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고난에 대한 적절한반응은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한 대가로 받게 된 고난이 아니기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은 견디고 인내하는 것 말고는 대처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 P297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평한 기준 그 이상을 가르치고 싶어 하십니다. 오른편 뺨을 맞으면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때리는 것은공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너머를 원하십니다. 옳고 그름너머 아량을 베푸는 넉넉한 수준까지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를 대우하는 방식입니다. "너는 첫째다. 너는 내자녀다. 이 죽어가는 세상과 죄악에 찌든 인생을 내가 어떻게 대접했는가를 기억해라." - P303
신앙생활은 내 인생이 하나님의 인도와 훈련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싸움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고통을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저는 억울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하소연만 합니다. 하지만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기준은 고통의 유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의 성장이며 성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철이 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때는 언제입니까? 자기 자녀를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난 다음에야 깨닫게 됩니다. 비로소 ‘옛말 틀린데 하나 없다‘는 말에 항복하게 됩니다. 공부해야 하는이유를 알고 공부하는 자녀를 보았습니까? 그런 자녀는 없습니다. 공부란 참 이상해서 공부의 필요성을 깨달을 때는 이미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다 지나 버린 때입니다. 원래 그렇습니다. 그래서 공부한 것을 써먹고 싶으면 공부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할때 미리 공부해 두어야 합니다.(부모가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재촉하는 것은 부모는 그 필요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독하리만치 자녀를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 P304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해야 하는괴로운 선지자였습니다. 갈멜산의 임재와 호렙산의 부재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당신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의신앙이 초월성에 집중하느라 자연과 현실이라는 정황을 놓아버리면 텍스트가 담길 컨텍스트는 사라진 꼴이 되어 버립니다. 컨텍스트 없이 텍스트만 홀로 살아 돌아다니면 세상은 ‘설교하고앉아 있네‘ 하며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듯 보이는 현실과 정황 가운데 드러납니다. 부재 가운데서오히려 더 강하게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시는 역설의 신비를 엘리야는 그의 온 삶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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