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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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난 후의 느낌을 굳이 종교적 의미와 결부시킨다는 것은 그닥 마뜩치도 어울리지도 않는 일이긴 하지만, 제목에서부터 풍겨져나오는 분위기나 이전부터 하고있던 종교적 고민과 연결되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피할 수 없는 무언가를 꺼내어놓을 수 밖에 만든다.  사실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수없이 난무하는 여러 기독교 교리해석 중 어느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불교적 교리는 더더욱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무어라 단정지으며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세상 만물의 이해는 '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대목에서 개인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해석해버리는 보수기독교의 교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세상의 온갖 편리함을 누리며, 또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도 행복한거라며 세상의 모든 이해를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만 해석하고 만족하는 삶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의 모든 현상을 인간을 위하며 신이 만들어준 가장 행복한 상태로 이해하며, 그 모든 해석을 경험이 아닌 신에게로 향한 기도와 예배형태의 '내면적 수련'으로만 이루려 한다는 점에 있다. 


  세상의 모든 이해가 단지 내면적 수련을 통한 어떠한 경지에 도달하는 일로 가능하다면 우리는 지금 수많은 구도자 출신의 사상가들을 만나며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사기꾼에 지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사문세계를 박차고 뛰어나가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해보고 난 후, 초라한 뱃사공으로서 강물에게 지혜를 배우며 살아온 싯다르타가 시대의 성자로 추앙받던 고타마보다도 더 큰 빛과 기운을 발산했다는 의미는, 설령 '부질없다'는 결론에 이를지라도 깊은 고민과 함께 스스로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체득을 통한 깨달음이야말로 진정한 세상만물을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경험을 통한 이해와 그 이해에 더해진 깊은 사유와 고민은, 한 인간의 깊이를 만들어주고 판단에 존중을 부여하며 스스로 말을 아끼게 만드는, 내면에 존재하는 두 개의 큰 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서양인이 이해한 동양의 사상.  그래서 읽기전엔 새로운 느낌이었고 읽고나서는 편안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경전이나 다른 동양인의 책이었다면 어렵게만 씌여졌을 것 같은 싯다르타의 이야기, 헤르만 헤세의 온화하고 밝은 얼굴마냥 편안하고 고요한 흐름으로 읽다보면 이해가 가볍고 편해진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설파하는 이해의 본질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나에게는 마음을 꿰뚫는 하나의 본질을 제시해주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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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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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리에 대한 동경과 추억이 있다는 것은 이젠 중년의 나이 이상을 살아왔다는 하나의 징표가 된 것일까?  시대를 대표하던 상징들이 이제는 과거의 추억거리로 밀려남을 인지하는 순간, 나의 삶에 녹아있던 시간의 한 더미가 뒤켠으로 옮겨짐 역시 느껴야만 했다.  어쨌든, 나의 어릴적 좁다란 골목 낮은 지붕동네 시절의 이소룡은 또래아이들간의 이야깃거리이자 동경, 그리고 놀잇감이었다.  영화에서 우연히 보았던 무술비법책의 자세그림을 흉내내어 수첩에 각자의 수련자세들을 그려 동네 골목에서 연습하기도 했고, 이소룡의 근육을 만든다고 안되는 팔굽혀펴기를 연습하기도 했다.  아버지 역시 무협영화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지 동네에서 거의 처음으로 집에 비디오를 들여놓으시고는 쉬는 날이면 언제나 스승이나 가족의 죽음을 복수하는 제자의 무술유랑기라는 뻔한 내용의 영화를 돌려보시곤 하였다.


  시대의 동경대상은 언제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란히 존재한다.  그 당시는 5공의 살벌한 시기였다.  시내와 가까웠던 우리동네는 거의 날마다 오후가 되면 최루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최루가스가 동네로 날아들어와 동네 할머니들이나 우리는 마루에서나 골목에서 눈물을 찔끔거리고 재채기를 하며 보내곤 했다.  그러면서도 나름 무술연습이랍시고 모여서 수첩에 그린 자세들을 연습하다가도 최루가스가 심하게 날아들어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여지없이 집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일주일에 한두번은 심부름으로 시내를 관통하여 걸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시내를 지나며 바라본 광경은, 차들이 사라진 길에 대학생 형과 누나들이 손으로 휘갈겨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주먹을 휘두르며 가두시위를 하다가 최루탄이 터짐과 동시에 여기저기 흩어져 백골단과의 술래잡기가 벌어지곤 하였다.  건물 아래로 피신한 시민들이 서서 그 광경을 보다가 문득 거리 한복판에서 백골단의 몽둥이에 맞고 있는 대학생이 발견되면 큰소리로 항의를 하곤 했는데 그 역시 흥분한 백골단이 달려들라 치면 움츠리며 조용히 피하곤 하던 모습도 생각난다.  나름 무술연습을 했다는 어떤 치기였는지 나는 시위대와는 무관한 어린아이라는 자위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그 상황의 길을 걷는 도중 누군가를 쫒아 달려오는 백골단과 몸을 부딫히게 되었는데, 순간 둔중한 충격과 예리한 통증은 내가 가진 것을 월등하게 뛰어넘는 어떤 괴력 또는 넘지못할 거대한 벽같은 게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어떤 깨달음을 주었다. 


  아버지의 비디오 역시 때마다 삼류 무협영화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등화관제가 있던 당시, 창문커튼을 닫고 불을 끄며 동시에 모여든 동네 아저씨들은 긴장과 침묵속에 뭔가 비밀스러워 보이는 테잎을 비디오에 조심스레 밀어넣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518 광주민중항쟁을 기록한 테잎이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테잎 속에 나왔던 죽은 사람들의 얼굴, 무언가에 목과 턱이 깔려 아래턱이 눌려펴진 얼굴, 얼굴의 반 또는 4분지 1이 정확하게 없어져버린 시신들, 가슴에 칼자국이 난자한 젊은 여성...세상은 그렇게도 폭력적이고 잔인했던 때였다.


  시대의 동경대상은 시간이 좀 더 지나 바뀌었다.  무협은 이소룡에서 성룡을 거쳐 바바리코트입고 담배를 멋있게 문 잘생긴 남자의 현란한 총질로 바뀌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액션보다는 서태지와 아이들, 김현철, 봄여름가을겨울등의 음악가들로 바뀐 것이다.  시대역시 이제는 현실불가능한 액션이나 상황은 컴퓨터 그래픽이 가상을 통해 실현시켜주는 그런 세상으로 바뀌었고, 세상은 나름 민주적이며 돈이 만능이 된 세상으로 변화했다.  좀 더 현실에 충실하기를 주문했던 제도교육과 내 주변의 어른들의 요구에 맞추어 내 자신의 변화를 이어가고 충분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세상의 한 위치를 자리한다.  그리고 현실적인 안위감을 내 마음아래에 깔아두고, 시대와 세상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동경에 대한 꿈을 현실로 묵묵히 이루어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인지 두 손을 모으고 마음을 다해 공감하고 그러한 사람들을 격려한다.  내가 단 한번이라도 이런 세상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그런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토해본 적이 있던가, 또는 뭔가 설명될 수 없는 괴로움에 소주 한 잔 털어넣어 본 적이 있었던가. 

 

  작가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하지만 이는 자체로 영화였다.  그것도 영화로는 만들어내기 어려운, 글로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가득한 하나의 영화였다.  개인의 이야기, 주변인물들의 이야기, 시대의 이야기가 이렇게 적절하게 배합되어 농밀하고 진득하고 감칠맛나는 소설은 흔치 않을 듯 하다.  그 안에 골고루 버무려진 작가만의 글맛과 깨알같은 재미는 이야기를 더더욱 재미나게 만든다.  소설을 풀어가는 화자의 시점이 간간히 어색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소설을 읽는데 전혀 어려움을 만들지 않는다.  최근에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집어든 책에서 뜻하지않은 진득한 재미를 맛보았다는 사실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가볍지 않으면서도 부담없는 해피엔딩의 눈을 뗄 수 없이 재미가득한 영화..  나에게 이 소설은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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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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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나의 과거인 20대 시절로 돌아가보고 싶어진다.  물론 물리적 시간속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것은 상상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 상상속에서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20대 초반의 나는 예의 해방감이나 자유로움에 마냥 몸을 풀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오지랖을 떨며 배우고 경험하고자 하는 수많은 것들을 시작하고, 좀 더 많은 책을 읽으며,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려 노력한다.  그렇게 좀 더 다양한 경험과 넓고 깊은 생각을 쌓아가는 일, 내가 20대로 돌아가면 꼭 하고 싶은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악마에게 내 영혼을 저당잡히며까지 하고싶은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삶을 충만하게 만들려 노력하는 스스로에게 적당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에게는 자신에 대한 그런 느낌이 없었을까, 학문에만 몰두하다 늙어버린 자신을 비관하는 와중에 만난 악마에게 스스럼없이 자신을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젊어진 육체를 가지고 세상의 많은 유혹과 부와 명예를 누린다.  악마를 통해 얻어진 세상의 즐거움은 과연 악마의 것인가 아니면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욕구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하는 대목이다.


  파우스트의 시작은 성경에 나오는 욥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악마가 파우스트를 유혹한 것도 신의 허락에 의해 이루어진 일.  재미있는 것은 학문에 몰두하며 대부분의 삶을 보내어 비관에 빠진 파우스트를 신은 가장 신뢰할만한 인간상으로 이야기한다.  반면 욥은 엄청난 재산과 처첩 그리고 자식들을 거느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시험이 들어가는 모습도 반대이다.  욥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병들림으로 시험을 당하지만 파우스트는 여자와 권력과 재물에 의해 시험을 당한다.  작품이 60여년동안 쓰여지느라 그런지는 몰라도 결과까지 비슷하지는 않은데 악마에 의해 저당잡힌 영혼을 빼앗기기 직전 파우스트를 사랑했던 여인 그레트헨의 영혼과 천사들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약간의 진부함을 보여준다. 


  사실 전체적인 줄거리보다는 괴테가 60여년이라는 시간동안 작품속에 담은 그의 세계관을 각각의 막마다, 사건마다 보고 느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듯 하다.  그렇지만, 그런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는 수많은 고전을 통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시대적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 조금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고전으로 존중을 받으면서도 작품이 쉽게 논의되지 못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게다가 시적 운율을 느끼며 읽어야 할 작품이 번역을 통하여 운율미가 사라져버리니 읽는 과정이 조금은 지루한 면이 없지않다.  인조인간 호문클루스라던지 이카루스의 추락을 연상케 하는 대목은 나름 흥미가 있지만 그것이 흥미와 개략적인 수준에서의 이해로 머물러버리는 현상은 순전한 개인적 이해력과 지식의 부족때문인지, 아니면 앞서말한 배경지식과 시대사상의 이해 부족때문인가 하는 고민만 생겨버린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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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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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의 시를 온전히 접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한두편 접해보았던 그의 시를 읽고 있자면, 경험에서 나오는 글의 깊이와 철저한 동질의식에서 나오는 분노, 그리고 시인의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울분이 느껴진다.  관념적이지는 않지만 마음 한가득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풍부한 언어들이 존재하고, 사회적이지만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워서 현실의 감정들이 살아 머리를 감싸매고 스며들어온다.  젊은시절 공사판 노동일부터 시작하여 몸에 배이고 머리에 지닌 수많은 경험과 계급적 견지를 철저하게 유지하는 삶, 그리고 그것들이 시인의 감수성과 만나 완성되는 우리 현실에 관한 최적의 그리고 절절한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 책은 그의 시집은 아니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이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글도 있고 세상을 이야기한 글도 있다.  시인이 쓴 산문은 문장이 간결하고 감성역시 절제되어 약간은 건조해진 듯도 하지만 그가 써나가는 그와 세상의 이야기는 그렇게 건조하고 단조롭지 않다.  그가 이야기하는 세상은 억압받는 자들, 탄압받는 자들이다.  그의 젊은시절 가난과 고됨만큼이나 처절한 사람들, 그들이 그저 세상은 그런거지 하며 조용하고 묵묵히 살아간다면 그들은 건조하고 단조로울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그렇지 않다.  저항을 통해 단조로움을 활발함으로 건조함을 풍성함으로 바꾸어내고 시인은 이들을 이야기하며 연대하고 세상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려 애쓴다.


  대추리 황새울의 저항, 용산의 절망, 85호 크레인의 김진숙과 희망버스, 제주의 강정을 관통하는 수많은 단어들 중의 하나는 '외부인' 또는 '외부세력'일 것이다.  그것은 위정자들과 기득권들이 저항을 와해시키고 이미지적 타격을 위해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그런 싸움의 중심이 아니더라도 현장의 변두리에서 있어보면 과연 그 '외부세력'이라는 말이 합당한 건가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자 한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폭력에 의해 터전을 빼앗겨야만 했던 대추리의 사람들이, 자본에 의해 터전을 빼앗겨야만 했던 사람들이, 그리고 삶의 근본을 뿌리뽑힌 사람들이 과연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이라는 전제는 스스로가 탄탄한 자본계급의 절대적 범주안에 들었다던지, 또는 무관심하게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관념적일수도 있는 인간적 논리를 떠나 현실적으로 따져볼때, 우리는 과연 자본이나 폭력의 범주안에서 안전한 사람들인가 하는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본에 설득당한 순진한 사람들은 알량한 보상금으로 삶의 터전을 내어주고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고 있고, 자연그대로였던 터전은 무참이 깨어지고 있다.  변변한 집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도시의 변두리로 점점 쫓겨나고 있고, 그 마지막은 처절한 싸움과 폭력에 의한 몸과 마음의 망가짐이다.  그리고 공존해야 하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의 비참함을 아무렇지 않은 눈으로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이것이 외부세력이라 칭해지는 우리의 자세인 것이다.


  외부세력은 과연 내부세력을 선동하고 조작했는가?  대추리에서 시인과 예술가들이 보여준 저항의 방법들, 그리고 그들의 행보, 희망버스의 이야기들을 읽어보자.  그저 우리는 함께 저항하는 이들이었을 뿐이다.  같은 처절함과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시인은 그저 함께하자는 이야기를 하였을 뿐이고 결국 구치소에 들어갔다.  외부세력의 선동자로서 그것은 당연한 일인가?  아니면 비참한 우리사회의 현실인 것인가?  잘 모르겠다면 이 책을 읽어보고 판단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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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수 없는 사람들 - 또 다른 용산, 집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평화 발자국 8
김성희 외 5인 글.그림 / 보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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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계의 도태에 대해서 무어라 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환경에의 적응실패로 사라져야만 하는 생명들에 대해 '무능함'이란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은 오히려 '무지함'이라는 딱지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은 잔인하고 매정하다 단정짓는 것도 무리이다.  '자연스런 자연자체의 환경'에서 어떤 이유로 도태되고 소멸되는 소수는 언제나 인정이 되는 부분이다.  그런 현상에의 인정은, '자연스런 자연환경'의 유지와 종속의 조건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하여 '자연스런 자연조건'을 넘어선 인간의 사회를 확대시킨 것은 인간에 의한 자연파괴를 통해 인간종의 수적확대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단순하게 생각하여 자연과 인간이라는 양자적 관계로 볼때, 단기적으로는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여 인간의 수를 늘리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분명 종족번식의 본능적 욕구와 함께 자연계에서 도태되었을 인간의 열성까지도 끌어안아 생존케 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해석은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인류의 역사안에서 보아도 과연 인간은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열성을 온전히 끌어안았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담, 그런 의미를 떠나 시대마다의 어떤 계급적 구분에 의한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인간의 우성과 열성은 재편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그런 구분의 기준은 전혀 자연적이지 않았다.  온전히 착취계급의 욕구에 부합하는 기준에 따르는, 반자연적이고 비인간적인 그런것이었다.  


  현시대의 자본주의 역시 그렇다.  한정된 재화를 가지고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 하는 도박은, 자연을 파괴하여 도박의 밑천으로 삼고 언제나 낭떠러지로 떨어뜨릴 대상을 끝없이 만들어내며 존재할 수 있는 착취계급의 룰에 충실한 반자연적 비인간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다.  그 도박을 유지가능케 하는 한 축인 토건산업을 토대로 한 자본주의하의 세상은 그들기준의 열성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충실하게 유린한다.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들이나 삶을 깡그리 무시해도 아무렇지 않을 사람들에게 법률과 규칙이라는 기준을 들이대며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그것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근 60여년을 그렇게 아무에게서도 관심받지 못하고 떠밀려다니던 멀쩡한 사람들의 삶은 이제서야 조금이나마 관심을 받게 된다.  용산 남일당에서 6명의 목숨이 아무렇지 않게 노골적으로 사라진 이후에 말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가진자들의 틀에 의해 나누어진 열성인간의 분류는 과연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일까?  그게 자연스럽다면 자본주의 자체는 지구라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체제여야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에 실린 에피소드들은 용산 이후에 지금까지도 자신의 삶을 유린당하며 싸우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용산에 비추어진 스포트라이트에 비해 이들은 너무도 변방에 위치해 있어 제대로 된 관심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기록을 읽고나면 과연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라져도 좋을 열성인간의 범주에 들어도 되는가에 대한 인간적, 자연적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고민이 들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에겐 토건자본주의가 상당히 합리적인 인간사회의 체계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에 대한 인간적 자연적 고민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루어지고, 그런 생각의 가지는 결국 인간다운 세상을 향한 고민을 가능케하는 하나의 균열을 만들어 낼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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