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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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히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평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저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람들의 바램으로서 이해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대립관계의 극한에 있는 사람들이나 일방적인 핍박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그저 단순한, 상황의 극복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일까? 
 

  평화의 상태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심리적, 현실적 안정과 안도감을 준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자 진실이지만, 누군가에게 평화는 반드시 치유해야만 하는 상처를 돌보고 다스리지도 못한 채 그냥 덮여지는 가림막이자 누군가에게 강요된 입막음의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노근리의 생존자들에게 휴전이후의 실질적 평화상태는 잃어버린 가족과 이웃에 대한 상처를 느끼고 기억하는 시간이었고, 치유는 공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입막음이 되어버린 시간이었다.  제주 4.3 역시 참여정부 시기에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긴 했지만, 폭도로 몰려 죽을 위기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항쟁 이후 평화로운 시기는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자신의 가족에 대한 말 한마디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억압의 시간이었다.  극한의 대립 이후의 평화라는 것 역시 이렇게 누군가의 상처가 여전하고 일방적 억압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진정한 평화의 상태로 보아야 할까?

 

  미국의 일방적 폭격으로 무참하게 파괴된 이라크에서 종전이 되었다면 그것은 평화의 시작일까?  물론 그곳은 지금도 테러와 억압이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시작되는 진정한 평화는 억울하게 죽은 이들과 파괴에 대한 사과와 보상, 그리고 그에 대한 약자의 수긍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회적이고 계산이 깔린 위정자들끼리의 합의와 서약과 악수가 아닌, 이라크에서의 전쟁을 반대한다는 수많은 나라들의 정의로운 사람들의 외침에서도 아닌, 철저하게 약자의 위치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유린당한 이들의 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팔레스타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곳에서의 평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위정자들의 합의와 악수나, 그들의 파괴와 침략과 핍박의 역사도 모르면서 지금 당장의 평화를 주장하는 먹고 살만한 이들의 가벼운 입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이유없이 다가선 정착촌 유대인들에게 총격을 당해 두 다리가 마비된 17세 소년의 입에서, 이스라엘 군의 무차별 사격과 진압규정을 무시한 저격으로 부상당한 두 아들을 그들의 훼방에 의해 치료받을 기회조차 잃고 시신까지 유린당하며, 이스라엘군의 감시하에 비내리는 새벽 한시 가족들만의 입회하에 축축한 땅에 두 아들을 묻어야만 했던 팔레스타인 노모의 입에서 평화라는 말이 나올때 비로소 그곳의 평화는 시작된다.   

 

  코믹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조 사코의 그림과 필체는 사뭇 코믹하면서 진지하다.  그러면서도 담담히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내용안에서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쉽고 가볍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인지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쉽게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많은 문화적 사고와 삶의 모습, 쉴새없는 긴장을 만들어내는 그곳의 상황들도 소개되어 있지만, 결국 평화는 하얀 비둘기로 표현되는 가벼움이 아닌, 어쩌면 쉽게 끌어올릴 수 없는 깊은 바닷속 거대한 검은 바윗덩어리와도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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