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세에 버몬트 주 산골에 30만 평의 땅을 샀다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라, 그 땅을 모두 정원으로 가꾸었다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라, 매달 매 계절마다 새로운 꽃이 피고 과실이 열리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라, 그 정원을 일평생 가꾸었다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라, 타샤 튜더의 태도가 부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알아채고 더 좋아하고 더 배우고 계속해서 고민하고, 그러는 동안 타샤의 애정과 손길을 느낀 정원이 보상이라도 하듯 다채롭게 생명력을 뿜어내는 것이 말이다.
모든 일에는 과정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안다. 과정이 좋았더라도 결과가 꼭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세상을 살면서 너무나도 다양하게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타샤가 기대한 결과는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YES or NO가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되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책에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부지런한 타샤로부터 가꿔진 정원과 타샤, 함께 살고 있는 코기가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걸 보면서 경외심이 일었다. 이게 되는구나. 고작 사십여 키로의 무게의 아흔 살에 가까운 여성에게서 이런 정원이 가꾸어질 수가 있구나. 이건 정원을 가꾼다는 것을 넘어 나를 창조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정원이 곧 타샤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책을 읽는 도중에 나는 내가 기르고 있는 (혹은 알아서 길러지고 있는) 식물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없는 동안에 j가 열심히 물을 주었지만 내 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인지, 혹은 관심을 덜 받아서 그런 건지 주눅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고 잎을 조금씩 만져주고 영양제를 주고 물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전날보다 싱싱해보이는 건 단지 기분탓일까? 그래도 고마웠다.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봐주는 것 같아서.
타샤처럼 넓은 정원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타샤처럼 부지런하지도, 끈기가 있지도 않고 매 순간마다 애정을 줄 자신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몇십 분의 일의 텃밭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마음만 앞서서 결국 황폐해지는 땅을 바라보게 될 확률이 더 크다는 것도. 집에는 나만의 텃밭이 있다. 그 작고 평평한 텃밭에는 상추를 심어두었고 오늘도 열심히 자라고 있다. 아직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텃밭은 고작 이만큼의 작은 것이지만 점점 더 넓어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