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 아닌 기억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아버지, 혁명가가 아닌 순간의 아버지, 거기서 어린내가 발견한 것은 뻔한 남자들과 다르지 않은 뻔한 행동이었다. 나이 든 뒤에도 나는 하동집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외로 꼰 채 굳이 외면했다. 내가 외면한 것은 하동댁이아니라 위대한 혁명가의 외피 속에 감춰져 있을지 모르는뻔한 남성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감옥에있었고, 나는 아버지가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위대한 혁명가라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알았을까? 자기보다 한참 어린 막내가 면당위원장인 당신을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다는 걸, 그 자랑이 당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걸, 그게 평생의 한이 되어 자랑이었던 형을 원수로 삼았다는 걸 어쩐지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수시로 작은아버지의 악다구니를 들으면서도 돌부처처럼 묵묵히 우리 집이나 작은집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만 빼끔거렸을 것이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랩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무엇에도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버지가 몇마디 말로 정의해준다 한들 이해할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옳았든 틀렸든 아버지는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 나는 불편한 모든 현실에서 몇발짝 물러나 노상 투덜댔을 뿐이다. 그런 내가아버지를 비아냥거릴 자격이나 있었던 것인가, 처음으로아버지에게 미안했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를 불편하게한 아버지의 동지들에게도 이 불편해하는 마음이 미안했다. 이 순간에도 아버지의 동지들은 목청 높여 아버지와의 인연을, 조국통일에의 열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시집 안 간 딸자식에게 언니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비수가 꽂힐 때 알았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자식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가족을 등지고 사회주의에 몸담았을 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혈육을 뿌리치고 빨치산이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이겠구나. 첫걸음은 무거웠겠고, 산이 깊어질수록 걸음이 가벼웠겠구나. 아버지는 진짜 냉정한 합리주의자구나. 나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들뻘의 남자가 아버지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밤 사이 누군가 제 차의 범퍼를 긁었다는 이유였다. 비싼 월급 받으며 일을 이따위로하나, 범인을 잡든가 당신이 돈을 물어내든가 하라고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으나나는 차마 그 현장에 끼어들지 못했다. 고개 숙인 아버지의 뒷모습을 더는 볼 수 없어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갔을 뿐이다. 나는 왜 학수처럼나서지 못했을까? 내 부모는 평범한 민중이 아니라 위대한 혁명가이니 범한 일상사에 좌우되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에게는 그럴만한 돈도 없고 배짱도 없어 일부러 피했던 것일까?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밤이 더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내가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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