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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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무관심하다면, 당장의 불편함과 부당함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그저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루쉰의 철벽상자를 생각한다.  한치의 틈도 없는 철벽의 상자안에서 보충되는 산소없이 자신들이 내뱉은 이산화탄소에 몽롱함을 느끼며 서서히, 그리고 별다른 고통없이 죽어가는 이들을 깨워 일말의 가능성도 없어보이는 탈출을 위해 괴로운 움직임을 권유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그의 고민..



  어쩌면 우리는 이 노장의 시대보다 저항해야 할 명분에 대해 인식이 희박한지 모르겠다.  사실 노장의 투사시대에는 저항해야 할 대상이 분명했고 싸움의 방법이 분명해 보였지만 지금의 자본시대에는 무엇을 대상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엉켜버리기만 하는 저항의 몸짓은 나와 대상을 구분짓지 못하게 하고, 그 모습은 종종 저항이 아닌 합의의 모습으로도 비추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과 무의식속에서 저항하기를 포기해버린 듯 하다. 




  다시금 생각해본다.  내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엔가 저항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지금 당장의 어떤 불편함과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기에 소극적이나마 끊임없는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의 자식들을 위해, 인간다운 삶을 공유하기 위해 저항한다는 명분은 과연 나의 마음에, 그리고 다른 이들의 마음에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강렬함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나의 저항은 내가 바라는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저항인가? 




  그런 고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항한다.  나는 분명 자본의 속성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자본의 한 톱니바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하나의 작은 경제를 이루고 있고, 자본의 구조속에 몸이 뒤엉켜 저항인지 타협인지 모를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씩 자본의 구조속에서 벗어나오려는 나름의 저항을 이어나간다.  무관심을 넘어 분노해야 한다는 노투사의 주장에 동의하며 또다른 저항의 이유를 덧붙이고 싶은 나의 마음이랄까?  그리고 부조리하기에 몽환의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깨워 함께 철벽을 두드려야 한다는 루쉰의 결론에도 함께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너무도 당연한 마음으로 읽어냈다.  저항의 대상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저항해야만 하는 이유가 명백히 존재하기에 당연하면서도 그 이유를 좀 더 분명히 상기시기는 마음으로 읽어내었다.




  하지만 노투사의 주장을 진보연하는 자유주의자들의 공감으로 이어가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자본의 비인간적 속성을 인정하면서, 작금의 상황이 자본의 비인간성 자체에서 기인함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정치사회적 구조비판에만 천착하는 그들의 공감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노투사의 저항을 마음깊이 받아들이다가 뜽금없이 덧붙여진 조국 교수의 글은, '금권'이라 표현했으면 했지 절대 '자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던 그의 글을 읽어나가며 개인적으로는 어색한 마음을 왠지 피할 수가 없었다.  책의 맥락면에서 그의 글이 무리가 될 정도의 어색함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주장하며 정치사회적 현실아래의 근원적 문제를 외면한 그의 조급하면서도 시대현실에 대해 다분히 의도가 느껴지는 글이 나에게는 불편함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노투사에 대한 존경과 감사와 편집자에 대한 아쉬움이 공존했던 책이었달까?  적은 분량이면서도 커다란 의미와 함께 계륵같은 군더더기가 조금 거슬렸달까?  어쨌든 나를 간결복잡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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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 - 노동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는가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가람 옮김 / 이매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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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들의 미소와 친절에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참 기특하게도 고2라는 비교적 어릴때의 시기였다.  그때엔 대전엑스포라는 국가적 행사가 열렸었고, 학교차원에서 단체 관람으로 행사에 가게 되었는데 수없이 긴 줄을 기다려 들어가 체험한 많은 신기한 영상도 그랬지만, 아직도 내 기억에 남는 의문들을 던져준 이들은 당시 신조어와 함께 급부상하던 '도우미'누나들이었다.  정장제복차림의 날씬한 누나들의 흐트러지지 않는 웃음띈 얼굴과 미소, 몸에 밴 듯한 친절은 당시 친절이라는 개념의 변화를 완전히 뒤바뀌게 만든 일종의 변환점을 이끄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 누나들은 자세와 표정만큼이나 마음도 착하고 친절할까?  혹시 속으로는 너무 힘들어하지 않을까?'



  그런 의문은 1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남아있다.  물론 보여지는 친절의 뒤에 그들의 속은 이만저만 타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은연중 깨닫게 되었지만, 제도와 자본으로 굴러가는 사회시스템은 사람들에게 마음과 진심을 다하여 친절하라 교육시키고 강요하기에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억지로라도 친절하게 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조금 엉뚱하고 착각같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에 둘러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생계수단적 자리보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제 주변에 수없이 많다.  대형마트, 백화점, 상가, 시장, 항공기 등등..  이제는 일만 해서는 안되는, 마음과 진심이 담긴 친절을 표현해 내야만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친절을 담는다고 보수가 많아지는 것도 아닌데 친절을 강요당하고, 그런 친절에 익숙해지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된 사람들은 이제 시장이나 동네구멍가게를 '친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볍게 기피하게 된다.




  대표적인 친절직업인 항공사의 스튜어디스를 통해 인간의 감정이 자본의 구조에 편입되며 어떻게 변화를 겪는가를 이야기한다.  강요된 친절은 감정의 왜곡을 낳는다.  일터에서 보인 미소와 감정적 대처가 집에서 자신도 모르게 지속되며 감정적 스트레스가 쌓이고 이는 개인에게 가장 편안하고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집이라는 공간에서조차 마음껏 풀어낼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  또한 모든 감정적 노동을 요하는 조건에서 지속되는, 마음과 불일치하는 표정과 행동의 친절함의 표현은 개인사적 감정과 행동의 흐름에 있어서도 부자연스러움과 혼란을 양산해낸다.




  감정이 자본의 시스템에 편입되고 활용되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보이자 순간 무서움과 울렁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사람들과 종종 그것이 자기의 위엄을 확인하는 기제인 양 행동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왜곡된 당연이 주는 폭력의 존재에 머리를 쥐어짤 듯한 짜증이 몰려온다.  자본은 노동과 감정을 지배했고 이를 통해 추가적인 투자없이 스스로 이윤을 극대화시킨다.  이제 인간의 무엇이 자본의 시스템에 편입이 될 것인가?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차가운 기계부품으로 진화 또는 퇴화하여 가는 것일까? 

 

  번역서의 부담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특히 이런 논문류의 글을 번역하여 책으로 내는 것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아픈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인터뷰 내용을 예시로 많이 배치하여 이해를 쉽게 하고 부담을 줄이긴 했지만, 역시 논문류의 글은 평이하게 읽기에는 부담이 많은 글이다.  나름 관심있는 주제여서 어떻게든 끝을 보기는 했지만, 이런 내용으로 좀 더 쉽고 평이하게 풀어낸 책은 없을까?  친절이라는 개념과 의미에 대한 고민에 더하여 책을 덮으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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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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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민족학이라던지 구조주의라던지 하는 것에 대한 어떤 구체성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저자는 인류학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그런 사람이라지만, 나에게 이 책은 그닥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오래 전에 쓰여진 남미 기행문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밀림을 오가며 만났던 원시부족의 모습들, 여행의 괴로움과 어려움, 낭만등이 복합된, 그러면서도 중간중간에 저자의 생각이 서술된, 어쩌면 너무 오래된 기행문이기에 그닥 실감을 주지 않는지도 모르는 책 속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난감한 마음이 가장 솔직하다면 솔직한 생각이 되겠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기행속에서 바라보는 것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라는 것이 어떤 형태라야 가장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그가 만난 원시부족들의 모습은 산업사회와 자본이 서양사회를 몰아치던 그 시대의 모습과는 달리 원시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들은 삶의 의미를 지금의 우리와는 다른 곳에서 만들어낸다.  그것은 서로의 몸에 문신과도 같은 그림을 그려내는 행위로 삶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을 포함한다.  맨 땅위에 뒹굴며 놀고 잠을 자고, 벌레를 먹기도 하며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가족관계와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원시적 삶의 모습속에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는 지금 우리를 엃매고 있는 자본체제라는 것과 전혀 무관하고, 누군가가 이끌고 만들어 낸 사회구조라는 것도 없으며,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기생충에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모두에게 이로운 행복감과 만족감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자연에 의지하며 삶을 만들어 온 이들에게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음이 분명한 행복함과 역시 자연스럽게 형성된 삶의 의미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도 중간에 이야기하였던 역사적으로 가장 인간적이었던 사회는 신석기 시대의 인류사회였다.  나의 이해로는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형성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 할 지라도 지금의 세상에서는 실현불가능한 답이 될 수 밖에 없지만, 인간이 자연에 의해 자연스레 통제되고, 삶의 최소한의 노력으로 생명과 생활의 유지가 가능하며 많은 시간의 여유는 나름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역사적 시절..  가장 기초적인 질서 안에서 사회가 유지되는 그 시대의 모습은 적어도 우리가 우리를 파괴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1900년대 초의 지구상에서 가장 울창한 원시림이자 문명사회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인 아마존 안에서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개인의 자유의지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가 급속도로 파괴된 원인은 외부의 인간들이 퍼뜨린 질병과 신문물이라는 점에서 발전이라 불리는 현대사회의 이기와 편리는 인간 스스로 인위적인 통제안에서 인간을 의존적으로 변질시키는것이 아닌가 생각케 한다. 




  저자는 기행을 통해 민족학과 인류학을 고민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의 기행에서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유추하고 가늠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리 쉽게 읽히지 않는다.  재미있게 읽기에는 너무 버겁다.  그리고 마지막 귀로의 장에서 그가 돌아본 이슬람과 불교의 문화는 남미의 원시부족의 모습과 어떤 연관이 있기에 내용에 넣었을까 하는 의문 역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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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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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았던 세상의 변화는 언제나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던가를 생각해본다.  신대륙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면서부터 벌어졌던 지배와 정복의 잔인한 모습들, 풍경들, 그리고 몰락해버린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  새로운 자원과 영토에 대한 욕심과 쫓겨난 이들이 터전을 위해 벌였던 정복과 확장의 야욕은 결국 오랜시간 그자리에 살아왔던 토착민들을 잔인하게 몰살시키는 비극을 낳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이민족에 의한 폭력적 물갈이는 인간의 본성과 양심에 대한 회의와 고민을 품게 만들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었다.



  자본이 형성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함께 토착민을 말살했던 이주민들은 이제 자신들의 터전 안에서 자신들끼리 폭력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포구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대포를 쏘아대는 그런 방식의 폭력은 아니지만,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트랙터로 대변되는 자본과 기계문명은 척박함 속에서도 터전과 핏줄을 이어가던 사람들을 몰아내어 이방인으로 만든다.  총칼은 펜대로 바뀌었고 죽음은 이방인으로만 치환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몰려내어진 이방인들은 캘리포니아에서 또다른 이방인이 되어 자본의 담합과 부의 불공평속에서 시들어만 간다.  내몰린 사람들의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불안과 형체를 느낄 수도 없는 폭력에의 노출.. 이는 신기하게도 지금의 우리사회와 비교해보아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은 익숙함으로 다가온다.  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권력은 폭력행사에 있어 점점 세련됨만을 더했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가 그랬던가, 악은 구조와 제도에서 기인한다고.  일자리를 구하려 해메이던 오키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고 싶었으나 결국 농장주들의 담합과 은행의 은밀한 압력에 품삯을 깎아내릴 수 밖에 없었던 어느 농장주에 대한 묘사에서 어느 한 사람의 선행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사회구조의 문제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피억압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깨뜨리기 위한 개별적인 폭력, 피억압자들끼리의 이간질을 통한 연대의 파괴, 서로간의 폭력에 대한 법집행에의 이중적 잣대는 지금 이 시대만의 답답함과 분함이 아닌 역사적으로 공권력이라는 명분하에 자행되었던 제도의 폭력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조지 오웰은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서 탄광노동자 가족들로 대변되는 하위계급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공감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한다.  존 스타인벡 역시 20세기 초반 미국의 대공황과 이후의 현실속에 억압당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의 모습을 직시하기를 작품을 통해 주문한다.  그래서 작품에는 케이시 목사류로 대변되는 저항세력의 구체적인 행동묘사가 없다.  케이시의 죽음은 너무도 허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들짐승과도 같이 살아야만 했던 이주민들의 생활과 폭우로 바닥에 물이 차오르는 위험속에 산모는 사산을 해야만 했던 절망감, 굶주려 죽어가는 어느 아이아빠를 살리기 위해 비가 퍼붓는 헛간 안에서 산모의 젖을 물렸던 그들의 절박한 동정과 연대는 사회구조의 한켠으로 떠밀려진 절박함 속의 사람들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기제가 되어준다. 




  자본이 잔인한 것은 자본 자체가 나빠서일까, 아니면 자본을 활용하는 인간이 나빠서일까?  아니면 자본이 구성하는 인간사회는 필연적으로 구조적 악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단순히 자연스러운 변화에 의한 발전과 소멸의 순환은 분명 아닌 것으로 보이건만 우리는 왜 여지껏 100여년전의 작품속 현실을 현재의 세상안에서 실감나게 느껴야하는가.  덤불속으로 숨어버린 이방인 톰 조드는 한국이라는 현재현실 속에서 투쟁의 끝에 결국 철장에 갇혀버린 노동자들이며, 곡괭이에 맞아 죽어버린 케이시는 환생하여 지금 85호 크레인 위에, 단식농성장의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힘겹게 흘러가는 차 안과 수로옆 맨땅에서 숨을 거두어야만 했던 톰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토록 지키려 했고 떠나려 하지 않았던 고향은 현재의 강정 구럼비이지 않을까. 




  매달 고전을 접하면서, 나는 왜 매 작품마다 현실과 꼭 들어만 맞는 오버랩 현상을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보편적 사고는 결국 고전을 접함으로서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이 고전을 읽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될 것이며, 뒤늦게 고전을 읽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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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드™ 2011-10-22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이고전인이유, 인간 삶의 본질은 어디에서나 비슷하게구현된다는 것을 잘보여주는작품이네요. 리뷰 잘 보았습니다.
 
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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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김진숙이라는 사람을 알게된 것은 고 노무현대통령 서거직후 그가 쓴 '노무현 동지를 꿈꾸며'라는 글을 읽고나서였다.  그 글을 읽고 난 느낌은 깊고 절절하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감성에서만 나오지는 않는, 경험과 고난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응어리같은 것이었다.  김진숙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라는 궁금증은 커졌지만 나의 게으름은 그 이상을 알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름 세 자만 기억한 채로 지내던 중, 그녀가 김주익 열사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던 한진의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겨울을 지나 봄이 되고 여름을 지나는 지금, 김진숙씨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고 나는 그녀의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었다면 누구나 느낄 그런 분노나 우울함을 이야기하고는 싶지 않다.  그런 감정이나 감정의 폭발은 좀 더 감성적으로 표현하고 느낄 사람들은 많기 때문이다.  그저, 그녀가 이야기한 이 책의 제목, 소금꽃나무라는 단어, 제목만큼 깊고 절절한 이야기들, 그리고 글 안에 배어있는 처절한 몸부림의 흔적들..  제도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언제 한 번 글쓰기 연습조차 하지 못한 사람이 쓴 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절제되고 깊은 이야기는 좋은 글은 기교나 감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고 느낀 감정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다시한 번 확인케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고 권정생 선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과 닮아있다.  글에 기교나 정제가 없이도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두 책은 쌍둥이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동시에 한탄스러움을 느낀다.  왜!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느끼고 울분했던 현실은 30년도 훨씬 지난 우리에게 새롭고 절절함으로 다가오는가!  내 주변의 누군가의 현실은 이렇게 오랜 시간을 말없이 묻어두어야 했던 그런 것이었던가.  그런 고난과 울분의 현실은 왜 누군가의 죽음과 누군가의 투쟁과 누군가의 낙오로만 때마다 새롭게 느껴야 하는가.  제도권력과 언론의 무관심 탓으로만 돌리기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돌아봄조차도 실행할 수 없는 사회개념의 이해와 탈이념이 문제이지 않을까.




  작은책 발행인인 안건모 선생님은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의 이야기를, 내가 속한 세상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  그것이 세상을 제대로 알고 앎을 바탕으로 변화를 끌어나갈 수 있는 바탕의 힘이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알지 못했던, 또는 스스로 표현하지 못했던 우리사는 세상의 부당함과 고난함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다.  물론 김진숙과 85호 크레인 투쟁은 트위터라는 새로운 대화와 소통기구가 생기면서 많은 힘을 얻은 부분은 있으나, 그래서 3년전의 촛불보다도 더 깊고 넓은 저항이 가능해졌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저항과 싸움 그리고 소통의 저변에 존재하는 개념과 통찰이지 않을까?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에 힘을 실어넣는 실제의 행동을 넘어,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다시 시간을 초월해 간과되는 현실을 만들지 않기 위한 가장 기본의 요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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