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원죄사건을 다룰 때마다, 항상 생각나는 말이 있어. '인생의 화와 복은 마치 꼬아 놓은 새끼줄 같다'는 말. (중략) 수십 명의 인간이 한 일. 즉 악의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선의, 배신이나 과실에게 일종의 의무에 충실한 행동이나 모범적인 행위도 모두 함께 꼬이고, 다양한 인간 활동이 섞이고 얽히고 설켜, 그것이 어떨 땐 원죄가 되기도 한다는 말일세" (p.469)

화를 부르는 것과 복을 부르는 것이 꼬아 놓은 새끼줄 같아서 화와 복의 원인이 되는 그 무언가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같은 출발점에 있음을 무겁게 암시하고 있다.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시간의 조작이 화와 복을 부르고 있다는 의미인건 아닌지... 제목과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광활한 대지 위에 저택 금어전의 넓은 주방, 다른날과 달리 귀가할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딸아이를 기다리는 미키코의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때 걸려온 한통의 전화, 금어전의 주인 와타나베 쓰네조가 받은 전화는 말없이 끊어져 버리고... 곧이어 걸려온 전화는 금어전의 외동딸 미카의 몸값을 요구한다. 오로지 미키코와의 통화를 요구하며 몸값을 주지 않으면 미카를 없애버린다고 협박한다. 납치, 협박, 신고 그리고 살해, 범인검거 평범한 유괴처럼 보여지는 이 사건에는 살인사건 못지 않은 어두운 부조리가 존재한다. 힘없고 약한 사람은 잘짜여진 그들의 판에서 살인자가 되어 일상을 빼앗겨 버린다.

"그자의 분노를 모리타 자신과 경찰이 아니라 범인에게 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범인이 강에 1억 엔을 떨어뜨리라고 지시한 시점에 이미 와타나메 미카를 살해했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즉, 미카의 사망 시각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앞으로 실시된 시체 검시와 감정,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p.92)

사건의 단서를 조작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조작되는 증거와 심문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겁에 질려 살인현장을 목도하고도 숨겨버린 평범한 청년 고바야시 쇼지를 살인범으로 몰아간다. 철없던 어린시절 저질렀던 전과와 사건현장을 보존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조직을 위해서는 잘못된 판단임을 알고 있음에도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아버린다. 정의를 지키는 것을 가장한 부조리의 민낯일 뿐이다.

어린시절 철없던 시절의 단순절도 전과를 가진 지극히 평범한 청년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인범으로 몰아간다. 억울한 누명을 쓰게된 청년의 절규도,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애닳픔도, 딸 아이를 잃은 부모의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도 공권력이라는 미명하에 가뿐히 넘어선다.

숲속에 버려진 가방에서 4천엔을 훔치고, 살인현장을 신고하지 않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실수로 사형을 선고 받은 고바야시에게 마지막 구명의 빛처럼 국선변호인이 나타나지만, 혼자의 힘으로 철옹성같은 부조리를 넘기에는 역부족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얽혀있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작, 돈이 되지 않는 사건에는 소홀한 변호인, 우수하지만 그 우수함은 오로지 조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경찰.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유괴사건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부조리한 조직의 모습에 분노하게 된다.

"이런 불합리한 일로 한 사람의 생명을 없애고도 태연한 사람들. 그런 세상이랄까, 사법제도랄까, 그런 것에 대한 제 오기입니다." (p.357)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한편의 범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은 글이다. 전혀 낯설치 않은 어쩌면 일상에서 쉽게 일어나고 있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장을 보는 것같다. 얼마전 진범 논란을 빚었던 화성연쇄살인범 사건이 떠오른다. 28년이 지난 이제서야 진범이 밝혀지고, 무고한 옥살이를 했던 윤모씨의 재심의가 이루어진다고는 하지만 누명을 벗는다해도 그의 28년은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말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게 되는건, 힘들지만 조작된 증거들을 하나둘씩 밝혀내고자 고군분투하는 윤리적이고 명쾌한 변호사 윤명 가와이 도모야키가 쇼지 곁을 끝까지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은 여명들이 모여 밝은 빛이 되어, 더이상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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