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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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어떤 불편함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150여년전의 과거나 지금이나 사람의 심리나 욕망은 변하지 않음을 느꼈다.  얼마전 읽은 '샤넬, 미술관에 가다.'라는 책에서는 시대에 따른 복식과 패션은 그 시대의 분위기와 계급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다.  밀란쿤데라의 '불멸' 민음사판의 표지작품 '결혼식 하객'이 관계를 만듬으로서 불멸의 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어느 개인의 표현된 욕망이라 생각한다면 민음사판 '고리오영감'의 표지 역시 소설의 내용과 걸맞는, 신분상승의 욕망을 추구하는, 그리고 신분의 정점에 선 사람들의 모습들이 아닐까..  



  시대를 초월하여 자본은 언제나 힘을 만드는 원천이었을까?  한 때, 자신의 노력과 스스로 갖춘 사회적 능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얻고 신분상승을 통해 계급을 형성하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점점 바탕에 가진 자본이 그러한 권력과 계급을 갖추는데 중요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노력과 방법마저도 자본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는 요즈음의 모습이 150년 전의 신분상승을 위해 명망가들의 집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한 법학도의 처절함과 오버랩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지 법학도라는, 변호사나 판검사등의 위치와 상관없이 관계를 통한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모습만이 다를 뿐,  자본력과 그것의 유지는 이 시대 계급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여졌다.  




  사업으로 성공하여 그 결실을 두 딸에게 모두 투자하여 신분상승을 누리게 해 준 고리오 영감의 모습은 역시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자식에 대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지만 이는 시대적 분위기가 판단력을 지배해버린 일종의 의식왜곡이 공존하여 처연함이 느껴진다.  이에 대한 당연스런 역현상일까?  두 딸의 아버지에 대한 애정에는 이미 더 이상의 자금줄이 되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의도적 무시가 깔려있다.  아버지의 죽음앞에서 마음은 아프지만 의도적으로 또는 정황상으로 그 죽음을 지키러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시나 또다른 의식의 왜곡이 느껴진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프랑스사회의 풍속을 분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했다는 작가가 그려낸 고리오와 두 딸, 으젠과 그 주변의 등장인물의 모습들 속에는 극단으로도 비추어지는 의식의 왜곡이 가득하지만, 왠지 이해도 될 것 같아 불편하면서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것은 역시나 지금의 우리사회의 모습과 그닥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식왜곡의 세상직후에 벌어진 프랑스의 격변을 지금 우리사회의 미래에 대비시켜도 무리는 없지 않을까?




  불편감은 나만의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있어왔던 아둥바둥의 세상살이는 결국 어떻게나마 자본력으로 표현되는 계급상승의 욕망의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다른 세상의 과거의 독특한 이야기라는 차이만 존재했을 뿐일지도..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나만의 생각일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비루한 삶일지 모른다는 생각.. 함부로 일반화 시킬 수 없지만, '있는 놈들이 더한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그런 '있는 놈'들이 보여주는 불편함을 비루함이라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법학도 으젠은 고리오영감의 죽음 앞에서 일말의 양심적 가책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결국 그 비루함으로 투신하였고, 지금은 그런 양심적 가책도 없이 비루하게 사는 사람들의 아귀다툼 속 아수라가 되어버렸다.  비참함이라는 표현도 조금은 아까울 측은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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