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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박영진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서 밝힌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개요의 일부였던거 같다. 언어만 읽어도 비트겐슈타인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대략 알겠다.
이 책을 읽고 감상문이라도 써볼려고 요약한 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절마다 그때그때 요약한거라 앞절과 연결이 안되니 써놓고도 잘 이해가 안된다. 아직 머리속에 담아둔게 있으니 그나마 이해 한다쳐도 다시 읽을 때는 더욱 어렵겠다 싶다. 하기야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이런 의미구나˝ 하고 이해하면 되는거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 하지않나.
각설하고, 철학이 진리로서 굳어진 부분을 들춰내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반철학이 갖는 의미를 새기고 이에 더욱 더 정진하는 철학의 참모습을 기대하기 위해서 철학적 사상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흥미있게 볼 책이라 생각한다.
기를 쓰며 읽어 겨우 비트겐슈타인 바디우가 무엇을 말할려는지 조금은 알겠는데..
그저 조금 알기만 한다는게 답답하네. 좀더 나가보고 싶은데...
◇반철학은
1.철학의 진술들에 대한 언어적 논리적 계보학적 비판, 진리라는 범주의 폐기, 그리고 스스로를 이론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철학적 야망의 해체.
2.철학이 최종적으로 담론적 외양으로, 명제들로, 거짓된 이론적 외양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인식.
3.철학적 행위에 맞서는 철저한 새로움을 지닌 다른 행위의 호소.
이 세가지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 발견 하는 것은 철학 저술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명제와 질문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다. 사유란 의미가 부여된 명제이다. 무의미란 의미의 결여이다.그러므로 철학은 비사유이다. 철학은 명제와 의미의 권위에서 벗어나며 동시에 행위의 형태에 전념한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제시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표시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기독교가 명명하는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명료화이며 세계의 의미이기도 하다. 초월적이고 한계를 드러나기에 이 무의미가 갖는 세계의 한계에 우리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기를 희망한다.
반철학의 요구는 반철학자를 항상 실존적인 단독성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그 행위는 오로지 행위 자체와 효과들 만을 가치의 증거로 삼는다.
니체는 행위의 가치가 선과 악 너머에 위치함을 주장하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을 통해서라 할지라도 가치들의 결합을 통해 규범화된 채로 남는다.
◇존재의 가장 참된 것은 세계와 언어의 존재론 즉 존재에 대한 논제들과 명제에 관한 논제들 사이의 반영적 관계에 사로 잡히지 않는 사물이 아닌 어떤 것이 이 관계의 잔여로 나타나는 곳이다.
◇실체는˝거기 있음˝이고 실재적 실존과 우유적 실존을 구별해야 한다. 실체는 잔여에 접근하고 사유 가능한 것은 오로지 여러 대상들 사이의 연관 `사태` 를 지칭한다. 즉 존재의 영원한 형식은 동등하게 사유 불가능한 대상들의 우연적인 병치일 뿐이다.
핵심적인 논점은 사유될 수도 기술될 수도 없는 대상들이 그림으로, 혹은 그림과 동일한 것에 해당하는 명제로 재현된다.
사유 불가능한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명명을 통해 이루어진다. 명명은 대상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대상들의 연관에 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대상들의 연관 `사태` 는 명제에 의해 재현되는데 이 명제를 원자(요소)명제라고 부른다.
◇명제가 원자적인 것은 독립적이고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는 존재의 범주에 속하며 가능한 것의 실체적 가치 안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의 그림을 그린다. 사유는 의미가 부여된 명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은 사유는 대상이 되는 상황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이 가능성은 명제가 기술하는 사태의 형식 아래 의미의 존재에 대한 토대를 구성한다.
가능한 것의 특수 사례가 현실이다. 현실은 `일어난다` 는 것 뿐이고 이 실존하는 세계는 세계의 실체적 토대와 우연적인 관계를 유지한다.세계의 상태를 기술하는 한에서 명제는 참이다.
◇반철학은 사유와 비사유의 경계에서 확장된 비사유를 정의하는 것인데 비사유는 명명, 불가능한 것, 무의미를 시와 수학 철학자체와 부딪친다. 여기서 의미는 두 체제를 의미한다. 세계 내적인 의미는 우연적이며 명제가 가진 의미는 사태를 기술할 때만 가치를 인정하기에 의미 자체가 없는 것이고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바깥에 있어 신이라는 궁극적인 이름을 가진 가치 의미가 있다.
실존이라는 면에서는 의미가 결여된 명제라 하여도 `일어나고` 세계 안에 있다는 점이다.
˝이 명제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라는 명제를 언어적 그림으로 삼는 대상들의 연관의 실체적 가능성은 대상들의 영속적 존재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복합명제는 원자명제의 군집이며,원자명제의 참 또는 거짓을 인식할 때, 복합명제의 값에 관한 결과를 도출하여, 이에 따라 원자명제의˝군집˝이 실제로 세계의 부분적 기술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모든 명제는 원자명제에 관한 진리 연산의 결과이다. 이것이 참된 복합명제는 과학적인 이유이다. 과학적 명제는 세계에 대한 부분적 기술인데,그러한 명제는 오로지 원자명제들을 근거로 함축되는 사태의 실존 혹은 비실존에 대한 확인으로부터 진리가 된다.
세계의 현실성과 독립적으로 참이되는 복합명제가 실존한다면 필연적으로 참이 되는 명제가 되고 이를 동어반복이라 명한다.
이 명제들이 과학적 언표의 진리가 갖는 우연성으로부터 필연성의 질서를 안정시키고 이 질서가 논리학이다.
어떤 사태의 실체를 그 사태의 `존재` 라 칭하고 그걸 기술함으로써 원자명제는 의미를 갖고 어떤 사태가 세계 내에 있다는 사실을 그 상태의 `실존` 이라고 칭하고 정당하게 긍정함으로써 명제는 참이 된다.
동어반복은 존재도 실존의 확인도 필요없고 모순도 갖지 않기에 세계와의 관계 속에 그 형식을 규정한다.
◇동어반복적인 진리의 의문
논리적명제의 결여, 수학적 명제는 실재를 말하는 명제의 실존, 그 관계는.
세계의 우연성이 자체의 실체적 존재와 현세성의 존재론적 규정의 관계.
실체적 존재의 관점의 보여주기와 논리학과 반철학적 행위 사이의 특징.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은 사유가 아니라 계산이다 라는 선언에 대한 사유로서의 수학의 핵심은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에 봉합하는 문제,무한의 문제,다수성의 구성 문제, 유형화의 문제이다.
◇논리학은 세계의 골조라고 규정하고 주체는 세계의 한계라고 부른다. 주체는 실존하는 것 전체를 포괄하는 ˝존재˝의 이름이다.
우리는 논리학-세계형식에 대한 규정인-과 주체-세계의 단일성에 대한 이름-의 상호 연결을 기대한다.주체의 존재는 실존인데 세계 바깥에 위치하기에 실존하지 않게되니 주체적 명제는 없다. 사유가 아니라 행위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반철학적 행위의 구둣점.
행위란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드러나는 가치를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행위란 글쓰기에 관해 던져 버리는 것.
행위는 말해진것 너머에 있는 의미를 침묵 속에
폐기한다는 점.
삶을 의미하는 주체에 관련되어야 한다.
행위는 구원의 선행성을 본질로 삼는다.
행위를 통해 정화된 주체가 지탱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이다.
결단.
집단성.
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