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할수록 세상은 복잡하고 변화는 쉽지 않다는 점을알아갑니다. 하지만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질문을 포기할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니까요. 합리성은 종종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얼마만큼 있는가로 결정되기에, 기득권은 사회의모든 갈등에서 더 ‘합리적인‘ 주장을 하기 쉽습니다. 근거는 지식의 형태로 존재하고,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자원과 시간이 투여되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가 표준이라고 여기던 몸은 항상 기득권의 것이었습니다.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할 필요가 없던 기득권은 소수자의 몸을 두고 매번 인간의 자격을 따져 물었지요. 그렇게 백인은 흑인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물었고, 남성은 여성이고등교육을 받아도 되는시 따졌고, 이성애자는 동성애지의 존재가 질병인지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질문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향해 던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나는 정상인가? 그렇다면 정상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분리와 격리를 통해 이룩한 평화가 온전한평화일 수 있을까요. 자폐인들을 배제한 공동체에서는 ‘정상적인 몸‘에서 벗어난 인간은 누구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지체장애인도, 성소수자도, 이주민도 "특수학교에 보내든지, 홈스쿨링을 시키든지, 아니면 외국으로 가세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어떤 기준으로 인간의 몸을 서열화하고 열등한 몸을 배제하는원칙을 고수하는 사회라면, 다른 기준으로 ‘열등한 몸‘이 되는소수자들 역시 차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가난해서 음식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과 전문적인 코치에게 훈련받고 좋은 영양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이 같은 출발선에서 달리기 경기를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동등한 기회라 부를 수있다. 플라톤은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만큼 불공정한 일은 없다"라고 말했다. 적극적 우대정책이 없다면 불평등이 계속 유지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고된 역사와 몸 깊숙이 새겨진 상처 말고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지못합니다. 근거는 언어의 형태를 한 지식으로 표현되는데, 그지식의 생산에는 자본과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동권투쟁에 나선 장애인을 비난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모습처럼, 공동체가 오랫동안 누적된 차별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개인에게모든 책임을 부과할 때, 차별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당사자는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와 기회를 빼앗깁니다. 그러한 조건위에서 합리성과 억지를 구분하는 ‘합리적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의 투쟁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연구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관계에 따라서, 그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 합리성은 종종보수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도전하며 판에균열을 만들어 낸 이들이 열어왔다. 많은 경우, 연구자의 언어는 그 변화를 사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회문제 해결은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푸는 대신, 큰 칼을 휘둘러 자르는 것은 칼을 휘두른 이를 영웅처럼 보이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영웅적 결정은 종종 상황을 악화시킨다. 면세점 노동자였던 홍 씨는 과거 회사의 엄격한 ‘꾸밈 지침‘과 관련해 "면세점 직원들은상품보다 빛나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고 한다. 상품을 빛나게 하기 위해 인간이 희생되어선 안 되듯이, 정책을 돋보이게 하려고 주거취약지에 머무는이들의 삶을 지워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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