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세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일이 잦은 편이라, 언어 감각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같은 책을 여러 언어로 읽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몇몇 책은 본래 작가가 써 낸 언어로 적힌 원본이 감칠맛이 더 잘 살고, 어떤 책은… 종종 번역가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속된 말로 ‘초월번역‘이 되어 다른 언어로 쓰인 버전이 훨씬 재밌는 경우도 있다.
아쉽게도 불어는 할 줄 모르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아... 이거 원작을 읽으면 이해가 되려나‘ 안타깝게 되뇌었다. 분명 한글로 쓰여 있는데도 문장 문장 이해가 안 가는 구석이 있어서 였다. 번역가 후기를 읽어보니, 과연, 불어 구사자에게도 난해한 책이라 더 그랬던가 보다.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물체를 더듬어나가는 듯한 모호한 서술 속에서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서술자의 극히 절제된 태도였다.
얼핏 봐도 등장 인물들이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가명을 써서 한 겹 방어막은 쳐두었지만, 만약 당시 작가와 지인을 공유하던 사람이라면 묘사만으로 누군지 짐작할 법 하다. 그러니 작가의 아바타인 서술자 ‘콜레트‘가 말만 잘 하다가도 종종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게 이해가 된다. (무수히 많은 말줄임표들에 처음에는 짜증도 좀 났다. 누가 한창 얘기하다가 끊어버리는 것만큼 신경줄 닳는 일도 잘 없으리라.)
동성애자, 알코올 중독자, 카사노바, 남장여자 등 당시 사회에서 쉬이 받아들여주지 않던 (그리고 아직도 차별이 존재하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조명하는 이야기다보니, 작가로서는 말을 고르고 고를 수 밖에 없었을테다. 그러니 칼같이 유사어 사이에 줄을 긋는 서술로 알려진 작가가 이 책에서는 오감에 의존하는 애매한 서술을 했겠지 싶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저널리스트의 르포나 다큐멘터리 노트를 읽는 느낌이었다.
작가는 스스로 책 속의 다른 인물을 바라볼 때 ˝이건 콜레트가 보는 시각이야, 사실과 다를 수 있어˝ 라는 감각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책 속 ‘콜레트‘가 어떤 인물과 가까워지기 힘들어 하면, 독자도 해당 인물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다. 그 인물이 뭘 하는 사람인지, 어떤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지 알게 두지 않는다. 단지 ‘콜레트‘의 오감으로 외모가 어떻게 생겼고, 먹는 음식이 이런 거고, 그 사람 집에 가면 어떤 냄새가 난다, 라고 철저히 관찰자의 독백만 듣게 된다. 독자들이 쉬이 서술자에게 동화되어 서술자의 의견을 마치 ‘사실‘처럼 생각하게 만들지 않게 노력한 게 눈에 과할 정도로 띈다. 마치 신경 써서 쓴 저널리즘 글처럼.
"여긴 누구 집인가요?" 나는 물었다. "사실 저도 몰라요." 샤를로트가 말했다. 화가들을통해 여길 알게 됐어요. 누구 집인지 알고 싶으세요?" "아니요." "당신이 그런 걸 물어봐서 놀랐어요... 내가 누구 집에 와 있는지 모른다는 건 참 유쾌한 일이죠..." - P24
남자가 성적 쾌락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 여자들에게 품는 적의, 나는 여자가 이런 식의 적의를 지닌 모습을 결코 본 적이 없다. - P36
"맞아요. 그이를 기다려요.. 하지만 그이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제 말을 이해하시는지 모르겠지만..." 99 "이해하는 것 같아요." "제가 부득이하게 거짓말만 안 해도 된다면, 그토록젊은 남자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 P30
분명 나는 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 쾌락의 분배자, 충분히 보상받지도 못하고 (그가 원한다 해도) 아마 단한 명의 여자도 행복하게 해 줄 능력이 없는 남자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다. 다미앵 역시 그가 무한히 신뢰한쾌락에 의미를 부여할 때 그만의 방식으로 ‘너무 멀리갔다. 만인의 연인이었던 그의 성적 능력에 대한 강박은 사실은 성적 불능에 대한 강박이 아니었을까? 만약 다미앵이 넓은 아량으로 쾌락의 절정을 연기해 그를 속이는 여자를 만났다면 뭐라고 했을까? 하지만 그 점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필연적으로 샤를로트를 만났을 것이다. 어쩌면 두 번 이상. - P75
성별이 불확실하거나 감춰진 사람이 발산하는 매력은 강렬하다. 그 매력을 전혀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이 남성적 원칙을 배제한 사랑을 향한 진부한끌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크나큰 착오다. - P97
내를 털어놓게 한 걸까? 그녀는 어떤 애매모호함도 없이 사랑이 아니라 쾌락을 이야기했다. 이는 물론 그녀가 자기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쾌락, 한 여자와 나눈 쾌락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과거 다른 여자 친구와의 쾌락을 이야기하며 후회하기도, 둘을 비교하기도 했다.. 육체적 사랑을 말하는 그녀의 방식은 방탕하게 길러진 어린 소녀들을 조금 닮아 순진하고 노골적이었다. - P119
에도르에게 돌아가겠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신이 못하는 일을 그는 할 수 있거든‘ 그야 그렇겠지‘ 라뤼시엔이 표독스럽게 말했어. 아니,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룰루가 발했어. 난 그걸 엄청나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다만 한가지 말해 둘게 우리 둘이서 외출할 때, 식당에 가거나 시골로 여행을 가면, 사람들은 당신이 남자인 줄 알지 그건 좋아. 그런데 내 입장에선 벽에 대고 오줄도 못 싸는남자랑 같이 다니는 게 굴욕적이야‘ 뤼시엔은 거의 모든 것을 예상했지만 이것만은 예상하지 못했지.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녀는 다시는 룰루를 만나지 않았어... 왜 웃는 거지?" - P133
하지만 그들이 말한 순수함은 무슨 뜻일까? 부드러운 껍질 속의 복숭아처럼 싱싱하고따뜻한 소녀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는 행동은 관습에어긋나지 않지만, 만약 복숭아처럼 봉긋하고 발그레한유방에 손바닥을 대고 가볍게 누르거나 들어 올린다면경악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만진 여자를 비난해야 마땅하다고 소리치는 사람들과 나는 싸우고자 한다.. 교양있는 사람들은 순수한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찌나믿기 어려워 하는지! - P159
나에게는 속박과 강요된거짓에 불과했던 시절에 나를 도와줬던 이들은 한 성의 다른 성을 향한 반감은 신경증의 영역 바깥에 있다. 고 설명해 줬다. 이후에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정상인‘의 견해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과거에 나는 나의 괴물들 사이에서 홀로 여자로 있으면서 여자를 배제하는 분위기를 좋아했고 그것을 순수하다고 불렀다. 그런가 하면 나는 사막의 순수함, 감옥의 순수함 또한 좋아했을 것이다. 감옥과 사막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 P187
"당신이 없으면 따뜻하지가 않아요." 어린 시절의 상처들을 장식처럼 매달고 선혈 한 줄기가 반짝이고 최근 얻어맞은 부위가 찌그러진 젊은 남녀들이 내게 말한다. "따뜻하게 감싸 주세요. 낫게 해 주세요!" 그들 대다수가 바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 혼란스러운 머리를 내 무릎에 기대고 기다린다.. 순진한 이들이여! 나는 구걸하던 그 사람들이 실은 스스로가 생명을 주는쪽임을 깨달을까 봐 두려움에 떤다... - P197
플라토닉한 상태를 유지할 때, 사랑으로 인한 질투는 우리에게 꿰뚫어 보는 능력을 일깨우고 모든 감각을 긴장시키고 자기 통제력을 강화한다. 그러나 사랑에 못 이겨 저지른 자신의 범죄에 실망하지 않은 여자가 어디 있을까? "계획할 땐 이보다 아름다웠는데. 카펫에 묻은 피는 항상 이렇게 검고 칙칙할까? 그리고 이알 수 없는 불만족스러움은 뭐지? 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잠든 얼굴은? 이게 죽음일까, 진짜 죽음일까?" - P207
‘순수‘라는 말은 내게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드러낸 적이 없다. 나는 그 말을 연상시키는 기포, 깊은 물, 조밀한 크리스털 속의 닿을 수 없게 자리 잡은 상상의 장소처럼 투명한 사물들을 통해 순수함에 대한 시각적 갈증을 해소할 따름이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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