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와 권리에 대한 이 이른바 ‘명언‘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선명하게 보여준다. 무언가 베풀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호의로서 일을 하고 싶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의성(시혜성) 자선사업이나 정책은 그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행위이다. 만일 당신이 권리로서무언가 요구한다면 선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까지 포함한다.
다시 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대원칙에 동의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헌법에도 명시된 규범인 평등과 차별금지원칙에 적어도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진 집단은 차별을 덜 인식할 뿐만 아니라 평등을 실현하는 조치에 반대할 이유와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차별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국가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외쳐왔지만 주류로서 자신이 가진 특권을 인식하지 못하여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진보‘ 정치인을 종종 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어디에 서서 어떤 풍경을 보고 있는가. 내가 서 있는 땅은기울어져 있는가 아니면 평평한가. 기울어져 있다면 나의 위치는어디쯤인가. 이 풍경 전체를 보려면 세상에서 한발짝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 알기위해 나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대화해보아야 한다. 한국사회는 정말 평등한가? 나는 아직까지 한국사회가 그 이상향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더 발견해야 할 때다.
메릴린 프라이 Marilyn Frye는 억압의 상태를 새장에 비유한다. 새장을 가까이에서 보면 철망이 한줄씩 보인다. 철망은 하나씩 보면아무것도 아니다. 그 얇은 선 하나가 새의 비행을 방해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새장에서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만 그 철망들이 모여 새장을 이루고 있으며 이 새장이 새를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새장도 뒤로 물러나야 볼 수 있다. "구조적으로 연결된 강압과 장벽의 네트워크가우리의 날갯짓을 방해하고 있음을 말이다. 당신은 차별이 보이는가?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차별과 상관없는가?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성찰은 모든 사람에게필요하다.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지적해주는 누군가가 있다. 면 내 시야가 미치지 못한 사각지대를 발견할 기회이다. 그 성찰의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회질서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며 차별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
하지만 "정치권에 정신장애인이 많다"는 이 유머는 웃기지 않아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럼 다 장애인과 동일시하고 감정이입하는 사람들에게 누가 웃는가? 어쩌면 이 멘트는 정치인들끼리 통하는 유머일지모른다.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는 데 너무 익숙해서 그 말이 장애인에 대한 비하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그 유머 속의 비하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치인들 사이에서 장애인 이 상관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교훈은 분명하다. 때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도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상처를 주는 잔인한 의미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다문화는 낙인이고 차별과 배제의 용어가되었다. 한 중학생의 말처럼 말이다. "종례 뒤 선생님이 ‘다문화 남아!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 도 이름이 있는데 ‘다문화‘로 부르셨다. 선생님이 내가 마치 잘못을 했다는 듯 말씀하셔서 큰 상처를 받았다" 이 장의 글머리에 인용한 아서 골드버그 대법관의 말을 다시 새겨보자. "차별은 단순히 지폐나 동전이나, 햄버거나 영화의 문제가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그를 공공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가 당연히 느낄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의 문제이다."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다.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밀이 우려했듯 이미 우리의 삶은 상당히 획일적인 형태로 굳어져 있다. 그러니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불평등한 세상을 유지하기위한 수고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불편함을 견딜 것인가? 이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수고로움이나 불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공동의 가치와지향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정말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공존의 조건으로서 평등의 의미를생각해보면 좋겠다. 고정된 ‘옳은 삶을 규정하지 않는 이 해체의시대가 버겁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는 인류가 지속적으로갈구하는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왕족이나 귀족이라는 소수가 누리던 자유를 민중이라는 다수가, 그리고 다음 단계로사회 바깥에 놓여 있던 모두가 향유하게 될 때까지 세상은 아직 더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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