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거나 선함의 효용을설파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어떤 찰나들을 포착하고 기록하여,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나의 결점을 통해타인의 빈틈을 알아보고 다정한 이해의 눈길을 보냈던 저순간과 같은 그런 알아봄의 경험은 정의를 구현하고 세상을바꾸는 데 하등 쓸모를 갖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일상에서서로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가장 작은 방법이 되어줄 순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채 그럼에도 매일의 발걸음을 떼어놓는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어쩌면 아주 사소한 별것 아닌 것들일지 모른다. - P8
그가 짊어진 돌덩이를 내가 얼마나 덜 수 있을지를 떠나, 적어도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자책의 돌덩이를 하나 더 얹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 역시 예전 그때, 상의드릴 일이 있다며 찾아와서 내면의 돌덩이를 꺼내놓던 나로 인해 놀랐을 누군가에게 이해되었기를 빌었다. 저마다의 돌덩이를 짊어진 채 사회적 관계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나와 당신이 때때로 그 테두리를 뜯어내고 서로에게 ‘듣는 귀‘가 되어주고, 거기에 미안해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가길 꿈꾼다. - P35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만 고유한 의미를 갖는, 내가 살아 있음을 충만히 느끼게 해준 어떤 선율, 어떤 장면, 어떤 냄새나 맛을 생을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찾아들 때그 기억이 수호천사처럼 그대에게 깃들어 다음 걸음을 떼어놓게 해주기를 빈다. - P62
가진 자들이 얼마나 더 소유했는지에 분개하지 않는 나는, 덜 가진 이들이 나만큼이나마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위해 무얼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을 놓지 않으려 한다. 말하자면 그건 ‘만족한 자‘의 윤리적 책무가 아닐까. 이를 저버리는 순간 나는 물욕 없음을 내세우며 안빈낙도 운운하는 배부른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 P100
돌이켜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을 막연히 동경하는것은 상대의 매력과 장점 때문일지라도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연히 보게 된 빈틈을 통해서였다. 누군가의세련된 매너에서 어색함을 감추려는 몸짓을 읽었을 때, 냉소이면에서 뜨겁고 서투른 열정을 보았을 때, 강인해 보였던이가 실은 심약한 ‘새가슴‘임을 느꼈을 때. 가끔 그게 안 되기도 한다. 이해관계가 대립할 경우 누군가의 단점이 빈틈임을 알아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편 아예 빈틈을 찾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이리 보고저리 살펴도 근사하기만 한 거다! 짐작하건대 내 고집스러운 선망이 그의 약함마저 멋짐으로 채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 P182
살아가면서 충돌하는 이의 빈틈을 연민하고, 선망하는 이의빈틈을 알아차릴 수 있으면 한다. 그리고 자신의 빈틈에도조금 너그러운 마음을 품으면 좋겠다.
그 후 나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을 부풀리고 과장하며 주도권을 쥐는 것이아니라, 상대방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의 욕망과 리듬을존중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그러나 받아들이는것을, 하나하나의 선물을 인생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 줄 아는 것, 그리고 자만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은채 똑같은 선물을, 똑같은 기쁨을 상대방에게 줄 줄 아는 것이다. 요컨대 단순한 자유다. 세잔은 무엇 때문에 생빅투아르산을 ‘매순간‘ 그렸겠는가? 그것은 매 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그 모든 비극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나는 안다. 끝이라 생각해온 어느 지점은 끝이 아니다. 거기에 빛나는 것들이 새로이 채워 넣어질 것이다. 두근거리며기다릴 무엇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을 것만 같은 시기에도 우린 저마다 아름다운 시절을 하나 더 통과하는 중일 수 있다. 어쩌면 오늘도 그럴지 모른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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