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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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낚시를 한다.  생계형 낚시는 아니지만 좋은 때에 만나는 여유시간에는 수평선 어선불빛이 일렬로 늘어선 바다를 바라보며 검은 밤하늘 같은 색으로 일렁이고 번득이는 현무암 갯바위 위에 선다.  유난히 바람이 많은 제주라는 섬, 습기머금은 어두운 바닷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 나는 마음이 상쾌해지며 자유를 느낀다.  주로 하게 되는 루어낚시든 간혹 하는 야광찌낚시든 사실 잡으면 좋고 안잡혀도 그만이다.  그 순간의 자유로운 기분은 어느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  
 

  많은 낚시하는 이들에게서 물욕과 이기심을 느낄 때, 저자의 낚시에서 나는 사람을 느끼고 삶을 느꼈다. 생계형 낚시는 시간을 준비하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올라오는 물고기마다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있고 이야기거리가 묻어있다.  그것은 비단 거문도라는 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저자가 살아왔던 과거의 추억과 아련함이 가득한 이야기들이다.  그러기에 물욕과 이기로 낚시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낚시를 어디서 얼마만큼 커다란 무엇을 잡았다 이야기할 때, 생계형 낚시는 생활과 추억을 이야기한다.  낚시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내가 낚은 물고기이야기에 자랑질을 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쩌면 저자는 어떤 높은 경지에 도달해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고기 하나하나에 어쩌면 그렇게 많은 바다의 추억을 담고 있는지 함께 아련해진다.  그것은 부러움이 아니다.  아마도, 내가 대도시의 어느 한구석에서 이 책을 읽었더라면 한없는 부러움과 함께 무작정 거문도에 한번 들르자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 제주이다.  창밖으로 제주앞바다가 한없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나와 저자는 비교적 동등하다.  하지만, 그 아련함은 작가로서의 글솜씨 때문만은 아닌 주체할 수 없는 풍성함이 느껴지는 아련함이다.  그것은 아마도 섬 출신이자 소개에 나와있듯이 40이전의 순탄치 않은 시간속에 쌓아 둔 수많은 경험과 이야기거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모습은 즐거움도 화려함도 아닌, 평범하거나 어딘가 쓸쓸함을 간직한, 가끔씩은 웃기도 하는 소소한 서민들이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들이 낚싯줄에 올라오는 물고기 한마리 한마리에 담겨 이 책에 쓰여졌다.

 

  먹는 이야기도 풍성하다.  어떻게 하면 맛있게 먹을 것인가 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나는 먹는 것보다 바다를 통해 사람들을 느꼈다.  특히 저자가 지금 살고 있는 섬사람들을 말이다.  나 역시 이곳에서 많은 뱃사람들 섬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을 조금씩 알아가지만, 나의 경험과는 매우 다른 깊이의 사람들을 만났다.  소개되는 물고기들이야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지만, 물고기를 먹는 누군가의 삶은 그 물고기를 바탕으로 애닳고 애절하고 때론 티격태격하며 고단하고 거칠게 바다를 살아가는 그런 삶이다.  그래서, 다 읽고 난 나의 마음은 부럽다거나 낚시를 하고싶다는 마음보다는 깊고 애절하고 잔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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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 앙꼬 단편집
앙꼬 지음 / 새만화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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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신의 일기라고 한다.  이 작품이 말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자신의 과거 일상을 토대로 그려낸 것이다.  뒤에는 진짜 일기도 있고 출간당시의 자신의 현재를 이야기하는 대목도 있다.  일기는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때로는 남들에게 공개되기도 한다.  공개되는 일기는 다른 이들과 공감을 일으킬 때, 단순한 일기가 아닌 작품이 된다.  어떤 형식이 되었던지 말이다.
 

  그런 작품이다.  이 책은 자신의 일기를 통해 공감을 자아낸다.  그렇다고 내용을 읽어보면 작가가 적어도 평범하거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열외적인 삶을 살아왔다.  말 그대로 어찌할 도리없는 문제아(표현이 좀 심했나?).  우리가 학생시절 이야기하는 소위 문제행동은 일정한 선에서 다 경험한 듯 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에서 공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은 한국교육이나 사회의 문제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것은 제껴두고 그 시절 느끼고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혼란과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런 혼란과 불안이 틀을 강요하는 세상과 충돌하며 발생하는 마찰의 불꽃일 뿐, 그 안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담겨있다.  오히려 그런 충돌이 더욱 인간미를 유지하고 발산할 수 있었던 이유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 혼란과 불안은 이 책이 발간될 당시까지 나타난다.  어딘지 투박하고 불안해 보이는 선에서의 느낌과 그 조합, 그리고 일기에서 나타나는 정돈되지 않은 사고와 행동들..  20대 초반의 아가씨는 그렇게 자신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자신의 꾸민 모습마저도 거칠게 그려내는 불안감은 작가가 소개의 말에서 그랬듯, 자신이 그려낸 현재의 일상이고 모습이고 이야기거리이다.  그래서 기대가 된다.  이 작가가 참여한 '내가살던 용산' 만화책에서 그림체는 이 책의 선보다 훨씬 더 정돈되고 안정감있어 보였다.  3년의 차이가 그럴진대, 작가가 자신을 온전히 찾고 안정감을 만들기 시작하면 어떤 이야기와 어떤 그림이 나올까 하는 기대 말이다.  

 

  일기가 계속되길 바란다.  자신을 채우고 있던 과거와 현재 속에서 공감을 끌어내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길 바란다.  언제나 공감과 감동은 특별하지 않은 삶 속의 감성에서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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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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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꿈을 꾼 듯 하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단지 몇사람의 공통된 꿈.  너무도 현실감있던 꿈을 꾼 사람들은 그것을 진짜 현실로 경험한 이야기인 양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그냥 생생했던 꿈이야기로 또는 미친놈 취급을 당한다.  하지만 꿈이라는 것은 개꿈마저도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고 은유적으로 밝혀내는 또다른 세계이다.  설령 개꿈이라 할지라도 그 세계에 놓여지는 장치나 현상들은 자신의 내면 어딘가를 표현하는 것들이다.  결국 진실은 내면을 표현하는 꿈 안에 존재한다.  미친놈 취급을 당하는 그들, 반대로 말하자면 세상의 진실을 알게된 극소수의 사람들인 것이다.  
 

  열외인간들은 하나의 꿈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같이 사회부적응자이거나 주류에 끼어들려 아둥바둥하는 인간들, 그런 열외인간들을 만들어내는 세상을 뒤집으려는 쿠데타가 꿈속에서 일어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들이 열외일 수 밖에 없었던 사고방식 그대로 움직인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여전히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단지 내가 경험한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

 

  쿠데타를 일으킨 집단들 역시 열외인간이다.  아니 머리가 양으로 변해버렸으니 열외인종이라고 해야할까?  열외라는 입장에 대한 공분을 느끼는 이들이 벌이는 쿠데타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것은 같은 열외의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서조차 공감을 얻지 못한 때문이다.  쿠데타를 통해 열외를 만들어내는 세상에 대한 공분을 표출하고 설득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열외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열외가 되어가면서도 마음속에 쌓여만 가는 공분을 느끼지도 표출해내지도 못한다.  생생한 꿈으로만 기억되는 쿠데타, 진실을 바라보았지만 현실은 진실을 경험하고도 자기자신조차 무언가가 바뀌어지지 않는다.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대체 무엇이 이런 어리둥절함을 만들어내는가.

 

  저자는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에 선 우리사회를 이야기한다.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에 서서 우리를 이 책으로 끌여들이고는 꿈을 꾸게 한다.  진실을 보라고.  우리가 겪고 있는 열패감, 열외로 내밀리는 모습, 열외로 사람들을 내모는 사회.  온갖 장치를 동원한 은유의 이야기들로 하여금 진실을 읽게 한 후에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자 이제 꿈에서 깨었는데 기분이 어떠신지?  여전히 꿈같은 이야기인가, 아님 내가 지금 처하고 있는 현실이라 생각하는가.  그리고 꿈꾸듯 이 책을 읽고 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만, 나는 여전히 열외가 되어가고, 열외가 되지 않으려 아둥바둥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여전한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열외인지 아닌지 모른채 그저 열심히만 살아가고 있음을 알겠는가?  공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쌓이고 있지만, 점점 쌓여가는 공분의 크기에 반비례하여 공분을 표출하는 방법을 잃어가는 것, 이것이 천민자본주의의 아이러니한 힘임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꿈꾸듯 이 책을 한번 읽어보자.  개인의 꿈은 개인의 진실이 담긴 내면을 은유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라면, 이 책은 사회의 진실이 담긴 내면을 은유를 통해 이야기한다.  즉, 이 책은 지금 우리사회가 꾸는 꿈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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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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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히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평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저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람들의 바램으로서 이해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대립관계의 극한에 있는 사람들이나 일방적인 핍박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그저 단순한, 상황의 극복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일까? 
 

  평화의 상태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심리적, 현실적 안정과 안도감을 준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자 진실이지만, 누군가에게 평화는 반드시 치유해야만 하는 상처를 돌보고 다스리지도 못한 채 그냥 덮여지는 가림막이자 누군가에게 강요된 입막음의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노근리의 생존자들에게 휴전이후의 실질적 평화상태는 잃어버린 가족과 이웃에 대한 상처를 느끼고 기억하는 시간이었고, 치유는 공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입막음이 되어버린 시간이었다.  제주 4.3 역시 참여정부 시기에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긴 했지만, 폭도로 몰려 죽을 위기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항쟁 이후 평화로운 시기는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자신의 가족에 대한 말 한마디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억압의 시간이었다.  극한의 대립 이후의 평화라는 것 역시 이렇게 누군가의 상처가 여전하고 일방적 억압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진정한 평화의 상태로 보아야 할까?

 

  미국의 일방적 폭격으로 무참하게 파괴된 이라크에서 종전이 되었다면 그것은 평화의 시작일까?  물론 그곳은 지금도 테러와 억압이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시작되는 진정한 평화는 억울하게 죽은 이들과 파괴에 대한 사과와 보상, 그리고 그에 대한 약자의 수긍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회적이고 계산이 깔린 위정자들끼리의 합의와 서약과 악수가 아닌, 이라크에서의 전쟁을 반대한다는 수많은 나라들의 정의로운 사람들의 외침에서도 아닌, 철저하게 약자의 위치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유린당한 이들의 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팔레스타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곳에서의 평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위정자들의 합의와 악수나, 그들의 파괴와 침략과 핍박의 역사도 모르면서 지금 당장의 평화를 주장하는 먹고 살만한 이들의 가벼운 입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이유없이 다가선 정착촌 유대인들에게 총격을 당해 두 다리가 마비된 17세 소년의 입에서, 이스라엘 군의 무차별 사격과 진압규정을 무시한 저격으로 부상당한 두 아들을 그들의 훼방에 의해 치료받을 기회조차 잃고 시신까지 유린당하며, 이스라엘군의 감시하에 비내리는 새벽 한시 가족들만의 입회하에 축축한 땅에 두 아들을 묻어야만 했던 팔레스타인 노모의 입에서 평화라는 말이 나올때 비로소 그곳의 평화는 시작된다.   

 

  코믹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조 사코의 그림과 필체는 사뭇 코믹하면서 진지하다.  그러면서도 담담히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내용안에서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쉽고 가볍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인지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쉽게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많은 문화적 사고와 삶의 모습, 쉴새없는 긴장을 만들어내는 그곳의 상황들도 소개되어 있지만, 결국 평화는 하얀 비둘기로 표현되는 가벼움이 아닌, 어쩌면 쉽게 끌어올릴 수 없는 깊은 바닷속 거대한 검은 바윗덩어리와도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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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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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유의지는 시스템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이 소설의 주제이고 실제로 소설 또는 스탠리 큐브릭의 동명영화를 통한 많은 후기들이 이를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 역시 영화를 통해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충격적인 영상과 감독이 의도한 좀 더 분명한 문제의식과 주제가 단순명료한 의문과 생각을 자아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유의지의 통제방법으로 제시된 루트비코 요법은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텔레스크린을 닮아있다.  조건반사를 통한 자율적 행동통제라는 면에서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회시스템이 인간의 행동과 감정마저 억제하려는 시도라는 면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어보인다.  오히려 저자는 오웰의 비판을 넘어 '인간의 일반적인 자유의지뿐만 아니라 인간의 악마적 본성도 사회가 통제하려는 시도는 잘못되었으며 통제될 수도 없다'는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듯 하다.  사실 이런 메세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워낙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있다.  사회는 범죄 또는 잘못으로 치부되는 모든 것들을 법이라는 제도하에 재단하고 처벌하는 것 외에 어떠한 시도도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음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최근들어 늘어나고 있는 CCTV나 성범죄자들의 전자발찌 착용, 화학적 거세법등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 역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존중받을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고 이 작품을 통해 반추할 수 있다. 

 

  그래서 너무도 많이 논의된 주제에 대해 또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글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좀 더 깊이 생각해본다.  첫번째로 알렉스의 잔인무도한 악행은 단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인간본연의 악으로만 받아들여야 하는가란 의문이다.  사실 저자는 주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허구일 뿐인 알렉스라는 인물과 그의 악행을 열심히 이야기한다.  그보다 덜한 악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우리사회에는 비슷한 악행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인간본연 자체라 생각하고 그런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만 하는 걸까?  혹시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 그런 잠재된 본연의 악을 행동으로 표출시키는 것은 아닐까?  나는 개개인의 자유의지가 모이면 나름의 질서가 형성되고 이상적인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화들은 대륙탐험시절의 백인에 의해 기록된 수많은 원주민들의 삶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인의 자유의지가 어떤 권력화된 힘에 의해 시스템하에 종속될 때 직간접적으로 억압된 자유의지는 분출구를 찾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같이 분출되는 것이 내면에 잠재된 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또는 가난한 엄마가 아기먹일 우유가 없어 가게에서 우유를 훔치듯, 시스템에서 소외된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벌이는 일들을 악이라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사회시스템과 연관되었을 수도 있는 알렉스의 심리나 내면을 이야기하지 않기에 더 이상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나는 너무도 잔인하고 일방적으로 왜곡된 알렉스의 내면과 행동에서 언뜻 사회시스템과의 심리적 불화를 읽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두번째로 알렉스가 조건반사적 자기처벌을 극복해내고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후 더 이상의 악행을 거부하고 아이를 생각하며 평범한 소시민으로 돌아가려 하는 모습에서 저자가 알렉스의 악행은 젊은 시절의 혈기로 저지를 수 있는 한때의 치기어린 행동으로 보려하는 듯 하여 조금 불편한 느낌이었다.  물론 허구속에 과장된 일들이긴 하지만, 타인에게 심대한 고통을 주는 그런 일들이 젊은날의 치기로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상식적이지 않은 과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는 치기어린 젊은 날의 행위의 수위가 그 정도라면 그것은 어쩌면 시스템에 억압된 자유의지의 반사적 몸부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앞서말했듯 내용은 영화가 오히려 더 깔끔한 느낌이다.  알렉스를 정치적 희생자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여러 정치인들과 언론의 행보를 보여줌으로서 마무리되는 장면은 소설의 뒤편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무기력함없이 주제를 분명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알렉스가 폭행하며 불렀고, 같은 집에서 도움을 받아 욕실에서 불렀던 'Singing in the rain'..  아직도 내 귓전에 울리는 멜로디이다.   영화내내 담겨있는 수많은 종류의 폭력의 장면과 함께 오버랩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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