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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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런 경험이라는 것, 그것이 가질 수 있는 고통의 크기는 과연 얼마만할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 경험이라는 것은 살아있음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인데, 혹여 그것을 해결 또는 종결시킬 수 있는 방법 중에는 죽음이라는 방법도 포함되는 것일까?  만일 그것이 인정된다면 그런 고통의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의 삶은 죽음보다도 못한 삶이라 말 할 수 있을까?  2차대전 당시의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가진 이들은 당시의 경험을 죽음보다도 못한 삶이라 말한다.  그렇게 죽음보다도 못한 삶을 살다가 대부분은 가스실에서 죽어갔고, 극소수는 살아남았다.  생존자들로 불리는 극소수의 사람들..  그들은 역사의 증언자가 되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들에게 위에서 이야기한 죽음보다도 못한 삶의 고통이 존재했던 것일까?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즉 자살을 선택하여 삶을 마무리한다.  죽음이라는 공포를 눈 앞에 둔 극한의 고통을 겪고 난 뒤의 그들은 삶에 대한 애착보다는 스스로 삶을 내려놓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왜일까?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을 두고 저자는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쁘리모 레비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만날 수 없고 그의 흔적주위에서만 맴돌 뿐, 답은 얻어내지 못한다.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모든 것들이 명백해질텐데라는 아쉬움만을 표할 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미 '왜?' 라는 질문에 답을 미리 안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어 '자기 본위의 죽음'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죽음을 어깨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 방법으로 인식하는 것, 홀가분하고 쾌활해질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다.  사람들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결국엔 자신도 그 방법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 안에서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끊임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자살한 쁘리모 레비 역시 죽음보다 못한 삶에 대한 경험이 그리고 고통이 내면을 지배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감으로 이어지고 있었을까?  그것은 어떤 표면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채, 모든 이들이 보기에 그랬던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순간적으로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마무리하게 만들었을까?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기제 앞에서 나 역시 '쁘리모 레비가 살아있었다면'이라는 아쉬움을 가지게 된다.  

 

  자살을 선택한 극한의 생존자들 중에는 얼마전 포스팅한 책 '쥐'의 저자 아트 슈피겔만의 어머니인 '아나'도 있었다.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손목을 그었다.  그녀는 경험이 주는 고통과 절망감을 내면속에서 숨기지 못하고 우울증이라는 병을 얻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렌트의 기제에 대입해보면 말이다.  트라우마에 의한 개인적인 내면의 망가짐은 단순히 개인적이지만은 않다.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끊임없는 회고와 반복으로 개인적으로만 치부되는 망가진 내면은 계속 각인되어야만 한다.  그 원인이 사회적일 때, 이런 노력은 더욱 의미가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했으리라.  저자의 두 형이 박정희 정권의 폭력에 의해 수감된 채 사상전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년, 17년의 옥살이를 했던 서승, 서준식 형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일조선인으로서 위안부의 문제,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던 자신의 문제들이 쁘리모 레비와 아나가 겪었던 사회적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기행형식의 내용이지만, 중간중간 저자가 풀어내는 트라우마의 문제는 수많은 생각의 가지를 뻗어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의 문제나 여타 수많은 디아스포라적인 처지의 이해를 떠난 인간 내면의 이해를 돕는 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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