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수 없는 사람들 - 또 다른 용산, 집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평화 발자국 8
김성희 외 5인 글.그림 / 보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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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계의 도태에 대해서 무어라 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환경에의 적응실패로 사라져야만 하는 생명들에 대해 '무능함'이란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은 오히려 '무지함'이라는 딱지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은 잔인하고 매정하다 단정짓는 것도 무리이다.  '자연스런 자연자체의 환경'에서 어떤 이유로 도태되고 소멸되는 소수는 언제나 인정이 되는 부분이다.  그런 현상에의 인정은, '자연스런 자연환경'의 유지와 종속의 조건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하여 '자연스런 자연조건'을 넘어선 인간의 사회를 확대시킨 것은 인간에 의한 자연파괴를 통해 인간종의 수적확대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단순하게 생각하여 자연과 인간이라는 양자적 관계로 볼때, 단기적으로는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여 인간의 수를 늘리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분명 종족번식의 본능적 욕구와 함께 자연계에서 도태되었을 인간의 열성까지도 끌어안아 생존케 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해석은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인류의 역사안에서 보아도 과연 인간은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열성을 온전히 끌어안았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담, 그런 의미를 떠나 시대마다의 어떤 계급적 구분에 의한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인간의 우성과 열성은 재편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그런 구분의 기준은 전혀 자연적이지 않았다.  온전히 착취계급의 욕구에 부합하는 기준에 따르는, 반자연적이고 비인간적인 그런것이었다.  


  현시대의 자본주의 역시 그렇다.  한정된 재화를 가지고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 하는 도박은, 자연을 파괴하여 도박의 밑천으로 삼고 언제나 낭떠러지로 떨어뜨릴 대상을 끝없이 만들어내며 존재할 수 있는 착취계급의 룰에 충실한 반자연적 비인간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다.  그 도박을 유지가능케 하는 한 축인 토건산업을 토대로 한 자본주의하의 세상은 그들기준의 열성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충실하게 유린한다.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들이나 삶을 깡그리 무시해도 아무렇지 않을 사람들에게 법률과 규칙이라는 기준을 들이대며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그것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근 60여년을 그렇게 아무에게서도 관심받지 못하고 떠밀려다니던 멀쩡한 사람들의 삶은 이제서야 조금이나마 관심을 받게 된다.  용산 남일당에서 6명의 목숨이 아무렇지 않게 노골적으로 사라진 이후에 말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가진자들의 틀에 의해 나누어진 열성인간의 분류는 과연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일까?  그게 자연스럽다면 자본주의 자체는 지구라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체제여야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에 실린 에피소드들은 용산 이후에 지금까지도 자신의 삶을 유린당하며 싸우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용산에 비추어진 스포트라이트에 비해 이들은 너무도 변방에 위치해 있어 제대로 된 관심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기록을 읽고나면 과연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라져도 좋을 열성인간의 범주에 들어도 되는가에 대한 인간적, 자연적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고민이 들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에겐 토건자본주의가 상당히 합리적인 인간사회의 체계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에 대한 인간적 자연적 고민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루어지고, 그런 생각의 가지는 결국 인간다운 세상을 향한 고민을 가능케하는 하나의 균열을 만들어 낼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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