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리영희 평전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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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시대가 지나갔다.  질곡많았고 답답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번잡했던 시대가 그가 돌아가심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 이야기한다면 그의 시대 역시 평범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생각을 흔들었기에 그 시대는 앞에서 말한 그런 번잡한 시대였고 그의 숨이 멈춤으로 그에 의해 흔들릴 수 있었던 시간 역시 마무리가 되었다.  
 

  세상은 여전히 흐르고 파도치듯 요동하는 모습속에서 자본에 의한 사회의 위기감이 증폭되는 가운데 생각은 계속 흔들려야만 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글들은 생각을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더이상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더 이상 그의 현실감있는 비판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은 커다란 아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가 말한대로 그의 글은 오로지 진실에서 시작하여 진실로 끝이 났다.  진실 자체만을 담은 글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중립이고 이를 통해 많은 생각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진실이냐 아니냐 하는 비판은 있을 수 있으나 가치중립적인 면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에 대해 세상은 그러하지 못했다.  진실을 추구하는 자체만으로 '의식화의 원흉'이니 '사상의 은사'이니 하며 비판과 평가가 난무했던 사회는 그 자체로 건강하지 못하고 왜곡되고 기울어진 사고가 판치는 사회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만 추구하는 글을 통해 사람들은 머리에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 쓰고 생각이 뒤집히며 뒤흔들어지는 기분으로 정의와 자유를 외쳐야만 했던 그 시대는 얼마나 버겁고 괴로웠던 시대였는가.  

 

  이제 그의 글은 진실로 가치중립적이 되었는가?  우리는 여전히 그의 글에서 생각의 진동을 느낀다.  세상은 여전히 기회주의자가 난무하고 생각의 좌표가 될 기준은 진실과는 상관없이 여기저기 난립해있다.  싸움의 상대는 독재에서 자본으로 옮겨지며 폭력과 동시에 유혹을 발산하는 상대앞에서 혼란마저 느끼고 있다.  그는 존재하지 않지만 언제나 존재할 그의 글은 여전히 싸워야만 할 시대적 흐름안에서 머리에 들이붓는 '찬물 한 바가지'이다.  그런 그의 글의 가치를 논하기 전에 여전히 바뀌지 않는 왜곡되고 기울어진 세상의 유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부터 하게 되는 지점이 형성된다.  사회적, 역사적 진실은 인간사회의 사고의 틀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요건인데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그런 사회적 진실만으로도 자유를 갈망하고 변화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기회주의자들의 효과적인 지배체제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의 게으름의 소치일까?  그의 글은 대체 언제가 되어야만 우리에게 진실 그 자체로 쓰여진 가치중립의 당연체로 받아들여질까?

 

  600여 페이지의 방대한 책이지만 읽기가 참 편하다.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저자의 노력도 엿보이는 데다가 한국현대사의 근간과 역사적 진실이 담겨있어 한 인물의 생을 골간으로 하여 역사를 설명하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는 현대사의 질곡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것은 삶의 시기면에서나 직업면에서나 우연이 작용했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냉정하게 그를 바라볼 수 있었던 독서였다.  그가 돌아가신 후 감정적으로 허탈감이 들었지만 이제 그런 흔들림 없이 다시금 그의 책들과 글을 읽었던 기억을 되돌아보면서 정리하는 마음으로 읽어내려간 독서였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는 자체로 진실이었다고.  그를 좌와 우의 어느편으로 평가하거나 어떤 의식화된 생각의 소유자로 평가하는 것은 그에 대한 무례이자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자체의 무식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는 단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어 준 스승'이었을 따름이다.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가치를 견지하는 일은 그를 통해 생각을 하게 된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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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미술관에 가다 - 미술 속 패션 이야기
김홍기 지음 / 미술문화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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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품에서 세세한 요소를 꺼내어 들춰보는 일은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사진이든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의미적 구성을 어떠한 매개체를 통해 깨닫는 것은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으로 작품을 다시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반대로 하나의 작품에는 수많은 의미적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작품을 만들어 낸 작자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자신의 생각, 사상, 취향, 시각등이 녹아날 수 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역사성이 함축된 시대상과 은밀할 수 밖에 없는 욕망과 고발이 담기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서경식씨는 미술작품을 통해 인간의 폭력과 잔인성을 고발하고 설명한다.  동시에 그런 인간의 역사적 실체와 만행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말하자면 그는 작품속에서 시대의 폭력을 읽어내며 되살아날 수 있는 폭력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김홍기씨는 작품속에서 복식의 모양, 즉 패션을 읽어낸다.  역사속의 패션을 읽어냄으로서 삶의 역사적 변천을 설명하고 현재의 삶을 투영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작품속 패션의 역사를 읽어내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패션 속에 들어있는 시대적 취향, 인간의 욕망,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언어의 교류, 시대적 정치사회상 등을 읽어낸다.  그것은 시대적 사건과 정치적 흐름을 읽어내는 역사서와는 또다른 인간상의 역사서와도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시대적으로 인간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 표현은 옷을 통해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렇게 하게 만들었던 그시대 사회의 정치사회 경제는 어떠했는지를 시간적 흐름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역사서 말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이는 미술을 매개로 한 패션의 역사책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삶의 역사책이라는 생각을 자주 할 수 있었다.

 

  결국 인간의 모든 행위는 거미줄처럼 얽히고 얽혀있다.  누군가의 음악, 미술, 패션, 글, 행동등이 마냥 하나의 분야로만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음악속에는 미술적 영감이 작용했을 것이고, 패션에는 입는 사람의 사상과 사회성에 바탕을 둔 취향이 존재할 것이며, 글 속에서는 음악과 미술과 사회적 영감과 사상이 함축되어 있을 것이고, 행동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미적, 사회적 판단을 바탕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그것을 역으로 하나하나 뽑아내는 것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나의 섬세한 면모를 돌이켜보는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인데 이 책이 조금 새롭고 흥미로웠던 느낌은 그래서였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패션은 어떤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을까?  경기가 안좋으면 치마가 짧아진다는 식의 유행은 실제하는 경제사회상의 반영일까?  물론 시대마다의 패션에는 계급성과 자본이 많이 느껴지긴 하는데, 점점 자본의 영향력이 거품처럼 커지는 시대의 패션은 혹여 거품처럼 불거져버린 자본의 모습을 좀 더 많이 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언제나 편함과 단순함만을 추구하며 옷을 입는 나의 패션에는 어떤 현시대의 모습을 담고있는가 문득 돌아보게 된다.  흥미로우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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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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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어떤 불편함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150여년전의 과거나 지금이나 사람의 심리나 욕망은 변하지 않음을 느꼈다.  얼마전 읽은 '샤넬, 미술관에 가다.'라는 책에서는 시대에 따른 복식과 패션은 그 시대의 분위기와 계급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다.  밀란쿤데라의 '불멸' 민음사판의 표지작품 '결혼식 하객'이 관계를 만듬으로서 불멸의 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어느 개인의 표현된 욕망이라 생각한다면 민음사판 '고리오영감'의 표지 역시 소설의 내용과 걸맞는, 신분상승의 욕망을 추구하는, 그리고 신분의 정점에 선 사람들의 모습들이 아닐까..  



  시대를 초월하여 자본은 언제나 힘을 만드는 원천이었을까?  한 때, 자신의 노력과 스스로 갖춘 사회적 능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얻고 신분상승을 통해 계급을 형성하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점점 바탕에 가진 자본이 그러한 권력과 계급을 갖추는데 중요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노력과 방법마저도 자본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는 요즈음의 모습이 150년 전의 신분상승을 위해 명망가들의 집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한 법학도의 처절함과 오버랩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지 법학도라는, 변호사나 판검사등의 위치와 상관없이 관계를 통한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모습만이 다를 뿐,  자본력과 그것의 유지는 이 시대 계급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여졌다.  




  사업으로 성공하여 그 결실을 두 딸에게 모두 투자하여 신분상승을 누리게 해 준 고리오 영감의 모습은 역시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자식에 대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지만 이는 시대적 분위기가 판단력을 지배해버린 일종의 의식왜곡이 공존하여 처연함이 느껴진다.  이에 대한 당연스런 역현상일까?  두 딸의 아버지에 대한 애정에는 이미 더 이상의 자금줄이 되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의도적 무시가 깔려있다.  아버지의 죽음앞에서 마음은 아프지만 의도적으로 또는 정황상으로 그 죽음을 지키러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시나 또다른 의식의 왜곡이 느껴진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프랑스사회의 풍속을 분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했다는 작가가 그려낸 고리오와 두 딸, 으젠과 그 주변의 등장인물의 모습들 속에는 극단으로도 비추어지는 의식의 왜곡이 가득하지만, 왠지 이해도 될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것은 역시나 지금의 우리사회의 모습과 그닥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식왜곡의 세상직후에 벌어진 프랑스의 격변을 지금 우리사회의 미래에 대비시켜도 무리는 없지 않을까?




  불편감은 나만의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있어왔던 아둥바둥의 세상살이는 결국 어떻게나마 자본력으로 표현되는 계급상승의 욕망의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다른 세상의 과거의 독특한 이야기라는 차이만 존재했을 뿐일지도..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나만의 생각일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비루한 삶일지 모른다는 생각.. 함부로 일반화 시킬 수 없지만, '있는 놈들이 더한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그런 '있는 놈'들이 보여주는 불편함을 비루함이라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법학도 으젠은 고리오영감의 죽음 앞에서 일말의 양심적 가책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결국 그 비루함으로 투신하였고, 지금은 그런 양심적 가책도 없이 비루하게 사는 사람들의 아귀다툼 속 아수라가 되어버렸다.  비참함이라는 표현도 조금은 아까울 측은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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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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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몇년 되지 않았다.  군의관시절 짬짬히 읽어나갔던 몇권의 책을 제외한다면, 수련의 시절 출퇴근 두시간의 지하철 안에서 읽었던 책이 지금의 독서습관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사실 독서라는 것은 인생의 동반자와 같은, 평생 이루어져야 할 습관인데 그렇게 보자면 나의 독서는 매우 늦어버린 습관이다.  시기를 놓쳐 뒤늦게 심어진 화초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듯, 독서를 통한 나의 생각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어릴적부터 꾸준히 책을 읽어나간 이들에 대한 부러움이 생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한 많은 평들을 넘어 저자가 부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대로 읽었던 책이란 중학생시절 읽은 고전 구운몽밖에 없는 나의 사고는 입시에 매몰된 채 교과서 이상의 영역을 빠져 나올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편협한 사고란 사람을 얼마나 옥죄이는가, 그것은 물리적 억압과는 무관한 좁은 우리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바깥을 볼 기회를 자의적으로 박탈하는 기제였다.  수많은 시간을 공부했지만, 여전히 사고는 편협하고 알고 있다 생각하는 것 이상을 알려하지도 않으며, 몸은 그런 테두리 안에서 움직일 줄만 아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릴적부터 독서라는 습관이 붙어있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후회가 밀려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좋은 책들을 찾아 읽는 독서의 힘이란 얼마나 크던가..  마냥 기쁨일 수만은 없지만, 저자가 가지고 있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디아스포라적 사고는 학생시절 일본인 선생의 무심한 핀잔 앞에서도 흔들림없이 지킬 수 있었던 힘의 바탕이 아니었을까..  그의 형 서승과 서준식의 19년 17년 옥살이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사상적 신념의 바탕이지 않았을까..  형들의 고통을 바라보며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고 가족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인내의 바탕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뒤늦게 시작한 독서를 통해 어떤 힘을 만들며 갖추어가고 있을까.. 

 

  이 책에는 그런 정체성과 힘을 만들어내었던 어린 시절의 독서와 추억이 담겨있다.  그것은 잔잔하다.  조선어를 말하지 못하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디아스포라의 처지가 기쁠 수도 없었겠지만 막연히 슬프고 처절하지도 않다.  유년시절의 경험과 어느정도 성장하여 정체성을 형성한 청년의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예민한데 예민한 감정표현과 기복은 독서라는 주제와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저자의 현재를 만들어 낸 독서,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정체성에 대한 의지와 예민함과 사고력은 나 역시 지닐 수 있을것인가?  단순한 유년의 추억과 독서에 대한 회상만 담겨있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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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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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런 경험이라는 것, 그것이 가질 수 있는 고통의 크기는 과연 얼마만할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 경험이라는 것은 살아있음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인데, 혹여 그것을 해결 또는 종결시킬 수 있는 방법 중에는 죽음이라는 방법도 포함되는 것일까?  만일 그것이 인정된다면 그런 고통의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의 삶은 죽음보다도 못한 삶이라 말 할 수 있을까?  2차대전 당시의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가진 이들은 당시의 경험을 죽음보다도 못한 삶이라 말한다.  그렇게 죽음보다도 못한 삶을 살다가 대부분은 가스실에서 죽어갔고, 극소수는 살아남았다.  생존자들로 불리는 극소수의 사람들..  그들은 역사의 증언자가 되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들에게 위에서 이야기한 죽음보다도 못한 삶의 고통이 존재했던 것일까?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즉 자살을 선택하여 삶을 마무리한다.  죽음이라는 공포를 눈 앞에 둔 극한의 고통을 겪고 난 뒤의 그들은 삶에 대한 애착보다는 스스로 삶을 내려놓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왜일까?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을 두고 저자는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쁘리모 레비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만날 수 없고 그의 흔적주위에서만 맴돌 뿐, 답은 얻어내지 못한다.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모든 것들이 명백해질텐데라는 아쉬움만을 표할 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미 '왜?' 라는 질문에 답을 미리 안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어 '자기 본위의 죽음'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죽음을 어깨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 방법으로 인식하는 것, 홀가분하고 쾌활해질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다.  사람들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결국엔 자신도 그 방법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 안에서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끊임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자살한 쁘리모 레비 역시 죽음보다 못한 삶에 대한 경험이 그리고 고통이 내면을 지배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감으로 이어지고 있었을까?  그것은 어떤 표면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채, 모든 이들이 보기에 그랬던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순간적으로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마무리하게 만들었을까?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기제 앞에서 나 역시 '쁘리모 레비가 살아있었다면'이라는 아쉬움을 가지게 된다.  

 

  자살을 선택한 극한의 생존자들 중에는 얼마전 포스팅한 책 '쥐'의 저자 아트 슈피겔만의 어머니인 '아나'도 있었다.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손목을 그었다.  그녀는 경험이 주는 고통과 절망감을 내면속에서 숨기지 못하고 우울증이라는 병을 얻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렌트의 기제에 대입해보면 말이다.  트라우마에 의한 개인적인 내면의 망가짐은 단순히 개인적이지만은 않다.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끊임없는 회고와 반복으로 개인적으로만 치부되는 망가진 내면은 계속 각인되어야만 한다.  그 원인이 사회적일 때, 이런 노력은 더욱 의미가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했으리라.  저자의 두 형이 박정희 정권의 폭력에 의해 수감된 채 사상전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년, 17년의 옥살이를 했던 서승, 서준식 형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일조선인으로서 위안부의 문제,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던 자신의 문제들이 쁘리모 레비와 아나가 겪었던 사회적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기행형식의 내용이지만, 중간중간 저자가 풀어내는 트라우마의 문제는 수많은 생각의 가지를 뻗어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의 문제나 여타 수많은 디아스포라적인 처지의 이해를 떠난 인간 내면의 이해를 돕는 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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