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내게도 토끼가 와 주었으면 - 메마르고 뾰족해진 나에게 그림책 에세이
라문숙 지음 / 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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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으면서 무의식중에 정말 따뜻한 글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랑색 글씨와 초승달이 장식하고 있는 표지를 살짝 걷어내면 샛노란 표지가 다시 나를 맞는다. 봄빛을 닮은 노랑색은 책을 펴기도 전에 어린시절 그 어디쯤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어릴적 좋아하던 색이었지만, 어리고 풋풋했던 어린시절을 지나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즈음에는 마음에 쏙 드는 노란색을 발견해도, 나이든 사람이 주책이라는 주변의 핀잔이 두려워 슬그머니 내려놓곤 하던 색이다. 봄을 기다리는 지금 다시 만난 노란색 표지가 나를 어린시절 그 어디쯤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냥 무작정 기분이 좋아진다.

가벼운 마음으로 사진과 그림으로 가득찬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어른이되고 나서는 막연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는다. 어른은 그림책을 보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옆에 있는 것 만으로 위로가 되는 토끼를 기다리는 테일러처럼, 나에게도 그저 평화롭게 가만히 나를 위로해 주는 토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삶의 장면이 바뀔때마다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책을 읽는 시선이 유연해 지고 있음을 말하는 작가님처럼 말이다. 나도 한때는 그림책의 주인이었을텐데...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그림책을 포기해버린건 아닌지 모르겠다.

"테일러가 자기 안의 혼란과 낙심과 분노를 풀어 완전히 녹여낼 때까지, 그리고 용기를 얻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때까지 토끼는 테일러 곁을 떠나지 않는다." (p.41)

대부분은 시끌시끌하게 사람들속에 있기를 좋아하지만, 관계속에서의 곤함과 무신경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을 때면 종종 혼자만의 시간을 바라게 된다. 항상 함께하는 것도, 항상 혼자인 것도 정답은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세상의 날카로움에서 버티는 것보다, 의자 한켠을 내어준 곰씨처럼 내 코가 빨개졌다고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혼자'와 '함께'는 동시에 있을 수 없지만,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다. 오히려 '홀로'와 '함께' 사이를 빈번하게 오갈수록 우리는 더 강해지고 우아해질지도 모른다." (p.59)

내가 두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사셨는지 알게 된다. 우리 엄마도 자유롭게 봄날의 거리를 걷고 싶으셨을텐데 말이다. 저혼자 큰것처럼 철없는 나를 위해 봄날의 여유로움을 포기한 엄마 젊은 날이 짠하다. 엄마가 되고나서 당연하지 않은 당연함을 강요받고, 스스로 선택하게 되는 나의 봄날이 조금은 안스러워진다. 하지만, 아이는 마음은 내 젊은 날의 안스러움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사랑스럽다고 여기게 되는걸 보면,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엄마인가 보다.

"아이의 온갖 '처음'을 기대하며 가슴이 벅찬 엄마, 아이에게 온전한 세계이자 놀이 친구인 엄마, (중략)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공부를 포기해야 했지만 그 아이가 자신에게 짐이아니라 행운의 부적이라고 얘기하는 엄마" (p.185)

매번 다르게 읽히는 그림책처럼, 매번 다르게 느껴지는 세상을 사는 방법을 도란도란 이야기 해주는 것 같다. 때로는 그 누군가의 토끼가 되고 때로는 나를 위로해 줄 토끼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오늘밤 외롭지 않은 꿀잠을 잘 수 있게 나의 배갯머리를 지켜줄 토끼를 기다리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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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탐정 애니메이션 코믹북 1 엉덩이 탐정 애니메이션 코믹북 1
고은문화사 편집부 지음 / 고은문화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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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크리스마스 즈음, 한참 스팽글 변신티셔츠가 유행할 때의 일이다. 두 형제를 키우고 있던 옆자리 동료가 엉덩이 탐정 캐릭터 스팽클 티셔츠를 찾느라 투덜거리고 있었다. 기억하기에 분명히 크리스마스 선물로 2벌을 겨우 샀다며 이야기 했었는데 아니 왜 또 같은 티셔츠를 찾느냐고 의아해하는 나에게 지친 듯 말했다. 무적의 4살짜리 아드님께서 매일 엉덩이 탐정을 찾으셔서 마르기도 전에 입고가겠다고 아침마다 전쟁을 치르다 힘들어서 결국 포기하고 한벌 더 구입하기로 했다면서 4살짜리 아들의 고집을 욕(?)했던 어이없는 기억이 있다.

여하튼 엉덩이 탐정은 아기의 뽀얀 엉덩이를 떠올리는 얼굴과 그에 어울리지 않은 새초롬한 표정의 묘한 어긋남이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엄마들이야 '이 표정뭐니?'라고 해도 아이들에게는 워낙 인기있는 캐릭터라 아이도 책을 받자마자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

이번에 받은 엉덩이 탐정 애니메이션 코믹북은 뿡뿡! 코알라 양의 대활약과 뿡뿡! 위험한 발명품 2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이런 다음권 나오기를 기다려서 구매해야하는 시리즈가 또 하나 늘어나겠구나하는 생각으로 아이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한다.

엉덩이 탐정 사무소의 구성원부터 견공경찰서 그리고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활약하게될 주인공들이 소개되어 있다. 서로 좋아하는 캐릭터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 한다. 아이들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는 '꺼리'를 만드는데 캐릭터만큼 좋은건 없다. 강아지를 키우고 있어서 견공경찰서 구성원들에 대한 대화가 길어빈다. 우리집 강쥐도 말티즈인데 서장님도 말티즈네!

자! 이제 하나의 단서로 사건을 해결하는 천재 탐정~ 엉덩이 탐정의 활약을 만나보기로 합니다. 브라운과 숲속에서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고 있는 엉덩이 탐정은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는 느낌을 받는데!! 그리고 그때 나타난 엉덩이 탐정의 왕팬 코알라양은 브라운을 쫓아내고 엉덩이 탐정의 조수가 되고 싶어 하네요~ 과연 코알라양은 엉덩이 탐정의 조수가 죌 수 있을까요??

이야기의 중간에 펼쳐진 문제는 아이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만화책에 등장하는 캐릭들과 함께 풀어보는 문제로 gogo!

만화책의 중간중간 미션이 숨어 있어서 아이들과 미션을 해결하는 일도 즐거움도 놓치지말아야 하는 즐거움이다.

이어진 2편에서는 TV에서 봤던 말티즈 서장이 후추공에 쫓기는 실감나는 장면을 즐기면서 엉덩이 탐정에 빠져들었다. 미로를 비롯해서 다양한 문제가 있어서 휘리릭 넘기기만 하고 집중해서 읽지 못하는 만화책의 단점을 꽉 잡아준다.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소리지르기 '뿌우우우웅~~~'과 함께한 즐거운 책읽기였다.

부록으로 함께온 미니컬리링북은 엉덩이 탐정의 캐릭터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즐거운 시간으로 이끌어 준다. 코로나19로 집에 꽁꽁 묶여 있는 아이에게 잠깐이나마 즐거운 시간을 줄 수 있는 엉덩이 탐정 코믹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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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수의 시대 - 펭수 신드롬 이면에 숨겨진 세대와 시대 변화의 비밀
김용섭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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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서 2030세대를 넘어 나 같은 40대 아줌마들 마음까지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 펭수! 처음 등장의 목적이었던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에게는 2030 만큼의 신드롬을 일으키지는 못한것 같지만, 어느 땐가 부터 카카오톡 이모티콘의 대부분이 펭수얼굴과 엉덩이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당연한듯 '펭하!'를 외치고, 평소 관심도 없도 ebs 사장님의 이름까지 온국민이 알게한 대단한 펭귄. 그가 바로 펭수다.

"사실 펭수는 재미있고 웃기는 캐릭터가 아니다. 펭수를 2030 밀레니얼 세대가 적극 지지하는 것은 펭수의 외모 때문이 아니고, 펭수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듯 거침없이 사회와 기성세대에게 바른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p.28)

딱히 미디어에 큰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조차도 세대를 넘나들고 직급을 넘나들은 사이다 발언에 홀딱 반해 버린걸 보면 우주대스타를 꿈꾸는 펭수가 대세로 자리잡은 것은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이들을 타켓으로 하고 있는 캐릭 치고는 딱히 귀엽지도 않을 뿐더러 심지어 친절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펭수'가 등장할때마다 속이 뻥뚫리는 것 같은 쾌감을 느끼곤 하는 걸 보면 우리의 남극펭귄 입담은 최고라 할 수 있겠다.

내가 펭수에게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어느 인터뷰를 보고나서부터 였다. '나는 힘든 사람에게 힘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힘든데 힘내라면 힘이 납니까?' 오호~ 펭수다운 말이다. 영혼없이 힘내라고 위로를 건내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말이 아닐까 싶은 문장이다. 맞다. 힘들어 죽겠는 사람에게 힘내라고 하는 말은 힘들어서 죽든 살든 내 알바 아니고 그냥 견디라고 던져주는 말뿐인 위로다. 이런 말뿐인 위로 말고 그냥 무심한듯 어깨를 두드려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라는 펭수의 조언이 마음에 닿는다.

아무튼,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구나에서 펭수구나!로 바뀐 사건이후 이어지는 펭수의 활약은 나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2030 세대를 넘어 간혹 4050대의 고루한 꼰대같은 발언도 서슴치 않는 펭수를 보면서 세대간의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세대간에 툭 터넣고 부딪히지 않아서 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40대 중반의 나는 X세대를 대표하는 세대다. X세대가 등장했을 때도 지금의 밀레니얼만큼이나 핫했다. 버릇없고 자기중심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서태지의 난 알아요를 좋아하는 세대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어떤가. 시집살이도 해본 시어머니가 며느리 시집살이를 시킨다고 기성세대들과의 세대갈등을 그렇게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니얼들과 수시로 부딪히며 세대갈등을 토로하는 대표적인 세대가 그때의 New generation X세대 들이다. 인간의 나이로 10살 그리고 20년 정도를 수명으로 하는 펭귄의 나이로는 중년인 펭수는 어쩌면 세대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우주대스타'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유난히 '나이'와 '직급'에 집착한다. 어디서 어느 누구를 만나든 제일 먼저 묻게 되는 것이 나이다. 왜일까?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새로운 집단에 들어갈때면 제일 먼저 나이를 궁금해하고 나이에 따라 나의 태도를 결정하곤 한다. 지극히 꼰대스러운 모습이다. 그런면에서 펭수를 만들어낸 ebs 자이언트 펭TV의 구성과 그들의 모습이 새롭다. 균형잡힌 성비와 수평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고리타분하기 짝이없는 ebs에서 우주대스타 펭수를 만들어 낸 원동력이되지 않았을까 싶다.

"개성이 강점이 되는 크리에이터가 보고 싶은 곳은 모두 가 보고, 해 보고 싶은 것도 모두 해 본다." (p.202)

펭수의 경제적 가치와 의미에 대해 어렵지 않은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는 글이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펭수 캐릭터에 대한 경제적 가치와 부가가치 창출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 우연히 등장한 아니 자이언트 펭TV 제작진의 끊임없는 노력에 힘입어 등장한 무례하기 짝이없는 자이언트 펭귄 한마리가 퍼트리고 있는 선한 영향력이 쭉 이어지기를, 앞으로도 펭수가 초심을 잃지 않고 2030과 4050을 아우르는 우주대스타의 면모를 지속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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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웃는 남자 (186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빅토르 위고 지음, 백연주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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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괴물, 추한 구경거리, 난 웃는 놈"

웃는 남자의 저자 빅토르 위고는 고전을 잘 읽지 않는 나에게도 익숙한 작가다. 가벼운 책읽기를 좋아하는 탓에 슬쩍 밀어버리게 되는 고전은 그저 교과서에 실린 단편적인 내용과 책 제목 정도만 기억하고 있는 분야다. 하지만, 부쩍 공연관람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요즘, 웃는 남자를 비롯해 오래전 아무것도 모르고 관람했던 파리의 노트르담, 레미제라블 등 대형 뮤지컬 원작이 많은 빅토르 위고는 고전 무식쟁이인 나에게도 반가운 작가다.

나는 두껍고 무거운 고전을 책으로 먼저 만나기 보다는 생동감 있는 공연을 보고 난 후 책으로 읽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긴 호흡의 고전을 2~3시간의 현장성 있는 공연으로 줄거리와 느낌을 이해하고 난뒤,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책을 읽는 것은 공연관람과는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간혹 반대의 방법으로 책을 읽고 난 후 영화나 공연을 보면 대부분 책보다 허술하게 녹여낸 스토리에 실망하곤 한다.

아쉽게도 웃는 남자는 공연관람이 가능한 시간대가 대부분 피켓팅이라 불리는 마의 시간대라 공연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에 온갖 공연정보와 인터넷 짤 들을 섭렵한 작품이다. 2018년 초연이후 지난 3월초까지 공연됐던 뮤지컬 웃는 남자는 슈퍼주니어의 규현을 비롯한 쟁쟁한 스타들의 출연으로 공연을 좋아하는 여심을 흔들어 놓았던 작품이다.

186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으로 출간된 이 책 또한 고전에 대한 나의 이미지를 절대 바꿔 줄수 없다는 듯, 1000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두께와 심지어 표지 색깔도 붉은 색인지라 완벽한 벽돌책의 위용을 자랑하며 나에게 도착했다. 긴 호흡으로 읽어야 겠다는 생각부터 들게 하지만 소장용으로 너무 예쁘다. (책을 읽는 것보다 책꽂이 전시용 사심이 먼저 생긴다) 워낙 여러군데 책을 놓아두고 여러권을 동시에 읽는 습관과 벽돌의 무게를 감안해서 붉은 벽돌책 ‘웃는 남자’는 자기전 나의 즐거움을 책임지기로 하고 침대 머리맡에 자리를 잡았다.

웃는 남자 그웬플렌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귀족이 아닌 약한 사람들에게는 악몽 같았던 17세기 영국, 귀족들의 무료한 삶의 가벼운 유희를 위해 고통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어린아이들을 사고 팔고, 납치해서 인위적인 기형을 만들어 공급하는 잔인무도한 집단 콤프라치코스가 존재하고 있다.

"콤프라치코스는 어린아이 장사를 했다. (중략) 그 아이들로 무엇을 했을까? 괴물을 만들었다. 왜 괴물을 만든 것일까? 웃기 위해서였다." (p.48)

초반의 여러 페이지를 길게 장식하고 있는 우르수스. 그는 길들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순한 늑대 호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곡예사를 비롯해 의사, 복화술사 등 때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는 캐릭터로 사람을 싫어하지만 유독 그윈플렌과 데아만은 끔찍하게 생각하는 따뜻한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삶이 끔찍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 주고 백성을 짓누르는 것은 군주, 군주를 억누르는 것은 전쟁, 전쟁을 짓누르는 것은 흑사병, 흑사병을 덮치는 것은 기근이다" (p.46)

웃는 남자의 주인공 그윈플렌. 그는 어린시절 콤프라치코스에 의해 입의 양쪽이 길게 찢어져 흉측하게 웃는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와 같은 우르수스, 오누이 같은 연인 데아, 늑대 호모와 함께 정착하지 못한채 이도시 저도시를 유랑하며 공연을 하고 있다. 흉측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순수한 인성과 출생의 비밀을 품고 있는 인기 있는 광대로 유혹을 쫓아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우르수스와 데아의 곁을 떠나지만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깨닫고 절규한다.

"어느덧 성장한 그윈플렌은 기이한 미소 덕분에 유럽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광대가 되고 그의 공연을 본 앤 여왕의 이복동생 조시아나는 그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다." (뮤지컬 웃는 남자)

때로는 오누이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는 그윈플렌의 연인 데아는 아름다운 모습을 지녔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외모를 이유로 다가오지 않는 그웬플렌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만 출생의 비밀의 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불구와 기형이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다가가서 서로를 품어주고 있었다.사랑받는다는 것. 그곳이 전부 아닌가?" (p.519)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어둡고 험한 세상의 끝에 서로의 사랑이 닿아 있지만 신은 끝내 그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정말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가볍지 않은 역사적 사실과 함께 서술되는 무거운 스토리는 역시나 쉽게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어마어마한 양에 지쳐서 뮤지컬 화면을 찾듯 살짝 살짝 건너 뒤며 읽었지만, 언젠간 다시한번 꼼꼼히 읽어보겠다는 생각과 함께 붉은 벽돌책을 책장에 곱게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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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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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사건을 다룰 때마다, 항상 생각나는 말이 있어. '인생의 화와 복은 마치 꼬아 놓은 새끼줄 같다'는 말. (중략) 수십 명의 인간이 한 일. 즉 악의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선의, 배신이나 과실에게 일종의 의무에 충실한 행동이나 모범적인 행위도 모두 함께 꼬이고, 다양한 인간 활동이 섞이고 얽히고 설켜, 그것이 어떨 땐 원죄가 되기도 한다는 말일세" (p.469)

화를 부르는 것과 복을 부르는 것이 꼬아 놓은 새끼줄 같아서 화와 복의 원인이 되는 그 무언가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같은 출발점에 있음을 무겁게 암시하고 있다.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시간의 조작이 화와 복을 부르고 있다는 의미인건 아닌지... 제목과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광활한 대지 위에 저택 금어전의 넓은 주방, 다른날과 달리 귀가할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딸아이를 기다리는 미키코의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때 걸려온 한통의 전화, 금어전의 주인 와타나베 쓰네조가 받은 전화는 말없이 끊어져 버리고... 곧이어 걸려온 전화는 금어전의 외동딸 미카의 몸값을 요구한다. 오로지 미키코와의 통화를 요구하며 몸값을 주지 않으면 미카를 없애버린다고 협박한다. 납치, 협박, 신고 그리고 살해, 범인검거 평범한 유괴처럼 보여지는 이 사건에는 살인사건 못지 않은 어두운 부조리가 존재한다. 힘없고 약한 사람은 잘짜여진 그들의 판에서 살인자가 되어 일상을 빼앗겨 버린다.

"그자의 분노를 모리타 자신과 경찰이 아니라 범인에게 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범인이 강에 1억 엔을 떨어뜨리라고 지시한 시점에 이미 와타나메 미카를 살해했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즉, 미카의 사망 시각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앞으로 실시된 시체 검시와 감정,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p.92)

사건의 단서를 조작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조작되는 증거와 심문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겁에 질려 살인현장을 목도하고도 숨겨버린 평범한 청년 고바야시 쇼지를 살인범으로 몰아간다. 철없던 어린시절 저질렀던 전과와 사건현장을 보존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조직을 위해서는 잘못된 판단임을 알고 있음에도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아버린다. 정의를 지키는 것을 가장한 부조리의 민낯일 뿐이다.

어린시절 철없던 시절의 단순절도 전과를 가진 지극히 평범한 청년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인범으로 몰아간다. 억울한 누명을 쓰게된 청년의 절규도,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애닳픔도, 딸 아이를 잃은 부모의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도 공권력이라는 미명하에 가뿐히 넘어선다.

숲속에 버려진 가방에서 4천엔을 훔치고, 살인현장을 신고하지 않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실수로 사형을 선고 받은 고바야시에게 마지막 구명의 빛처럼 국선변호인이 나타나지만, 혼자의 힘으로 철옹성같은 부조리를 넘기에는 역부족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얽혀있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작, 돈이 되지 않는 사건에는 소홀한 변호인, 우수하지만 그 우수함은 오로지 조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경찰.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유괴사건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부조리한 조직의 모습에 분노하게 된다.

"이런 불합리한 일로 한 사람의 생명을 없애고도 태연한 사람들. 그런 세상이랄까, 사법제도랄까, 그런 것에 대한 제 오기입니다." (p.357)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한편의 범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은 글이다. 전혀 낯설치 않은 어쩌면 일상에서 쉽게 일어나고 있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장을 보는 것같다. 얼마전 진범 논란을 빚었던 화성연쇄살인범 사건이 떠오른다. 28년이 지난 이제서야 진범이 밝혀지고, 무고한 옥살이를 했던 윤모씨의 재심의가 이루어진다고는 하지만 누명을 벗는다해도 그의 28년은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게 되는건, 힘들지만 조작된 증거들을 하나둘씩 밝혀내고자 고군분투하는 윤리적이고 명쾌한 변호사 윤명 가와이 도모야키가 쇼지 곁을 끝까지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은 여명들이 모여 밝은 빛이 되어, 더이상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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