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당신


언제부턴가 인터넷에 '우츄프라 카치아'에 대한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퍼지기 시작했다.
이 식물은 결벽증이 심해서 누가
만지기만 하면 말라 죽는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만져주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식물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꽃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상하게도 사람은 어떤 사람에 대한 실상을 알고서도
계속 사랑하는 이유는 그 허상(虛像) 속에서
자신의 위선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가상의 황당한 스토리지만
알고 보니 그 꽃은 결백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너무 고독(孤獨)해서 죽는다는 그 점이
현대인과 많은 공유점이 있었기에
감동(感動)을 주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돈 버는 일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외모는 물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오직 상품성을 높이는 수단이 되어버리는 동안
부끄럽게도 이 사회는 중년(中年)층에서 가장 높은 자살율과
세계 최고의 이혼(離婚)증가율이라는 일그러진
슬픈 자아상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심령의 샘은 말라가고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은 힘을 잃은 채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 삶의 방식들은
우리를 더욱 외로운 고슴도치로 만들었던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홀로 있다고 느껴지는 고독(孤獨)이 아니라,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진실한
정(情)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극한의 외로움이다.

이상하게도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외로움은 그와 정비례하여 점점 커져만 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로움을 달래 줄 대안
물들을 본능적으로 찾게 되었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애완동물을 선호하나
대화를 할 수 없기에 2% 부족한 외로움을
채워주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또 인터넷을 통해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한다.
가상공간은 많은 사람과 상대할 수 있으나
그 때가 지나면 또 홀로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고독한 현대인들을 위한
서비스업종은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하고 있는 추세며 훨씬 다양해질 전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들로는 본질적으로
외로움을 해결할 수가 없다.
본질적인 대안이 있어야만 외로움과
공허함을 극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 수가 있다.





첫째는 자아(自我)를 회복하는 길이다.

‘소외(疎外)’라는 현대인의 정신적 질병은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원초적 고통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이것을 달래기위해서
여러 대상을 통해 몸부림쳐보지만,
몸과 그림자는 하나이듯이 사람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는 통과 의례와도
같은 것임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만약에 이 의식들을 제대로 지나가지 않으면
일평생 두려움과 분노, 우울증이라는
거짓자아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살인마 유영철은
외로움이 살인의 동기였다고 했다.
범죄자들은 이렇게 한결같이 어릴 때부터
부정적 자아가 형성됐고 그 반감을
사회에 투사시켰던 것이다.

의식(意識)이 현실을 만들듯이
외로움은 회복되지 못한 자아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정신치료라는 것도 자아를 강화시켜주며,
부정적인 자아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어 온 많은 어려움들은
상대방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신 안에 있는 문제가 주 요인이었다.

곧 자아상이 바로 서있지 못할 때
부정적(否定的)인 자기형상이 만들어지면서
대인 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치므로 자신과의 관계가
타인과의 관계의 열쇠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흉보고 정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열등감 환자라는 점에서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상처받은 내재아이(Inner child)를
치유하는 길은 먼저 내면 속의 욕구들을
바로 이해(理解)하고 감사와 사랑으로
본래의 참자아를 회복해야만 한다.





둘째는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영화 'AI'는 자식을 잃은 부모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로봇 아이를 입양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로봇이 사람의 외로움을 어찌 달래겠는가.

80대 노인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죽었고,
혼자 사는 60대 노인이 자실한지 사흘
만에 발견된 사건이 있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만으로는 살아갈 수없는 존재다.
외로움은 집착(執着)으로 변하고
집착은 관계 속에서 병(病)으로 나타난다.


죄(罪)는 세계관에 영향을 주면서
모든 제도와 모든 관계에 파급이 미친다.
그 중에서 이웃과의 관계가 가장 문제시 되고 있다.

오래 전에 읽었던 부버의 ‘나와 너’에서
‘나와 너’라는 인격적 만남과 ‘나와 그것’이라는
물질적 관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이제야 바로 알 것 같다.

문제는 이 두 관계 형성에 따라
삶의 양상(樣相)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는 참다운 인간존재란 더불어 살아가는
인격적인 관계형성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나와 그것’이라는 비인격적인 도구적 관계가
더욱 팽창하기에 외로움은 더욱
깊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아 회복은
이제 가정과 이웃으로 확장되어야만 한다.
관계회복이란 모든 것을 사랑할 때에만 가능한 것은
사랑이 곧 관계회복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 가족만큼 약자(弱者)인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며 보살피는 일은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셋째는 절대자와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개그맨 김형곤 씨가 운동 중 돌연사 했다.
남에게 웃음을 주었던 그는 정작
부인과 이혼하고 아들은 유학 보낸 후
혼자 많이 외로워했었다고 동료들이 전했다.

아이러니한 일은 남에게 기쁨과 쉼을 주는
서비스업에서 우울증 발병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현대인의 허무와 무의미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누구 말처럼 신(神)의 상실에 있다.
인간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찍이 칸트도
신을 떠나거나 부인(否認)하면
삶의 절대규범과 가치도 부정하는 결과가 되므로
인생의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고
그렇게 교훈했던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한대 해도
그 자체만 가지고는 인간소외의 본질적인
대응책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은 인간 스스로는 소외극복이
전혀 불가능한 것을 아시고 그를(HIM)
이 땅에 보내 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던 것이다.

종교(Religion)란 '연결하다, 재결합하다' 의미인데
인간 스스로 절대자와의 끈을 놓아버리고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를 통해 재결합이라는 선물을 주셨던 것이다.

부버가 말한 ‘나와 너’의 관계란
인격적 관계의 근원으로서 나와 너,
즉 신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의 제자리를 찾아야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래 전에 비밀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누설한 경우가 있었다.
돌아가신 부친께서는 이것을 대단히 나무라셨다.
그때 내가 말했다.
"제가 비밀을 누설한 사람에게 주의를 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부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자기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막지 못하면서
어찌 남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느냐?
남을 막는 것과 자기를 막는 것 가운데 어느쪽이 더 어렵겠느냐?
조심해야 한다."

- 呻吟語 / 뤼신우 저 (박인용 옮김)의<세상을 보는 지혜> 중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IMAGE 1 =-



팀웍의 조건


한국 야구가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을 꺾는 기적(?)을 보면서 느낀 것은
“팀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용병이로구나” 하는 사실이다.
용병을 하려면 인화가 필수적인 조건이고, 인화는 리더가 덕장이냐 아니냐에 의해 좌우된다.
덕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인화가 어렵고, 인화가 깨지면 각자가 지닌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
오히려 유능한 사람도 무능해지는 경우가 있다.
더구나 이번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출전팀은
모두 국가대표팀으로 선수 하나 하나가 내로라 하는 수퍼스타들이다.
이들이 각자 지닌 역량을 어떻게 발휘하게 하느냐가 팀장의 숙제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 서로 믿어야 한다.
인간적인 신뢰 없이는 양보가 불가능해지고 서로 고집 부리면
팀장이 타이밍에 맞는 용병을 할 수 없어 팀웍이 마비된다.
조직이 유연성을 보이지 못하고 경직되면 스포츠에서는 끝이다.
팀웍이란 어떤 것인가. 헤밍웨이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잘 그려져 있다.
폭파전문가인 미국 대학교수 조던은 스페인에 파견되어 집시 게릴라들의 안내를 받지만
결국 자신이 리더가 되지 않으면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힘으로 팀을 장악하지 않고 인간적인 면으로 어프로치 하여 집시들이 자신을 믿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조던은 의심 많은 집시 두목 파브로에게서 충성심을 얻어내는데
성공해 마침내 오합지졸을 데리고 능력 이상의 임무를 수행해 낸다.
명령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리더 자신이 잘 나가고 있는 조직을 오히려 망치는 경우도 있다.
소설 ‘삼국지’를 보면 용장인 장비가 의형제인 관운장의 원수를 갚으려다 어처구니없는 최후를 마친다.
부하들이 장비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지시사항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그를 죽여버렸다.
이 때문에 전세 전체가 뒤바뀌게 된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장으로 꼽히는 노부나가도 마찬가지다.
참모를 믿지 못하고 모욕적인 망신을 준 것이 부하 손에 죽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리더의 고집과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의 비극이다.
스포츠에서도 기술보다 인간적인 신뢰가 우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독들이 경기에 임하면 깜빡한다.
중간 보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신이 모든 상황을 판단하다가 일을 그르친다.
어떤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월드컵 축구 때 히딩크 감독의 용병술에서 목격했었다.
히딩크는 타이밍을 중요시했다.
사람을 아무리 잘 써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이번 WBC 야구대회에서 한국팀의 김인식 감독이 보여준 용병술은 히딩크의 것에 못지 않은 탁월한 경지의 감각이었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국가나 회사에서도 누가 누구를 만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구성원들이 리더를 믿는 인간신뢰의 풍토만 성립되면 성공은 저절로 따라온다. 한국 야구팀이 보여준 것은 승리가 아니다. 어떻게 승리를 만들어내었나 하는 과정이다.
한국팀이 어떻게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는 지금 미국 야구계의 화제다.
무엇보다 제일 놀란 것은 한국인들 자신이다.
“저 사람들 한국팀 맞아?”라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인화가 형성되면 내가 나에게 놀라는 기적이 일어나는 법이다.


이 사
clee@koreatimes.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