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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문화를 읽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 동녘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 더 넓게는 인문학적 소양에 대한 밀린 숙제 같은 짐이 항상 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 시대 30대는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다양하게, 어디까지 깊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답답해했다. 나는 철학을 모르고, 철학은 어려운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철학을 안다, 철학을 한다라고 이야기하려면 오랜 세월 유구히 전해 오는 그 많은 고전들을 다 읽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많은 양에 압도되어 계획도 규모도 없이 기회 닿는대로 순서없이 마구 읽다 지쳐 자빠지고, 나가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최근 적절한 길잡이를 찾아, 10년 공부를 다짐했다. 열하일기의 허생은 마누라의 바가지에 10년 공부를 다 하지 못하고, 자리를 털고 집을 떠났지만, 나는 10년 공부 득도의 길을 멈추지 않고 기필코 가보리라 주먹 꽉 쥔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이 책 <철학, 문화를 읽다>를 만났다.
<철학, 문화를 읽다>는 '글머리에'- 이 책은 우리 주변의 다양한 문화 현상에 대해서 그것이 우리의 의식과 실천, 또 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반성해 보는 안내서입니다.- 에서 밝혀 두었듯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 13명의 교수가 일상 속 12가지 주제에 대해 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짧은 보고서 형식의 글 모음이다. 12가지 주제는 인간, 인간관계, 성 차별, 정치, 대중음악, 소비, 건강, 환경, 속도, 종교, 가상, 전통문화 등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1989년 창립되었고, 철학을 기반으로 한 연구자들의 자기 성찰과 실천적 모색을 통해 철학의 대중화를 지향하는 전문가 단체다.
인상적이었던 주제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1장, 군자에서 시민까지 - 유가적 인간과 근대적 인간
철학적으로, 고대 아테네의 시민 의식과 중국 선진 시기의 군자관은 그들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 중 군자는 간단히 말하자면 도덕성을 갖춘 인간을 의미한다. 공자는 주나라 초기에 주공이 정립한 질서 체계를 인간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규범이라고 생각했고, 성인(聖人)은 이런 도덕적 내용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인간을 의미하며 이런 일은 덕과 재주가 평범한 인간보다 뛰어난 인간이라야 할 수 있는데, 그를 '군자'라 정의했다. 그에 반해, 공공의 질서 의식이 약하고 개인의 이기심을 강하게 추구하는 인간은 '소인'이다. 또,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시민'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중시하며, 이성의 공적 사용을 전제로 하는 합리적인 질서 의식으로 건강한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인간상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는 '현상보다 현상의 배후에 있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려는 유가의 군자관에 사유 재산 인정이라는 현실에 발을 디디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시민의식을 조화시킨 인간'이라고 결론 짓는다.그런데, 대승의 의미가 강하며 소수의 엘리트 의식이 묻어나는 군자관과 소승의 의미가 강한 시민이 만날 접점이 필요한데, 책에서는 공적인 의로움을 바르게 함으로써 사적인 이익도 발생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들었다. 이것은 군자관에서 사적 이익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민의식과 이를 맞출 희망의 틈이 되어준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개인의 사적 이익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것이어야 하며, 사적 이익이 공적 의로움을 해칠 정도로 소수에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인 조건이 붙는다.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 보자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인간상을 이해하고,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시민 개개인이 그 인간상이 되기엔 버겁고, 지도자로 나서는 이에게는 이런 모습을 원하고, 하지만, 지도자로 나서는 그 자도 공익과 사익이 부딪히는 그 지점에서 의연히 이성을 지키는 이가 흔치 않아, 전반적으로 '군자관+시민의식'의 조합보다는 '소인관+시민의식'의 조합이 어울리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속 내지는 가이드라인을 도출해 합의하고, 지도자도 대다수의 시민도 이런 철학적 도덕적 성찰의 기회를 자주 가진다면 점진적으로 성숙해가는 시민사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철학적 도덕적 성찰의 기회를 자주 것은 교육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고, 교육과 현실이 지금처럼 별개가 아닌라 유기적으로 긴밀히 연결이 되고, 교육의 큰 모토가 '이런 성찰을 통한 이상적 인간상 형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4장, 386에서 촛불 문화제까지 - 생활과 거리의 정치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다. 정치사에 대해서도 잘 모르거니와, 모르다 보니, 그 들의 싸움이 그저 시끄러울 뿐이라서, 무색무취의 정치관을 갖고 있었고, 우리 나라는 결국 보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탄섞인 중얼거림 밖에 뱉을 줄 모르는 나였다. 다소 진보적인 분위기가 강한 이 장에서 조목조목 철학적인 논거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전개되어 지금까지 지금까지 두루뭉술 하게 생각했던 것이 많이 명확해졌다. 또한, 연일 각계 인사들이 현 정권의 행보가 민주주의 퇴보를 지향한다고 개탄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해대는 현 시점에서 크게 공감할 부분이 많았다.
'박정희 신드롬'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무능력, 역사적 경험이 짧은 한국 민주주의의 허약함이 야기한 일종의 퇴행적 군중심리다. 이 현상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첫째로, 민주 세력이 개혁과 복지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수층의 거부를 압도하지 못했고 또 현실적 대안 제시를 통해 국민을 설득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므로 주목해야 한다. 둘째는, 아직도 국민의 정서에 참여와 책임, 공동체 정신과 연대의 문화가 자리잡지 못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므로 주목해야 한다. -p.78
2007년 대선 직후 <<문화일보>> 여론조사 결과다. 국민의 67퍼센트가 바람직한 우리나라의 모습으로 '사회복지가 잘 갖추어진 나라'를 들었다. 예상밖의 결과다. 심지어 엊그제 한나라당과 이명박을 찍은 '나는 보수'라는 사람 중에도 64퍼센트가 우파 슬로건인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좌파의 목표인 '사회복지'의 구현을 희망했다. 비록 투표는 한나라당에 했지만 정당의 이념으로는 피설문자의 51.1퍼센트가 진보정당, 녹색정당의 비전에 동의한 것이다. 이런 이율배반을 어떻게 설명하고 또 극복 할 수 있을까.
바로 그 동일한 피설문자가 사회복지를 위한 세금 인상에는 무려 98.3퍼센트가 반대했다.이명박 정부가 공교육을 파괴하고 사교육을 부채질한다고 욕하면서도 막상 공교육 정상화, 무상교육 확대의 전제인 'OECD 수준으로의 세금 인상'에는 모두가 반대한다. 국가 비전은 진보당이 옳지만, 내 집값 때문에 뉴타운 개발 정책을 내건 한나라당을 대거 찍은 국민들의 단견과 무임승차 심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뿐인가. 촛불을 지핀 학생과 시민의 절대다수가 여전히 박정희를 우리 민족 최고의 지도자로 꼽는 어지러운 현실이다. p.81
바로 내가 항상 어리둥절하고, 적응하기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어리둥절 이해하기 힘든 일들에 대해, 어지러워 하지만 말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걸 민주주의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며 강조했고, 나는 기어이 설득당했다.
9장, 증기기관차에서 KTX까지 - 시간체험과 공간 이동
이 책에서는 가속에 대한 현대인의 열광 내지 맹신을 '속도의 파시즘(현대 문화철학자 비릴리오)'이란 단어를 쓴다.
속도의 파시즘은 가속의 매트릭스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 더욱 불행한 것은 자신이 그러한 매트릭스에 포박당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삶의 상황에 경종을 울리는 용어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가속의 극한은 어디이며, 시,공간 압축의 최종 상태는 어떤 것인가? p.195
세대를 거듭하며 첨단을 달려온 과학 기술이 결국은 속도를 높여 시,공간 압축률 높이기 위해서였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존재의 속도가 가속화 되고, 지나간 세월의 기억, 즉 모든 개개인의 정체성의 내실을 느린 것으로 변질 시켜 버렸다.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속울 통해, 더 빨리, 더 많이 무언가를 해내고 가짐으로써 행복해졌는가? 하는 비판이다. 그리고 심지어 숭배의 대상이기까지 한 속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관성이 되어버린 우리 자신의 사고 맟 감각 체계에 대해 냉혹하게 반성해 보자고 이야기 한다.
정말 공감하는 이야기이다. 항상 하루를 시작하며 다이어리에 빼곡히 매 시간 할 일, 갈 곳, 약속 등을 적어 놓고, 정해진 시간 안에 다 해치워야지만, 그 날 하루가 알차게 보내진 것 같은 강박 속에서 더 알찬 하루, 더 보람된 하루를 위해 한 줄 스케쥴의 동선이 전국으로 세계로 까지 뻗어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다 가속 기술 덕분이고, 그 뿌듯함 속에 점점 속도의 파시즘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한다, 결국은 자신의 행복마저 저당잡히고서 그 여유와 행복 언제 찾아다 쓸 것인지 계획도 분명치 않은 버는 것 같지만, 큰 테두리 안에서 사실은 밑지고 있는 장사를 우리 모두 열광하며 하고 있다는 걸 꼭 찝어 주어서 옆구리가 정말 아팠다. 그러게 항상 사색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그 합리의 바탕을 큰 생각, 큰 철학에 두어야 겠다.
이렇듯 이 책에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알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지나치는 생각없음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함께 생각해 보자고 각 장 끝에 관련 영화나 책도 소개하고, 생각해 볼 문제들도 제시하고 있다. 하나하나 대답해 가다 보면 놓치고 있었던 많은 것들을 찾게 된다. 중학생 이상이라면 누구라도 읽어보고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책의 구성방식은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도 제격일 것 같다. 꼭 필요한 생각거리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께에 비해 상당히 많은 시간을 들여 진지하게 읽은 책이다. 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