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역사 나남신서 72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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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굳이 광기를 미친듯하다고 표현한다면 우린 살다보면 때론 그런 기분이나 감정에 휩싸일 때도 있지 않나. 광기를 이렇게 가까이 두고 있구나 하고 이 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난해하다.정신병에 대해서 나열한 부분을 수월하게 읽게 되니 정작 깊은 성찰을 요하는 부분 마저 쉽게 가고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익숙하지 않은 단어의 조합도 있어 맥락을 찾아 나가기 힘들다.
˝광기의 역사˝는 말 그대로 변천사다. 물론 광기를 인식하는 의미도 크지만 사회 경제적으로 구조적으로 윤리적인 이유로 수용해서 격리하고 또는 의학적인 견지에서 치료하는 150년 동안 광인이 변화하는 과정이다.아니 광기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이성적(?)이기에 광기는 깊게 생각하기 어려운 주제였고 읽는 내내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아쉽게도 결론을 이끈 마지막장을 서둘러 읽어 꼭 다시 봐야겠다. 끝으로 가면 왜 이렇게 서두는지..

1-1. 광인의 추방, 유배 그리고 문학에 등장, 진실의 풍자
1-2. 17세기에 구빈원이라는 수용시설은 왕권과 연결된 시민통제의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다. 빈민은 도덕적인 가치를 잃고 노동의 의무를 저버리는 무위도식은 신에 대한 반항이었고 단죄를 내려야 했다. 거기에 광기는 자연스럽게 무위도식의 윤리적 단죄의 인식에 해당되었다.
1-3. 나병환자 수용시설이 성병환자로 채워지고 걸인 방탕자 시기꾼 광인이 수용된 공간은 사회적 합목적성으로 완결되었고 모든 광기는 혼란된 성에 뿌리를 둔다. 고전주의 시대 초기에 방탕 불경죄 신성모독죄에 위중한 형벌로 단죄했으나 점차 유죄선고가 줄어든 이유는 그 중간 단계에서 범죄행위가 도덕적 책임 곧 윤리적 관점에서 행해지는 죄의식의 내면화가 이루어진다. 즉 비이성의 영역에 위치한다.
이렇게 수용함으로써 이성과 비이성의 통일성은 깨지고 단절되며, 비이성은 인간의 감정, 욕망, 속박된 본성으로 규명짓고 교정되어야 할 질병으로 규정된다.
1-4. 광기에 대한 의식은 중세에 개인으로서 독립적인 존재이고 친숙한 인물이었으나 고전주의 시대에 비이성의 일반적 이해 속으로 사라진다.
광기를 두가지로 고찰하면 법적 주체로서의 인격과 관련해서 법의 맥락에서 해석하느냐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과 관련해서 사회적 실천에 종속되어 있느냐 이다. 따라서 19세기의 정신병리학은 정상인을 법적 주체와 동일시하는 체계이고 광인은 우리 문화에 의해 수용의 사회적 명령과 권리주체의 능력을 판별하는 법률적 인식 사이의 접점에 놓는다.
1-5.광기의 동물성은 도덕적 속박과 제어된 비이성의 체제 안에 광인을 억류하게한다.
2-1.17세기 광기는 이성에 의한 존재고 그 속에서 소외된 존재이나 18세기에 관점이 변화되어 실증적이며 부정적인 이성과의 관계이다. 즉 비이성이다. 그러므로 광기는 질병의 논리적이고 자연적인 영역으로재구성되었다
2-2.광기에 속하는 본질적 구조 정신착란의 도출은 해부학적인 원인과 정념에 빠진 무너진 이성이다.
2-3.
2-4.
3-1. 개인의 형성뿐만 아니라 인류의 다양한 변종 출연을 가능하게 하는 ˝침투력˝. 광기는 자신의 본질에서 벗어난 자기 자신을 상실한 사람이다.
3-2. 내적으로 광기는 광포함에서 이성을 상실한 이들로 인식을 바꾸고 광인의 수용이 경제 사회적인 이유로 점차 축소되며 빈민의 구제가 사회적인 문제에서 사회인의 의무로 바뀌고 있다.
3-3.광기에서 수용의 철폐는 광인을 다루는 비인간적 물리적 속박에서 병자로서 제한된 공간으로 바뀌고 광기는 인식의대상으로 지위를 받았지만 스스로는 통제되는 자주성을 잃었다.
3-4.은거처는 광인들을 치유하는 공간으로 처음에는 정신이상을 소멸시키는 획일적 법제영역 도덕적 통합의 장소로 체계화된 작업의 수단을 사용하였지만 모두 폐기하고 의료인을 포함시켜 신적 지위를 부여하고 재판관의 역할을 주었다.
3-5. 광기는 내밀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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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 도덕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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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나도 이젠 제법 나이가 들었지!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면 젊었을 때야 무엇인지 모를 기대와 설렘이 가득하겠지만 지금이야 이런저런 생각에 정리도 하고 후회도 하면서 젊다는 것 빼곤 부족하지 않다고 혈기를 부려보겠지만 왠지 모르게 허무할거야.
도덕과 가치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려 떠난 여행은,
그저 나에겐 그런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 만 그득하다.
내가 뱃전에 선듯한 설레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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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 -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서설 파라디그마 Paradigma 8
미셸 푸코 지음, 김광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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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
와우! 진짜 힘들다. 읽으며 밑줄치고 이해 안되서 또 긋고 간추리며 또 그으니 책 전체를 줄친게 되버렸다. 제대로 읽고 정리라도 한건가 싶다.이 책은 장이 넘어가도 이론이 계속되니 겉으로나마 이해하지 못하면 그 때부턴 건성이 되버린다.그래도 나름 열심히 읽었다.
사실 이전에 인간학을 가볍게 읽었고 의미를 많이 갖진 않았는데 푸코는 이 서설로 내가 책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지 의심케 했다.
노철학자가 인간학을 25년동안 강의한 이유를 비판 철학 과의 비교를 통해 그 의미를 일깨우는 책이다.칸트의 `비판` 을 알면 이 서설을 흥미롭게 볼 수 있겠다.
단순히 세계에 대한 대중적인 인간의 인식을 고찰할 뿐아니고 비판 철학과의 관계를 깊이있게 성찰했다.
아래에 간추린 부분을 붙인다.
◇요약.
삶을 준비하는 세계에 관한 인식의 구성은 획득된 모든 지식과 숙달,실용적인 요소들을 제공한다. 또 자연과 인간이 속하는 전체와의 관련성 속에서 고찰 되어야 하며, 양자는 전체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배치된다.
칸트는 인간학을 다른 문헌과 동시대적으로 저술하고 있는데 드러나는 부분은 비판철학적 사유와 인간학적 반성였다. 연구는 대상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것이고 이것은 초월적 반성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인간학은 이용의 상호성 안에서 자유와 사용이 이미 묶여 있는 영역(집합체에 대한 탐구는 자연과 자유가 뒤얽힌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이 그것들을 서로 비교 평가하는 유희의 통일성 안에서 상호 종속되는 영역, 문화의 규정 안에서 세계가 학교가 되는 영역을 탐구한다(인간에게 고유한 문화 안에서 세계라는 학교를 인식하도록 가르친다).
인간학의 연구 대상으로 세계 안에 거주하는 인간인 세계 시민을 제시하므로 인간에 대한 인식이고 그 분석은 마음이라는 내면적 차원을 주로한다. 칸트가 건축술 ˝일반적인 인식들을 하나의 이념 아래서 체계적으로 통일하여 학문을 형성하는 방법˝로 확립하는 이성적 경험적 심리학은 인간학을 대체 할 수 없다.검토해야 하는 것은 마음 자체이다. 마음은 정신인데 그 존재는 인간 안에 생기를 주는 원리이다. 생기는 마음에 이념이 가득한 운동을 일으킨다. 여기서 도출된 결과는 마음 안에 존재하는 정신이 마음을 초월하는 자유와 총체성을 부여하고 진정한 인간학은 오직 실용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성립시킨다.
정신은 이성의 순수 사용인 초월 철학을 벗어나 칸트 사상의 핵심이 될 진리가 될 수 있다.
인간학과 비판의 반대되는 모습. a.주체성을 예로 든다면 비판은 잡다의 종합을 순수한 이성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면 인간학은 지각과 주의력의 종합으로 구체적 실존에 대한 성찰이다. b. 능력들의 분할을 말할 때는 비판이 능력을 확실성의 영역에 지속적으로 준거하여 의미를 부여한다면 인간학은 자신의 중심과 정당성으로부터 멀어지고 부당하게 자신을 상실하게 되는 영역을 나타낸다. 즉 조건 지어진 것이 가질 수 있는 근거를 갖지 않음과 근거 짓는 활동의 조건 지음의 비교이다. c. 인간학의 요소론과 방법론은 비판과 일맥상통해서 마음의 총체성을 형성하는 구조인 다양한 능력을 다루고(요소론), 뒤이어 인류 안의 민족 혹은 인종에 속한 가족의 일원인 개인에게서 능력의 실행 규칙을 다룬다(방법론).두 부분은 비판에서 조건들의 차원(능력)에서의 가능한 것과 구성된 차원(현상)에서의 실제적인 것으로 서로 구별되는 것들은, 인간학에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연속된 것으로 주어진다.요소와 방법 이론이 서로 반복되며(내면과 외면은 의존하며 인식된다) 인식과 실존이 규정하는 선험적인 영역은 가깝기도 멀기도 한다.
비판과 인간학의 관계 파악은 경험적 심리학의 제한된 체계를 수용해야 하는 인간학이다. 순수 철학은 인간학을 다루지 않지만 광범위하게 두가지 영역은 균형을 이룬다.
1.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3.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4.인간이란 무엇인가?
위 세가지 질문이 비판 철학적 사유 구성이면 네번째 질문은 인간학적 주제로의 전환이며 이것은 사유의 단절이 아니고 인간을 세계에 속하는 인간으로 규정하며 세계의 일부로서 나의 존재는 세계 존재이다.세계는 모든 실제적 존재를 포함하는 현실적 체계안에 주어지기에 세계는 실존의 근거이며, 실존을 포함하면서 실존을 제한하는 동시에 자유롭게 하는 원천이다. 단지 인간학적 질문은 세 물음을 반복하면서 자신과 관련된 질문을 제기할 뿐이다.이러한 상호 관계의 체계를 통해 진리와 자유의 상호적 초월성이 정초된다.
인간학은 자신이 체계적인 동시에 대중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학에서 지성에 의한 판단은 시간상에서 주어지고 진리는 시간의 영역 자체에 따라 형성된다. 시간은 비판에서 직관과 내감의 형식에서 주어진 것의 잡다라면 인간학은 자기 자신과 관련된 종합적 활동의 분산이다. 주어진 것으로서의 방식이 아닌 철저한 규정에 대한 가설과 보증을 제공하는 본질적 가능성이라는 방식으로 종합에 작용한다.
종합의 작용으로의 활동은 자유의 형태지만 진리의 작업을 오류의 가능성에 연결하는 위험한 자유로서 그 판단을 인위라 불리는 수동적이고 불확실한 행위로 대체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비판에서 시간과 주체의 관계는 인간학의 시간과 인위의 관계에 대응한다.
인식의 시작인 무엇과의 관계는 위의 세가지 질문의 반복이 진리와 자유의 연결로 인위의 작업이 진실된 시간안에서 반복된다.
체계성에도 불구하고 인간학은 대중성이어야 한다. 대중적이기 위해서 인식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인간들의 개념과 취향과 성향에 대한 인식에 기초해야만 한다. 인간학은 대중적으로 존재하고 인식하기 위해 언어에 의한 말함인 언어의 토대가 있어야한다. 이런 관용적 언어의 관계망 안에서 세계 안의 인간의 보편적인 거처를 형성한다.
인간학에 의해 시작되고 그 시작 자체에 의해 벗어난 초월 철학은 마지막 저작 ˝유고˝에서 그 체계를 신,세계,인간 이 세가지 용어를 칸트 사유가 지속되는 힘인 원천,범위, 한계라는 개념과 근본적인 관계를 통해 철학에 위치시키기도, 인간학의 내용으로 밝히기도 한다.
여기서 모든 철학의 기획은 철학적 성찰과 인간학적 성찰과의 분할을 극복하려고 한다.
확실히 철학적 영역의 해체는 이뤄지는듯 하지만 결국 근원적인 것에 대한 성찰이 ? 근원으로 되돌려졌다.
인간학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인간학`은 단지 인간에 대한 학문 혹은 인간에 대한 전체 학문들에 관한 학문이나 지평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그것의 인식을 정초하고 제한하는 것에 대한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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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칸트 지음 / 울산대학교출판부(UUP)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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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인간학. 새로운 관점을 이뤘다는데 잘모르겠다.
3대 비판서에 쓰여진 반복되는 내용 중에 좀 더 세분화되고 심도있는 부분도 있지만 익숙해선지 전체적으로 집중해서 읽혀지지 않는 책이다. 설렁설렁보면 자꾸 잊게되어서 주의를 기울이자니 흔히 보는 성격론에 대한 책과 비슷해 읽는 재미가 없다. 아니, 너무나 다양하게 구분해 놓아서 집중하지 못했기에 그런건지 모른다.
이젠 푸코가 박사논문으로 썼다는 이 책의 서설에 관심을 가져본다.
추린 내용을 아래에 붙인다.
◇인식능력에 관하여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는 것은 지각으로부터 감각대상을 인식, 즉 경험에까지 확장을 말한다. 자기를 의식하며 에고이즘은 시작된다. 논리적,심미적,실천적으로 나뉜다.
자신을 표상하는 것은 대상의 규정으로부터 추상하는 것이다.
자기의 표상을 의식하는 것은 사변적 관점에서는 아프리오리한 학문적 원리가 필요하지만 경험적 실천적 관점에서는 판단만이 있다.
표상에 관해 주관이 폭발되는 경우, 감성적 인식능력이다. 이런 직관이 반성을 통해서,그리고 그 반성으로부터 생겨나는 오성 개념을 통해서 내적 경험이 되며 결국 진리가 된다. 진실되지 않은 덕이 있는 모습이 점차 그런 종류의 현실적인 마음으로 깨달아지므로 유용하지만 선이나 자애는 그 가상이 기만하는 것이라 없어져야한다.
상상력은 경험에
선행하는 생산적(창조적)이든지 경험적 직관을 떠올리는 재생적(회상적)이다.
감상적 창작 능력은 공간에서의 직관의 형성적 능력, 시간에서의 직관의 연상적 능력, 표상들 상호 간의 공동 기원으로부터 나오는 친화력이 있다.
예견된 것의 표상을 과거의 것에 대한 표상과 결합하는 수단으로서, 현재 있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은 표시 능력이다.
사물의 형태(직관)는 그것이 개념에 의한 표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그 역할을 하는 한에서는 상징이다. 개념을 위한 상징 그리고 표현의 기호화는 오성에 이르는 수단이다.
올바른 오성은 대상의 인식에 대한 개념의 적합성이고 오성에 제공된 규칙을 판단하는 판단력은 기술적 심미적 실천적 판단력을 위한 능력이며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필연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이성이 있다.
지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 스스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항상 자기 자신과 일치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서의 가장 중대한 혁명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책임인 미성숙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이다.
◇쾌와 불쾌의 감정
인생은 결국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당신이 행했던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당신은 그만큼 길게 살았다˝.
취미는 나 자신에서의 감관의 감각에 따르는 것만은 아니고,그것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규칙에 따라서 선택하는 감성적 판정 능력이라 간주된다.
◇욕구 능력에 관하여
욕망은 그것의 결과로서의 어떤 미래의 것에 대한 표상에 의해서 주관의 힘이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다.
욕구는 올바른 도덕적 가치를 가지면 삶을 흥미롭게 누릴 수 있지만 어긋난 욕정은 스스로를 피폐하게 할뿐이다.
◇인간학적 성격론
개인의 성격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성적인 인간에 대해서 구할 수 있는 최소한임과 동시에 내적 가치의 최대한이다. 그러므로 원칙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은 가장 보통의 인간 이성에서도 가능한 것이며, 그렇게 됨으로써 최대의 재능을 가진 사람보다도 존엄에 관해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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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박영진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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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서 밝힌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개요의 일부였던거 같다. 언어만 읽어도 비트겐슈타인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대략 알겠다.
이 책을 읽고 감상문이라도 써볼려고 요약한 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절마다 그때그때 요약한거라 앞절과 연결이 안되니 써놓고도 잘 이해가 안된다. 아직 머리속에 담아둔게 있으니 그나마 이해 한다쳐도 다시 읽을 때는 더욱 어렵겠다 싶다. 하기야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이런 의미구나˝ 하고 이해하면 되는거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 하지않나.
각설하고, 철학이 진리로서 굳어진 부분을 들춰내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반철학이 갖는 의미를 새기고 이에 더욱 더 정진하는 철학의 참모습을 기대하기 위해서 철학적 사상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흥미있게 볼 책이라 생각한다.
기를 쓰며 읽어 겨우 비트겐슈타인 바디우가 무엇을 말할려는지 조금은 알겠는데..
그저 조금 알기만 한다는게 답답하네. 좀더 나가보고 싶은데...
◇반철학은
1.철학의 진술들에 대한 언어적 논리적 계보학적 비판, 진리라는 범주의 폐기, 그리고 스스로를 이론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철학적 야망의 해체.
2.철학이 최종적으로 담론적 외양으로, 명제들로, 거짓된 이론적 외양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인식.
3.철학적 행위에 맞서는 철저한 새로움을 지닌 다른 행위의 호소.
이 세가지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 발견 하는 것은 철학 저술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명제와 질문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다. 사유란 의미가 부여된 명제이다. 무의미란 의미의 결여이다.그러므로 철학은 비사유이다. 철학은 명제와 의미의 권위에서 벗어나며 동시에 행위의 형태에 전념한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제시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표시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기독교가 명명하는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명료화이며 세계의 의미이기도 하다. 초월적이고 한계를 드러나기에 이 무의미가 갖는 세계의 한계에 우리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기를 희망한다.
반철학의 요구는 반철학자를 항상 실존적인 단독성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그 행위는 오로지 행위 자체와 효과들 만을 가치의 증거로 삼는다.
니체는 행위의 가치가 선과 악 너머에 위치함을 주장하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을 통해서라 할지라도 가치들의 결합을 통해 규범화된 채로 남는다.
◇존재의 가장 참된 것은 세계와 언어의 존재론 즉 존재에 대한 논제들과 명제에 관한 논제들 사이의 반영적 관계에 사로 잡히지 않는 사물이 아닌 어떤 것이 이 관계의 잔여로 나타나는 곳이다.
◇실체는˝거기 있음˝이고 실재적 실존과 우유적 실존을 구별해야 한다. 실체는 잔여에 접근하고 사유 가능한 것은 오로지 여러 대상들 사이의 연관 `사태` 를 지칭한다. 즉 존재의 영원한 형식은 동등하게 사유 불가능한 대상들의 우연적인 병치일 뿐이다.
핵심적인 논점은 사유될 수도 기술될 수도 없는 대상들이 그림으로, 혹은 그림과 동일한 것에 해당하는 명제로 재현된다.
사유 불가능한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명명을 통해 이루어진다. 명명은 대상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대상들의 연관에 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대상들의 연관 `사태` 는 명제에 의해 재현되는데 이 명제를 원자(요소)명제라고 부른다.
◇명제가 원자적인 것은 독립적이고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는 존재의 범주에 속하며 가능한 것의 실체적 가치 안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의 그림을 그린다. 사유는 의미가 부여된 명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은 사유는 대상이 되는 상황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이 가능성은 명제가 기술하는 사태의 형식 아래 의미의 존재에 대한 토대를 구성한다.
가능한 것의 특수 사례가 현실이다. 현실은 `일어난다` 는 것 뿐이고 이 실존하는 세계는 세계의 실체적 토대와 우연적인 관계를 유지한다.세계의 상태를 기술하는 한에서 명제는 참이다.
◇반철학은 사유와 비사유의 경계에서 확장된 비사유를 정의하는 것인데 비사유는 명명, 불가능한 것, 무의미를 시와 수학 철학자체와 부딪친다. 여기서 의미는 두 체제를 의미한다. 세계 내적인 의미는 우연적이며 명제가 가진 의미는 사태를 기술할 때만 가치를 인정하기에 의미 자체가 없는 것이고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바깥에 있어 신이라는 궁극적인 이름을 가진 가치 의미가 있다.
실존이라는 면에서는 의미가 결여된 명제라 하여도 `일어나고` 세계 안에 있다는 점이다.
˝이 명제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라는 명제를 언어적 그림으로 삼는 대상들의 연관의 실체적 가능성은 대상들의 영속적 존재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복합명제는 원자명제의 군집이며,원자명제의 참 또는 거짓을 인식할 때, 복합명제의 값에 관한 결과를 도출하여, 이에 따라 원자명제의˝군집˝이 실제로 세계의 부분적 기술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모든 명제는 원자명제에 관한 진리 연산의 결과이다. 이것이 참된 복합명제는 과학적인 이유이다. 과학적 명제는 세계에 대한 부분적 기술인데,그러한 명제는 오로지 원자명제들을 근거로 함축되는 사태의 실존 혹은 비실존에 대한 확인으로부터 진리가 된다.
세계의 현실성과 독립적으로 참이되는 복합명제가 실존한다면 필연적으로 참이 되는 명제가 되고 이를 동어반복이라 명한다.
이 명제들이 과학적 언표의 진리가 갖는 우연성으로부터 필연성의 질서를 안정시키고 이 질서가 논리학이다.
어떤 사태의 실체를 그 사태의 `존재` 라 칭하고 그걸 기술함으로써 원자명제는 의미를 갖고 어떤 사태가 세계 내에 있다는 사실을 그 상태의 `실존` 이라고 칭하고 정당하게 긍정함으로써 명제는 참이 된다.
동어반복은 존재도 실존의 확인도 필요없고 모순도 갖지 않기에 세계와의 관계 속에 그 형식을 규정한다.
◇동어반복적인 진리의 의문
논리적명제의 결여, 수학적 명제는 실재를 말하는 명제의 실존, 그 관계는.
세계의 우연성이 자체의 실체적 존재와 현세성의 존재론적 규정의 관계.
실체적 존재의 관점의 보여주기와 논리학과 반철학적 행위 사이의 특징.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은 사유가 아니라 계산이다 라는 선언에 대한 사유로서의 수학의 핵심은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에 봉합하는 문제,무한의 문제,다수성의 구성 문제, 유형화의 문제이다.
◇논리학은 세계의 골조라고 규정하고 주체는 세계의 한계라고 부른다. 주체는 실존하는 것 전체를 포괄하는 ˝존재˝의 이름이다.
우리는 논리학-세계형식에 대한 규정인-과 주체-세계의 단일성에 대한 이름-의 상호 연결을 기대한다.주체의 존재는 실존인데 세계 바깥에 위치하기에 실존하지 않게되니 주체적 명제는 없다. 사유가 아니라 행위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반철학적 행위의 구둣점.
행위란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드러나는 가치를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행위란 글쓰기에 관해 던져 버리는 것.
행위는 말해진것 너머에 있는 의미를 침묵 속에
폐기한다는 점.
삶을 의미하는 주체에 관련되어야 한다.
행위는 구원의 선행성을 본질로 삼는다.
행위를 통해 정화된 주체가 지탱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이다.
결단.
집단성.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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