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무지개 - 자연과 인간의 다양성, 젠더와 섹슈얼리티
조안 러프가든 지음, 노태복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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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동성애로 표현되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받아들이고는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저 고등동물의 10% 미만의 비율로 동성애가 존재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 동성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언제나 의문인 채였던 것이다.  


  획일성, 복잡한 것을 간단한 분류로 나누어 범주안으로 묶어놓는 현재의 지식체계는 결국 단순한 이분법과 흑백논리의 시각만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내었다.  정상인 것과 정상이 아닌 것, 질병이 아닌 것과 질병인 것 등등..  그 기준은 전문가라 표현되는 지식독점자들이 일방적으로 제시해놓고서는 그들이 말하는 옳음의 범주안에 들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옳음의 테두리 안으로 들도록 치료나 교정이라는 명목하에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해 왔다.  때때로 그것은 자본논리와 결탁하여 이윤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전혀 불편하지 않은 몸의 상태를 그들의 기준에 맞추어, 또는 미래에 불편함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협박으로 그들이 원하는 테두리 안으로 들도록 일방적 치료를 감행하기도 하였고, 정체성적 문제 역시 정신적 질환이나 환경적 혼란의 결과로 치부하여 교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왔으며, 원치않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사람들은 그저 소수의 사람들로 때로는 정치사회적 의도를 가지고 의도적인 억압을 가하기도 하였다.  의식의 부재 또는 무지, 그리고 제도에 대한 철저한 순응은 그렇게 스스로가 원치 않는 고통속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재케 하였다.


  저자는 내용에서 무지개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그것은 다양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알고있는 모든 다양한 분야 안에서 펼칠 수 있는 무지개들, 즉 다양성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매우 객관적이고 충분한 근거를 통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사람의 역사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근거들을 모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사회로 귀결시키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는 왜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왜 존중되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때로는 다양한 근거를 하나의 결과로 귀결시키는 연역적 논리전개가 살짝 지루해지기도 하지만, 결국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방대한 자료와 근거, 그리고 논리에 나의 막연했던 생각이 논리적 구체성과 근거를 갖추어 훨씬 명료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성적 외모와 젠더정체성에 대한 명료한 구분과 이들을 표현케 하는 유전자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자료를 통해 가장 간략하게만 정리해도 인간의 성과 젠더적 표현형은 최소 16가지의 모습이 있다는 설명은 생물학자로서의 저자의 탐구력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내 지식의 편협함에 많은 생각을 들게 하였다.  


  저자는 동시에 현재의 의학과 모든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소위 지식을 거머쥐고 조율한다는 전문가 집단들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기준에 의해 희생당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함께 말이다.  이는 이반일리히나 웬델베리 같은 사상가들의 사회적 관념성이 가득한 지식에 대한 비판과는 또다른 근거론적인 비판이다.  철저하고 치밀한 분석이 같은 사상적 비판을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이 비교적 자연스레 읽히는 것은 개인적으로 동성애의 구체적 근거에 대한 갈망때문이기도 하고 동성애를 통해 기존의 지식의 흐름을 철저히 분석하고 비판하여 재정렬과 동시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재미와 신선함때문이었다.  그리고 관념적 비판이 이렇게 구체적 근거와 과학적 분석을 통해 좀더 객관적인 모습으로 힘을 갖추게 되는 현상을 목격하는 즐거움때문이었달까.  나는 성적으로 이성애자이다.  내게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는 관심밖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만약 눈이 작거나 다리가 짧은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가 부정될 수 없듯이,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충분히 그들의 존재를 인정받아야하고 사회적으로 동등한 역할을 존중받아야 한다. 아울러 그들이 이제껏 사회에서 겪은 고통과 불이익에 대한 보상과 배려도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제안에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일은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분명 필수적인 요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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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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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우리나라 개화기의 문화적 혼란을 보는 듯 하였다.  그것은 거시적인 차원을 넘어 지금껏 자신이 알아왔던 문화와 관습이 깨어지는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던 개인들의 미시적인 흔들림이었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그 변화에 대한 느낌은 동일하였다.  흔들림앞에서 개개인의 판단은 단지 자신이 지금껏 속해있던 사회의 관습에 바탕하고 있었다.  흔들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관습이 온전히 옳았던 것만은 아니었기에 혼란은 이미 피할 수 없음이었고, 혼란의 이유에 대한 고민은 시간적이거나 시각적 여유가 없었기에 흔들림은 일방적이었던 것이다. 


  한 사회가 가진 고전적 관습과 인식, 그리고 지능적으로 잠식해오는 식민통치세력의 문화잠식에 대한 균형적 비판, 이 작품에 담겨있는 그런 균형적 시선은 그래서 가치있다.  물론 작품해설에서도 언급된 바가 있지만, 작가는 오콩코가 속한 부족사회의 모습을 세밀하고 자연스럽게 묘사함으로서 전통적 관습의 비인간적인 면과 사뭇 부조리한 부분들을 드러낸다.  동시에 종교를 내세워 지능적으로 잠식해가는 식민통치세력의 무자비하고 몰이해적인 행위들 역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것의 압권은 마지막에서 나타난다.  무너져가는 전통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고히하려 노력하던 오콩고가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 지고는 자살했을 때, 이를 바라보는 판사의 머릿속은 문화인류학적 한 현상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통한 하나의 업적으로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족민들의 행위를 인간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서양인의 모습에는 두 문화사이에 나타나는 힘의 막대한 차이와 어긋난 시선이 만들어내는 일방성만 존재할 뿐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나 천주교를 앞세워 잠식해 들어간 서구열강의 식민문화정책은 가히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관습의 비인간성과 그들이 생각하기에 비합리적인 부분을 파고들어 그 사회의 약자들을 구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다른 이야기도 나올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일단 비인간성에의 조정은 받아들인다 하지만, 비합리적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는 많아보인다.  일단 종교가 그들을 잠식하는 방법에 있어 원칙적으로는 유일신의 신비주의적 또는 내세론적인 이론이라는 비합리를 내세워 '경쟁에서 승리한 비합리'가 되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시대에 바라본 그들이 잠식한 문화이후의 현재는 가끔 참담하기도 하다.  그들의 전통적 삶은 자연의 순환과 맞물려 거칠고 힘들긴 했지만 순조로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종교를 필두로 한 식민통치 이후 자본이라는 시스템에 중독되어버린 그들의 삶은 보이지 않는 폭력에 휩싸였고 '정당한 착취'하에 피폐해져버린 자본식민지 그 자체인 모습이 되어버렸다.  결국 전통사회의 그들은 비인간성에 대한 보상으로 세대를 이어가는 '산산이 부서진 삶'을 받았을 뿐이었던 것이다.


  궁금해진다.  시대의 흐름안에서 경험한 것을 기록하고 묘사한 작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오콩고의 자손들과 그들의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하고 있을까.  물론 그가 발표한 이 작품이 이야기하는 시대 이후의 작품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습에서 내릴 수 있는 결과론적인 생각은 어떠할까?  50년대의 두 문화를 바라보는 균형잡힌 비판은 과연 지금도 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것일까?  자본적 식민지라는 의미를 벗어나 전통적인 의미에서 비판이 가지는 균형은 아직도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조금 더 깊은 시선에서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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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루쉰 문학 선집
루쉰 지음, 송춘남 옮김, 박홍규 해설 / 고인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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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고전인 이유, 그것은 과거의 모습으로 하여금 현재를 비추어보고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여전히 변하지 않거나 반복적인 불의를 보며 답답해지기도 하지만, 고전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는 고민과 반추를 가능케 해주는 버팀목이자 방향키이다.  사상가의 말과 글 역시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사상가는 시공을 뛰어넘어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시대를 돌아볼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사고를 제공해준다.  이 역시 근본을 꿰뚫는 사상이 언제나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부조리와 불합리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여전히 잃어버리거나 덮어버릴 수 없는 근본적 틀임에는 변함이 없다.  


  루쉰이 루쉰인 이유, 우리에게 아직도 루쉰이 마음깊이 자리할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시대와 공간을 넘어선 우리가 루쉰의 글에 칼날의 서늘함을 느끼고 마음을 다하여 공감하는 모습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것은 부정하고 불안한 제도와 권력에 온 마음으로 저항하며 저항의 근원을 인간사상의 뿌리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려 적확한 표현과 깊이있는 비유 가득한 글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케 하고 생각의 바탕을 만들어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정립된 생각의 바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도 둔중한 울림을 주는 탄탄함 그 자체이다. 


  개인적으로 루쉰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리영희 선생님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근본을 꿰뚫는 성찰의 방법, 실천의 방향에 대한 글은 리영희 선생님의 언제나 진실을 바탕으로 한 비판과 균형을 유지케 하였다.  그것은 철근상자 안의 몽환에 취해 서서히 죽어가는 이들을 깨워 벽을 두드리게 하는 괴로움이요, 먹으로 쓴 거짓말을 밝히기 위해 피로 쓴 진실을 헤집어 내는 고통의 모습이었다.  루쉰의 글이 아직도 마음을 두드릴 수 밖에 없는 아수라의 세상에서 루쉰의 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상처를 안고 괴로움과 고통을 받아들이겠다는 자기선언이나 다름없는 일인지 모른다.  노년이 되어서야 아파트라는 편리한 인간문명을 접하고 감탄했던 리영희 선생님의 모습은 그러한 자기희생을 증명하는 자그마한 일화였을 것이다. 


  이 책에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아큐정전같은 루쉰의 소설은 없다.  단지 이곳저곳에 발표한 글과 편지, 생각을 짧게 서술한 글들과 고대중국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단편소설 몇편이 수록되어 있다.  루쉰의 소설이 그러했듯 이 책에 나오는 루쉰의 비유는 조금 어렵다.  명쾌하게 다가오지 않고 당시 중국사회의 소소한 현상이나 사건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들이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루쉰의 이러한 난해한 비유가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루쉰의 글에서 현대사회에서도 적용하여 생각해볼 만한 페미니즘적 내용이나, 이반일리히, 웬델 베리, 피에르 라비등의 사상가들과 일맥상통하는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선하고 반가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알던 루쉰의 또다른 새로움이었다.  900여 페이지의 긴 글이지만 단문의 조합이라 읽기에는 부담스럽지 않다.  편하게 읽어내려가면서 루쉰의 전체적인 생각을 독자로 하여금 정리하게 만드는 책이다.  단 한권으로 루쉰의 거의 모든 생각들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다만, 그의 단편소설들을 다시 한번 더 읽고 싶다는 기대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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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미술관 - 영혼의 여백을 따듯이 채워주는 그림치유 에세이
김홍기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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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독서였다.  짬짬이 읽어가며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내어야 하는 고전이나 사회과학 서적에 머리아파하지 않아도 되었던 아주 편안한 독서.  마음은 따뜻해지고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어딘가 경쾌함이 살아나는 듯한 느낌.  책표지의 노란 색깔과 환한 웃음같은 완연한 봄날 한낮의 포근함이었다.  책을 통하여 이런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껴 본 때가 얼마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아프게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복잡한 사회 안에서 자신이 가진 시선을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마음의 시선에서 일상에서 관계에서 감정의 물결 속에서 힘들었거나 지쳤거나 슬프거나 할 때, 미술작품이라는 매개체로 그것들을 탄탄히 딛고올라 극복하고 거기에 가벼운 위트와 저자 개인의 마음을 살짝 올려담아 마음 깊은 곳에서 든든함을 끌어올린다.  막연하지만 그저 기댈 수 있다는 어떤 위안, 다시금 힘을 낼 수 있다는 다짐, 그리고 살짝 미소짓게 만드는 여유가 살아난다.  나는 그렇게 예전과는 달리 사뭇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게 이 책이 지닌 힘이었다.  따뜻하고 가볍고 위안이 되고 즐거워지는 힘 말이다. 




  예술이 가진 힘이라는 것, 인간이 창조해 낸 매체이기에 만들고 사용하기에 따라 다양하고 다른 모습을 지닐 수 있겠지만, 저자는 미술을 포함한 예술 전반을 매우 긍정적이면서도 때로는 비판적이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여 설명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그의 글들을 매우 좋아한다.  그런 미적 감각에 문외한인 내가 미술과 패션을 포함한 예술 전반을 어떤 개념과 요소로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교과서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읽었던 이 책은 나름 매우 신선한 느낌이었다.  때로는 이렇게 부드럽고 포근하며 경쾌한 글들도 써왔구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또는 작품을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이런 위로의 힘을 건넬 수 있음을 깨달았음은 내게 부족했던 어떤 감성과 사뭇 경직되어 있었던 나의 마음을 다스리고 다독거리는 노력을 별달리 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작품마다의 위안에 살짝 얹어준 경쾌함에 알 수 없는 은연 중 눈시울이 살짝 젖어들기도 하였다.  너무도 다스리지 못했던 나의 마음에 대한 미안함때문이었을까?




  위안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일상을 관통하는 중론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쌓이면서 생긴 하나의 성찰인데 지극히 개인적인 감성과 마음의 입장에서이긴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일상을 관통하는 중론은 여지없이 무너져내렸고 위안을 느껴버렸다.  자존심은 아직 꺾이지 않아 표지의 '그림치유'라는 말에는 아직 동의하지 않고 있지만, 살짝 젖어드는 내 눈시울에 흠칫 놀라 되돌아 본 나는 위안때문에 마음이 따뜻해져 버리고 있었다.  어떤 종교에도 느끼지 못했던 그 따스함은 결국 내 마음의 문제였다는 뜻일까?  그 강팍함을 무장해제시킨 것은 어느 거창한 것도 아닌 이 책이었다.  냉철하려는 나의 시선에 피곤해진 마음을 풀어 준 가벼운 이 책, 그리고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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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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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전체를 지배하는 불안한 긴장감은 나에게는 어느정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결국 불안한 개인이 모여 만든 가족이라는 불안함, 불안함이 만들어내는 긴장은 가족이라는 혈연의 끈으로 인하여 오히려 깊고 애매해진다.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지며 단단하게 뭉쳐진 생각과 시선, 선택과 우연한 기회가 만들어버린 현재의 괴로움, 자신의 생 이전에 겪었을 부모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무능과 불만, 선천적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식들..  각자가 만들어낸 불만이 가족이라는 혈연으로 모여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는 모습은 작가 개인경험을 바탕으로 하기에 일반화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족이라는 것은 과연 완벽에 가까운 인간관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묘사한 섬세한 불안과 긴장은 상당히 구체적이어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상당히 높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기실 인간사회속에서 쉽게 말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했던 가족이라는 단위안에서 존재했을 일상의 감각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불안과 긴장의 결과물일 수 있는 매맞는 아내, 남편, 자녀들을 종종 보아야하는 직업적 입장에서 자연스레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회의 모습은 가족단위 구성사회가 아닌 공동체적 구성사회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굳이 그런 딱딱한 사회역사적 현실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작가는 서문에서 썼듯이 개인적 경험을 기반한 가족안에서의 불안을 피와 눈물로 드러내고 고발한 것이다.  이는 다른 의미에서의 우리가 무의식으로 속해있는 사회제도에 대한 어떤 반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피와 눈물로 묘사한 괴로움과 슬픔이 마음을 두드렸다.  많은 이들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겪었던 가족이란 틀 안에서의 불안함은 작품안에서도 그렇지만 작가의 생애에 대해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게 하였다.  극복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고 싶지는 않다.  상처는 많은 부분에서 삶의 거름이 되어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게 하는 기제가 되기 때문이다.  상처를 기반으로 하는 작가의 치열한 고민은 결국 이 작품으로 귀결되었고 그의 삶 역시 그의 선택에 따른 치열함이었다.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다.  그 표현은 쉽게 말하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자아낸다.  공감은 우리의 삶에 알게모르게 박혀있던 섬세한 감각을 일깨운다.  그래서 상처는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무사안일과 무념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이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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