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어사 박문수나 판관 포청천처럼 누군가 강력한 직권 발동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악인을 엄벌하는 것을 바란다. 정의롭고 인간적이고 혜안 있는 영웅적 정치인이 홀연히 백마 타고 나타나서 악인들을 때려잡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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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와 체면과 모양새와 뒷담화와 공격적 열등감과 멸사봉공과 윗분 모시기와 위계질서와 관행과 관료주의와 패거리 정서와 조폭식 의리와 장유유서와 일사불란함과 지역주의와 상명하복과 강요된 겸손 제스처와 모난 돌 정 맞기와 다구리와 폭탄주와 용비어천가와 촌스러움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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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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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나 신화를 다루는 책을, 특히 고전을 읽다보면 문체는 매끄럽고 서사 구조는 재밌는데 여성에 대한 서술이 거슬릴 때가 있다.
일리아드 오디세이의 수많은 님프, 여신, 공주는 말할 것도 없고,
반지의 제왕을 봐도 여성은 ‘존귀하고 고귀한‘ 요정 여왕이나 ‘두르굴의 괴물’ 거미로만 묘사되지 않던가.
작가의 상상력조차 우리 세상의 ˝주류의 시선˝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주류의 시선”이 창조한 신화 세계에서 ˝주류가 아닌 마녀˝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최초의 마녀로 언급되는 키르케는 좋아하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질투해서 괴물로 만들고, 유부남 오디세우스를 유혹해서 잡아놓고, 선원들을 섬에 초대해 죽여버리는 여신이다.
아쉽게도 원전에는 키르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여신의 입장 묘사가 거의 없다. 그저 잔혹한 결과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아쉬웠던 공백을 이 책의 작가가 아낌없이 채워넣었다.

사건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상세한 사정을 듣게 되고, 얽힌 인물 모두의 서사를 알면, 사실관계는 여전히 같은데도 얼마나 다른 이야기로 보이는가...

읽으며 너무나도 즐거웠다.
아무래도 고위 신들과 영웅들의 시선보다 마녀의 시선이 내게 더 친숙하다.

이 작가의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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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이 세상을 단 한 순간도 감당 못하겠어.
그럼 아가, 다른 걸 만들려무나.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 형제. 미노타우로스에게 손을 내밀던 아리아드네와 그녀의 목에 남아 있었다는 흉터가 생각났다.
"나도 형제가 있다." 내가 말했다. "내가 그들의 권력을 차지하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아느냐?"
우리는 아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예전과 똑같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신과 공포, 신과 공포.

다행이었다. 나는 그가 화를 내길 바랐다. 그래야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컸다.

제 아버지가 원래 그런 분은 아니었다고. 유모는 계속 이 말만 반복하더군요. 그러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는 듯이.

나와 같이 살던 시절에는 내가 마법과 신의 광휘로 그를 감싸고 이 모든 걸 가라앉혔다. 그가 여기서 그렇게 행복하게 지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목가, 나는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을 그렇게 표현했다. 어쩌면 환상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렸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음모를 꾸미고 버럭 화를 내거나 말거나 제가 그걸 지켜보고 있을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어머니가 하루종일 치즈 한 조각으로 연명하고 눈이 침침해지도록 길쌈만 하거나 말거나 그 역시 지켜보고 있을 필요가 없었고요."

"저를 동정하시는군요. 그러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여러 거짓말을 했지만 저더러 겁쟁이라고 하신 건 맞는 말이었으니까요. 아버지가 몇 년 동안 하인들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때리고, 어머니에게 고함을 지르고, 우리집을 잿더미로 만들도록 내버려둔 게 저였습니다. 아버지가 구혼자들을 죽일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시기에 도와드렸습니다. 그다음에는 그들에게 동조한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시기에 또 도와드렸고요. 그러자 아버지는 저더러 그들과 한 번이라도 동침한 하녀들을 모아서 피로 흠뻑 젖은 바닥을 청소하게 했고, 청소가 끝나자 그들 역시 죽이라고 하셨죠."

고모가 밤하늘을 가로질렀지만 이제 그쪽은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연인들을 감상하는 일이었고 나는 한참 동안 누구의 연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어쩌면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오디세우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돼지우리를 채웠을까? 그가 나에게 돼지에 대해 물었던 그날 저녁이 생각났다. "얘기해주세요," 그가 말했다. "벌을 받아 마땅한 남자인지 그렇지 않은 남자인지는 어떤 식으로 결정하십니까? 이 심장은 썩었고 다른 심장은 괜찮다는 걸 무슨 수로 확신하십니까? 잘못 판단했으면 어쩌고요?"

"나는 모두를 변신시킨다." 내가 말했다. "그들 쪽에서 내 집을 찾아왔지 않느냐. 내가 왜 그들의 마음속을 신경써야 하느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잔을 들었다. "당신과 저는 생각이 같군요."

그는 아이가 둘이었지만 그 어느 쪽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기 아이를 제대로 아는 부모는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보면 우리가 저지른 실수만 거울처럼 비쳐 보일 뿐이다.

누가 이 세상의 모든 아들을 놓고 그중에서 오디세우스의 아들을 골라보라고 했다면 나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 그를 무너뜨린 게 아니었습니다. 그를 좀더 그답게 만들었을 뿐.

그녀는 세상을 잃느니 거기에 불을 질러버리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얗게 소멸되는 것이 나의 가장 오랜 공포였다. 공포의 전율이 나를 관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긋지긋했다. 마침내 지긋지긋했다.

그는 줄이 하나뿐인 하프였고, 낼 줄 아는 음이라고는 자기 자신뿐이었다.

"저한테 더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그냥 제 마음대로 살 테니까 앞으로 자식을 꼽을 때 저는 빼주세요."

저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제 아버지도 아닙니다. 제가 아테나와 조금도 엮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왜 몰라주십니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나를 믿었다.

그녀는 사라졌다, 영영.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참담하고 비통한 심정이 파도처럼 나를 후려치지 않았다. 앞으로는 내 이름의 낙인을 찍고 저승으로 들어가는 영혼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결과가 어찌되든 너에게 진실을 밝히고 싶어서."

"저는 지금까지 당신을 다그치지 않았죠." 그가 말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당신에게는 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아니까요. 하지만?" 그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이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이집트에 간다면, 다른 어디든 간다면 저도 동행하고 싶다는 걸요."

그렇게 불행한 운명을 짊어진 채 무슨 수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약초가 있는 곳으로 간다. 뭔가를 만들고 뭔가를 바꾼다. 내 마법은 그 어느 때 못지않게,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 이것도 행운이다. 이 정도의 능력과 여유와 방어를 갖춘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텔레마코스가 자다 말고 일어나 나를 찾아온다. 내 손을 잡고 풋풋한 냄새가 나는 어둠 속에 나란히 앉는다. 이제는 세월의 흔적으로 우리 둘 다 얼굴에 주름살이 생겼다.
키르케, 그가 말한다. 괜찮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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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프라는 단어에서 우리 미래의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언어로 님프라는 말에는 그냥 여신만이 아니라 신부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남자라면 신이건 인간이건 어떻게든 자기 핏줄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썼고, 아버지의 보물창고는 이미 으뜸 신과도 맞먹을 정도였다. 그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했다.
"적당한 배필을 만날 거야." 그가 말했다.
"얼마나 적당한 배필을요?" 어머니는 알고 싶어했다. 나를 좀더 나은 상대와 맞바꿀 수 있다면 위로가 될지도 몰랐다.

"이리 와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 좀더 괜찮은 아이를 만들어요."

아버지는 자신이 없는 세상을 절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나는 뭐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영광이 극에 달했을 때 인간이 아버지를 보면 어떻게 돼요?" 내가 물었다.
"단박에 타서 재만 남을 거다."
"인간이 저를 보면요?"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체커 말이 움직이며 내는, 대리석이 나무에 쓸리는 그 익숙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재수가 좋은 하루라고 생각하겠지."

그 시절의 내가 그랬다. 줄곧 거기에서 벗어날 기회를 엿보았다고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그 무지근한 고통이 전부라고 믿으며 마지막까지 그냥 부유浮游했던 것 같다.

대담한 짓을 저지른다고 해서 속까지 대담한 건 아니구나.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 그가 말했다.

내가 없다는 걸 알아주는 이가 있길 바랐지만 아무도 몰랐다. 어느 누구도 나는 안중에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돌멩이였다. 수천 곱하기 수천의 어린 님프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었다.

내 인생 자체가 뿌연 심연이었지만 내가 그 어두컴컴한 바다의 일부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안에 사는 생명체였다.

나는 그들과 달랐다.
다르다고? 낮고 우렁찬 삼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생각을 해야 한다, 키르케. 그들이라면 어떻게 하지 않겠는지.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야, 키르케. 나는 아버지에게 마법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얘기하고, 아버지는 내 말을 믿는 척하고, 제우스는 아버지의 말을 믿는 척하고, 그렇게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지. 실토한 누나가 잘못했어. 왜 그랬는지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렇다,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채찍질을 당했을 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내가 그들과 보냈던 그 오랜 시간은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와 같았다. 벌써부터 물결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게 내 유배의 조건이었다. 철저하게 혼자 지내는 것. 다른 누군가를 박탈하는 것보다 더 심한 형벌이 어디 있겠느냐고, 우리 가족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태껏 나는 실이 없는 직녀, 바다가 없는 배였다. 그런데 보라, 이제는 어딜 항해하고 있는지.

이제는 그림자가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림자가 보인다는 건 아버지의 시선이 하늘에서 사라지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아무도 용기가 없나? 어느 누구도 감히 나를 상대하지 못하겠단 것인가?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닥칠 일들을 나름대로 열심히 기다렸던 셈이다.

공포와 경외라면, 하늘을 쳐다보며 무슨 허락이 내려질지 궁금해하는 거라면 지긋지긋한 마음도 있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건, 아마 그들도 몰라서 그랬을 거야.

나는 엎질러진 물을 두고 우는 여자일까 아니면 심장이 돌로 이루어진 매정한 여자일까? 중간은 없었다. 그 두 개가 아닌 다른 반응은 그가 좋아하는 재미난 이야기에 들어맞지 않았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지냈다. 누가 물으면 행복하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잊지 않았다.
내 이름이 찍힌 싸늘한 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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