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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운명은 있다

‘타임머신’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 소년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미래의 여러 세계를 두루 구경하고 다시 현재의 집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영화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영화를 통해 본 미래의 장면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느 집 거실 한쪽 서가에 꽂혀 있던 책들에 대한 장면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간 소년이 서가에 꽂힌 책을 꺼내면 책들은 모두 꺼내는 족족 먼지가 되어 바스라져버린다. 나중에는 서가가 무너지고 책들이 모두 먼지로 화해버린다. 책은 이미 좀이 쓸고 썩어 책의 형태만 유지한 채 그대로 서가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폭삭 사그라지는 책의 소멸을 보며 몹시 충격을 받았다. “미래엔 책들이 없어지다니! 미래의 사람들은 책이 없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니!” 하는 충격에서 잠시 동안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나는 그것이 처음엔 미래는 책조차 필요없을 만큼 행복한 세계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미래인들의 행복을 역설적으로 책의 소멸을 통해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실제로 그 영화에 나타난 미래인들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몹시 행복한 모습이었다. 책의 소멸 따위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나신에 가까운 옷을 입은 채 술을 마시며 서로 껴안고 사랑하고 섹스를 즐기기에 바빴다. 일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먹고 사랑하고 행복하다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곰곰 생각해보면 그 책의 소멸 장면은 미래의 행복보다는 미래의 불행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책조차 버리고 살게 된 미래인들의 불행한 모습, 정신의 괴로움보다는 물질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미래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통해 현재인들에게 책의 소중함을 경각시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은 책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으며, 책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책이 없으면 돈이 없는 것과 같다. 돈이 없으면 배가 고파도 밥을 먹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이 없으면 마음의 배가 고파도 그 배고픔을 달랠 길이 없다. 나는 육체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지만 마음의 배고픔은 더 더욱 견딜 수가 없다. 무엇이든지 읽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지 못한다.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인간인 것처럼 때가 되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책은 인간이다. 책에도 운명이 있다. 시대는 급속히 과학화되고 정보화되어 책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제 곧 이 지상에서 종이책이라는 매체의 한 형태가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고, 또 전자종이와 전자책의 등장으로 그런 조짐도 보인다. 그러나 과연 책이 사라진 세상, 책이 필요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책을 읽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나는 단연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날이 바로 인간의 죽음의 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책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다.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인간은 영혼을 잃게 될 것이다. 책은 인간 영혼의 한 구체적인 모습이다. 인간의 영혼을 찾아볼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책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순수한 영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책은 인간의 영혼의 먹이이자 모유다.

 

가야산에서 열반한 성철스님도 책이라는 모유를 통해서 큰스님이 되었다. 성철스님의 법력이 높고 깊은 것은 일찍부터 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열 살이 되기 전에 사서삼경 등 모든 경서를 독파했으며, 청소년기엔 서울 총독부 도서관을 찾아가 책읽기에 대한 갈증을 풀었으며, 읽을 책이 다 떨어지자 다시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 중앙도서관과 동경대학 도서관에서 몇 달씩 책에 파묻혔다. 당시 수백마지기의 땅을 팔아 불교 서적만을 사들였던 천석꾼 김병연 씨는 자신이 사 모은 책들을 읽고 이해할 만한 사람을 찾고 있다가 성철스님에게 아낌없이 그 책을 전부 물려주었다. 결국 성철스님이 입산 출가를 결심한 것도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우연히 노승이 지나다가 그에게 영가대사의 <중도가> 한 권을 주었는데, 그는 그 책을 받아 읽고 심안이 밝아짐을 느껴 ‘시원한 것이 여기 있구나’ 하고 결국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책은 한 인간의 일생과 영혼의 모습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책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워질 수 없다. 그래도 인간은 책을 읽을 때가 참으로 아름답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인간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면, 책을 읽는 노인의 모습 또한 아름다운 모습이다. 햇살이 따스한 뜰에 나와 손자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의자에 앉아 돋보기 안경을 끼고 책장을 펼치는 노인의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도 가끔 한 권의 책이라는 인간이 되고 싶다. 이른 아침 창가로 햇살이 스며들 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한 권의 책. 시집이면 더 좋겠다. 시집이 되어 사랑하는 여인의 책상 위에 놓여 봄햇살을 쬐고 싶다. 나를 넘기는 여인의 손가락과 눈빛의 향기를 마음껏 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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