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칸트 지음 / 울산대학교출판부(UUP)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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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인간학. 새로운 관점을 이뤘다는데 잘모르겠다.
3대 비판서에 쓰여진 반복되는 내용 중에 좀 더 세분화되고 심도있는 부분도 있지만 익숙해선지 전체적으로 집중해서 읽혀지지 않는 책이다. 설렁설렁보면 자꾸 잊게되어서 주의를 기울이자니 흔히 보는 성격론에 대한 책과 비슷해 읽는 재미가 없다. 아니, 너무나 다양하게 구분해 놓아서 집중하지 못했기에 그런건지 모른다.
이젠 푸코가 박사논문으로 썼다는 이 책의 서설에 관심을 가져본다.
추린 내용을 아래에 붙인다.
◇인식능력에 관하여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는 것은 지각으로부터 감각대상을 인식, 즉 경험에까지 확장을 말한다. 자기를 의식하며 에고이즘은 시작된다. 논리적,심미적,실천적으로 나뉜다.
자신을 표상하는 것은 대상의 규정으로부터 추상하는 것이다.
자기의 표상을 의식하는 것은 사변적 관점에서는 아프리오리한 학문적 원리가 필요하지만 경험적 실천적 관점에서는 판단만이 있다.
표상에 관해 주관이 폭발되는 경우, 감성적 인식능력이다. 이런 직관이 반성을 통해서,그리고 그 반성으로부터 생겨나는 오성 개념을 통해서 내적 경험이 되며 결국 진리가 된다. 진실되지 않은 덕이 있는 모습이 점차 그런 종류의 현실적인 마음으로 깨달아지므로 유용하지만 선이나 자애는 그 가상이 기만하는 것이라 없어져야한다.
상상력은 경험에
선행하는 생산적(창조적)이든지 경험적 직관을 떠올리는 재생적(회상적)이다.
감상적 창작 능력은 공간에서의 직관의 형성적 능력, 시간에서의 직관의 연상적 능력, 표상들 상호 간의 공동 기원으로부터 나오는 친화력이 있다.
예견된 것의 표상을 과거의 것에 대한 표상과 결합하는 수단으로서, 현재 있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은 표시 능력이다.
사물의 형태(직관)는 그것이 개념에 의한 표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그 역할을 하는 한에서는 상징이다. 개념을 위한 상징 그리고 표현의 기호화는 오성에 이르는 수단이다.
올바른 오성은 대상의 인식에 대한 개념의 적합성이고 오성에 제공된 규칙을 판단하는 판단력은 기술적 심미적 실천적 판단력을 위한 능력이며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필연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이성이 있다.
지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 스스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항상 자기 자신과 일치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서의 가장 중대한 혁명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책임인 미성숙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이다.
◇쾌와 불쾌의 감정
인생은 결국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당신이 행했던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당신은 그만큼 길게 살았다˝.
취미는 나 자신에서의 감관의 감각에 따르는 것만은 아니고,그것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규칙에 따라서 선택하는 감성적 판정 능력이라 간주된다.
◇욕구 능력에 관하여
욕망은 그것의 결과로서의 어떤 미래의 것에 대한 표상에 의해서 주관의 힘이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다.
욕구는 올바른 도덕적 가치를 가지면 삶을 흥미롭게 누릴 수 있지만 어긋난 욕정은 스스로를 피폐하게 할뿐이다.
◇인간학적 성격론
개인의 성격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성적인 인간에 대해서 구할 수 있는 최소한임과 동시에 내적 가치의 최대한이다. 그러므로 원칙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은 가장 보통의 인간 이성에서도 가능한 것이며, 그렇게 됨으로써 최대의 재능을 가진 사람보다도 존엄에 관해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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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박영진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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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서 밝힌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개요의 일부였던거 같다. 언어만 읽어도 비트겐슈타인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대략 알겠다.
이 책을 읽고 감상문이라도 써볼려고 요약한 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절마다 그때그때 요약한거라 앞절과 연결이 안되니 써놓고도 잘 이해가 안된다. 아직 머리속에 담아둔게 있으니 그나마 이해 한다쳐도 다시 읽을 때는 더욱 어렵겠다 싶다. 하기야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이런 의미구나˝ 하고 이해하면 되는거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 하지않나.
각설하고, 철학이 진리로서 굳어진 부분을 들춰내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반철학이 갖는 의미를 새기고 이에 더욱 더 정진하는 철학의 참모습을 기대하기 위해서 철학적 사상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흥미있게 볼 책이라 생각한다.
기를 쓰며 읽어 겨우 비트겐슈타인 바디우가 무엇을 말할려는지 조금은 알겠는데..
그저 조금 알기만 한다는게 답답하네. 좀더 나가보고 싶은데...
◇반철학은
1.철학의 진술들에 대한 언어적 논리적 계보학적 비판, 진리라는 범주의 폐기, 그리고 스스로를 이론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철학적 야망의 해체.
2.철학이 최종적으로 담론적 외양으로, 명제들로, 거짓된 이론적 외양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인식.
3.철학적 행위에 맞서는 철저한 새로움을 지닌 다른 행위의 호소.
이 세가지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 발견 하는 것은 철학 저술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명제와 질문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다. 사유란 의미가 부여된 명제이다. 무의미란 의미의 결여이다.그러므로 철학은 비사유이다. 철학은 명제와 의미의 권위에서 벗어나며 동시에 행위의 형태에 전념한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제시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표시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기독교가 명명하는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명료화이며 세계의 의미이기도 하다. 초월적이고 한계를 드러나기에 이 무의미가 갖는 세계의 한계에 우리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기를 희망한다.
반철학의 요구는 반철학자를 항상 실존적인 단독성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그 행위는 오로지 행위 자체와 효과들 만을 가치의 증거로 삼는다.
니체는 행위의 가치가 선과 악 너머에 위치함을 주장하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을 통해서라 할지라도 가치들의 결합을 통해 규범화된 채로 남는다.
◇존재의 가장 참된 것은 세계와 언어의 존재론 즉 존재에 대한 논제들과 명제에 관한 논제들 사이의 반영적 관계에 사로 잡히지 않는 사물이 아닌 어떤 것이 이 관계의 잔여로 나타나는 곳이다.
◇실체는˝거기 있음˝이고 실재적 실존과 우유적 실존을 구별해야 한다. 실체는 잔여에 접근하고 사유 가능한 것은 오로지 여러 대상들 사이의 연관 `사태` 를 지칭한다. 즉 존재의 영원한 형식은 동등하게 사유 불가능한 대상들의 우연적인 병치일 뿐이다.
핵심적인 논점은 사유될 수도 기술될 수도 없는 대상들이 그림으로, 혹은 그림과 동일한 것에 해당하는 명제로 재현된다.
사유 불가능한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명명을 통해 이루어진다. 명명은 대상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대상들의 연관에 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대상들의 연관 `사태` 는 명제에 의해 재현되는데 이 명제를 원자(요소)명제라고 부른다.
◇명제가 원자적인 것은 독립적이고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는 존재의 범주에 속하며 가능한 것의 실체적 가치 안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의 그림을 그린다. 사유는 의미가 부여된 명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은 사유는 대상이 되는 상황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이 가능성은 명제가 기술하는 사태의 형식 아래 의미의 존재에 대한 토대를 구성한다.
가능한 것의 특수 사례가 현실이다. 현실은 `일어난다` 는 것 뿐이고 이 실존하는 세계는 세계의 실체적 토대와 우연적인 관계를 유지한다.세계의 상태를 기술하는 한에서 명제는 참이다.
◇반철학은 사유와 비사유의 경계에서 확장된 비사유를 정의하는 것인데 비사유는 명명, 불가능한 것, 무의미를 시와 수학 철학자체와 부딪친다. 여기서 의미는 두 체제를 의미한다. 세계 내적인 의미는 우연적이며 명제가 가진 의미는 사태를 기술할 때만 가치를 인정하기에 의미 자체가 없는 것이고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바깥에 있어 신이라는 궁극적인 이름을 가진 가치 의미가 있다.
실존이라는 면에서는 의미가 결여된 명제라 하여도 `일어나고` 세계 안에 있다는 점이다.
˝이 명제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라는 명제를 언어적 그림으로 삼는 대상들의 연관의 실체적 가능성은 대상들의 영속적 존재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복합명제는 원자명제의 군집이며,원자명제의 참 또는 거짓을 인식할 때, 복합명제의 값에 관한 결과를 도출하여, 이에 따라 원자명제의˝군집˝이 실제로 세계의 부분적 기술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모든 명제는 원자명제에 관한 진리 연산의 결과이다. 이것이 참된 복합명제는 과학적인 이유이다. 과학적 명제는 세계에 대한 부분적 기술인데,그러한 명제는 오로지 원자명제들을 근거로 함축되는 사태의 실존 혹은 비실존에 대한 확인으로부터 진리가 된다.
세계의 현실성과 독립적으로 참이되는 복합명제가 실존한다면 필연적으로 참이 되는 명제가 되고 이를 동어반복이라 명한다.
이 명제들이 과학적 언표의 진리가 갖는 우연성으로부터 필연성의 질서를 안정시키고 이 질서가 논리학이다.
어떤 사태의 실체를 그 사태의 `존재` 라 칭하고 그걸 기술함으로써 원자명제는 의미를 갖고 어떤 사태가 세계 내에 있다는 사실을 그 상태의 `실존` 이라고 칭하고 정당하게 긍정함으로써 명제는 참이 된다.
동어반복은 존재도 실존의 확인도 필요없고 모순도 갖지 않기에 세계와의 관계 속에 그 형식을 규정한다.
◇동어반복적인 진리의 의문
논리적명제의 결여, 수학적 명제는 실재를 말하는 명제의 실존, 그 관계는.
세계의 우연성이 자체의 실체적 존재와 현세성의 존재론적 규정의 관계.
실체적 존재의 관점의 보여주기와 논리학과 반철학적 행위 사이의 특징.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은 사유가 아니라 계산이다 라는 선언에 대한 사유로서의 수학의 핵심은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에 봉합하는 문제,무한의 문제,다수성의 구성 문제, 유형화의 문제이다.
◇논리학은 세계의 골조라고 규정하고 주체는 세계의 한계라고 부른다. 주체는 실존하는 것 전체를 포괄하는 ˝존재˝의 이름이다.
우리는 논리학-세계형식에 대한 규정인-과 주체-세계의 단일성에 대한 이름-의 상호 연결을 기대한다.주체의 존재는 실존인데 세계 바깥에 위치하기에 실존하지 않게되니 주체적 명제는 없다. 사유가 아니라 행위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반철학적 행위의 구둣점.
행위란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드러나는 가치를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행위란 글쓰기에 관해 던져 버리는 것.
행위는 말해진것 너머에 있는 의미를 침묵 속에
폐기한다는 점.
삶을 의미하는 주체에 관련되어야 한다.
행위는 구원의 선행성을 본질로 삼는다.
행위를 통해 정화된 주체가 지탱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이다.
결단.
집단성.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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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 오성 정념 도덕 본성론 동서문화사 월드북 85
데이비드 흄 지음, 김성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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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이성에 따른 관념론이나 경험론을 구분하자는 생각으로 이 책을 펼쳤지만 오성과 정념 도덕 세편으로 나눠서 인간 본성의 원리를 분석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물론 오성에서는 인상과 관념 인과성 필연적 관계 맺음과 결과를 이어주는 원인을 활동의 원리로 추론하는데, 대상이 존재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2편의 정념이나 3편의 도덕도 정신의 지각을 그 원리나 작용으로 분석했으나 이성으로 추론 하는 것이 아닌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내용이 너무 빨리 잊혀지기에 기억을 좀더 길게 가져보려고 절마다 요약해서 메모해둔 것을 아래에 붙인다.
한 북플님이 리뷰를 꼭 써보라고 하면서 이유를
조목조목 말씀하셔서 절을 마칠 때는 그 절을 요약해보니 글의 흐름을 맞춰 가듯 읽게 된다.
절이 세분화되어서 읽는데 조금은 힘들다.
긴 호흡으로 쭈욱 읽어야 더 재미있는데..

오성.
인상이 관념보다 앞선다.
추상관념 일반관념 개별관념
모든 일반 관념은 어떤 명사에 뒤따른 개별관념일 뿐이다는 버클리의 주장에 동의.
시공관념의 분할, 끝없는 분할 가능성의 체계에 따르면 각 부분들을 모두 재현하는 별개의 관념은 절대로 이룰 수 없으며, 나눌 수 없는 부분 즉 원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체계에 따르면 이 부분들이 막대하고 끝이 없으므로 이러한 관념을 이루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시각과 촉각으로 공간관념을 정신으로 전해주고있는데 대상이 존재해야 연장관념을 가질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 나뉘어진 많은 부분들은 마침내 쪼갤 수 없게된다.쪼갤 수 없다는 것은 무이므로
실재적이고 존재하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정신에 의해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시공관념은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관념이다.
진공관념의 존재는 경험적인 인상과 관념으로 대신한다.
지식과 개연성
철학적 관계에서 인과는 본질적으로 인접과 계기의 관계이다.
존재하는 것은 원인을 가져야하고 관념은 독립관념으로 분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관념으로 부터의 추론은 분리하지 못하고 원인의 필연성을 추론하지 못하니 대상이 존재해야하고 학문적 추론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인상에서 관념으로 추론하는것은 경험의 도움을 받지만 다른 경험의 실례로 결과를 연관짓는 것은 이성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 안에서 이 대상들의 관념들을 연합하고 합치게 된다. 이 합일 원리는 유사 인접 인과 이세가지 원리뿐이다.
신념은 현재 인상과의 관계에 따라 생겨난 생동적 관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은
관념을 나타내는 방식에 생각을 바꾸고 힘과 활기를 보탠다는 말이다.
신념이 정념에 가까운 생득성을 획득하면 진리와 허구를 구분하지 못한다.
우연의 가망성과 개연성은 혼합된 우연으로 의해 근원적 충격과 원인에서 발생한 사유의 생동성까지도 조각조각 나뉘어 분열된다.
필연적으로 연관된다는 것은 대상이 어떻게 원인과 결과에 능력과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인데 그것은 사례의 인접과 계기의 중복이다. 그 관찰은 인상을 산출하고 관념을 집합시킨다 그리고 정신이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관념을 옮기며 형성한다.
회의적 철학 체계와 그 밖의 철학 체계.
이성은 다른 원인의 개입으로 완전한 지식이 개연성으로 바뀌고 때론 증가한다. 생생한 표상작용인 신념이 기초하지 않는 추론은 회의론에 의해 이성의 힘은 점차 약해진다.
대상에 대한 지각과 정신은 독립적이냐 종속적이냐.
상상력을 기반으로 존재의 지속을 갖게되고 철학적이기 보단 통속적으로 존재체계를 밝힌다.
대상은 인상을 갖고 관념이 생기며 정신이 사유하는 원인과 결론은 항상적 결부를 하는데
물질은 스스로 운동을 전달하거나 사유를 산출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연관을 절대적 존재자로 결론 짓지만 위의 이유로 영혼의 실체라는 물음은 알 수없다.
인격의 동일성은 유사와 인과라는 원리로 지각을 동일하게 유지하는데 그 원천에는 과거 기억이 있어야만 한다.
정념
긍지와 소심
정신의 모든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눈다.
인상은 정념의 감각인데 이건 사유가 있던 없던 각인이다. 좋기도 나쁘기도한.
긍지와 소심은 말 그대로인데 항상 그 대상은 자아이다. 자아에게 의식되는 정념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 원인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과제다.
긍지와 소심은 자아와 대상과의 관계속에서 희소성을 갖고 식별하기 쉬우며 비교적인 상황에서 생기는 본성을 가졌다.
부의 참된 본질은 삶의 쾌락과 편의성을 창출하는 능력에 있다. 그런데 이 능력의 실제 본질은 그 힘이 실현될 수 있는 개연성에 있다.
사랑과 미움
부와 권력은 소유한 사물과 소유물을 공유하는 기대와 공감으로 부러움을 가진다.거기에 그 부러움에 소유자도 2차적 만족을 얻는다.
모든 종류의 관념은 거의 어떤 정서를 수반한다.
의지와 직접 정념
우리는 절대 물체의 상호 영향이 의존하는 원리를 알아낼 만큼 깊게 물체의 본질이나 구성을 통찰할 수 없다.숙지하는 것은 물체의 항상적 합일이고 정신의 추정이다.
대상의 존재에서 다른 대상의 존재를 이성은 추정할 수 없다.오직 그 대상들을 경험하고 관찰할 뿐이다.
시간과 공간에서는 정념이 상상력에 의해서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그 단절의 결과는 공간에서 영향력이 약하다.또한 시간상으로 동일한 거리는 과거보다 미래에 미치는 영향력이 우세하다.
도덕
일반적인 덕과 부덕
정신이 지각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정신에 나타날 수 없다. 즉 관념은 도덕성의 문제를 구별하고 이성만으로 덕과 부덕을 나눌 수 있는가인데 도덕성은 우리 정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므로 이성은 도덕을 이끌지 못한다.
덕과 부덕이 유발하는 인상이나 소감을 통해서 그 차이를 정할 수 있다.느껴진다는 것이다.
정의와 불의
정의는 인위적인 덕이다. 그 행동을 낳는 동기를 존중한다. 정직한 행동의 이유 또는 동기가 공공의 이익에 대한 존중이며 그것은 교육및 사람들의 묵계에서 발생한다.
인간의 한정된 관용과 궁색한 처지는 정의라는 덕이 공공의 이익과 모든 개인의 이익에 필요하도록 만듦으로써 이 덕을 유발한다.
공감을 통해 타인의 거북함을 느끼는 것이 부덕이다.
정신작용은 우리가 수행하기로 약속한 행동에 대한 의욕이 아니고 약속에서 발생하는 책임에 대한 의욕이다.
의무감 이외에 약속을 수행하도록 우리를 이끌 도덕적 동기는 없다. 사회의 필요와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약속을 정부의 근원적 허가이자 복종에 대한 최초 책임의 원천으로 간주해야한다.즉 충성의 의무는 처음에는 약속에 대한 책임과 융합되어 일정 기간 약속에 대한 책임때문에 유지되지만,곧 뿌리를 내려 모든 계약에서 독립적인 고유의 책임과 권위를 갖는다.
약속을 수행함으로써 얻는 이익은 일반적이고, 공공연하며, 삶에서 극히 중요하다.
사회가 안정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신민은 특정 인물에 속박되고 충성한다.
정부내지 주권자가 권리를 유지하고 주권을 양도해도 인민들은 주권자를 선출할 수 있는 자유마저 뺏기지 않을려고 자신들의 자유를 엄격히 경계한다.
그 밖의 덕과 부덕
정의는 인류의 선과 복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 덕이며, 사실 정의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한 인위적인 창안에 불과하다.
공감은 인간 본성의 가장 강력한 원리이고, 또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취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모든 인위적 덕에 우리의 도덕적 소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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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대우고전총서 1
앙리 베르그손 지음, 최화 옮김 / 아카넷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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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 직접 주어진것들에 관한 시론
개념어를 이해하고 철학의 요지가되는 문장을
익히고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어가는 문맥를 이해하려 애썼다.
이책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골격을 세우고 감각의
크기 양과 질 지속 비롯되는 운동 접촉되는 사물에서 관념으로 이끄는 경험적인 사고를 결론짓는다.
존재도 인식도 아니고 단지 의식의 상태를 확대했다기보다는 눈을 뜨고 봐야만 볼 수 있는것처럼 세밀하게 추론할 수 있을까.
느낌으론 철학적 깊이를 심리학에 줘버렸다고본다.
전체를 안보고도 한곳에서 이렇게 즐거울 수 있나 싶다.
보통은 완독하고 감상문을 쓰는데 읽어가면서 내용을 요약하다보니 밑줄긋던 부분이 정작요약을 할때는 흐름을 이끄는 부분이 아닌 철학논지여서 접합점은 달리 봐야 했다.
읽다가 중간중간 마구 요약한 부분을 붙인다

[감각 감정 열정 노력과 같은 의식의 상태의 크기에 대한 것과 측정할 수 없는 기저의 느낌에서 오는 내적상태의 관념.
이것이 펼쳐지는 공간은 분리되거나 지속적인가.
의식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분리해서 수의 단일성과 다수성은 불연속 불가분으로 전자를 내포하면 후자는 하나의 질료로 연장해서 객관화된 다수성을 만든다.
수는 공간을 내포한다. 공간은 형성중인 수와 형성된 수로 즉 주관과 객관으로 나눠진다.
또 수의 개념은 물질적 대상과 감각의 상징적형상화의 다수성이다.
이러한 수의 관념은 질로 나누어져서 세어지는 시간과 제공되는 장소라는 공간의 관계를 유지하게된다.
공간의 개념은 능동적인 정신의 행위로 실재하는 객관적인 부분이다.
공간을 지각하는 추상적인 능력은 동질적 장소임을 내포하고 있다. 이때 동질적인 것을 채우는 것이 공존이냐 계기냐 이다. 시간을 주어진다는 것은 연장을 말하고 지속의 계기를 이끄는데 이것은 부분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고 각각이 상호침투 연대 내적인 유기적 결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공간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과거 현재가 병치되면서 공간과 지속은 연결된다.
지속은 공간에서 운동으로 개념지을 수 있는데 이 운동은 의식이 변하게 되어도 공간 안에서의 전개일 뿐이므로 계기는 없다고 본다.
병치해서 구별된 사물들은 다수성을 이루며
그 단위들이 동일하다는 가정에 동질적 공간에 존재하고 서로 상호침투하며 질적으로 전진한다. 이런 질적인 전개는 지속되는 시간속에 관념이라는 상을 갖게 되고 그것은 외부와의 접촉이고 그 외재성은 현상을 표상하게되며 의식의 깊은 곳까지 퍼져 들어간다.
지속은 의식의 사실들을 질적다수성에서 생각하느냐 투사된 시간속에서 생각하느냐
두가지로 구별된다.
지각되고 정신속에서 그려지는 대상은 경향성을 띠고 응고된다.결국 감각의 불변성을 믿게되고 완성되서 관념은 말라버린다.
관념들 사이는 내밀하지 못하게 분류되나 자아와 사물에 유기적이며 살아있는 지성은
배제할 것같은 관념을 보개고 융합해서 서로 녹아드는 자아를 형성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아이다.
이제 의식의 활동의 자유는 물리적 결정론과 심리적 결정론으로 구분되어 행동하는데 이것은 응고된 사고가 껍질을 벗지못하고 자동기계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하지만 자유롭다 믿는다.
또한 선택의 자유론와 결정론은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필연성을 갖는다는것. 미래의 예견은 과거의 행적의 결과이고 시간의 단축으로 예견하는것은 불변의 지속을 근거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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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논리, 진리
알프레드 J. 에이어 지음, 송하석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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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이 책을 썼고 나이가 들어 문제점이 많다고 했다.
만족스럽지 않았는데 철학사적 의미를 인정받는다면 한사람의 평생에 걸친 사고의 변화나 철학자들의 많은 주장은 어느 것인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인식하고 존재를 깨우치는것은 각자의 경향이 아닌가.
에이어는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하고 분석판단은 사실에 대한 결여이고 동어반복일 뿐이라고 했다.
진리는 경험적 타당성을 결정하는 방식을 제시하면서 완성된다고 했다.
후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결국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칸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사상을 반복하고 있다지 아니한가! 칸트의 사고를 같이 논하는것은 여기서도 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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