 통해 보장받는가? 이성적 사유의 대상이 되는 개별자는 이데아와 유사한 면모를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동일성 개념은 유사성 개념과 상보적이다. 플라톤의 변증법은 개별자들을 유사 개념의 매개에 따라 동일성 또는 전체성에 귀속시키는 운동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동일적인 개념(이데아)에 귀속되어 있는 차이, 즉 <개념적 차이>라 부른다. 반면에 이 동일적인 개념에의 개별자의 귀속을 표현해 주는 유사성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존재자들(시뮬라크르) 사이의 차이는 <차이 자체>, <개념없는 차이, 매개되지 않는 차이>라 부른다.
들뢰즈 존재론의 기획 전체는 바로 이런 표상적 사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 차이, 표상을 매개로 삼지 않는 차이,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개념 없는 차이>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사유하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은 <차이 자체>를 표상으로, 즉 개념적 차이로 환원하는 장치들을, 동일성, 유사성, 대립(부정), 유비의 네 가지로 정리하고 <차이 자체>를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변증법은 처음에는 서로 차이나는 것들, 즉 대립적인 것을 제시하지만 결국엔 부정의 부정, 정반합의 운동을 통해 차이를 동질적인 것, 전체성에 종속시키는 작업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들뢰즈의 니체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뼈대란, 궁극적으로 차이를 동일자에 종속시키는 변증법의 <부정의 부정>에 대항해, 차이가 차이 그 자체로서 계속 반복하게끔 하는 니체의 <긍정의 긍정> 개념을 확립시켜 보자는 것이다.
(2) 힘의 의지
차이 자체의 의미를 복원하고자 들뢰즈는 니체의 <힘의 의지>와 <영원 회귀>의 의미에 대해 물어나감으로써 달성된다. 힘의 의지란 무엇인가? 우선 힘의 의지는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가 아니라 <각각의 힘 안에 있는 의지> 혹은 <힘이 지닌 한 측면>이라는 점이다. 언제나 <힘의 개념은 다른 힘과 관계 맺고 있는 어떤 힘의 개념이다>. 힘의 의지는 <이런 힘들을 발생하게(생겨나게) 하는 동시에 이 힘들간의 관계를 결정해주는 요소>라고 정의된다.
(3) 적극적 - 반응적, 긍정적 - 부정적, <법>의 의미
힘의 의지가 긍정적일 때 그 힘은 적극적이고, 부정적일 때 그 힘은 반응적이다. 즉 적극적과 반응적은 힘의 성질이며 긍정과 부정은 힘의 의지의 활동이다. <반응적>은 어떤 힘이 할 수 있는 바로부터 그 힘이 분리되었을 때의 힘의 상태를 가리키며, <적극적>은 그 힘이 할 수 있는 바가 온전히 유지 되었을 때 의 힘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면 왜 의지가 힘의 본 모습을 부정하는 일이 생기는가? 힘에 대해서 외부적인 <법>이 힘의 의지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힘을 그 힘이 할 수 있는 바로부터 분리시키는 것 일반을 통틀어 들뢰즈는 <법>이라 부른다. 힘을 왜곡시키는 <법>에 대한 비판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 다양한 법들이 각 분야에서 어떻게 힘의 의지를 억압하여, 그 의지의 힘을 부정하게 하는가, 그리하여 반응적인 힘으로 만드는가를 추적한다. 들뢰즈의 오이디푸스 비판은 반응적 힘에 대한 니체의 비판에 기반을 두고 있다.들뢰즈가 욕망이라 부르는 것은 니체의 힘의 의지 개념과 동일한 것이다. 들뢰즈는 욕망이 오이디푸스라는 억압 장치 때문에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일을 비판하는 것이다.
(4) 적극적 힘과 차이
힘의 의지가 <긍정>을 할 때의 힘, 곧 적극적 힘이란 그 힘을 제약하는 법, 즉 그 힘을 그 힘이 할 수 있는 바로부터 분리시키는 법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힘이다. 요컨대 법은 외부적 강제로서 힘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며, 의지의 긍정은 힘의 내적 요소로서 힘들 사이의 관계를 자발적으로 발생시킨다.
들뢰즈는 힘의 의지를 <시뮬라크르 안의 기능>이라 일컫는다.
(5)반복의 의미, 이접적 종합
반복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의 반복 개념은 더하고 뺄 것도 없이 니체의 영원 회귀와 정확하게 동일한 개념이다. 들뢰즈는 영원 회귀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영원 회귀는 다양 그 자체의 재생산의 원리, 차이의 반복의 원리이다>.
들뢰즈에서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개념 없는 차이)는 상위의 동일성을 향한 목적론적 운동 속에서 지양되지 않는다. 의지의 긍정이 힘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긍정인 이상 그 힘들 사이의 차이가 영원히 <반복>해서 생산될 뿐이다. 반복은 차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반복은 차이 자체로부터 생산되며 따라서 <반복은 개념 없는 차이로 정의된다>.
들뢰즈는 이런 반복을 힘들의 <종합>이라고 일컫는다. 그가 말하는 종합은 <분리(이접)>, 혹은 <이질적 종합>을 뜻한다. 서로 차이 나는 상태로만, 서로 이접된(분리된) 형태로만 관계 맺는 힘들은 서로 이접적 종합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종합>이란 <차이로 맺어진 관계>를 뜻한다.
2> 존재의 일의성
(1) 일의성의 의미와 스피노자
일의성의 철학은 기존 철학 <존재의 유비>에 즉 <존재는 여러 의미로 말해지며 그 의미들 사이엔 유비적 관계밖에 없다>는 사상에 도전하고 있다.
일의성의 철학은 <존재가 말해지는 대상은 다의적인 반면 존재 자체는 일의적이다. 이것이 일의성이 의미하는 바이다>. 들뢰즈의 일의성의 철학은 스피노자를 거쳐 니체에게서 완성된 모습을 발견하므로 우리의 탐구도 스피노자에서 출발해야 한다. 스피노자에서 <신은 자신의 속성들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속성들은 그 속성들에 의존하는 양태들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 그러므로 신의 유일한 표현적 이름들, 신이 유일한 표현들은 속성들이다. 즉 실체와 양태들에 대해 말해지는 공통 형식은 속성들이다>. 즉 속성들은 < 존재론적으로 일자이며 형식적으로는 다수라는 것, 이것이 속성들의 지위이다>.말했듯이 양태들(개별자)은 속성들의 표현이며, 따라서 양태들에게도 존재는 하나의 유일한 실체만을 의미한다. 결론지으면 <속성들은 실질적으로, 질적으로 차이나는 의미들처럼 작동한다. 이 속성들은 하나의 동일한 지시체와 관련되듯 실체와 관련된다. 그리고 실체는 그 실체를 표현하는 양태들과 관련해서, 존재론적으로 유일한 의미로서 작동한다>.
속성들은 유일한 실체(존재)의 표현이고 양태들은 이 속성에 의존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일의성의 철학이다.
(2) 니체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긍정의 긍정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양태들에 대해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반면, 양태들은 실체에 의존적이다. 이것은 양태와 실체가 서로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을 스피노자는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존재가 그 자신 안에 존재할 때 그것은 실체를 일컫고, 존재가 다른 것 안에 존재할 때 그것은 양태를 일컫는다.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 실재성,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를 표현한다.
이와 반대로 들뢰즈의 일의성의 철학은 존재가 (실체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양태들에 대해서만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니체적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이라 불리는 사고방식의 전환은 양태들(존재자들)의 반복되는 생성, 즉 영원 회귀 자체를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다.
변증법의 < 그 유명한 부정의 부정에 대항하는 긍정의 긍정> 즉 이중의 긍정이 의미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첫번째 긍정은 차이 나는 개별자들의 계속되는 생성을 가능케하는 힘의 의지의 긍정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긍정의 결과물은 생성이다. 두번째 긍정은 이 생성을 대상으로 하는 긍정이다. 즉 별도의 동일성을 가진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생성만이 존재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존재는 개별자들의 생성이라는 일차적 원리에 뒤따라오는 <이차적 원리>일 뿐이다.
(3) 환영으로서의 존재
들뢰즈의 존재의 일의성 개념을 요약하면 별도의 실체로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시뮬라크르)들의 생성 자체가 곧 존재이다. 이 존재는 동일성을 지닌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자들이 차이를 지니며 생성되는 상태, 곧 반복을 의미할 뿐이다.
2) 들뢰즈의 오이디푸스 비판과 니체 : 가책 혹은 내면의 식민지
니체의 가책 비판은 들뢰즈의 오이디푸스 비판의 밑그림이요 원천이다. 가책은 신 때문에 생겨나고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때문에 생겨났다.
그런데 신과 아버지는 힘을 반응적으로 만드는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신에 대한 신앙(기독교)과 아버지에 대한 신앙(정신 분석학)은 힘을 반응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허구적인 구조인 것이다. 신(기독교)과 아버지가 허구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들뢰즈는 <오이디푸스는 내면의 식민지>라고 단언한다. 오이디푸스가 내면의 식민지라 하면 이것은 가족주의를 통한 욕망의 지배와 실재하는 경제 형태로서의 식민지의 공모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1> 니체의 가책 비판과 들뢰즈의 오이디푸스 비판
(1) 가책의 정의
가책이란 반응적 힘의 일종이다.
니체의 가책의 경우를 고려했을 때 그 허구적인 억압 기제는 기독교의 <원죄> 개념이요, 인간 내면으로의 힘의 방향 전환, 바로 내면적 고통, 죄의식으로서 가책의 발생이다. 그러므로 <가책의 첫째가는 정의는 ‘힘의 내재화에 의한, 내부로의 힘의 투사에 의힐 고통의 증대‘이다>. 가책의 고통은 원죄라는 허구적 장치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현존 자체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고통이다.
(2) 프로이트의 오류 추리
프로이트의 비판에서부터 시작한다.
법이 근친상간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를 근친사간으로 몰아가는 자연적 본능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여기서 근친상간이 가리키는 바는 물론 오이디푸스의 존재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주장은 <오류 추리>에 불과하고 여기에는 하나의 속임수가 숨겨져 있다. 이 속임수는 이렇게 작동한다. <법이 욕망 혹은 ‘본능들‘의 영역에서 완전히 허구적인 어떤 것을 금지하고는 자신이 백성들(본능들)이 이 허구에 대응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 생긴다>. 이와 같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허구적인 법이 욕망을 변질시킴으로써 생겨난 것이기에, <욕망의 덫>이며 <멍에>이자 <날조된 이미지>이고 <올가미 혹은 왜곡된 이미지>이다.
들뢰즈는 자신의 오이디푸스 비판을 니체의 가책 이론을 적용시켜 비판하고 있다. ‘니체의 가책과 들뢰즈의 오이디푸스는 모두 허구적인 장치들을 통해 <적극적인 힘 - 욕망>이 <반응적 힘 - 죄의식>으로 변질된 모습들이다.‘
3) 오이디푸스 비판은 언제부터 기획되었는가?
2> 니체와 들뢰즈의 민족학 ---- 부채 이론 : 해방으로서의 고통과 가채으로서의 고통
(1) 정신 분석학은 왜 비난받아야 하는가?
청신 분석학의 불미스러운 점은, 욕망을 길들이게끔 고안된 허구적인 장치들에 대항하는 비판으로 나가기는 커녕,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 질서에 순응하도록 <옮겨 놓인> 욕망에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주고 그것을 당연한 인간의 본성으로서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오이디푸스가 <허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욕망의 본성에서 유래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라는 뜻이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있는 곳엔 언제나 오이디푸스가 존재한다. 이렇게 오이디푸스에 대해 말한다. <오이디푸스 개념은 실로 세계사의 결과이며, 이는 자본주의가 이미 세계사의 결과라고 하는 특정한 의미에서이다>.
(2) 민족학적 연구의 필요성
들뢰즈는 오이디푸스의 탄생을 민족학적 관점에서 기술하기 위해 니체의 기술을 모방하고 있다. 그것이 니체의 부채 이론이다.
(3) 니체의 부채 이론
가책이라 신에 대한 일종의 부채 의식인데, 이러한 면모는 <대속>개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람들이 그것을 겪음으로써 부채를 갚게 되는 그런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그것에 묶고, 영원히 자신을 채무자로 느끼는 고통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가책이 마음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정서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선, 채무자에게 죄의식의 올가미를 씌우기보다는 오히려 <채무자를 해방시키는 부채>가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니체는 그러한 가능성을 축제로서의 고대 형벌 제도에서 찾는다. 처벌의 본성은 결코 고통받는 자가 내면으로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고통을 보는 자의 눈을 즐겁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처벌은 하나의 진정한 축제이다>.
(4) 교환주의에 반대해서
들뢰즈는 오이디푸스가 욕망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 니체의 부채 이론을 응용한다. 들뢰즈는 부채를 교환가치의 일종으로 보는 구조 인류학의 기본 관점을 거부한다. <욕망은 교환에 대해선 무지하다. ‘욕망은 도둑질과 선물(증여)하기밖에 모른다‘>.
(5) 들뢰즈의 부채 이론
구르망체족의 성년식이란 손해를 보상하기 위해 고통을 끼침으로써 상쇄하는 의식이다.
본래적인 처벌과 고통은 죄의식, 곧 오이디푸스와는 상관이 없으며 오로지 남이 보고 즐기는 데에만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6) 잠복기에 대한 비판과 니체적 트라우마
이러한 외적 상처와 해방으로서의 고통은 프로이트적인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니체적 관점에서 보자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잠복기를 거쳐 출현하는 프로이트의 기억 흔적은 반응적 힘의 일종이다. 잠복기를 통해 탄생하는 이 반응적 힘은 원한이며, 가책, 죄의식이다.
그러나 이제 니체의 망각이, 잠복기를 통해 가책의 형태로 도래할 기회를 노리는 프로이트의 기억 흔적을 대체한다. 니체적 트라우마, 즉 남이 보고 즐기기 위한 외적 상처는 부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고통, 즉 부채에 대한 기억을 망각하기 위한 고통인 것이다.이 고통 속에서 부채에 대한 책임은 결코 채권자에 대한 죄의식으로 발전하는 법이 없다.
(7) 니체의 상징들과 역사관
들뢰즈는 오이디푸스를 탄생시키는 파괴적인 요소를 니체의 역사관에 의존해 해명하고 있다.
가책은 교회의 등장과 더불어 탄생한다. 교회를 국가의 일종으로 규정하므로 가책의 원인은 국가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얻전 역사적 필연성이 국가를 탄생하게 한 것이 아니며, 합목적성이나 합법칙성 없이 역사는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 니체의 역사관이다. 그렇기에 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이와 함께 선교사들이 끌어들인 기독교는 전통 사회의 철저한 파괴적인 기능만을 할 뿐이다.
(8) 오이디푸스화, 자본주의화, 식민지화
이제 금발의 야수(식민 자본주의)들에 의한 자본주의 창설과 더불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혼인에 의한 씨족간의 결연은, 여자들의 순환을 통한 노동력의 재분배라는 사회적 생산의 의미를 지닌다. 이런 뜻에서 가족의 성원들은 사회 경제적 체제로부터 고립되어있는 사적인 인물들이 아니다. 그런데 국가의 창설자들이 가져온 자본주의는 오이디푸스와 공모하여 가족에 대해 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욕망을 변질시킨다. 이러한 욕망의 가족화 혹은 가족이란 단위의 사회 체제로부터의 고립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1)들뢰즈는 우선 이 고립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 형상 개념을 도입해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말하면 가족은 이제 경제적 재생산의 자율적인 사회적 형태에 종속하고 이 사회적 형태가 할당해 주는 장소에 있게 되는, 인간의 질료 혹은 재료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이 자본주의 체제의 한 장소, 자본주의가 마련해 준 한 <형상>을 채워주는 질료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적 생산을 떠맡고 이제 가족은 이 생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리고 이 (질료>로서의 아이는 자라나, 자본이 들어선 대지로 가서 노동자의 <형상>을 입는다.
(2)그런데 가족화한, 혹은 사유화한 욕망은 어떻게 그렇게 순순히 자본주의의 하층 계급의 <형상>을 제 모습으로 받아들이는가?
가족이 사회 체제의 <외부에> 놓여 오이디푸스화하는 일은 가족 체제와 사회 체제가 <들어맞게> 되는 일과 함께 진행된다. 그래서 모든 욕망의 대상은 그것이 지닌 사회적 함의가 제거되어 버린 채 가족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만다. 오이디푸스가 욕망의 본질로 고려되는 한, 가족 무대로서의 자본주의 또한 <욕망의 본질에 합당한 형태>로서 정당화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빗장을 부셔버려서는 안되는 것도 내 욕망의 숙명이다.
니체가 기술했던 상황, 채무자에게 해방을 주던 형벌의 고통이, 가책이라는 내면의 고통으로 변질되는 상황이 오이디푸스를 통해 다시 한번 자본주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3) 거꾸로 선 비판을 두 발로 서게 하기
들뢰즈 철학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요약하면 그것은 <표상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겠다. 그것을 주관하는 최고의 원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니체가 수행하는,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와 이미 건립되어 있는 갗들을 다시 알아보는 일>이다.
칸트의 비판의 칼날은 인식과 도덕 자체에 가 닿지 않고 인식과 도덕에 관여하는 마음의 능력들의 <사용>에 가 닿는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과연 비판이 이런 것이어도 좋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하여 기존의 가치들에 거짓이 있다며 새로운 가치들을 수립하는 것이 철학이 궁극적으로 떠맡아야 할 과제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니체의 비판 철학의 이념이다.
누가 비판을 수행하는가? <비판의 최종 심급>은 무엇인가? 니체에게 <비판의 심급은 힘의 의지이고 비판적 관점은 힘의 의지의 관점이다>. 비판의 최종 심급에서 힘의 의지(욕망)는 무엇인가를 욕망할 때마다 그 욕망하는 일이 무한히 계속 반복(영원 회귀)되어도 좋은지 매 순간 물어나간다. 따라서 우주의 질서로서 영원 회귀 자체가 힘의 의지의 <윤리적 선택>의 귀결이나 다름없다.
4 새로운 욕망 이론을 향하여
들뢰즈의 스피노자적 욕망 이론과 라캉
1) 그토록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의 욕망 이론은 라캉의 <분열된 주체> 개념과 라캉에게 그토록 중요한 <시니피앙>과 대립한다.
들뢰즈 욕망 이론의 한 정점을 이루는 《앙띠 오이디푸스》를 중심으로 세 가지 핵심 개념인 <욕망하는 기계>, <기관들 없는 신체>, <독신 기계>를 어떻게 스피노자 철학의 인도 아래 라캉의 욕망 이론이 들뢰즈적 개념들의 성립에 개입하는지 추적할 것이다.
2) 라캉의 충동 이론
1> 부분 충동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개념은 라캉의 <부분 충동>개념과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라캉은 <심리적 실재의 과정 속에 나타난 충동은 [언제나] 부분 충동들이다>라고 말한다. 충동들은 오로지 파편적인 부분들일뿐 서로 통합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법이 없다. 들뢰즈는 라캉과 마찬가지로 욕망하는 기계들, 즉 충동들의 파편성 또는 전체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충동들은 그 대상들과 함께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향해 발전하게 하는, 충동들의 진화란 없다. 또 충동들이 그로부터 생겨나는 원초적 전체성이란 것도 없다.
라캉의 충동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충동의 원천, 대상, 목적, 그리고 그것이 만족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각각의 충동에는 그 원천으로서 각각의 <기관>이 상응하는데 이 기관이 바로 <성감대>이다. 그리고 이러한 충동들에 대응하는 대상이 바로 <대상 a>라 불리는 것으로 이 대상 a는 통일적인 유기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들이 아니라, 부분 충동에 대응하는 파편적 조각이므로 <부분 대상>이라 불린다. 또한 충동의 목적은 <기관의 즐거움>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기 성애>의 형식 속에서 실현된다. 다시 말해서 충동의 원천은 기관(성감대)이고 충동은 대상a로 향하지만 대상 a는 충동이 진정으로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즐거움의 원천은 기관 자체이므로 충동은 다시 기관으로 되돌아온다. 요컨데 하나의 기관은 충동의 원천이며, 동시에 충동의 운동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그런데 무엇을 충동의 목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또 그것은 충동의 목표와 어떻게 구분하는가?
충동의 목적은 자신의 원천인 기관 자체이지만, 그 기관 자체에 도달할 것이 충동의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충동의 목적은 성감대로부터 출발해 다시 성감대로 되돌아오는 자신의 순환적인 여정을 계속 생산해 내는 것이며,바로 이로부터 만족을 얻는 것이다.
2> 충동은 욕망과 어떻게 다른가?
충동, 욕망을 대상 a의 관점에서 구별하려고 할 경우 그 둘의 차이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욕망의 대상은 또한 충동의 대상>이며, 그 둘 모두에게 이 대상 a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잃어버린 대상>, 결여, 결핍, 상실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본성상 이 대상 a로부터 만족을 얻고자 하나, 숙명적으로 이 대상 a는 이처럼 상징계 안에서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욕망이 현실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이 대상 a의 <모방물>이거나 <대체물>일 뿐이다. 결핍과 불만족에서 오는 갈증은 오로지 대상 a를 거머쥘 때에만 해소될 수 있으므로, 욕망은 대상 a를 모방(대체)하고 있는 상징계의 한 시니피앙에서 다른 시니피앙으로 옮겨 가는 덧없는 유랑을 계속할 뿐이다.
이런 뜻에서 라캉은 충동이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명시한다. < ----- 구순 충동을 만족시켜 주는 것은 영원히 결여되어 있는 대상 주위를 도는 것이다>
3) 결여로서의 욕망과 생산으로서의 욕망
1> 욕망의 신학화에 반대하여
욕망은 늘 불만으로, 혹은 결핍으로 정의된다.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선의 이데아를 향한 모든 존재자들의 운동과 똑같이, 결여되어 있는 대상 a를 향한 욕망의 운동은 목적론적 형태를 띠는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 이론은 일종의 신학이 된다. <결여는 순수하게 신화적인 것이다. 그것은 부정 신학의 일자와 같은 것이다>. 욕망에 대한 이러한 목적론적ᆞ부정 신학적 해석이 플라톤부터 레비나스에 이르는 서양 철학을 지배한다. 결국 결여로서의 욕망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욕망의 신학화>에 대한 비판이다.
2> 생산으로서의 욕망과 충동 ----- <생산>과 <기계>의 뜻
생산으로서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욕망을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칸트는 <이 능력은 자신의 표상을 통해서 표상들의 대상들을 실재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산의 관점에서 욕망을 정의한다. 생산하는 욕망 개념은 칸트보다는 스피노자의 <힘> 개념일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의 힘은 신의 본질 자체이다>. 여기서 본질, 즉 힘이 바로 생산하는 일을 한다. <이 힘에 의해서, 신은 자신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 되고 또한 자기 자신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이 본질이 바로 속성들이다. <속성들은 실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따라서 우리는 힘은 속성들이며 이 힘이 하는 일은 자기 자신과 사물들의 <생산>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처럼 스피노자의 속성, 라캉의 충동,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는 모두 생산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며, 그 생산은 자기 원인이 되는 것, 즉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형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 들뢰즈가 욕망(충동)을 가리키기 위해서 왜 <기계>라는 말을 사용하였는지 라캉의 충동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기계라는 말은 목적론에 맞선 개념이다. 욕망의 운동이 목적론적인데 비해 충동의 운동은 기계적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순환만을 고집하는 운동일 뿐, 원인도 목적도 없다.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를 <목적도 없고 원인도 없는 욕망>으로 정의한다.
4)욕망하는 기계와 기관들 없는 신체
1>충동들의 파편성(라캉)과 속성들의 이접성(스피노자)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 개념이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매개로 라캉의 부분 충동과 관계할 수 있는지 해명해 보자. 충동들의 비유기체적인 부분적 성격, 즉 파편성은 두 요소간의 관련성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무의식의 환원 불가능한 궁극적 항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로 환원되지 않으며 유기체를 이루지 않는 이 요소들의 종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궁극적 요소들(무한한 속성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며 그들 사이에 반대 관계도 모순 관계도 없기 때문에, 기관들 없는 신체는 실체 자체요, 부분 대상들은 실체의 속성들, 즉 궁극적 요소들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각각의 속성들은 유일 실체에게만 귀속되며, 질적으로 서로 다른 속성들간에는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속성들간에는 <이접적 관계> 혹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의미를 강조하자면 <비관계>만이 있다. 이렇듯 서로 이접적인 속성들이 유일 실체에 귀속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서로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에 귀속된다.
2> 기관들 없는 신체와 스피노자의 신
기관들 없는 신체는 무엇인가? 들뢰즈는 이 신체를 <욕망의 생산의 모든 과정이 등록되는 표면>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들뢰즈는 기관들 없는 신체를 칸트가 신을 해명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칸트는 신이 <실재의 총체>로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객체에 술어를 귀속시키는 방식, 즉 판단을 산출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설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실재(술어)의 총체라는 칸트의 신 개념은 의외로 스피노자의 신 개념과 유사하다. 스피노자에게서도 모든 속성의 총체가 신이다. 스피노자의 개별자, 즉 양태들은 언제나 이 속성들을 통해서 존립한다. 칸트에게서, 개별자들은 신이 보유하고 있는 술어들을 통해서 하나의 판단 속에서 나타날 수 있듯이 말이다.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의 힘을 <리비도>라고 부르고, 이것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 기관들 없는 신체를 구성했을 때 그 힘을 신적인 힘, 즉 <누멘>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난데없는 명칭 또한 스피노자를 배경으로 해서 이해해야 한다. 왜 이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누멘)를 신적이라 부르는가? 칸트에게서 만물은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술어들 혹은 속성들을 이 실재의 총체로부터 가져온다는 점에서 이 총체는 신이라 불릴 만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별자가 지닐 수 있는 모든 힘의 원천인 욕망하는 기계들 전부가 귀속되어 있는 총체라는 점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는 신적이며, 그것의 에너지는 신적이라 불리는 것이다.
3> 라캉의 알과 들뢰즈의 알, 라멜르
들뢰즈의 기관들 없는 신체와 라캉의 욕망 이론의 친화성은 <알>의 메타포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들뢰즈는 <우리는 기관 없는 신체를, 기관들이 기관화[유기체화]되기 이전의, 그리고 층들이 형성되기 이전의 알로 다룬다>. 알은 아직 유기체를 형성하지 않은 단계이므로, 비유기체적인 기관들 없는 신체를 표현해 주는 은유로 사용되는 것이다.
라캉도 <알>의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 이 알은 <부분 충동들의 발생>을 설명해 준다. 즉 껍데기 밖으로 흘러나온 알 같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라멜르>이다. 이 깨진 알, 즉 라멜르는 아직 성이 분화되기 이전 상태의 생명체인 것이다. 여기서 순수한 생존 본능에 지배되어 있는 라멜르가 성감대들에 자신을 고착시키는 순간이 바로 부분 충동들이 탄생하는 시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는 한 신체 안의 성감대(부분 충동들의 기관)의 분포를 <비유기체적인 상태>, 바로 기관들 없는 신체의 상태와 동일시하는 데서도 환인된다. <비유기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개체 이전의, 또 인물 이전의 특정성들의 분포가 ‘성감대[성적 신체들]‘이다. 부분 충동들의 기관인 성감대는 유기체를 이루지 않고 이접적 종합의 상태로 기관들 없는 신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5) 독신 기계 --- 부분적 주체 이론
1> 파생적 주체
속성에 해당하는 욕망하는 기계들과 실체에 대항할 기관들 없는 신체 뒤에 오는 양태에 해당하는 개별자들의 발생을 기술해야 한다.
서로 이접적인 비유기체적인 부분 충동들 각각에 주체 개념을 부여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자기 자신으로 환원되는 반성적 구조, 그러니까 일종의 자기 동일성을 스스로 산출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망 자체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현실적인 개별적 존재자가 주체로서 가지는 위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우리가 기술하려는 주체는 하나의 현실적 개별성을 지닌 존재자로서의 주체, 욕망하는 기계들로부터 파생하는 개체로서의 주체이다.
2> 소비의 연접적 종합과 볼룹타스
주체는 욕앙하는 기계들, 즉 부분 충동들의 종합을 통해 생산된다. 들뢰즈는 이 종합을 <소비의 연접적 종합>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소비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주체의 발생에 사용(소비)된다는 뜻이다. 또한 그것은 본래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이접적인 다수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서로 결합해서 하나의 현실적 개별자를 낳는다는 뜻에서 연접적 종합이다. 주체란 그 안에 욕망하는 기계들이 강림해서 하나의 현실적 상태로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는 떠나가곤 하는 껍데기 같은 것일 뿐이다. 주체가 분열증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주체가 이접적인 상태들 다수를 과정 속에서 자신의 성질들로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동일성도 없는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 주체를 규정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분열증적 주체에 <독신 기계>라는 이름을 붙이며, 이 기계의 에너지를 <볼룹타스(즐거움)>라고 부른다. 그런데 독신 기계, 즉 주체의 힘은 왜 불룹타스라 불리는가? 들뢰즈는 말한다. <욕망하는 기계의 체계는 종국에는 행복하게 되는 일반적이고 생산적인 분열증이다. --- ‘참으로 즐거움을 누리는 기계. 즐거움을 누린다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자유이다‘>. 분열증적 주체의 자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임상적 의미의 정신 분열자(환자)와 진정한 의미의 분열증, 즉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을 구별할 때 우리는 주체의 자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주체의 자유란 바로 과정으로서의 분열증, 즉 수많은 상태들을 횡단하는 일을 방해받지 않고 실현하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과정의 계속이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3> 라캉과 전제 군주 시니피앙
라캉의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라캉이 말하듯 <시니피앙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대타자는 시니피앙의 질서라는 법의 체계로서, 욕망이 오이디푸스적 인간적인 형태인 아이의 욕망이 향해야 할 지점을 지정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욕망에 대한 욕망[대타자의 욕망에 응하는 욕망]이며, 대타자의 욕망>이다.
들뢰즈는 라캉이 정말 하고자 했던 바는 시니피앙의 질서 속에서, 오이디푸스와 시니피앙을 비판하고 그 이면에 은폐된 <욕망의 실재계적인 비유기체성>, 즉 비인격적이고 비유기체적인 부분 충동들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의식이 시니피앙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전제 군주적 체계의 도구임을 밝혀내는 것을 라캉의 업적으로 평가한다.
4> 라캉과 부분적 주체
주체는 근원에 자리하는 통일성의 원천 같은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들의 끊임없는 운동의 부산물이다. 즉 기계의 잔류물로서, 기계에 부속한, 인접한 부분으로 생산된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부분적 주체가 라캉이 보이고자 한 진정한 주체 개념이다.
6) 욕망과 혁명 --- 결국 들뢰즈와 라캉의 차이는
1> 비인물적 욕망들의 연결과 집단 동작주
두 사람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 줄 결연의 문제를 보자.
욕망을 인물들의 욕망으로 이해하는 이상 혹은 인물들의 혼인을 욕망들 사이의 결연의 불가결한 형태로 이해하는 이상 결연을 비오이디푸스적으로 설명할 방도는 없다. 오로지 <‘성을 인간의 형체로 표상하는 것‘을 붕괴시킬>때에만, 즉 욕망을 비인물적인 부분 충동의 층위에서 이해할 때에만 찾아낼 수 있다.
주체성을 규정하는 개념들을 말살하고 욕망을 비인간적 층위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 <각자에게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인간적이지 않은 성을 돌려주는 것, 각자에게 그의 여러 성을 돌려주는 것>이 들뢰즈 욕망 이론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인물이라는 허구적 표상에 기반을 두는 분열된 주체(언표 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를 깨뜨리면 나타나는 <집단적 동인들>이란 바로 비인격적인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부분 충동들이며, 언표 일반은 바로 이 익명적인 욕망들의 표현이다.
라캉은 오히려 오이디푸스 개념을 이용해 혼인 질서를 규명하려 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인물들과 그 인물들을 지배하는 상징계적 법칙(오이디푸스)을 라캉은 <완전히> 포기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실재와 만나는 방식
들뢰즈와 라캉의 차이점을 조명하는데 먼저 부분 충동과 대상 a의 관계를 보는 둘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해야 한다.
들뢰즈는부분 충동과 부분 대상이 <실재로> 연결 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물들의 혼인을 대신하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연결은 부분 충동과 부분 대상의 실재적 연결을 상정했을 때에만 유효하다. 반대로 라캉은 충동의 운동은 대상 a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돌아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자기 성애적> 형태를 띤다.
이러한 차이를 염두에 둘 때 라캉은 어떤 대상이든 사물의 빈자리[실재의 자리]를 점유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상은 오로지 환영을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실재가 주체 앞에 등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술들인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정신 분석은 모든 것을 환상으로 번역하고, 모든 것을 환상에다 팔아먹으며, 환상을 보존하며, 특히 실재계를 놓치고 만다>. 즉 실재와의 만남은 실재상 일어나는 사건이지 환영이 아니다 라고 비판했다.
3>혁명에 관해서
들뢰즈는 두 종류의 혁명을 구별한다.1)의도적으로 혁명을 추구하는 것, 즉 <새로운 사회적 개체를 추진하는 원인들과 목적들의 질서 속에서 자기들의 활동을 하는> 혁명과, 2)<이와 반대로, 갑자기 돌출해 원인들 및 목적들과 관계를 끊고 사회적 개체를 다른 국면으로 되돌리는 욕망>에 의한 혁명이 그것이다.
여기에 가장 위험스러운 방식이 추가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혁명 세력 자체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즉 <오이디푸스, 미르크스-아버지, 레닌-아버지, 브러주네프-아버지>가 생겨나고, 이에따라 혁명 집단은 자본주의적 지배 체제와 동일하게 부성적 주체 집단과 그 밑의 예속 집단으로 변질된다.
따라서 들뢰즈는 혁명의 가능성을, 혁명의 표상을 추구하는 집단에서가 아니라, 욕망(부분 충동)의 본성에서 발견한다.
그런데 욕망의 본성이 어떤 것이기에 그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일 수 있는가? 바로 실재계의 부분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 때문에 애초에 욕망은 <상징계에 대해서> 혁명적이다. 욕망이 억압적인 모든 상징계적 장치를 넘어, 실재계의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에, 오이디푸스적으로 차인 자본주의적 상징계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심한 별들이 그렇듯, 기억될 만한 사상이란 그것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진리를 기르는 자들의 옆에서 늘 성가시게 빛나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