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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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하이데거의 책을 읽지 않겠다는 것은 나에게 어불성설이다. 단지 읽어야 할 책을 어떻게 선택할까 생각하기 바빴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나치독일과의 관계가 있어서 조금은 관심 밖에 있었다. 그러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읽게되니 하이데거에 대한 관심도 생겼고,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은 무지 난해하다는 책소개까지 보게 된다.이해력은 부족하고 그러기에 자격지심까지 있는데 읽으려니 걱정이 앞섰다.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여러번 반복해서 읽었지만 그래도 미흡하면 다른 사람의 요약본이나 해설을 참고 했다. 어느 북플님이 본인은 그 어떤 책의 입문서나 해설을 보지 않고 책을 읽는다고 하시더라. 공감을 하기에 곡해한다 싶어도 혼자 읽어 내려 간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러기엔 어려운 부분이 도통 이해가 안갔다. 특히 시간, 시간성, 시간화를 접하게 되는 2편은 일정부분이 더욱 그랬다.
주욱 읽어가면서 나름 주제를 정리했다 싶다가도 개념이나 이해에 대한 혼란이 오면 제대로 읽곤 있는건지 의구심이 생겼다.
한달 반만에 겨우 끝냈다. 이해는 둘째치고..
내용 중에 있는 용어를 다시 찾아 볼 수 있도록 안내 페이지를 뒷부분에 정리해서 넣으면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겠다.
`존재`의 뿌리까지 샅샅이 파헤쳤다.
이 한줄로 서평을 대신한다.
◇존재와 시간
서론
존재의 물음에 대한 정리 작업
존재에 대한 관점의 방식에 대한 설명.
의미의 이해및 개념적 파악에 대한 설명.
범례적인 존재자의 올바른 선택을 위한 가능성의 준비.
존재자에게로의 참다운 접근방식의 산출.
제1부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 설명함
제1편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 지식
제1장
현존재를 예비적으로 분석해야하는 과제의 설명
9절 현존재분석론의 주제
현존재가 갖는 특징의 귀결은 그때마다 각기 그에게 가능한 존재(실존)와 각자성이다.이렇게 규정되는 현존재를 구성하는 일상성의 무차별성은 실존성의 선험적인 구조가 놓여있다. 이 구조가 실존성에서 규정되기에 존재물음 자체는 그 존재성격의 두 양태 즉 누구(실존)이거나 무엇(가장 넓은 의미의 눈앞에 있음)인 양태의 연관을 다루게된다.
10절 현존재분석론을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구별지어서 한정함.
실존론적 분석론은 역사적으로 코기토 숨에서 숨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제기한다.존재론적으로 함께 한다는 것은 삶이라는 하나의 존재양식에서 `삶`이라는 물음의 도상에 있어 행위를 이행함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나 단순히 눈앞에 있음도 아니고 존재론적 기초는 `거기에` 언제나 이미 있다는 점이다.
11절 실존론적 분석론과 원시적 현존재의 해석.
`자연적 세계개념` 획득의 어려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을 관철하는 데에는 자연적 세계개념의 이념을 정리작업하는 일이다. `세계` 자체가 현존재의 구성요소라면 현존채의 근본구조에 대한 통찰이 요구된다.
제2장
현존재의 근본구성틀로서의 세계-내-존재 일반
12절 안에-있음 그 자체에 방향을 잡아 세계-내-존재를 대강 그려봄
세계-내-존재가 의미하는 현상은 그 존재론적 구조를 탐구하고 세계성 이념을 규정해야 한다.둘째로 일상성속의 현존재의 존재성과 구조를 알아야한다. 그리고 이 현상에 대한 특징을 부여한다면 내-존재(안에 있음)는 세계-내-존재라는 본질적인 구성틀을 가지고 있는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형식적 실존론적 표현이다.
실존범주로서 세계 `곁에 있음`은 내-존재 `안에 있음` 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을 때 존재자는 결속될 수 있다.
현존재의 세계-내-존재는 -그때마다 그것으로 존재하는- 안에-있음의 방식이 배려함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다. `배려함`이라는 표현은 존재론적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
세계-내-존재의 현상이 현존재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보여지기`에 세계와 범례적으로 연관짓고 세계를 인식하면서 세계-내-존재의 양태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13절 어떤 한 기초지어진 양태에서의 안에-있음의 범례화. 세계인식
인식함은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의 한 존재양식이며 그것은 자신의 존재적인 기초를 이 존재구성틀에 가지고 있다.
인식함 자체는 선행적으로 일종의 이미-세계-곁에-있음안에 근거해서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을 바라보고 스스로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에 독자적으로 머무르는 양태에 이르게 된다.
제3장
세계의 세계성
14절 세계 일반의 세계성이라는 이념
세계-내-존재가 `세계`라는 구조계기의 관점에서 보여야 한다. 이때 세계 내부의 `존재자`에서 보이는 자연사물들은 그 존재가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존재적 묘사도, 그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해석도 그 자체로는 `세계`의 현상을 적중시키지 못한다.
`세계성`은 일종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세계-내-존재의 한 구성적 계기의 구조를 말한다.
특정한 세계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의 존재구조에 대한 범주적 총괄개념으로서의 `자연`은 세계성을 이해할 수 없고 지금까지의 존재론에 대한 일별에서 존재론적인 분석을 고려하면 세계도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으로서의 일상성의 지평으로 주제를 가져야 한다.
일상적인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세계는
주위세계이다.주위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적인 해석을 통해 주위세계성을 만나게 된다.
가. 주위세계성 및 세계성 자체의 분석
15절 주위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의 존재.
가까이 만나게 되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제시에서 이 일상적인 세계-내-존재를 우리는 세계 안에서의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와의 왕래라고 이름한다. 존재를 설명하는 주제의 존재자로서 구조를 규정하면, 사물이라고 성격부여를 하는 존재자는 배려하면서 무엇을 하기위한 도구로서 실천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도구가 자체에서 스스로 내보이는 존재양식을 우리는 손안에 있음이라고 부른다. 도구에 맞춰진 왕래는 `하기 위한`의 다양성에 예속되어 있다. 이 물품은 손안에 있는 존재만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양식의 존재자도 만나게 된다. 각기 그때마다 배려된 물품은 공공의 세계에도 있다. 손안에 있음의 범주적 규정이 `세계` 와 같은 개념으로 이끄는가?
16절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서 알려지는 주위세계의 세계적합성
손안에 있는 것의 배려된 세계의 왕래에서 손안에 없는 것 즉 결여는 손안에 있는 것의 존재의 긍정적인 현상적 성격을 의미한다.
17절 지시와 기호
손안의 것의 존재구조를 해석하면서 주위세계적으로 배려하는 특정한 방식으로 현상지어진 것을 지시라고 한다.이런 지시들을 발견하는 도구를 기호에서 발견한다. `하기위한` 에 터하고 있는 가르킴은 손안의 것의 도구 성격으로서 지시의 연관안에 속한다.
18절 사용사태와 유의미성. 세계의 세계성
어떻게 손안의 것이 세계를 만나는가?
하기위한, 그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등의 연관으로 지시되는 그 곳이 세계라는 현상이다.그리고 현존재가 지시하는 그것의 구조가 세계의 세계성은 구성하는 그것이다.
나.데카르트의 세계해석에 대비하여 세계성의 분석을 구별 부각시킴
19절 연장된 사물로서의 `세계` 에 대한 규정
연장된 물체적인 사물의 본래적인 존재가 세계이다.
20절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 규정의 기초
사람들은 세계를 규정하는 실체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여겼다. 데카르트 역시 이 물음을 회피하고 실체를 충족시키는 존재들의 속성에 의해 표현했다.
21절 데카르트의 `세계` 존재론에 대한 해석학적 토의
데카르트는 연장성으로 파악하려고 한 존재자는 세계 자체와 동일시하게 되고 동시에 `현존재`의 존재를 연장된 사물의 존재와 동일한 방식으로 실체로 파악한다.비판도 없이 전통에 존재론적으로 방향을 잡아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론적인 문제들을 파헤치지 못했지만 연장성을 `세계`의 근본규정성으로 정립하는 정당성을 가진다.
다. 주위세계의 주위차원과 현존재의 공간성
22절 세계내부적인 손안의 것의 공간성
세계내부적인 손안의 것이 공간내재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일상적인 왕래에서 만나는 손안의 것이 가까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주위를 배려하는 도구로서 왕래하는 공간은 눈앞에 있는 사물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개별의 자리들에 있는 것이다.
23절 세계-내-존재의 공간성
현존재는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와 배려하며 친숙하게 왕래한다는 의미로 세계 `안에`존재한다. 이 안에-있음의 공간성은 거리없앰과 방향잡음이다. 현존재의 일상성의 둘러보는 거리없앰은 `참된 세계`의 자체 존재를, 즉 현존재가 실존하면서 각기 그때마다 이미 그 곁에 있는 그 존재자의 자체 존재를 발견한다.여기서 거리는 양적인 확장의 지속이다. 방향잡음은 거리를 없애는 것이 가까워지는 그 방면으로의 방향이다.여기서 유의할 것은 거리없앰에 속하는 방향잡음이 세계-내-존재에 의해 기초지어진다.칸트는 모든 방향설정은 `주관적인` 선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24절 현존재의 공간성과 공간
현존재안에 선행적으로 발견된 공간은 캐물어 들어가서 공간의 주제적 발견과 현상적 토대를 존재론적으로 확정해야한다.공간이 존재양식을 가지지 않았기에 공간의 존재의 물음은 존재개념에서 해방시켜 현상 자체에 대한 관점에서 그리고 다양한 현상적 공간성을 존재 일반의 가능성을 해명하는 방향으로 데려오느냐에 달려 있다. 단 공간은 세계로 소급되어서야 비로소 개념파악될 수 있다.
제4장 더불어 있음과 자기 자신으로 있음으로서의 세계-내-존재.`그들`
25절 현존재는 누구인가라는 실존론적인 물음의 단초
현존재는 그때마다 각기 나 자신인 그런 존재자이며,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 존재자 자체의 존재양식이 갖는 문제틀은 현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과 관련되어 전도 되지말아야한다.`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현존재의 `본질`이 그의 실존에 근거하고 있다.
26절 타인들의 공동현존재와 일상적인 더불어 있음
현존재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그 존재양식의 분석에서 알 수 있다. 세계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로서의 타인은 현존재와 세계`안에` 같이 존재한다. `여기에` `저기에` `거기에`는 현존재의 근원적인 공간성이 지니는 성격이다. 일차적으로 실존론적이다. 타인은 공동현존재로 `함께있음` 속성을 가지고 더불어 있음 안에서 결여될 수 있다.`염려`, `심려`, `배려`는 타인에 대한 현존재의 존재양태이고 존재이유이다.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세계이다.
27절 일상적인 자기 자신으로 있음과 `그들`
현존재가 타인과의 거리감이 없어질수록 지배를 받으며 `타인들의` 속으로 해체된다.
사람들이 타인들에 속한 본질적인 귀속성을 은폐하기 위해서 `남들`이 일상적인 함께있음에 `거기에 있는` 그들이다. `그들`이 일상성의 존재양식을 지정한 고유의 존재방식은 `평균성`이다.본질적인 경향으로 평균화라 칭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공공성`으로 알고 있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다. 더불어 있음으로서의 현존재는 실재적이고 `그들`역시 일상성의 `가장 실재적인 주체`로 드러난다.
다시금 자신을 현존재적으로 다양하게 구체화시키면 일상적 현존재의 자기는 그들속의 자기이다. 눈앞의 것이 아닌 본래적 자기 자신의 존재는 본질적인 실존범주의 하나로서의 `그들`의 실존적인 변양태의 하나이다.
제5장 안에-있음 그 자체
28절 안에-있음에 대한 주제적 분석이 가지는 과제
현존재의 존재의 단일적인 근원적 구조를 현상적으로 부각시켜 이 구조로 부터 현존재의 `존재하는` 방식들을 존재론적으로 규정한다.
안에-있음을 현상적으로 성격규정하면 존재자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양식으로서의 안에-있음이다.이 현상이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는 존재자는 그 자체가 각기 자신의 `거기에`로서 존재한다.
`거기에`를 존재하는 두 가지의 동일근원적인 구성방식들을 우리는 처해있음과 이해에서 본다.
가. `거기에`의 실존론적 구성
29절 처해 있음으로서의 거기에- 있음
존재론적으로 처해 있음은 일상적인 것인 기분잡혀 있음이다. 기분잡혀 있음 속에서 현존재는 그 존재 사실이 `내던져 있음`속에 처해 있는 방식으로 그것의 `거기에`로서 존재한다.처해 있음의 두 본질규정 -내던져 있음을 열어밝힘과 그때마다 전체 세계-내-존재를 열어밝힘 외에 세번째 세계의 세계성을 이해하는데 기여한다.
30절 처해 있음의 한 양태로서의 공포
공포의 현상은 대상,두려워함,이유의 세가지 관점에서 고찰한다. 대상 즉 `두려운 것`은 손안의 것,눈앞의 것,공동현존재의 존재양식을 가진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어떤 것이다. 두려움 자체는 성격규정된 위협적인 것이 자신에게 닥치도록 놔두는 자유롭게 내줌이다.
이유는 두려워하는 존재자 자체 즉 현존재이다.
이러한 `두려움의 경향`은 현존재 자체의 본질적인 처해 있음의 실존론적 가능성으로 이해해야한다.
31절 이해로서의 거기에-있음
이해는 실존범주로서 현존재의 존재의 근본양태로 개념파악해야 된다. 이해는 현존재 자체의 고유한 존재가능이라는 실존론적 존재인데 그것도 이 존재가 현존재 자체 안에서 그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는지를
열어밝히는식으로 그렇다.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를 그의 `그때문에`에로 기획투사한다.기획투사는 기획투사함에서 자신을 위하여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앞에 던지며 가능성으로 존재하도록 해준다.이해는 기획투사함으로서, 그 안에서 현존재가 가능성으로서의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다. 이해는 자신의 기획투사 성격에서 우리가 현존재의 시야라고 이름하는 그것을 실존론적으로 만든다. 근본방식은 배려의 둘러봄,심려의 뒤돌봄으로서 현존재가 그때마다 존재하듯이 존재하는 바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시야인 것이다.이 실존에 관계되는 시야를 투명성이라고 이름한다. 존재자에 이르는 그리고 존재에 이르는 접근양식으로서 `봄`에 방향을 잡았다.즉 현상학적인 `본질직관`도 실존론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32절 이해와 해석
현존재는 이해로서 자신의 존재를 가능성들에로 기획투사한다.이해의 이런 형성을 해석이라고 한다. 해석은 이해에서 기획투사된 가능성을 정리작업함이다.해석의 현상을 세계의 이해에서 찾는다.손안의 것이 주변을 돌아봄으로 두드러지게 이해된 것은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라는 구조를 가진다.
`으로서`가 이해된 것의 명시성을 형성한다.
손안의 것은 이미 사용사태전체성에서부터 이해되고 있다.그 사용사태전체성은 해석의 본질적인 기초이다.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해석함은 앞서 가짐,앞서 봄,앞서 잡음에 의해 기초를 부여받고 있다.세계내부적인 존재자가 현존재의 존재를 만난다는 의미는 앞서 가짐,앞서 봄,앞서 잡음에 의해서 구조지어진 기획투사의 그리로(의미지평)이며 거기에서부터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게 된다.의미라는 개념은 실존범주이고 현존재만이 의미를 부여한다.이해는 `거기에`의 열어밝혀져 있음으로서 언제나 세계-내-존재 전체에 해당되고 실존과 함께 이해되고 있다.
33절 해석의 파생양태인 발언
발언이 이해에 근거하고 있고 해석의 파생된 이행형태의 하나를 나타내고 있으며 하나의 의미를 띠고 있다. 발언은 함께 나누며 (전달하며) 규정하는 제시이다.발언은
필연적으로 해석 일반과 마찬가지로 앞서 가짐,앞서 봄,앞서 잡음에 실존론적 기초를 두고 있다. 발언이 어느 정도까지 해석의 파생적 양태가 되는가는 눈앞의 것을 그것이라고 규정하는 속성과 같이 둘러보며 이해하는 해석의 근본적인`으로서`를 눈앞에 있음을 규정하는 서술적 `으로서` 로 떠밀려난다.
34절 거기에-있음과 말. 언어
`거기에`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기초적 실존범주는 처해 있음과 이해이다. 발언은 이해에 근거하고 있고 뜻을 함께 나눔으로 설명함으로써 말함과 이야기함이라는 개념으로 온다. 비로서 언어가 주제가 되고 있는 사실로써 실존론적 구성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언어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는 말이다.
말은 세계-내-존재의 처해 있는 이해가능성으로서 듣고,침묵하고, 함께 나눔으로 의미부여하고 현존재의 실존을 구성하고 있다.
나. `거기에` 의 일상적 존재와 현존재의 빠져 있음
`그들의` 존재양식의 일상성이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양식을 밝혀내고 근원적인 존재양식부터 내던져져있음을 구체화해야 한다.
35절 잡담
`잡담`은 일상적 현존재의 해석과 이해의 존재양식을 구성하고 있는 긍정적인 현상을 의미한다. 밖으로 말해지는 말은 이야기되고 있는 존재자에 대한 존재연관이 없기에 그저 퍼뜨려 말하고 뒤따라 말하는 잡담을 구성한다.
근원적으로 이해하려는 존재에 참여하지 않는 잡담은 평균적인 이해만 있어서 세계-내-존재에 이해를 닫아버린다.특징지은 방식으로 닫아 버리고 있는 잡담은 뿌리가 뽑힌 현존재 이해의 존재양식이다.실존론적으로 뿌리 가 뽑혀 있다.
이 뿌리뽑힘이 현존재의 `실재성`을 형성한다.
모든 진정한 이해,해석,함께 나눔,재발견,새로운 취득은 이러한 일상적 해석되어 있음 안에서 또 거기에서부터 그리고 그것에 대항해서 수행된다.
36절 호기심
봄은 모든 현존재적인 열어밝힘의 근본양식 즉 현존재가 행동관계를 가질 수 있는 존재자를 진정으로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로 파악
되었다. `보는것` 에 대해서 일상성이 있는 존재경향을 호기심이라 칭한다.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로서 호기심은 순전히 안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서 배려된 주위세계에 머물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만함이 본질성격의 기초이다. 보기위해 보고 뛰어 들기 위해 새로운 것을 찾는다.
37절 애매함
애매함은 현존재의 자기 자신에 존재에까지 퍼져있다. 현존재는 언제나 애매하게 `거기에` 존재한다. 서로 함께 있음의 공공의 열어밝혀져있음 안에,가장 요란한 잡담과 가장 솜씨 좋은 호기심이 `사업` 을 관장하고 있는 곳에, 일상적으로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곳인 거기에 일어난다.애매함은 이미 하나의 세계 안에 내던져져 있는 서로 함께 있음인 그런 서로 함께 있음 속에 들어 있다.
38절 빠져 있음과 내던져져 있음
빠져 있음은 현존재가 `세계` 곁에 존재함을 의미한다.빠져 있음에 대한 해석이 현존재의 비본래성을 정확히 규정하고 있다.비본래성은 탁월한 세계-내-존재를 형성하고 있다.
현존재의 근본 구성틀로서 세계-내-존재에 대해 언급할 때 구성틀의 존재양식을 현상적으로 이야기하면 빠져 있음, 내던져져 있음은 현존재의 실존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 증명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비록 비본래적인 양태에서이기는 해도 바로 세계-내-존재-가능인 것이다. 실존론적으로 본래적인 실존의 일상성의 변양된 장악일 따름이다.
제6장 현존재의 존재의 염려
39절 현존재의 구조 전체의 근원적인 전체성에 대한 물음
세계-내-존재는 하나의 근원적이며 전체적인 구조이다. 현존재의 일상성은 세계-내-존재로서 규정될 수 있다.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에는 존재이해가 속한다. 현존재를 자신 앞으로 데려오는 열어밝힘의 방식은 존재의 구조전체성을 밝게 드러내고 실존론적 분석론은 불안이란 현상을 밑바탕에 둔다.불안은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으로서 열어밝혀진 현존재와 더불어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전체성을 파악하는 현상적 토대를 제공한다.
40절 현존재의 한 탁월한 열어밝혀져 있음인 불안이라는 근본적 처해 있음
불안은 세계-내-존재 그 자체에 있을 때 나타난다. 현존재가 `그들`과 배려된`세계`에 빠져 있는 것을 우리는 그 자신 앞에서 `도피하는` 것이라고 이름했다.안정된 친숙함 속에서 머무룰 수있는 배려함에서 돌아옴은 현존재를 바로 극단적인 의미에서 세계로서의 그의 세계 앞으로 데려오며 그래서 현존재 자신을 세계-내-존재로서의 그 자신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41절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
현존재는 그의 존재에서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는 그런 존재자이다. `~~이 문제가 된다`는 이것은 고유한 존재가능으로서 존재론적으로 현존재가 그의 존재에서 이미 자기 자신을 앞질러 있음을 말한다. 자기를 -앞질러-있음은 완전히 파악하면 자기를-앞질러-이미-하나의-세계-안에-있음을 말한다. 이 안에는 배려된 세계내부적인 손안의 것 곁에 빠져 존재함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는 곁에-있음으로서 자기를-앞질러-이미-안에-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존재는 염려라는 의미를 충족시킨다. `염려`라는 표현은 하나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근본현상을 의미하지만 현존재의 존재를 염려로서 설명하는 것은 존재적-실존적으로 이미 열려밝혀져 있는 것을 실존론적으로 개념에로 우리에게 끌고 오는 것이다.
42절 현존재를 염려로 보는 실존론적 해석을 현존재의 존재론 이전의 자기해석에서부터 확증함
현존재의 존재론적 해석은 존재자를 `염려`라는 이미 밑바탕에 놓여 있는 존재 구성틀에서 염려라는 실존론적 개념으로 데려왔다.
43절 현존재, 세계성, 실재성
현존재의 분석론과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정리 작업이 실재성이라는 의미의 존재로 잡힌 일면적 방향설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ㄱ)`외부세계` 의 존재 및 그것의 증명가능성의 문제로서의 실재성
실재성의 의미를 묻게 되면 `외부세계 문제`에 대한 논의와 얽히게 되어 실재적인 것 자체가 그것의 존재와 관련하여 해명해야 한다.
칸트와 데카르트는 `실재성의 문제`의 해결 시도를 실재론과 관념론의 변종들의 시도를 매개로 형성하였다.그 문제는 존재론적 문제로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으로 소급 되어야 한다.
ㄴ)존재론적 문제로서의 실재성
실재성이 세계내부적으로 눈앞에 있는 존재자의 존재를 의미한다. 실재적인 것을 현상학적으로 성격 부여하면 충동과 의지에서 경험된다. 실재성이란 저항성이다.저항의 경험은 존재론적으로 오직 세계가 열어밝혀져 있음에 근거해서만 가능한다.저항은 `외부 세계`를 세계내부적인 존재로
성격규정한다.`세계성의 의식`도 자체세계-내-존재의 한 방식이다.
ㄷ)실재성과 염려
실재성은 실존론적으로 염려의 현상을 소급지시한다. 실재성이 실존론적으로 현존재의 존재안에 근거한다.현존재는 존재양식의 존재자가 있을 때에만, 존재이해는 존재자로서 가능하다.
44절 현존재, 열어밝혀져 있음, 진리
ㄱ)전통적 진리개념과 그 존재론적 기초
진리는 곧 인식과 대상과의 일치이다.일치는 연관이라는 형식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진리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에는 전체를 지탱하는 존재의 연관을 물어야 한다. 참된 것을 판단하는 대상과의 일치는 현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이다. 여기서 입증되는 것은 발언의 발견하면서-있음이다. 발언된 것이 스스로를 동일한 것으로 내보이는 데에서 확증된다.
발언의 참임은 발견하면서-있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ㄴ)진리의 근원적 현상과 전통적 진리개념의 파생성
발견함 자체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가 비로서 진리의 가장 근원적인 현상을 보여준다.
현존재가 열어밝혀져 있음은 본질적으로 `참` 이다.현존재는 `진리 안에`있다. 이 명제의 실존론적 의미는 현존재의 존재 구성틀에 열어밝혀져 있음, 내던져져 있음, 열어밝히면서 존재함, 그리고 빠져 있음에 현존재는 비진리 안에 있다. 현존재는 근원적으로 진리와 비진리 안에 있다.진리현상의 전통적 해석의 지평에서 통찰하는 일치는 열어밝혀져 있음 및 발견된 존재에 대해서 발견하며 존재함으로서의 진리는 세계내부적으로 눈앞에 있는 것들 사이의 일치로서의 진리가 된다. 이로써 전통적 진리개념의 존재론적 파생성이 제시된 셈이다.
ㄷ)진리의 존재양식과 진리의 전제
존재자의 발견되어 있음과 더불어 이 존재자는 바로 이전에 이미 있었던 그 존재자로서 자기를 내보인다. 그렇게 발견하는 것이 `진리`의 존재양식이다. 모든 진리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현존재적 존재양식에 따라서 현존재 의 존재와 상관적이다.`진리` 를 전제함은, 진리를 `그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그런 어떤 것으로 이해함을 의미한다.우리가 진리를 전제하는 이유는 `우리` 가 현존재의 존재양식으로 존재하면서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존재는 진리가 있는 한에서 있고 진리는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만 있다.`있다` 함은 존재의 의미와 존재이해 일반의 사정범위가 해명될 때 구체적으로 제시 될 수 있다.
제2편 현존재와 시간성
45절 현존재에 대한 예비 기초분석의 성과와 이 존재자에 대한 근원적인 실존론적 해석의 과제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해석이 존재론적 근본 물음의 정리작업을 위한 기초로서 근원적이어 야 한다면, 그것은 현존재의 존재를 앞서 먼저 그 가능한 본래성과 전체성에서 실존론적으로 밝혀놓아야 한다.현존재의 실존정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근거는 시간성이다. 이 시간성에서 부터 역사적현존재로서 역사학을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제1장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존재와 죽음을 향한 존재
46절 현존재의 전체존재를 존재론적으로 파악
하고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임
현존재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을 형섬하고 있는 염려는 그 존재론적 의미상 분명히 이 존재자의 가능한 전체존재와는 모순된다.
47절 타인의 죽음의 경험가능성과 전체 현존재
의 파악가능성
죽음은 상실로서 드러나지만 죽는 자가 `감수하는` 존재의 상실 그 자체에는 접근할 수 없다.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고작 ` 그 자리
에` 있을 뿐이다.사망으로서의 죽음은 이 현상을 순수 실존론적인 개념으로 데려오든가 아니면 그 현상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해를 포기하든가 하는 것뿐이다.
48절 미완, 종말, 전체성
종말과 전체성에 대한 존재론적인 성격부여는 존재 일반에 대한 명료한 이념을 전제한다.
`끝남` 이 실존하고 있는 존재자의 전체존재를 규명하면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부단한 미완이고 죽음과 함께 종말로서 현존재의 끝남으로 개념파악되는가는 적합하게 규정되지 않는다.
49절 죽음의 실존론적 분석과 이 현상에 대한 가능한 다른 해석과의 제한구별
죽음의 본질은 삶의 존재론적 본질에서부터 규정된다.사망은 현존재가 그 안에서 자기의 죽음을 향하여 존재하는 그런 존재방식에 대한 명칭으로 통용된다.죽음의 차안적 존재론적 해석이 모든 존재적-피안적 사변에 앞서 놓여
있다.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에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실존적 가능성이 함께 울려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존재론적 연구의 본질에 속한다.
50절 죽음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구조를 앞서 그려봄
죽음의 현상을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에서부터 해석하면 `염려`라는 현존재의 존재라는 기초적인 성격으로 규정한다.먼저 죽음의 현상은 어떻게 실존, 현사실성, 빠져 있음이 밝혀지고 있는지를 앞서 그려 보이며 명확히 해야 한다.죽음은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건너뛸 수없은 가능성으로 밝혀진다.
`염려는 현존재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명칭이다`를 현상적으로 확증하기 위해서 죽음을 향한 존재가 현존재의 일상성에서 보여져야 한다.
51절 죽음을 향한 존재와 현존재의 일상성
일상성의 구조에서 죽음을 향한 현존재는 자기자신과 관계를 맺는다. 일상성으로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도 공공적으로 비겁한 두려움, 현존재의 불확실성, 음울한 세계도피로서 통한다. 종말을 향한 존재는 죽음 앞에서의 도피, 종말 앞에서의 회피의 양태를 가지고 있다.
52절 일상적인 종말을 향한 존재와 죽음의 온전한 실존론적 개념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의 경험적 사실을 확신하지만 현존재의 빠져있는 일상성은 그 확실함을 피해간다. 일상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는 자신의 죽음을 회피하면서,
그 자신의 순수 이론적인 숙고에서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과는 다르게 죽음을 확신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존재론적 개념은 현존재의 종말로서의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이고 확실하며 그리고 그 자체로서 무규정적이고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
이다.죽음은 현존재의 종말로서 자신의 종말을 향한 이 존재자의 존재 속에 있다.
53절 죽음을 향한 본래적 존재의 실존론적 기획투사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는 하나의 가능성을 향한 존재로서 그 가능성은 미리 달려가봄으로 파악한다.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이고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으로 현존재를 개별화시킨다. 이 가능성으로 달려가봄 안에는 전체적 현존재를 실존적으로
앞서 취할 수 있는가능성이, 다시 말해서 전체적
존재가능으로 실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 있
다.미리 달려가봄은 현존재에게 `그들`-자신에
상실되어 있음을 드러내보이며 현존재를, 배려하는 심려에 일차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채,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앞으로 데려온다.
이때의 자기 자신이란,`그들`의 환상에서부터 해 방된 정열적이고 현사실적인,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불안해하는 죽음을 향한 자유속에 있
는 자신이다.
제2장 본래적 존재가능의 현존재적인 증명과 결단성
54절 본래적 실존적 가능성을 입증하는 문제
`그들` 속에 상실되어버림으로 해서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현사실적인 존재가능이 각기 그때마다 이미 결정되었다. 현존재의 자기존재
가능성을 찾기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본래성에서 `내보여져야` 하는 양심의 소리이다.
양심은 오직 현존재의 존재양식 안에만 `있으며` 각기 그때마다 오직 현사실적 실존과 함께 그리
고 이 실존 안에서 현사실로서 알려진다.
55절 양심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들
현존재가 자신을 상실하여 고유한 자기를 들어넘길 때에, `그들` 의 말을 귀기울임을 단절하는 어떤 들음을 일깨우기 위해 부르면서 이해하는 것이 곧 양심이다.
56절 양심의 부름의 성격
우리는 양심을 부름이라고 특징 지었는데, 이 부름은 `그들`-자신을 자기 자신에게로 불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불러냄으로서 부름은 자기를 자기존재가능으로 불러세우고 그로써 현존재를 그의 가능성에로 나오도록 앞으로 부르는 것이
다.
57절 양심은 곧 염려의 부름
양심은 현존재의 자기를 `그들` 속에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불러세운다. 양심은 스스로를 염려의 부름으로서 드러낸다. 부르는 자는 내던져져 있음(이미-ᆢ안에-있음)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는 현존
재이다. 부름받은 자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자기를-앞질러ᆢ)에로 불러 세워진 바
로 그 현존재이다.그리고 현존재는 불러냄에 의해서 `그들` 속에 빠져 있음에서부터 불러세운
다. 양심의 불러냄의 이해에서부터 그리고 동시
에 그 이해와 함께 비로서 온전한 양심의 체험을
파악할 수 있다.
58절 불러냄의 이해와 탓
그들-자신을 불러냄은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을
그의 존재가능으로 불러세운다는 것을 의미하
며 그것도 현존재로서, 다시 말해서 배려하는 세계-내-존재와 남들과의 더불어 있음으로서의
현존재를 불러세운다는 말이다.양심의 부름은 현존재가 `탓이 있다` 가 의미하는 본질을 이해
해야 한다.탓이 있음은 `죄를 지음`이라는 행동양태를 규정하고 `도덕적 요구` 의 침해로서 일종의 현존재 존재양식이다. 우리는`탓이 있음
` 이라는 형식적 실존론적 이념을 `어떤 아님에 의해서 규정된 존재에 대한 근거가 됨`,다시 말해서 아님의 근거가 됨(근거존재)이라고 규정한다.탓이 있음은 빚을 짐에서부터 귀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역이다. 빚을 짐은 근원적인 탓이 있음에 `근거해서` 비로서 가능해
진다. 부름은 염려의 부름이다. 탓이 있음이 우
리가 염려라고 부르고 있는 그 존재를 구성하고 있다. 현존재는 섬뜩함 속에서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과 함께 서 있다. 현존재는 부름을 이해하며 자신의 가장 고유한 실존가능성에 귀를 기울이
고 있는 것이다.그는 자기 자신을 선택한 것이
다. 부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양심을 가지기를 원함을 말한다. 양심을 가지기를 원함은 현사실
적인 탓이 있음이 가능하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실존적 존재이다.
59절 실존론적 양심해석과 통속적 양심해석
양심은 세계-내-존재의 섬뜩함에서부터의 염
려의 부름이며, 이 부름은 현존재를 가장 고유
한 탓이 있을 수 있음에로 불러세운다.
`나쁜` 또는 `착한` 양심, `질책하는` 또는 `경고하는` 양심을 해석하는 현상의 근본형태에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일 수 있을
것은 어떤 것도 열어 밝히지 않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를, 즉 실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름에서 부름받고
있는 것을 충분히 해석하려면, 본래적으로 들으면서 불러냄을 이해함 그 자체에 놓여 있는
실존론적이 구조가 산출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60절 양심에서 증거된 본래적인 존재가능의 실존론적 구조
양심을 가지기를 원함에 놓여 있는 현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은 불안의 처해 있음에 의해서
, 가장 고유한 탓이 있음에로 자기 자신을 기획
투사함인 이해에 의해서 그리고 침묵하고 있음
으로서의 말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다. 이를 결단성이라고 이름 한다.결단성은 그 존재론적 인 본질상 각기 그때마다의 한 현사실적인 현존
재의 결단성이다. 이러한 존재의 본질은 곧 그의
실존이다.불러냄에 대한 이해를 결단성이라고
실존론적으로 해석함은 양심을 현존재의 근거
안에 포함된 존재양식으로서 드러낸다. 그리고
현존재는 이 존재양식 안에서 자기 자신을 - 가
장 고유한 존재가능을 증거하면서 - 자신의 현
사실적인 실존에로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우리의 탐구는 이제 추구되어온 현존재의 본래
적인 전체존재가능의 존재론적 의미를 제한규
정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제3장 현존재의 본래적인 전체존재가능과
염려의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시간성
제61절 현존재의 본래적인 전체존재를 제한규
정함에서부터시간성을 현상적으로 밝혀내는
데로 나아가는 방법적인 단계를 앞서 윤곽지음
현존재의 본래적인 전체존재가능을 실존론적 으로 기획투사하면 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 `가 앞질러 달려가봄의 현상으로 밝혀진다.
시간성은 현상적으로 근원적으로 현존재의 본
래적인 전체존재에서, 즉 앞질러 달려가는 결단
성의 현상에서 경험된다.
62절 현존재의 실존적으로 본래적인 전체존재
가능은 앞질러 달려가보는 결단성
결단성은 자체 안에 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
를 자신의 고유한 본래성의 가능한 실존적 양태
성으로서 간직하고 있다.결단성이 앞질러 달려가보면서 죽음의 가능성을 자신의 존재가
능에로 끌어들여올 때, 현존재의 본래적인 실존
은 더 이상 어느 것에 의해서도 건너뛰어질 수
없게 된다.결단력과 앞질러 달려가봄의 `연관`
에 대한 해석이 비로서 앞질러 달려가봄 자체에
대한 완전한 실존론적 이해에 도달했다.
앞질러 달려가봄은 현존재에서 증거된 한 실존
적인 존재가능의 양태이다.
63절 염려의 존재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 획득
한 해석학적 상황과 실존론적 분석론 일반의 방
법적인 성격
앞질러 달려가보는 결단성과 더불어 현존재가
그의 가능한 본래성과 전체성과 관련되어 현상적으로 드러내보여졌다.현존재가 근원적으
로 앞서 가짐, 앞서 봄, 앞서 잡음은 실존범주를 개념적으로 작업하는 일을 수행하는데 충분한
파악을 하게 됐다. 이해의 `순환`은 온전히 이 `
원` 속으로 뛰어 들어 현존재 분석의 단초에서
현존재의 순환적인 존재에 대한 온전한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다.기초존재론적 문제에서 가장
근원적인 실존론적인 진리는 염려의 존재의미
의 열어밝혀져 있음이다.
64절 염려와 자기성
염려는 양심의 부름에서 현존재를 그의 가장 고
유한 존재가능에로 불러세운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현존재가 우선 대개는 그 자신이 아니고
`그들`-자신에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다. 이 `그
들`-자신은 본래적인 자기의 실천적 변양이다.
염려는 자체 안에 이미 자기라는 현상을 간직 하고 있다.일상적인 자기 해석은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있는 `세계`에서부터 이해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염려는 자기의기초를 두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염려의 구성계기로서 의 실존성이 현존재의 자기-지속성(자립성)의 존재론적 구성틀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이 구성틀에는 염려의 온전한 구조내용에 상응하 게 비자기-지속성(비자립성)으로의 현사실적인 빠져 있음이 속한다.
65절 염려의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시간성
염려와 자기성의 `연관`을 특징지음은 현존재의 자기-지속성과 전체성을 실존론적으로 이해하
며 고찰하면서 현존재의 존재의 존재론적 의미
에 대한 구명이 이행되어야 한다.염려의 의미에서 의미는 열어밝혀진 현존재의 존재이
다. 현존재는 실존하면서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
열어밝혀진 존재는 그 존재자에게 바로 이 존재
가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러한 존재자의 존재이다.
도래는 현존재가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
서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런 옴이다.
도래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면서 결단
성은 자신을 현재화하면서 상황으로 데려온다.
이런 식으로 존재해오며-현재화하는 도래로서
통일적인 현상을 우리는 시간성이라고 이름한
다.시간성이 본래적인 염려의 의미로서 밝혀진
다. 시간성은 실존, 현사실성 그리고 빠져 있음
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며 그렇게 염려구조의 전체성을 근원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근원적이 고 본래적인 시간성의 일차적 현상은 도래이다.
근원적인 시간성에 대한 분석을 요약하면 시간
은 시간성의 시간화로서 근원적이며,이 시간화
로서 염려구조의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시간성 은 본질적으로 탈자적이다.시간성은 근원적으
로 도래에서부터 자신을 시간화한다. 근원적인
시간은 유한하다.
66절 현존재의 시간성과 거기에서 발현하는 실
존론적 분석을 더 근원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과
제들
시간성의 근거에서 현존재의 일상성과 역사성 을 해석해야한다.비로서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
재론이 뒤엉켜 있음을 통찰하게 된다.현존재의
비본래성을 드러내고 존재 일반의 개념도 획득
해야만 포괄적인 존재론적 투명성도 얻게 된다.
제4장 시간성과 일상성
67절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의 근본구성계
기 그리고 그 구성틀에 대한 시간적 해석을 앞서
윤곽지음
열어밝혀진 존재이해인 현존재가 존재일반의 일상적인 시간적 이해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물어본다.
68절 열어밝혀져 있음의 시간성
ㄱ)이해의 시간성
이해는 현존재가 각기 그때마다 그 때문에 실존
하고 있는 그 존재가능에로 기획투사하면서 존
재함을 말한다. 실존적 가능성에서 기획투사하
면서 자기를 이해함의 밑바탕에는 도래가 놓여 있다.예기함은 기대함에 기초하고 있는, 도래의
한 양태이며, 도래는 본래적으로 미리 달려가봄
으로서 시간화된다.본래적인 현재로서의 순간
과 구별하여 비본래적인 현재를 우리는 현재화
라고 이름한다.현재화는 세계에 빠져 있음에 대
한 시간적 해석에서 명확해진다. 현재화에 실존
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비본래적으로, 배려되
고 있는 것을 현재화하면서, 그것에서부터 길어
내어진 가능성들에로 자기 자신을 기획투사함
이 가능한 것은 현존재가 그의 가장 고유한 내던
져진 존재가능에서 자신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망각하며-현재화하는 기대함은 비본래적인 이
해가 기것에 맞추어 그의 시간성의 관점에서
자신을 시간화하는 그러한 고유한 탈자적 통일
성이다.
ㄴ)처해 있음의 시간성
이해는 처해 있는 이해이다.처해 있음은 내던져져 있음에 근거한다. 기분은 내던져진 존재자로 존재하는 방식을 제시한다.처해 있음
은 일차적으로 기재에서 시간화된다.기분은 실
존적으로 무엇을 `의미 부여하고` 어떻게 `의미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시간성을 근거로 해서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간적 해석
은 이미 예비분석된 공포와 불안의 현상에 국한
한다.불안은 결단성의 도래에서부터 발원하고,
공포는 상실된 현재에서부터 발원한다.
ㄷ)빠져 있음의 시간성
빠져 있음은 그 실존론적 의미를 현재에 가지고
있다.빠져 있음에 대한 탐구는 호기심에 국한한
다.현재화로서 호기심은 거기에 상응하는 도래
및 기재와 하나의 탈자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현재는 도망간다는 의미에서 귀속해 있는 기대
감에서 `발원한다`.기대함을, 발원하는 현재화를 통해서, 뒤따라오는 기대감으로 탈자적으로 변
양시키는 것이 흐트러짐의 실존론적-시간적 가
능조건이다.현재의 `발원함`의 근원은 본래적인
시간성 자체이다.세계에 내던져져 있는 자로서
현존재는 배려해야 하는 것에 현사실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으로 자신을 `세계` 에 상실한다.
ㄹ)말의 시간성
말의 시간적 구성에 대한 분석과 언어형태의 시
간적 성격에 대한 해설은 존재와 진리의 원칙적
인 연관의 문제가 시간성의 문제틀에서 펼쳐졌을 때 비로서 착수될 수 있다.
시간성은 개개의 모든 탈자태에서 전체적으로 시간화된다.다시 말해서 시간성의 그때마다의
온전한 시간화의 탈자적 통일성 안에 실존, 현사
실성 그리고 빠져 있음의 구조전체의 전체성이
근거하고 있다.
69절 세계-내-존재의 시간성과 세계의 초월의 문제
ㄱ)둘러보는 배려함의 시간성
사용케 함이 배려의 실존론적 구조를 이루
고 있지만 이 배려가 `----곁에 있음`으로서 염려
의 본질적인 구성틀에 속한다면 그리고 이 염려
가 그편에서는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다면, 이
경우 사용케 함의 실존론적 가능조건은 시간성
의 시간화의 양태에서 찾아져야 한다.
사용케 함은 그 자체로서 기대하며-간직하는 현
재화의 탈자적 통알성 안에 근거하고 있어야 한
다. 둘러보는 사용케 함이 `애초부터`배려되고 있는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기대
함이 현재화와의 통일성 속에서 시간화되지 않
았다면, 현존재는 어떤 것이 없다는 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ㄴ)둘러보는 배려가 세계내부적인 눈앞의 것의
이론적인 발견으로 변양됨의 시간적 의미
이론적인 행동관계의 존재론적 발생을 추구하
면서 실존론적으로 필연적인 가능조건은 무엇
인가? 실존론적 개념은 학문을 실존의 방식으로
서 이해하며 그로써 존재자 또는 존재를 발견하
거나 열어밝히는 세계-내-존재의 양태로서 이해
한다. 그렇지만 학문에 대한 완전히 충분한 실존
론적 해석은 존재의 의미 그리고 존재와 진리의 `연관` 이 실존의 시간성에서부터 해명되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수행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손안의 것을 둘러보는 배려가 세계
내부적으로 발견 가능한 눈앞의 것에 대한 탐구
로 전환되는 것만을, 세계-내-존재 일반의 시간
적 구성으로 밀고 들어가려는 주도적인 의도를 가지고 연구한다. 손안에 것을 새롭게 눈앞의 것으로 보기 때문에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와의
배려하는 왕래를 주도하던 존재이해가 전환되
었다.
ㄷ)세계의 초월의 시간적 문제
현존재는 실존하면서 그의 세계로 존재한다.
세계의 실존론적-시간적 가능조건은 시간성이
탈자적 통일성으로서 지평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거기에 놓여 있다.현사실적으로 배려하
며 손안의 것 곁에 있음, 눈앞의 것의 주제화 그
리고 이 존재자의 객관화하는 발견 등은 이미 세
계를 전제한다.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오직 세계
-내-존재의 방식들로서만 가능할 뿐이다. 탈자
적 시간성의 지평적 통일성 안에 근거하면서
초월적이다.
70절 현존재적 공간성의 시간성
공간성은 세계내부적인 공간의 발견을 기초짓
고 있다. 현존재가 공간적인가 하는 것은 현존재
는 오직 현사실적으로 빠져 있으며 실존한다는
의미의 염려로서만 공간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현존재의 공간마련에는 방향잡음과 거리없앰
이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세계내부적인 눈앞의 것의 내부에서 시간성의 통일성에 속하
는 현재화에 근거하고 있다.
71절 현존재 일상성의 시간적 의미
일상성은 그 안에서 현존재가 `매일` 머물고 있는 그런 실존함의 양식을 의미한다.일상성은
현존재가 `나날을 살아가는` 방식의 `어떻게`이
다.
제5장 시간성과 역사성
72절 역사문제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개진
현존재의 존재이해에 근거해서 존재 일반의 의
미를 알게 된다.현존재는 찰나적으로 삶을 채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뻗쳐나감으
로 구성한다. 내던져져 있음과 죽음을 향한, 도
피적인 또는 미리 달려가보는 존재의 단일성에
서 태어남과 죽음은 현존재적으로 `함께 연관되
어`있다.염려로서 현존재는 `사이에`로 있는 것이
다.현존재의 생기(뻗쳐 나감)가 그 구조및 실존
론적-시간적 가능조건을 밝혀 보임은 역사성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를 획득함을 의미한다.
역사성의 실존론적 구성을 위한 실마리는 수행
한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존재가능에 대한 해석
과 거기에서부터 자라나온, 시간성으로서의 염려에 대한 분석이 제공한다.역사성이 염려에 뿌리를 둔 것에 상응하게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본래적 비본래적으로 역사적인 것으 로 실존한다.학문으로서의 역사학에 대한 실존
론적 해석은 오로지 그 존재론적인 유래를 현존재의 역사성에서부터 입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분석은,이 존재자가 `역사 안에 서있기`에 `시간
적인`것이 아니라,오히려 그 역으로 오직 그가 그의 존재에 근거에서 시간적이기에, 역사적으
로 실존하며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73절 역사의 통속적 이해와 현존재의 생기
역사는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실존하는 현존재
의 특수한 생기이며, 그래서 서로 함께 있음에서 `지나가버린` 그리고 동시에 `전수된` 그리고 계
속 영향을 미치는 생기가 강조된 의미에서 역사
로 통용된다.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계는 세계-내-존재로
서 현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존하는 현존재의
방식으로만 존재한다.아직도 눈앞에 있는 고대
유물들은, 그것들이 `거기에`- 있어왔던 현존재
의 기재했던 세계에 도구로서 귀속해 있었다는
것과 그 세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과거` 또는 역사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세계-역사적인 것은 이를테면 역사학적인 객과
화에 근거해서 비로소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세계내부적으로 만나지면서 그 자체
안에서 그것인 그런 존재자로서 역사적인 것이
다.
74절 역사성의 근본구성틀
현존재는 역사성에 의해서 구성된다. 현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해석은 시간성에 대한 정리작업
이다. 시간성은 앞으로 달려가보는 결단성으로
규정된다. 현존재는 결단성 안에 있는 생기로 죽
음에 대하여 자신을 자신에게 전수한다. 결단성
속에 놓여 있는,앞질러 달려가보며 자신을 순간
의 `거기에` 로 전수함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이
름한다.운명적인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본
질적으로 타인들과 함께 더불어 있으면서 실존
할 때, 그의 생기는 공동생기이고 역운으로 규정
한다.운명적인 역운은 전수되는 상속에 붙들려
있음과 관련해서 반복에서 열어밝혀질 수 있다.
반복이 현존재에게 그의 고유한 역사를 비로소
드러내 보여준다.이렇게 특징지은 역사성을 우
리는 본래적인 역사성이라고 이름한다.
75절 현존재의 역사성과 세계-역사
여기서는 비본래적인 역사성에 대해서 고찰해 본다. 현존재의 역사성의 테제는 세계-내-존재
로서 실존하고 있는 그 존재자가 역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역사의 생기는 세계-내-존재의 생기이다.세계-역사의 의미는 현존재와 실존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세계의 생기를 의미한다.
동시에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세계와 더불어
각기 그때마다 세계내부적인 존재자가 발견되
어 있는 한에서, 손안의 것과 눈앞의 것의 세계
내부적인 `생기`를 의미한다.역사적 세계는 현사
실적으로 오직 세계내부적인 존재의 세계로서
만 존재한다.역사성을 존재론적으로 제한규정
하면 세계-역사적인 것은 현사실적 현존재가
빠져 있으면서 배려되고 있는 것에 몰입하고 잏
기 때문에,그는 자신의 역사를 세계-역사적으로 이해한다.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는 배려되고 있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그의 역사를
계산한다.비본래적인 역사성에는 현존재를
`그들`-자신으로서 비지속적으로 자신의 `오늘`을
현재화한다.
76절 현존재의 역사성에서 유래하는 역사학의
실존론적 근원
역사학은 현사실적으로 지배적인 세계관에 의존하고 있다.또한 학문의 근원을 존재론적으
로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서부터 물어볼 필요 가 있다.역사에 대한 역사학적 열어밝힘은 그 자체에서 그 존재론적인 구조상 현존재의 역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존재의 역사학의 이념은 현존재의 역사성에서부터 존재론적으로 기획투사함을 의미한다. 역사학적인 주제화는 거기에-존재해온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가진다.
역사학이 도대체 `삶에` `유익하거나` `유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 삶이 그 존재의 뿌리에서 역
사적이고, 그래서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것으
로서의 삶이 각기 그때마다 이미 본래적 또는 비
본래적 역사성에 대해서 결단을 내렸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역사적 실존의 본래적인 열어밝
혀져 있음에서 부터 역사학적 진리의 가능성과
구조가 개진되어야 한다.
77절 이상의 역사성 문제의 제시와 딜타이의
탐구 및 요르크 백작의 이념과의 연관
역사의 근본성격에 대한 통찰은 역사고찰의 객체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
라 살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역사성의 발아점
입니다.나는 역사입니다.
존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사이의 종적인 차이
에 대한 역사성의 개념을 파악하면,
역사성에 대한 물음은 역사적 존재자의 존재구
성틀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다. 존재적인 것에
대한 물음은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 즉 가장
넓은 의미의 눈앞의 것의 존재구성틀에 대한 존
재론적 물음이다. 존재적인 것은 존재자의 단지
한 구역일 뿐이다. 존재의 이념은 `존재적인 것`
과 `역사적인 것` 을 포괄한다.그것(존재의 이념)
이 곧 자신을 `종적으로 차별화시켜야` 하는 그
것이다.
제6장 시간성과 통속적 시간개념의 근원으로서
의 시간내재성
78절 전술한 현존재의 시간적 분석의 불완전함
현존재는 `시간을 고려하여`시간에 맞추어 살고 있다는 현사실이다. 현사실적 현존재는 시간성을 실존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도 시간을 고려하고 있다.시간성으로서의 현존재가 시간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시간과 관계하는 그런 행동관계를 어떻게 시간화하는가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적인 현존재는 `시간`을 존재이해의 지평 안에서 이해한다. 통속적 시간개념은 그 유래를 근원적인 시간의 평준화에 힘입고 있다.
79절 현존재의 시간성과 시간의 배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존재자 곁에 있음으로 자신을 배려하며 밖으로 말하고 있다.
배려는 시간성에 근거하여 `그때에` `지금` `그 당시` 라고 말하는데 이 연관구조를 시점기록가능성이라고 이름한다. 시점기록가능성은 어디에 근거하나? 이것은 하나의 시점을 의미한다.현존재가 배려된 것을 밖으로 말하는 것은 현재화이다. 자신을 밖으로 풀어내는 현재화를, `지금`에서 말해지고 있는 해석된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이름한다. 시점기록가능성은 시간성의 탈자적 구성틀의 반영이며 그렇기 때문에 밖으로 말해진 시간 자체에 본질적이다. 기대하며-간직하며-현재화하는 배려는 `자신에게` 이런저런 시간을 허용하며 이 시간을 배려하면서 언명하는데 우선 현존재가 어떻게 그때마다 실존에 상응하면서 자기의 시간을 `가지는가` 에서부터 규정되어야 함을 개념파악해야 한다.
밖으로 말해진`지금` 은 각자에 의해서 서로 함께-세계-안에-있음의 공공성 안에서 말해진다. 이제 일상적인 배려가 자신을 배려되고 있는 `세계`에서부터 이해하는 한, 배려는 그것이 자신에게 주는 그 `시간` 을 자기의 시간으로 알고 있지 않고, 배려는 사람들이 계산하는 `주어져 있는` 시간을 배려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 의 공공성은 현사실적 현존재가, 시간을 고유하게 계산에 넣기 위해서, 시간을 더욱더 명시적으로 배려하면 할수록 그만큼 절실해진다.
80절 배려된 시간과 시간내재성.
잠정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오직, 어떻게 시간성에 근거하는 현존재가 실존하면서 시간을 배려하고, 어떻게 이 시간이 해석하는 배려에서 세계-내-존재를 위해서 공공화되는가 하는 것이다.공공 시간의 현상적 성격으로 이미 배려에서 시간이 공공화된 것이다. `공공의 시간`은 `그 안에서` 손안의 것과 눈앞의 것이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바로 그 시간임이 입증된다.이 존재자를 시간내재적인 것이라고 명명한다.현존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세계에 내맡겨져 있음의 지평 안에서 이 세계 내부에서 어떤 것으로 만나게 되는 그것에서부터 시점
기록한다.이 시점기록은 시계를 필요로 한다.시간성이 시계의 근거이다. 우리는 시간성의 시간화에서 공공화되는 시간을 세계시간이라고 이름한다. 그 까닭은 시간이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시간을 봄은 본질적으로 지금을-말함이다. 그 `지금을-말함`은 현재화를 말한다. 배려되고 있는 시간을 측정하며 시점기록함은 이 시간을 눈앞의 것에 대한 현재화하는 관점으로 풀어놓는 것을 말한다.세계의 열어밝혀져 있음과 더불어 세계시간이 공공화되며,그래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 곁에 시간적으로 배려하며 존재함은 모두 이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시간 안에서` 만나게 되는 것으로서 둘러보며이해한다.
81절 시간내재성과 통속적 시간개념의 발생
둘러보며 자신에게 시간을 주며 배려하는 시계사용의 지평에서 드러나고 있는 시간의 정의는, 시간은 움직이는 시계 바늘을 현재화하며 헤아리며 좇어가는 가운데서 제시되는 헤아려진 것이다. 그래서 현재화는 이전과 이후에로 지평적으로 열려 있는 간직함과 기대함과의 탈자적 통일성에서 시간화된다. 세계시간의 본질적 구조와 통속적 시간이해는 지금의 시점기록가능성과 유의미성이 근거하고 있는 시간성의 탈자적-지평적 구성틀은 이러한 은폐에 의해서 평준화된다.빠져 있는-일상적 현존재의 비본래적 시간성은 자기를 상실하고 죽음의 유한성으로부터 도피하지만 인간이 `삶 안으로 들어섰을` 때, 시간은 이미 `있었듯이`, 그렇게 시간은 계속 진행된다. 즉 세계시간이 그 안에서 시간화되는 시간성이 그 모든 은폐에도 완전히 닫혀져 있는 것은 아니다.시간을 끝이 없는, 지나가버리는, 되돌릴 수 없는 지금의 연속으로 보는 통속적인 성격규정은 빠져 있는 현존재의 시간성에서 발원한다.
82절 시간과 정신의 관련에 대한 헤겔의 결해에 대비하여 시간성과 현존재 그리고 세계시간의 실존론적-존재론적 연관을 구별함
헤겔은 시간개념을 통속적 시간이해로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ㄱ)헤겔의 시간개념
통속적 시간이해에 대한 최초의 전승된,주제적인 상세한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발견된다. 공간이 변증법적으로 그것이 무엇인 그점에서 사유된다면, 공간의 이러한 존재가 헤겔에 의하면 시간으로서 드러난다. 공간은 자연의 자기 바깥 존재(자기 밖에 있음)의 매개없는 무차별성이다.공간은 공간 안에서 구별 가능한 점들의 추상적 다수성이라는 것이다. 점은 공간 안에서 어떤 것을 구별하고 있는 한, 공간의 부정이다. 자신을 대자적으로 정립함으로써 점은 그것이 그 안에서 서있는 잇달아 있음을, 즉 이제는 부정된 부정의 영역으로서의 자기 밖에 있음의 영역을 정립한다.무차별성으로서의 점성의 지양은 다른 점들을 향해서 `자기를 뻗친다.`점성으로서의 이러한 부정의 부정이 헤겔에 의하면 곧 시간이다.점의 대자적 지기정립의 가능조건은 지금이다.공간의 순수 사유가 각기 그때마다 지금과 지금들의 자기 밖에 있음을 `사유하기`때문에, 공간이 시간으로`있는` 것이다.시간은 관념적으로 직관된 생성이다. 또한 시간을 성격규정함은 `관념적`이기는 해도 눈앞의 것으로서 직관돌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헤겔이 시간을 추상적 의미로 이해함은 시간견해에 대한 적합한 표현이 시간을 부정의 부정으로 규정한 데에 있다.
ㄴ)시간과 정신의 연관에 대한 헤겔의 분석
헤겔은 정신의 본질을 형식적-서술적으로 부정의 부정이라고 규정한다.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하는것`이다.자신을 자신의 개념으로 데려오는 정신의 전개의 동요가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에,자기를 실현하면서 부정의 직접적인 부정으로서의 `시간 안으로` 떨어져들어오는 것이 정신에게 적합한 것으로 남아 있는다. 왜냐하면 `시간은,거기에 있는, 텅 빈 직관으로서의 의식에 표상된 개념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단적으로 평준화된 세계시간의 의미로도 개념파악되기 때문에 눈앞의 것으로 정신과 마주 서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은 비로소 처음으로 `시간 속으로` 떨어져 들어와야 한다.
83절 현존재의 실존론적-시간적 분석론과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기초존재론적 물음
철학은 현존재의 해석학에서 출발하는 보편적 현상학적 존재론인데,이 해석학은 실존에 대한 분석론으로서 모든 철학적 물음의 실마리의 끝을,거기에서부터 그것이 발원하며 거기에로 그것이 되돌아가는 거기에다 고정해놓았다.`존재` 와 같은 그런 것은, 이해로서 실존하는 현존재에 속하는 그런 존재이해 안에서 열려밝혀져 있다. 비록 비개념적이기는 하지만 선행적으로 열어밝혀진 존재가 현존재로 하여금 실존하는 세계-내-존재로서 존재자와,즉 세계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뿐 아니라 실존하는 자로서의 자기 자신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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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 한길사 / 199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조건

나에게 이 책은
○각 절마다 저자가 말하는 결론을 분명하게 밝힌 책.
○주제에 맞는 다른 철학자의 생각을 인용한 책.
○철학적 사변보다 제작인의 행위에 철학적 역사적 의미를 두는 책.
○다 읽기를 서두르지 않고 각 절을 여러번에 걸쳐 반복해 읽어 이해하려 애쓰니 저자가 하고자 하는 얘기에 공감해서 좋았던 책.
○노동하는 동물로서 인간이 위치하는 사회적 모습의 변화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책.

1장.인간의 조건
활동적 삶이라는 인간의 근본활동을 나타내는 것은 노동 작업 행위이다. 이 활동은 인간실존의 조건과 연관되어 있으나 인간본성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중세에 활동적인 삶은 정치적 삶이고 이 말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인 삶이지 질서지어진 관계 속에서 형식지어진 삶이 아니다. 시대가 바뀌고 작업과 노동이 인간활동의 위계에서 부상하여 존엄성을 획득하고 관조만이 자유로운 삶이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활동적 삶이 인간에게 관조를
필요로 하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지나치게 관조에 무게를 두지 않는 것은 활동적인 삶의 포괄적인 원리 없이는 질서도 확립될 수 없고 한편 인간의 핵심적인 지위 역시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멸성과 영원성의 차이를 회상해보면,
모든 자연에서 유일하게 죽을 운명인 개별적 인간은 - 개별적 삶이 다른 것과 구별 되는 것은 그것이 직선적 운동의 과정을 가진다는 점이다.즉 생물학적인 순환운동의 삶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산출하는 작업 행위 언어의 능력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 이것을 통해 불멸적인 행위업적과 사라지지 않을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능력에 스스로를 신적 본성을 가진 존재로 확증한다. 사유적으로는 자신을 기록하지 않는 관조 또는 명상이 영원한 것의 경험을 서술한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인간이 만든것에 대한 가멸성을 증명했고 개인의 영원한 삶을 복음 설파하는 기독교에서도 증명되었다.
2장.공론 영역과 사적 영역
4. 인간적 삶은 행위가 인간의 배타적 특권이고 고유한 능력이다. 이 행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회적이다. 이렇게 정치적 조직체를 갖춘 인간의 능력은 이성과 언어를 가진 동물이란 정의로 생활을 이해할 수 있다.
5.고대에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은 분명하다. 가정의 자연적 공동체는 필연성의 산물이며 모든 활동은 그 지배를 받는다. 이 필연성은 전정치적 현상으로서 모든 인간은 예속되어 있고 타인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폴리스는 평등만을 고려하여 타인에게 예속되지 않는 자유를 의미한다.
근대에 사회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의 구별은 덜 선명해지고 정치의 사회적 기능화로 가계 또는 경제 활동이 공론 영역으로 부상하게 되어 집단적 관심으로 되었다. 이러한 사적영역의 확장은 중세도시의 직업조직체의 길드에까지 올라가 결합가정으로서 공동선은 사적인 이해에 공적인 의미를 갖는 중간영역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좋은 삶이란 공적 영역으로 들어가 가정의 삶의 필연성을 지배하고 노동과 생산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생존에 대해 갖는 내적 충동을 극복하는 것이다.
6.사회의 출현은 가계가 공적 영역의 밝은 곳으로 이전된 것을 말한다. 근대 개인주의에서 사생활은 풍부해지고 사회적 영역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고대의 군주제적 일인지배는 사회적 평균화를 구가하는 경향에서 대중이 지배하는 익명의 지배로 변형되었다.
이런 사회적 순응주의는 경제학에도 기인하여 인간활동의 제한된 영역의 연구에서 인구증가의 타당성 증대와 편차 감소로 인한 사회적 요소가 기술적으론 통계의 일률성을 지향하며 사회과학이 주도적 학문으로 바뀌었다.
사회가 탄생하고 사회적 영역은 사적 발전이 중요해지고 공동체는 노동자와 직업인의 사회로 변형시켰다. 노동의 공적 지위를 부여하면서 노동의 탁월성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할 수 있었다. 공론 영역은 인간의 탁월성을 발휘하는 장소가 되었다.
7.공적이란 용어는 첫째 우리가 보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을 듣는 타인의 현존으로 인하여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의 실재성을 확인하는 폭넓은 공공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둘째 세계가 우리 모두에게 공동의 것이고 우리가 사적인 소유지와 구별되는 세계 자체를 의미한다.
세계의 영속성은 죽을 운명인 인간에게 공론 영역의 공공성만이 우리가 시간의 자연적인 파멸로부터 보존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수용하여 수세기에 걸쳐 빛을 발할 수 있다.
불멸을 추구하고 보증 받는다는 것은 공적 존재로서 공적 우월성을 획득하여 공적 찬사를 받는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시간의 파괴로부터 구해지는 공적 공간을 구성하지 못하고 가장 무용한 금전적 보상이 더욱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객관성 과는 달리 공론 영역의 실재성은 다양한 입장과 관점에서 동일한 것을 볼 경우에만 나타날 수 있다. 만약 같은 대상에 관심을 갖는 대상의 동일성이 해체 된다면 공동세계는 파괴되고 사적으로 되어 모두 자신들의 고유한 경험의 주관성에 갇히게된다.
8. 본래 `박탈된` 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사적인` 이라는 용어는 시대가 지나가면서 제한된 가정의 삶이라는 박탈감은 사라지고 사적 소유가 공론 영역과 대립하지 않으며 정치적 조직체에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사적으로 소유한 세상에서 시민의 추방은 재산의 몰수가 아니라 시민권의 박탈이라는 파괴를 의미했고 이것은 가정의 내부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고 공론 영역으로 이어지는 외관이었다. 가정 영역은 가정과 가정의 경계선을 통해서 공론 영역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그 경계선은 법률로 제정되었다. 이 법률은 공공 영역의 울타리였던 것이다.결국 정치적 삶은 사적인 소유를 기반으로 해야 가능했다. 여기서 부는 사회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몫이었기에 소유의 의미를 대신할 수 없었지만 부의 축적이 있어야 공적 활동이 자유롭다는 이유로 사적인 부가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근대사회에서 커다란 규모의 부의 축적은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농민들의 소유권도 박탈하며 사적 소유를 희생시켰다.
그런데 어떤 형태의 사적인 소유도 모든 사회적 생산성 발전에 방해가 되기에 무효화 시켜야 한다는게 그 당시 사회적 본질이었다.
9.공동의 부가 공론 영역을 인수하게 되었을 때 사적 소유는 공동세계가 갖는 지속성을 잃게 되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없어지고 사회적 영역으로 흡수되며 근대의 친밀성은 개인의 내적 주관성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소유와 부의 의미는 돈이라는 교환 가능한 사회적 가치만을 획득한다. 따라서 사적 영역이 사회적 영역으로 해체되는 과정에서 근대의 소유는 세계적 성격을 상실하고 인간 속에 자리잡게 된다. 부가 공적 관심사가 된 후 사적 소유권이 관리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니 개인의 구체적 장소의 의미인 사적 소유는 폐지된다.
사적인 것의 비박탈적 성격에서 사적 영역의 제거는 삶의 필연성 제거라는 인간 실존의 위험을 첫째 특징으로 하고 둘째 특징은 사적 영역의 활동이 직접적인 보호가 아닌 공적 영역과의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인식되었다. 특수하게는 사회에 의한 침해로 사적 소유의 점진적 소멸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혁명적 수단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태초부터 숨겨진 사생활은 노동계급과 여성의 해방으로 인해 신체의 기능과 물질적 관심을 숨길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10.인간의 모든 활동은 숨겨지기도 드러나기도 하면서 세계에서의 자신의 적절한 자리 매김을 암시하고 있다. 즉 정치적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판단 기준들은 활동적 삶 각각의 본질과 일치한다.
3장. 노동
11.노동과 작업의 구별은 자신의 신체로 삶의 필연성에 봉사하는 노예와 고대 그리스의 장인을 상기시킨다. 고대에는 삶의 필연성에 지배를 받는 노동은 인간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근대에 노동의 지위를 상승한 근본 이유는 노동의 `생산성` 때문이었다. 노동이 조직화되고 분업화되어 뛰어난 생산성을 가지면서 작업으로 간주되고 그 구분이 없어지며 모든 사물은 세계적, 객관적 실재로 이해되기보다 노동력의 결과물이자 삶의 과정의 기능으로 이해되었다.결국 노동생산성이 설명해주는 것이 노동 자체가 아니라 인간 노동력의 `잉여`였다. 또한 모든 직업에서 노동 가치는 사회에 대한 `유용성` 으로 판단되었다.
12.삶의 과정에서 노동생산성은 노동력이 제공하는 재생산성이지 그 사물의 성질이나 성격에 있지 않다. 세계의 사물들은 노동생산물이 아닌 작업의 생산물이 영속성과 지속성을 보장해준다. 이 사물로서 인간의 실재성을 갖게 되고 또 다른 실재성을 갖는 행위와 언어의 `생산물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타인의 항상적 존재에 의존하고 무형의 것을 유형의 사물로 변형시키는 사물화에 있다. 이 조건이 인간관계와 인간사의 구조를 구성한다.
인간의 삶은 세계 속에서 그 사물들이 얼마나 영속되느냐에 세계성의 정도가 달려 있다.
13. 자연은 부단히 되풀이하는 순환운동이지만 삶은 시작과 끝이라는 두 개의 근본 사건에 의해서 제약받는 직선 운동을 따른다. 자연의 순환운동은 인위적 세계로 들어갈 때만 자연의 과정은 부패와 성장이라는 특징을 가질 수 있다. 모든 인간활동이라는 면에서 노동은 자연의 재료를 욕구에 맞는 형식으로 변형하고 이런 생물학적 과정의 순환을 유지하기 위해 소비가 필요하다. 생존을 위해 노동과 소비가 필요하고 자연관점에서는 파괴적인 것의 대응으로 지속적으로 인간의 인공세계를 침해하고 세계의 지속성과 인간의 목적을 위한 유용성을 위협한다.
14. 노동과정은 `자연과 인간의 신진대사`로 정의하며 노동은 `자연이 부여한 영원한 필연성` 이자 인간활동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이다. 노동이 내재하는 삶은 그 본질적인 의미가 생산성과 다산성에 있다.
15.노동은 직접적으로 삶에 속박된 활동이다.자기 신체의 활동은 사적 소유를 근거하며 증가하는 부는 소유의 자기화이다.
사회화된 인류에서 조차 개별적 삶은 제거될 수 없다.
16.인간의 노동력의 다산성으로부터 삶의 필수재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삶의 조건들의 본질에 속한다.인간의 본질에서는 삶이 필수재를 획득하기 위한 수고와 고통 그리고 그것을 흡수하는 기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스스로 짊어질 때만 유지될 수 있다.
노동과정에 있어서 도구와 기계에 의존하는 대량생산체제는 생산품의 사용 성격을 잃어버리고 점점 소비의 대상으로 넘어간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의 신진대사는 내재된 지속성은 기대하거나 보존할 수도 없다.
결국 영속성, 안정성, 지속성이라는 (인공의) 세계의 제작자인 제작인의 이상은 노동하는 동물의 이상인 풍요함을 위해서 희생되었다.
17.이 사회는 노동계급의 해방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활동 자체의 해방을 통해서 도래했다. 생계를 위한 활동을 벗어나 인간을 좀더 생산적이게 할 것이라는 희망은 부수적으로 생긴 여가를 오로지 소비에만 소모하며 노동과 소비라는 삶의 균형은 지속되지 못한다.
이러한 사회의 위험은 이 사회가 증가하는 다산성의 풍요에 현혹되고 끝없는 과정의 원만한 기능에 사로잡혀 더이상 자신의 무상함, 즉 `노동을 한 후에도 지속되는 어떤 영속적 주체에서도 삶은 자신을 고정시켜 주체화할 수 없다`는 무상함을 인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4장. 작업
18.작업으로 인한 생산물은 적절히 사용하면 세계에 지속성과 견고성을 부여한다.
19.작업은 사물화로 이어지고 자연을 파괴하며 인위적 세계를 건설한다. 이런 폭력의 경험으로 우리는 자기확신과 만족을 얻는다.호모 파베르의 제작인은 절박함이 갖는 노동 자체의 기쁨이 아니라 군주이자 모든 자연의 지배자이다.
20.기계화는 근대사회에서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고 도구적 성격을 상실했다. 기술은 사실상 더이상 `물질적 힘을 확장시키려는 의식적 인간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차라리 인간 유기체의 내적 구조가 점점 더 인간의 환경으로 이식되는 인류의 생물학적 발전인 것처럼` 나타난다.
21.제작인의 용구와 도구들이 모든 작업과
제작을 결정하기에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공리주의에 내재하는 유의미는 `목적 그 자체`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완성된 생산품도 삶의 목적을 위해 다시 수단이 되며 도구가 된다.
인간중심주의에서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사용을 위한 모든 사물의 척도가 된다`. 즉 내재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2.근대에 정치는 사회를 보호하는 기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사회에 내재하는 자연적인 생산성은 제작인의 생산성이고 제작인이 자신의 공론영역을 가지는 것은 교환시장이다. 고립된 장인은 생산품의 교환을 통해서만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근대 초기에 노동의 사회에서 노동력은 높은 가치를 부여했으나 그 사용물이 공론 영역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가치의 질적변화가 생겨 객관적 절대적가치인 내재적 가치는 상실하고 시장가치 교환가치만이 존재하게 되었다.교환시장은 일관되게 도구성으로부터 발전한다.그러나 유용성으로 위장한 도구성이 세계와 세계의 모든 사물을 존재하게 했던 활동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결된 세계도 지배하게 된다.
23.세계는 안정성이 없다면 의지할 거처도 안되는데 안정성을 위한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것이 예술 작품이다.인공세계는 예술 작품의 영속성에서 자신의 안정성을 드러낸다.예술작품의 직접적 원천은 사유 능력으로 예술가나 철학자는 자기 작품의 물질적 사물화를 위해 사유과정을 중단하고 변형해야만 한다. 인위적인 사물세계가 가멸적 인간의 거처가 되어 항상 변화하는 인간의 삶과 행위의 운동을 견뎌내고 오래 안정적으로 지속하려면 제작인의 세계와 예술가 철학자의 사유가 공존해야한다.
5장 행위
24.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 공유하는 `특수성` 과 살아있는 모든 것과 공유하는 `차이성` 은 인간에게서 유일성이 된다.
말과 행위로서 우리는 인간세계에 참여한다.행위하고 말하면서 자신을 보여주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인간세계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
25.말과 행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사람을 지향한다. 그 내용이 대상적이고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물리적인 사물세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관련짓고 묶어 둘 수 있다. 대부분의 행위와 말은 다양한 중간영역과 연관되어 인간 관계를 구성한다. 이 실재를 우리는 인간관계의 `그물망`이라고 부른다.
26.행위한다는 것은 한사람에 의한 시작과 다수가 참여하여 일을 실행하고 완성하며 완전히 이루어낸 업적으로 나뉜다.
행위자는 다른 존재들 사이에 그들과의 관계속에서 움직이며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무제한적인 행위의 관계를 확립한다.그러나 문제는 행위의 과정은 그 결과를 끝이 났을 때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27.인간의 행위 자체의 본질은 삶이 끝나고 이야기 외에 아무것도 뒤에 남기지 않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그리스에서 행위의 연약성에 대한 치료법은 폴리스의 구축이었다. 폴리스의 형식에서 함께하는 인간의 삶은 행위와 이야기들을 사라지지 않도록 보증해준다.폴리스는 말과 행위가 공유하는 공간으로서 나와 타인을 현상하고 세계를 현상함으로서 세계의 실재성을 보증한다.즉 존재한다.
28.모든 사람이 현상하는 공간인 공론 영역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권력이다.또한 사람들을 함께 묶어두고 머물게 함으로써 삶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권력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공론 영역과 현상의 공간을 보존한다. 물화할 수 없는 권력은 또 다른 힘과 폭력에서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부패가 일반적인데 행위의 역동적 권력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지 않을 위엄을 정치에 부여하였다.폴리스가 사라지면 모든 것을 상실하기에 지속하기 위해서는 행위의 의미를 실행 자체에 두고 그것의 동기나 결과에 주지 않는다. 목적은 활동 자체에 놓여 있다. 엔테레케이아가 된다.
29.인간이 현상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세계 내의 공간인 공론영역은 `인간의 작업` 이다.그렇지만 생산품이 인간보다 오래 지속하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제작인과 노동하는 동물의 확신도 현상의 공간이 없이는 그 실재성을 확립할 수 없다.세계의 실재성을 가늠하는 공동의 것이 공론 영역으로서 교환시장을 유지하고 존재시키는 것은 권력이 아닌 교환이다.
30.근대 이전의 노동하는 동물인 노동계급은 근대 사회에서 경제적 보장 사회적 특권 그리고 정치적 힘에 있어서 엄청난 발전을 하였지만 노동 신분은 여전히 사회적 조건이었다.이렇게 가지는 노동자의 시민권과 인격의 권리로 다소는 갑작스럽게 공론 영역에 진입하게 되었다.그렇다고 이 사회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 했던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제시하는 노동 운동이 사회 전체와 투쟁을 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집단과 동일해지면서 국민을 대표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나머지 국민과 다르지 않게되고 정치적 역할을 상실하며 공론 영역의 소멸이 완결단계에 이르게된다. 근대의 노동 운동의 특징이다.
31. 인간이 행위자들이 다수여서 초래하는 우연성과 도덕적 무책임을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행위를 생산으로 대체하고 인간의 다원성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인간사의 영원한 질서를 구축하는데 있다.플라톤은 지식과 행위의 구별, 시작과 지배의 이해를 생산품을 형상하여 지각하는 부분과 실행하는 부분으로 나눠서 그 견고성을 부여했다.행위의 개념을 생산과 제작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정치사상은 폭력이 전통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근대를 특징짓는 일련의 혁명에서 뚜렷이 드러난다.즉 폭력은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는 모든 오래된 사회의 산파이다.
32.인간의 행위는 자연을 조작하고 인위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이렇게 새로운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은 나타난 결과가 불확실하고 예측불가능하다.그럼에도 행위하기 이전의 본래 상태로 되돌리거나 행위의 결과를 방지할 수가 없다. 근대가 인간능력을 확장하고 행위의 결과가 늘어날 수록 그 힘은 증가한다. 그 본질이 자유인 행위능력은 인격으로서의 주권과 동일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지배의 이상인 주권은 다원성의 조건에 모순되기 때문이다.인간의 현실로 볼 때 행위능력은 비주권이라는 자신의 무능력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33.우리는 제작인으로서 행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무능력인 환원불가능성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용서하는 능력이다.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갇혀서는 결코 자신의 실패나 잘못을 용서할 수 없다.
34.미래의 불가능성인 예측불가능성은 공동체 내부에서 행위의 결과를 예견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약속을 하고 지키는 능력이 이것을 극복하는 기능을 한다.
생성과 사멸의 영원한 순환 속에 우리가 행한 것을 원상회복하고 우리가 야기시킨 과정을 부분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이 없다면 죽을 운명의 인간은 모든 것을 황폐하게 하고 파괴시킬 것이다. 이를 구원하는 기적은 궁극적으로 탄생성이다.즉 인간이 탄생함으로써 할 수 있는 행위이다.
6장 활동적 삶과 근대.
35.과학의 발전이 인간을 지구의 거주적 환경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소외되는 희생을 치뤘다.실재 사회를 가장 동요시켰던 것은 종교개혁이었다. 소유는 인간의 세계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조건이었는데 봉건제를 붕괴시킨 재산 몰수가 세계를 소외시킨 단일 요소였다.탈소유화에 의해 시작되고 부의 지속적인 증대를 특징으로 하는 소외과정은 가계의 소유와 달리 사회적 인간이 집단적으로 소유를 가질 수 없기에 그런 사회의 등장은 공론 영역과 사적 영역을 동시에 몰락시켰다.
36.갈릴레이의 발견은 인간의 감각능력의 판단에 대한 회의와 지구중심적인 세계관이 보편체계의 중심이 될 수 없는 우주 속의 한 점이 되게 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경험하지 않는 사변이 신과학의 정신적 도구인 근대 대수학의 발전으로 자연을 탐구하고 접근하는 새로운 양식의 길을 열어 두었다.자연을 단순히 관찰하기보다 자신의 정신 아래 두었다. 이러한 수학의 기능은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자료에서 현상하는 이상적 척도를 정신에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진정한 존재의 계시에 대기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이들 자료를 인간 정신의 척도에 환원시킨다.
37.이 세계의 객관적 진리와 실용적인 노하우는 준거점을 지구 밖에서 선택하는 우주의 법칙에서 획득되며 지구의 우주에 대한 관련성을 판정하면 상대적이 된다.
철학적으로 볼 때 보편적 관점을 가진 철학자의 열망은 그리고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자기 반성이 관념들의 발전에서 자라난 거란건 어리석은 생각이다.관념이나 생각은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38.데카르트의 회의는 인간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눈으로 본 것을 신뢰할 경우에만 현실과 진리는 인간의 감관과 이성에 드러난다고 믿음으로써 기만당했다는 것을 알고부터다.
데카르트는 실재를 의심하고 감각과 이성의 신뢰를 확신하지 않았다.결국 진리의 확실성 상실은 선례에 없던 진실성에 대한 새로운 열정으로 귀결된다. 단지 진리는 이론이고 검증은 실천의 문제였다. 즉 진리로부터 진실성으로,실재로부터 신뢰성으로의 전환과 유사하다.
39.자기 반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의 인지적 관심이다. 근대 철학의 발전을 이룬 데카르트적 이성은 정신에서 주어지는 관념적 형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정신이 산출하는 형상들에 대한 인식이 최고의 인식인 것이다.데카르트에게 이성은 과정을 자신 안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공동감각의 추론이라 부른다. 인간 정신의 구조에서 아르키메데스적 점의 발견으로인한 보편적 세계관의 혼란을 해결하는 방법은 정신 자체의 준거점을 인간 자신 안으로 채택하는 것이었다.
40.아르키메데스의 점조차도 보편적 회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가설이 만든 인공 현실을 표상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자기 정신 안으로 인간의 도피도 불가능하다.
41.데카르트적 회의로 말미암아 초래된 결과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위계의 전도이다.행위를 통해서만 진리와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실성은 스스로 행하고 그 활동을 통해서만 검증될 수 있다는 본질을 가진다.근대 철학에서 객관적 진리란 항상 움직이는 감각 지각들이며 부단히 움직이는 정신의 산물이다.
42.제작하는 활동은 하찮은 위치에서 부상하여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사물의 본질은 존재하게 된 `방법`이라는 제작 과정이 지식의 실질적 대상이 되어야하고 따라서 과학의 대상은 자연이나 우주가 존재하게 된 역사여야 한다는 점이다.역사는 인간활동의 산물만을 다루기에 인간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사물에만 관심을 갖고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인간이 세계를 만들고 지배하는 기술의 확립은 자기 독해를 통한 자기 반성이 가장 인간적인 것을 만들고 판단하는 기준과 규칙을 가지게 된다.
진리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관조는 장인의 작업이 형상에 의해 이끌어지는 한에서 제작에 내재하는 요소로 여겨진다.따라서 관조와 관조적 삶의 개념과 실천을 형성한 것은 철학자와 무언의 철학적 경이가 아니라 변장을 한 제작인이었다.
43.제조업자와 제작인은 최고의 인간 가능성으로 고양되었다.삶 내의 위계의 전도는 과정의 개념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제작자이자 세계 건설자로서 인간은 고정되고 영속적인 기준과 척도들을 박탈당하였다.세계사물이 유용성을 고려하지 않고 산출하는 생산 과정의 부산물로서 그 가치가 이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가치의 상실은 유용성이란 원리를 대상의 사용이 아닌 생산 과정과 관련짓는다.이제 생산성을 자극하고 고통과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 유용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궁극적 척도는 유용성이나 대상의 사용이 아니라 `행복`이다.
생산이나 사물의 소비에서 경험되는 고통과 쾌락의 총계를 의미하는 행복은 실제 성취하려고 생각했던 것이 개인의 삶의 증진이었으며 나아가 인류의 생존 보장이었다.
항상 삶 자체가 모든 것의 준거점 역할을 하는 최고 기준이 된다.
44.다양한 인간조건과 능력 내에서 삶이 다른 모든 요소들을 지배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개별적 인간 생명의 불멸성에 대한 기독교의 믿음이었다.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삶을 시작하는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지상의 삶도 영원한 삶의 부분이고 시작이다. 자신이 삶에 구속되어 있다는 그 이유로 인간과 자연의 노동하는 신진대사인 삶 자체는 능동적으로 될 수 있고 자신의 완전한 다산성을 펼쳐보일 수 있다.
45.개인의 생명이 가멸적으로 되고 도래할 세계에 대한 확실성을 상실하자 근대인은 이 세계가 아니라 자신에게 내던져졌다. 근대 후기에 사회적 삶과 사회화된 인간을 강조하자 남겨진 것은 예속되어 있는 삶의 과정 자체의 힘이다.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모든 활동은 어떤 활동으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나타난다.과정들을 야기한다는 의미에서 행위의 능력과 본래 가지는 계시적 성격은 인간 실존에 의미를 부여하여 빛을 발하게 하는 원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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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나남신서 72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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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광기의 역사

굳이 광기를 미친듯하다고 표현한다면 우린 살다보면 때론 그런 기분이나 감정에 휩싸일 때도 있지 않나. 광기를 이렇게 가까이 두고 있구나 하고 이 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난해하다.정신병에 대해서 나열한 부분을 수월하게 읽게 되니 정작 깊은 성찰을 요하는 부분 마저 쉽게 가고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익숙하지 않은 단어의 조합도 있어 맥락을 찾아 나가기 힘들다.
˝광기의 역사˝는 말 그대로 변천사다. 물론 광기를 인식하는 의미도 크지만 사회 경제적으로 구조적으로 윤리적인 이유로 수용해서 격리하고 또는 의학적인 견지에서 치료하는 150년 동안 광인이 변화하는 과정이다.아니 광기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이성적(?)이기에 광기는 깊게 생각하기 어려운 주제였고 읽는 내내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아쉽게도 결론을 이끈 마지막장을 서둘러 읽어 꼭 다시 봐야겠다. 끝으로 가면 왜 이렇게 서두는지..

1-1. 광인의 추방, 유배 그리고 문학에 등장, 진실의 풍자
1-2. 17세기에 구빈원이라는 수용시설은 왕권과 연결된 시민통제의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다. 빈민은 도덕적인 가치를 잃고 노동의 의무를 저버리는 무위도식은 신에 대한 반항이었고 단죄를 내려야 했다. 거기에 광기는 자연스럽게 무위도식의 윤리적 단죄의 인식에 해당되었다.
1-3. 나병환자 수용시설이 성병환자로 채워지고 걸인 방탕자 시기꾼 광인이 수용된 공간은 사회적 합목적성으로 완결되었고 모든 광기는 혼란된 성에 뿌리를 둔다. 고전주의 시대 초기에 방탕 불경죄 신성모독죄에 위중한 형벌로 단죄했으나 점차 유죄선고가 줄어든 이유는 그 중간 단계에서 범죄행위가 도덕적 책임 곧 윤리적 관점에서 행해지는 죄의식의 내면화가 이루어진다. 즉 비이성의 영역에 위치한다.
이렇게 수용함으로써 이성과 비이성의 통일성은 깨지고 단절되며, 비이성은 인간의 감정, 욕망, 속박된 본성으로 규명짓고 교정되어야 할 질병으로 규정된다.
1-4. 광기에 대한 의식은 중세에 개인으로서 독립적인 존재이고 친숙한 인물이었으나 고전주의 시대에 비이성의 일반적 이해 속으로 사라진다.
광기를 두가지로 고찰하면 법적 주체로서의 인격과 관련해서 법의 맥락에서 해석하느냐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과 관련해서 사회적 실천에 종속되어 있느냐 이다. 따라서 19세기의 정신병리학은 정상인을 법적 주체와 동일시하는 체계이고 광인은 우리 문화에 의해 수용의 사회적 명령과 권리주체의 능력을 판별하는 법률적 인식 사이의 접점에 놓는다.
1-5.광기의 동물성은 도덕적 속박과 제어된 비이성의 체제 안에 광인을 억류하게한다.
2-1.17세기 광기는 이성에 의한 존재고 그 속에서 소외된 존재이나 18세기에 관점이 변화되어 실증적이며 부정적인 이성과의 관계이다. 즉 비이성이다. 그러므로 광기는 질병의 논리적이고 자연적인 영역으로재구성되었다
2-2.광기에 속하는 본질적 구조 정신착란의 도출은 해부학적인 원인과 정념에 빠진 무너진 이성이다.
2-3.
2-4.
3-1. 개인의 형성뿐만 아니라 인류의 다양한 변종 출연을 가능하게 하는 ˝침투력˝. 광기는 자신의 본질에서 벗어난 자기 자신을 상실한 사람이다.
3-2. 내적으로 광기는 광포함에서 이성을 상실한 이들로 인식을 바꾸고 광인의 수용이 경제 사회적인 이유로 점차 축소되며 빈민의 구제가 사회적인 문제에서 사회인의 의무로 바뀌고 있다.
3-3.광기에서 수용의 철폐는 광인을 다루는 비인간적 물리적 속박에서 병자로서 제한된 공간으로 바뀌고 광기는 인식의대상으로 지위를 받았지만 스스로는 통제되는 자주성을 잃었다.
3-4.은거처는 광인들을 치유하는 공간으로 처음에는 정신이상을 소멸시키는 획일적 법제영역 도덕적 통합의 장소로 체계화된 작업의 수단을 사용하였지만 모두 폐기하고 의료인을 포함시켜 신적 지위를 부여하고 재판관의 역할을 주었다.
3-5. 광기는 내밀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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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 도덕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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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
나도 이젠 제법 나이가 들었지!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면 젊었을 때야 무엇인지 모를 기대와 설렘이 가득하겠지만 지금이야 이런저런 생각에 정리도 하고 후회도 하면서 젊다는 것 빼곤 부족하지 않다고 혈기를 부려보겠지만 왠지 모르게 허무할거야.
도덕과 가치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려 떠난 여행은,
그저 나에겐 그런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 만 그득하다.
내가 뱃전에 선듯한 설레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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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 -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서설 파라디그마 Paradigma 8
미셸 푸코 지음, 김광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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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
와우! 진짜 힘들다. 읽으며 밑줄치고 이해 안되서 또 긋고 간추리며 또 그으니 책 전체를 줄친게 되버렸다. 제대로 읽고 정리라도 한건가 싶다.이 책은 장이 넘어가도 이론이 계속되니 겉으로나마 이해하지 못하면 그 때부턴 건성이 되버린다.그래도 나름 열심히 읽었다.
사실 이전에 인간학을 가볍게 읽었고 의미를 많이 갖진 않았는데 푸코는 이 서설로 내가 책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지 의심케 했다.
노철학자가 인간학을 25년동안 강의한 이유를 비판 철학 과의 비교를 통해 그 의미를 일깨우는 책이다.칸트의 `비판` 을 알면 이 서설을 흥미롭게 볼 수 있겠다.
단순히 세계에 대한 대중적인 인간의 인식을 고찰할 뿐아니고 비판 철학과의 관계를 깊이있게 성찰했다.
아래에 간추린 부분을 붙인다.
◇요약.
삶을 준비하는 세계에 관한 인식의 구성은 획득된 모든 지식과 숙달,실용적인 요소들을 제공한다. 또 자연과 인간이 속하는 전체와의 관련성 속에서 고찰 되어야 하며, 양자는 전체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배치된다.
칸트는 인간학을 다른 문헌과 동시대적으로 저술하고 있는데 드러나는 부분은 비판철학적 사유와 인간학적 반성였다. 연구는 대상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것이고 이것은 초월적 반성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인간학은 이용의 상호성 안에서 자유와 사용이 이미 묶여 있는 영역(집합체에 대한 탐구는 자연과 자유가 뒤얽힌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이 그것들을 서로 비교 평가하는 유희의 통일성 안에서 상호 종속되는 영역, 문화의 규정 안에서 세계가 학교가 되는 영역을 탐구한다(인간에게 고유한 문화 안에서 세계라는 학교를 인식하도록 가르친다).
인간학의 연구 대상으로 세계 안에 거주하는 인간인 세계 시민을 제시하므로 인간에 대한 인식이고 그 분석은 마음이라는 내면적 차원을 주로한다. 칸트가 건축술 ˝일반적인 인식들을 하나의 이념 아래서 체계적으로 통일하여 학문을 형성하는 방법˝로 확립하는 이성적 경험적 심리학은 인간학을 대체 할 수 없다.검토해야 하는 것은 마음 자체이다. 마음은 정신인데 그 존재는 인간 안에 생기를 주는 원리이다. 생기는 마음에 이념이 가득한 운동을 일으킨다. 여기서 도출된 결과는 마음 안에 존재하는 정신이 마음을 초월하는 자유와 총체성을 부여하고 진정한 인간학은 오직 실용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성립시킨다.
정신은 이성의 순수 사용인 초월 철학을 벗어나 칸트 사상의 핵심이 될 진리가 될 수 있다.
인간학과 비판의 반대되는 모습. a.주체성을 예로 든다면 비판은 잡다의 종합을 순수한 이성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면 인간학은 지각과 주의력의 종합으로 구체적 실존에 대한 성찰이다. b. 능력들의 분할을 말할 때는 비판이 능력을 확실성의 영역에 지속적으로 준거하여 의미를 부여한다면 인간학은 자신의 중심과 정당성으로부터 멀어지고 부당하게 자신을 상실하게 되는 영역을 나타낸다. 즉 조건 지어진 것이 가질 수 있는 근거를 갖지 않음과 근거 짓는 활동의 조건 지음의 비교이다. c. 인간학의 요소론과 방법론은 비판과 일맥상통해서 마음의 총체성을 형성하는 구조인 다양한 능력을 다루고(요소론), 뒤이어 인류 안의 민족 혹은 인종에 속한 가족의 일원인 개인에게서 능력의 실행 규칙을 다룬다(방법론).두 부분은 비판에서 조건들의 차원(능력)에서의 가능한 것과 구성된 차원(현상)에서의 실제적인 것으로 서로 구별되는 것들은, 인간학에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연속된 것으로 주어진다.요소와 방법 이론이 서로 반복되며(내면과 외면은 의존하며 인식된다) 인식과 실존이 규정하는 선험적인 영역은 가깝기도 멀기도 한다.
비판과 인간학의 관계 파악은 경험적 심리학의 제한된 체계를 수용해야 하는 인간학이다. 순수 철학은 인간학을 다루지 않지만 광범위하게 두가지 영역은 균형을 이룬다.
1.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3.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4.인간이란 무엇인가?
위 세가지 질문이 비판 철학적 사유 구성이면 네번째 질문은 인간학적 주제로의 전환이며 이것은 사유의 단절이 아니고 인간을 세계에 속하는 인간으로 규정하며 세계의 일부로서 나의 존재는 세계 존재이다.세계는 모든 실제적 존재를 포함하는 현실적 체계안에 주어지기에 세계는 실존의 근거이며, 실존을 포함하면서 실존을 제한하는 동시에 자유롭게 하는 원천이다. 단지 인간학적 질문은 세 물음을 반복하면서 자신과 관련된 질문을 제기할 뿐이다.이러한 상호 관계의 체계를 통해 진리와 자유의 상호적 초월성이 정초된다.
인간학은 자신이 체계적인 동시에 대중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학에서 지성에 의한 판단은 시간상에서 주어지고 진리는 시간의 영역 자체에 따라 형성된다. 시간은 비판에서 직관과 내감의 형식에서 주어진 것의 잡다라면 인간학은 자기 자신과 관련된 종합적 활동의 분산이다. 주어진 것으로서의 방식이 아닌 철저한 규정에 대한 가설과 보증을 제공하는 본질적 가능성이라는 방식으로 종합에 작용한다.
종합의 작용으로의 활동은 자유의 형태지만 진리의 작업을 오류의 가능성에 연결하는 위험한 자유로서 그 판단을 인위라 불리는 수동적이고 불확실한 행위로 대체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비판에서 시간과 주체의 관계는 인간학의 시간과 인위의 관계에 대응한다.
인식의 시작인 무엇과의 관계는 위의 세가지 질문의 반복이 진리와 자유의 연결로 인위의 작업이 진실된 시간안에서 반복된다.
체계성에도 불구하고 인간학은 대중성이어야 한다. 대중적이기 위해서 인식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인간들의 개념과 취향과 성향에 대한 인식에 기초해야만 한다. 인간학은 대중적으로 존재하고 인식하기 위해 언어에 의한 말함인 언어의 토대가 있어야한다. 이런 관용적 언어의 관계망 안에서 세계 안의 인간의 보편적인 거처를 형성한다.
인간학에 의해 시작되고 그 시작 자체에 의해 벗어난 초월 철학은 마지막 저작 ˝유고˝에서 그 체계를 신,세계,인간 이 세가지 용어를 칸트 사유가 지속되는 힘인 원천,범위, 한계라는 개념과 근본적인 관계를 통해 철학에 위치시키기도, 인간학의 내용으로 밝히기도 한다.
여기서 모든 철학의 기획은 철학적 성찰과 인간학적 성찰과의 분할을 극복하려고 한다.
확실히 철학적 영역의 해체는 이뤄지는듯 하지만 결국 근원적인 것에 대한 성찰이 ? 근원으로 되돌려졌다.
인간학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인간학`은 단지 인간에 대한 학문 혹은 인간에 대한 전체 학문들에 관한 학문이나 지평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그것의 인식을 정초하고 제한하는 것에 대한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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