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혼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 줘야지 그 애가 먼저 나에게 시비를 걸었고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 아아 아이의 그 말. 엄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내 편이어야지내게 물어봐야지. 어린이 집에서 왕따 경험을 한 여섯 살 아이가 오랜 시간에 걸쳐엄마의 세심하고 과감한 지지를 받은 후 홀가분한표정으로 했다는 말,
"엄마, 고마워. 나는 이제 자유야."
그게 이 책의 전부다. 정혜신의 공감‘의 핵심이다.
일상에서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으면 짜증이 많아지거나 폭럭저 이로 변하거나 무기력해진다. 마찬가지로 삶의 바탕인 인간관계의 가등들이 해결되지 않고 쌓이면 마음도 엇나가고 삶도 뒤틀린다. 안정년적인 일상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집밥 같은 치유다. 집밥 같은 치유의 다른 이름이 적정심리학이다.
나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게 팩트다. 공황발작은 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버둥거리며 보내는 모르스 부호 같은 급전(電)이다. "내가 희미해지고 있어요. 거의 다 지워진 것 같아요"라는 단말마다. 공황발작의 원인을 생물학적 요인 중심으로 판단하면 증상을 없애기 위해 약물치료에 보다 치중하겠지만, 그러다 보면 공황발작이 의미하는 개인의 심리적 상태에 대한 집중과 해결은 놓치기 쉽다. 사람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이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거침없이 나를 표현할 때다. 모든 아기가 아름다운 것도그 때문이다.
젊든 늙는 우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이젠 알 것 같다. 자기 존재에주목을 받은 이후부터가 제대로 된 내 삶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노인도 그렇고 청년이나 아이들도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지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저 사람은 지금 내가 산소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키는 인증 작업일 뿐이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있으면 사람은 산다.
아이는 아빠에게 "아빠 사랑해, 아빠랑 놀고 싶어, 우리 아빠가 제일 힘세"라는 식으로 아빠라는 존재 자체에만 반응하는 존재다. 아빠의 연봉이 얼마인지, 아빠의 키가 큰지 작은지 상관하지 않는다. 아빠는 아이를 통해 자신이 바깥에서 어떤 일을 하든 한 존재로서사랑받고, 인정받는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은 어떤 당위보다 더 강하게 그의 존재를 자극한다. 제대로 사는 쪽으로 그를 움직이게 만든다.
관계에서의 상처는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경우가많다. 얘는 딱 자기 아빠야, 얘는 딱 어릴 적 나야, 얘는 나랑 정반대야와 같은 말들은 내 아이를 부모와의 연결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내가 아닌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다. 자식을 바라보는 게으른 시선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이런 게으른 시각은 큰 둑의 작은 구멍이다. 결국 둑 전체를 무너뜨린다.
"그래도 계속 만나야 하는 사이인데 그런 상사와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묻는다면 다시 말할 것이다. 질문이 잘못됐다. 상사를 상수로 놓고 나만 변수로 취급하는 불평등한 인식의 구도 안에서 내가 제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상사가 중심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는 질문으로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내 삶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잘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일까."
자신에 대한 성찰을 건너뛰고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일로 넘어갈 방법은 없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자전거의 왼쪽 페달이라면 자기를 살펴보는 일은 동시에 돌아가는 오른쪽 페달이다. 한쪽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 즉시 자전거는 멈추고 넘어진다. 자기에 대한 성찰이멈추는 순간 타인에 대한 공감도 바로 멈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기 성찰의 부재는 공감을 방해하는 허들이 된다.
사람은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자신이 놓인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공감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사람은 믿어도 되는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일한 역할이 그것이다. 온 체중을 다 실어 아이를 믿어주면 그게 어떤 일이든 본인이 오히려 ‘내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는 건 아닌가 열심히 고민한다. 안전하면 입체적이고 온전한 성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관계란 것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홀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 내가 전부가 아닌, 나도 있고 너도 있는 판이기 때문이다. 결론을이미 갖고 있던 그녀가 고심 끝에 던진 질문(혹은 던지고 싶었던 질문)들은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라기보다 자기 결론을 은연중에 전달하려는 의도가 담긴 ‘질문 형식의 조언이나 계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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