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새롭게 보라고 하거나 창의적으로 그리라고 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관찰하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관찰해보면 세상은 다르게 보입니다. 요즘은 국민시처럼 암송되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도그와 상통할 겁니다. 나무들을 하나같이 고동색으로 몸통을 칠하고 초록색으로 이파리를 그리면 선생님은 혼을 내셨습니다. "세상에 똑같은 나무는 하나도 없단다. 너희들이 그런 것처럼." - P171
기존의 정답처럼,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는 관계 안에서는새로운 세렌디피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세렌디피티를 우연처럼 번역해 쓰지만, 사실 그때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바꿔보면 기존 루틴답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페니실린이든, 아스피린이든, 포스트잇이든,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거든, 하나같이기존의 정답을 거듭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게 된 것들입니다. 세렌디피티란 뭔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아닙니다. 하지만 그냥 우연에만 맡겨진 것도 아닙니다. 저들은한결같이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분야에서 꾸준히 관찰하고공부하고 숙련해온 아마추어 출신의 프로들입니다. 그렇게 축적된 능력이 어느 날 필요한 순간에 튀어나오는 겁니다. 마치 세렌디프의 왕자들처럼 말이지요. 세렌디피티란 이름의 창의성, 그것은 사실 준비된 우연, 어쩌면 그런 이들에게 허여된 필연의다른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 P182
세월은 안으로만 새기고, 생각은 여전히 푸르른 희망으로가득 찬 사람, 그리하여 내년엔 더 울창해지는 사람, 그렇게 나이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어른으로 늙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계속 커가면 좋겠습니다. 늙음은 젊음의 반대말도 아니고, 젊음이 모자라거나 사라진 상태도 아닙니다. 늙음은 젊음을 나이테처럼 감싸 안고 더욱 크고 푸른 나무가 되어 쉴 만한 그늘을 드리우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공부는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겁니다. - P198
이쯤 되면 사랑 때문에 살겠고, 사랑 때문에 못 살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길들이면 다 될 줄 알지만, 서로 다른 두 사람이서로의 방식대로 길들인다는 건 얼마나 큰 갈등의 과정이겠습니까. 사랑은 남이 만들어주는 물건이 아닙니다. 내가 공을 들여길들고 길들여지는 인내의 과정입니다. - P216
이처럼 사랑하다‘는 ‘생각하다‘와 같은 동사입니다. 순간의어떤 열정, 눈멀고 귀가 먼 어떤 상태적인 형용사가 아닙니다. 오랜 시간 열렬히 생각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생각이바다와 같이 넓더라도 출렁이되 넘쳐서는 안 됩니다. 절제와 충만이 함께하는 생각의 바다여야 합니다. 또한 때로는 눈부신 산맥과도 같고, 그러다 슬플 때는 우물처럼 한없이 깊어지기도 하고, 행복의 절정을 맛볼 때는 바르르 떠는 꽃잎처럼 전율도 해보는 것이 사랑이지요. 요컨대 그대 생각으로 내 영혼을 채우는 것이 사랑이란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빈 영혼을 무엇으로 채운답니까? - P222
그래서 사랑은 책임인 것입니다. 오랜 시간 생각하고 함께해온 그 사람을 책임지고, 그 사람에게는 나를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란 말입니다. 부당한 억압이나 고통스러운 책무가 아니라 아름다운 의무이자 권리인 것입니다.그러므로 이기적인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관계니까요. 자유롭고 아름다운 구속이니까요. 오랜 시간 서로길들이고 인내하고 생각하며 책임져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대로 인해, 그대를 위해, 내 스스로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하는 거니까요. - P223
얼음의 온도
허연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얼어붙거나 불에 타는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사, 2012) - P240
아내도 한때는 별처럼 빛나던 신비한 그녀였습니다. 안고 업으며 살았어야 하는데, 사는 게 뭔지 나름대로는 열심히 산답시고 허둥대다가 삶이 힘겨운 만큼 그녀도 무거워지며 자꾸 그녀를 내려놓으려 한 것은 아닌지요. 빈털터리로 시작해, 없던 집과자동차, 알량한 명예 따위를 얻게 된 대신, 그러는 사이 머리는벗겨지고, 사랑, 평등, 신, 자유, 고귀함 같은 가슴속 아름다운 단어들은 다 사위어가며 어느덧 우리는 티끌처럼 작아진 것은 아닌지요. 밤하늘의 별도 쳐다보지 않고, 꿈도 노래도 잃은 채 너무 오래 무심히 살아온 건 아닌지요. 이제는 부부가 서로 마주보며 진짜 사랑을 나누고, 미안하다, 고맙다, 말하건 아니 하건, 잘 키운 자식놈 소식이나 기다리며, 별이 빛나는 밤, 그때 그 사랑의 노래를 불러보면 어떨까요. - P245
누군가를 모델로 삼는다는 것과 그 사람을 닮는다는 건 다른 말입니다. 그 사람을 모델로 자기 자신을 조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인사이더들을 닮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그들과똑같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거면 내가 왜 존재해야 합니까? 그럴 양이면 신께서 그 수많은 아름다움을 다 만드시진 않았겠지요. 삶의 기준은 나 자신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고독하게자신을 사랑하며 가꾸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 기준이야말로 얼마나 혹독한지를 말입니다. - P275
인생에 직진은 없습니다. 있다 한들 아름답지 않습니다. 구불구불 굽이지고 굴곡진 길이 아니었더라면 죽음을 향해 직진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공간인 것 같았던 청산과 무인도가 생명을 살린 것처럼, 그 고독의 경지가 인생의 진경眞景을 보게 해주고 삶과 예술의 진경眞境에 들어서게 해준 것처럼, 에둘러간 곡선이 그리도 고맙고 값진 겁니다. - P291
더딘 슬픔, 그것이 상실에 대한 올바른 애도입니다. 끝내 허무하게 사라질지라도, 생명의 불 꺼지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은 연기로 남아, 무중력처럼,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렇게 잠시 그대와 함께한 추억들을 되새기며, 그대 떠나 텅 비어버린 이 세상의 공백을 채우는 것, 그것이 애도 아니겠습니까. 우리네 짧은 인생에도 그런 정도의 여운과 여백은 허락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애도의 여백도 다 사후의 일입니다. 그리운 사람, 그리워해야 할 사람이라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아니 대숲에폭우가 쏟아지는 밤이라도 그리워해야지요. 너무 늦으면 안 됩니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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